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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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대작가로 불후의 명성이 보장된 중년의 괴테를 만난 베티나는 그와의 사이에 '섬씽"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괴테의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여자로써 그 정도의 극성이었다면 거기서 그쳤을 리는 만무, 괴테가 죽은 후에 그녀는 그와 주고 받은 편지를 서간집으로 내면서 그녀의 능력으로는 어림없었을 불후의 명성을 보장 받는다.

지적이고 냉정한 아네스는 남편 폴과의 결혼 생활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꾸려왔다고 생각하나, 나중에서야 밝혀지듯 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로 끝없이 남성편력을 전전하던 아네스의 동생 로라는 8살 연하의 남자 베르나르와 만나자 그 사랑만큼은 절대적일거라 믿지만 그 사랑 역시 한계에 이르자 무너지고 만다. 폴은 무너진 로라를 위로하다 그녀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깨닫고 아내가 죽자마자 로라를 새 아내로 맞아 들인다.

새 여자에 대한 해갈되지 않는 갈증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전전한 루벤트는 어느날 더 이상 그녀들에게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며 단지 남은 것이라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여인들과의 정사뿐이란 것을 알고는 씁쓸해 한다. 정숙한 아내인 줄 알았던 아네스도 실은 루벤트와 불륜관계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로라는 늙은 형부를 유혹해 아이도 낳았으나, 다른 남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을 멈추지는 않는다. 그런 로라의 추파를 폴은 자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제스쳐라며 눈물을 흘린다. 이야기는 그렇게 산만하니 두서없이 흘러가는 통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언뜻 종잡을 수 없어 보인다.



그렇게 이야기 자체만 두고 보면 연관성 없어 보일지 모르나 주제 만큼은 뚜렷하게 한가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전정한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정말 진정한 사랑이냐는 것과 보이는 것 그대로가 진실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선 베티나의 경우를 보자.그녀는 자신과 괴테와의 있었던 일을 세기의 사랑으로 떠벌리고 다닌다. 나이차와 불륜이라는 것 때문에 이루워 질 수 없었던 애닮은 사랑으로...그녀의 떠벌임에 낭만적인 기질이 다분했던 로망 롤랑이나 릴케는 다양한 찬사를 통해 미화했고, 결국 그런 소동을 통해 그 둘의 사랑을 불멸이 되어 버린다. 작가가 제동을 거는 것은 바로 그 장면이다. 정말 그 둘의 사랑은 진실한 것이었을까? 작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 낸다. 내가 이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을 하게 된 것도 그 부분이였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에 현혹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환상에 매혹될 뿐, 즉 겉모습에만 치중할 뿐 그 내면은 보려 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가 정확히 보았듯이 베티나는 사실 전형적인 나르시스트에 불과한 정신병자였을뿐이다. 괴테를 사랑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랑 자체나 그 사랑으로 인한 자신의 불후의 명성을 사랑한 것이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를 직접 겪은 괴테 역시 알고 있었음이 이 책을 통해 드러난다.

괴테는 베티나에게 "자신에게서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낭만적인 사랑에 중독된 사람들에게는 보일리 없다. 베티나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숨긴 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 그것은 그녀가 결코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녀를 미화하는 반면 괴테의 아내는 오히려 무식한 뚱녀로 망각하고 만다. 여기에 작가는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우리가 추종하는 불멸의 사랑이  정당한 것인가 하고. 아니, 그렇지 않다. 진실이 배여 있지 않는 사랑은 다만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더냐고 작가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사람이 변덕스러운 것 만큼이나 사랑도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하며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고,진실해 보이는 이면엔 거짓이 숨어 있는데다, 오히려 우리가 믿고 싶어하지 않는 평범함 속에 진실이 묻혀 있기도 하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사를  꿰뚫어본 작가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가 걱정이다.이미 명망 높은 작가인 자신이 만에 하나 희극적인 종말을 맞는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그것을 두고 웃을까 하고 말이다. 자신의 존재완 상관이 없는 한 사건으로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각인 될것이 두려운 것이다. 자신이 죽고 난 뒤 그 누가 나서서 그것이 오해란 것을 변명해 주겠는가? 환상을 만들어낼만한 기회도 없이 죽어 있는 마당이니 오죽 갑갑할까 그는 너스레를 떤다.

천국에서 혹시나 베티나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유치찬란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괴테는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상에서는 천상의 사랑이라고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사랑은 그러나 당사자인 괴테에게는 고문이었던 것이다. 불멸? 그런 것엔 신경쓰지 말라고 괴테는 헤밍웨이에게 충고를 한다. 이미지는 죽은 자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어차피 진실 보다는 다른 인간이 믿고 싶어하는 거짓, 즉 환상일 뿐이니 네가 통제할 수 없는것에 신경쓰지 말라고 쾨테는 조언한다. 그렇게 괴테는 (혹은 작가는) 진실보다는 보여진 것에 더 가치를 두고, 더 중요시하는 대중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사랑의 환상과 거짓을 까발리고 진실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 책은 정말로 유쾌한 책이었다.내 기대 이상의 통찰력을 보여준 쿤데라,그가 이 책을  자신이 쓴 가장 슬픈 사랑이야기라고 말했을때 난 왜 그가 슬프다고 했을 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랑이 실은 거짓일 뿐이라고 고발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슬펐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긴 그것을 까발리는 것이 그 누군들 유쾌하겠는가? 비록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사랑만큼은 진실이라고 우리 모두는 믿고 싶어하니 말이다. 어쩜 이 책에서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아마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의 통찰대로 진실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환상을 쫓아 가보면 신기루일때가 많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 고맙기는 했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진실한 사랑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암울하게 느껴졌다.

애써 우리가 모두 다 그렇지는 않을 거라 위로해 본다. 환상이 아닌 자신의 마음속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부터가 그러니까.이 책의 말미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 라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여자들이야 말로 마음속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 갈 수 있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기에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 보면서 리뷰를 마친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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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 Cloudy with a chance of meatball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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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리 외에는 별 볼일이 없는 외딴 섬에 괴짜 과학자 플린트란 소년이 자라난다. 어린 시절부터 이것저것을 발병해내던 그는 마침내 물을 가지고 음식으로 전환해내는 기계를 발명한다. 작동만 한다면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오는 기적의 물건이 되었으련만, 아쉽게도 그의 기계는 소리만 요란한 채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실망한 플린트는 숨기 위해 부두로 나간다. 그곳에서 그는 그 덕분에 체면을 구긴 기상캐스터 샘을 만난다. 그의 발명품을 알아주는 샘에게 호감을 느끼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음식이 비가 되어 내린 것이다. 자신의 발명품이 작동한다면서 펄펄 뛰는 플린트, 그의 마을은 곧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버린다. 이에 마을의 시장은 마을을 홍보할만한 거대한 축제를 벌이기로 한다. 

 

하지만 욕심이 과하면 화가 생기는 법, 플린트는 음식 비가 점차 커진다는것을 깨닫는다. 자체 변이를 통해 음식이 유전자 조작을 하고 있다는걸 알게 된 그와 샘은 기계를 멈춰야 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려, 거대 음식 폭풍이 몰려 오는걸 보면서 모두들 도망갈 궁리를 하게 되는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이 놀랍다. 음식을 가지고 벌이는 소동들이 어찌나 유별나던지, 전혀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그들이 대단해 보였다. 아이스크림으로 눈을 만들고 동네를 꾸민다던지, 여자친구 샘을 위해 젤로 집을 만드는 것은 정말로 근사하더라. 젤로 집 같은 경우는 마치 진짜 젤로 집 처럼 통통 튀는 생동감이 너무도 사실적이다. 꼭 보시길...이야기도 참신하고, 그림은 생동감 넘치고. 단지 점점 커가는 음식들이 좀 거북스러웠다는 점만은 별로였다. 정크 풋이건 아니건 간에 음식이라면 다 먹기 싫어지더라. 미국 같은 경우엔 교육적인 효과도 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먹어대다간 결국 좋을게 없다는 교훈 말이다. 아이들과 같이 보기엔 그닥 나쁘지 않다. 실은 조카가 아주 좋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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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 자라지 않는 아이 유유와 아빠의 일곱 해 여행
마리우스 세라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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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오렌지색 반바지에 노랜색 윗 옷을 입고 있는 아이가 눈에 뜨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달리고 있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는 녀석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유유다. 아프다더니 녀석, 튼튼하게 자란 모양이네. 이것이 처음 본 유유에 대한 내 인상이었다. 사진에서 뭔가 어색한게 느껴지긴 했지만 애써 그러려니 무시하면서. 그리고 무심히 책의 뒷장을 넘겨 보다, 같은 옷을 입은 유유의 다양한 사진이 릴레이로 담겨 있는걸 보곤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똑같은 사진들을 이렇게 배열했지? 책을 한 손으로 쥐고 빠르게 투투투투 넘겨 보니 그제서야 좀 이해가 됐다. 아, 아이가 달리는 것 같이 느껴지도록 배열한 것이구나....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별일이네,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면 다른 사진들을 넣어줄 것이지, 왜 똑같은 사진을 넣은 것일까?  

 

그 의문은 책을 다 읽을 즈음 풀리면서 먹먹한 감동으로 변해버렸다. 왜냐면, 이 책의 주인공인 유유는 한번도 제 발로 걸어본 적이 없는 아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들은 달리기는 커녕 걸어본 적도 없는 아들을 위해, 그런 아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 아버지를 위해 호르디란 사진 작가가 만들어준 것이라고 한다. 유유를 향해 눈 감지 말라고 주문한 사람은 유유의 누나였고, 아이의 팔다리는 친지들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포토샵의 수정 덕분에 아이는 사진속에서나마 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는,성냥개비보다 얇은 듯한 팔을 열심히 흔들고 다리를 내 디디면서, 진짜로 달리고 있는 듯한 유유의 모습에 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유유의 아버지인 저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 내 아들이 걷는 모습을 보고 싶어, 호르디,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한 거야, 아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것이 얼마나 간절한 소망이었던지, 사진 작가를 움직이고, 아들을 움직이더니, 이젠 보는 독자들을 움직이게 한다. 쉽게 전이되는 진동이다. 인간은 때론 놀랍도록 이기적인 존재이나, 진심이 울리지 않을 정도로 이기적인 존재는 못되는가보다. 이럴땐 설득이라는 것조차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설득할 필요조차 없으니 말이다. 유유의 사진을 보면서 울면서 미소를 짓는게 가능함을 깨닫는다. 와. 이봐, 유유...너 정~~엉~~말 잘 달리는구나, 달리기 선수해도 되겠어. 그리고 유유의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아들이 정말 잘 생겼는데요? 자랑스러우시겠어요. 라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흐믓함에 미소를 짓겠지. 유유는 바로 우리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아이니 말이다. 

 

태어나 한달이 된 아들 유유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눈여겨 본 아버지 마리우스 세라는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는다. " 기지개를 켜는 것 같이 말이죠..."라면서 설명하던 저자는 의사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걸 보곤 당황한다. 그리곤 그 기지개 같은 행동이 간질 발작이라는 설명에 망연자실한다. 어른들도 힘들어 하는 간질 발작을 하루에도 몇 차례나 하고 있었다는걸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뇌의 질환에 의한 것이란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검사 수치, 그들은 오랫동안 아들의 병명조차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딸에 이어 아들을 낳은 뒤 남과 다르지 않은 가정을 꾸릴 생각이었던 부부는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이 믿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둘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달리는 것을 고사하고, 걷는 것도, 기는 것도 못하며, 목조차 가누지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그들은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다. 아들이 장애아라고 해서 가족 구성원에서 빼 버리거나, 불행에 짓눌려 패배한 채로 남아 있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렇게 일곱 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아들과 함께 세상을 누비고 다닌 여정들을 담아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남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들이 얼마나 사려깊고, 친절하며, 우아하고, 유머 감각 넘치며, 매력적인지 이야기 하지만, 듣는 사람이 그걸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건 상상력이나 표현력 부족의 문제는 아니다.  그보단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외모나 전망이나 능력이나 개성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고, 영혼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면 알아차리기 어렵다. 영혼이 그를 어떻게 미소 짓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내 영혼에 어떤 파문이 일게 했는지는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드니 말이다. 영혼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아니라면 사랑은 불가능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우린 넘쳐나게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은 글쎄? 얼마나 될까? 그가 사랑을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가장 알아내기 쉬운 시험을 들어보라면 난 장애를 든다. 과연 당신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그전과 그 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 어려울거라 느껴지시는가? 아니, 별로 그렇지는 않다. 장애와 영혼이 별개라는걸 알면 말이다. 그런면에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이 저자의 모습이 나를 울렸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그의 아들 유유를 알 것만 같았다.이 책 속에서 저자가 아들에 대해선 별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놀라운 일 아닌가? 때론 설명이 필요없는 것도 있는 법인가보다.

 

장애아의 아버지가 쓴 구태의연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를 한방 먹인 역작이었다. 어렵게 쓰인 문장도 별로 없고, 대단한 사상을 설파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어쩌면 그것이 더 어려운 일이여서 그런가도 모르겠지만서도. 

 

 엄마가 장애인인 나는 장애인 가족을 가진 사람 특유의 직감이 발달한 편이다. 쉽게 말하면 그들이 진심으로 장애인을 대하는지 아니면 단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제스쳐를 쓰는 것인지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하여 장애를 다룬 책에서 내가 감동을 받는건 드문 일로, 노벨상을 탄 유명한 장애아 아버지 오에 겐자부로를 싫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내겐 그가 지성인을 가장한 나르시스트에 위선자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맞지 않는 아들을 받아 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그는 자신의 책에서 구구절절히 토로하나, 나는 그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과연 그의 아들 노릇을 하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 일이었을까하고. 생각을 뒤집어 보면 오히려 고생을 한 것은 그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싶은 것이다. 아무리 노벨상이 대단한 것이라 해도, 난 그가 내 아빠가 되는 것은 싫을 것 같다.

 

이 책 처음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쓰는 일이 내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지도 모른다고...난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안다. 그리고 그렇게 주저한 그가 왜 이 책을 썼는지도. 더불어 이 책을 쓰는 동안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거란 것도 안다. 그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세상이 뭐 달라지겠어? 라고. 

 

그를 대신해서 내가 말하고 싶다. 달라진다고. 왜냐면, 장애란 이해시켜야 하는 무엇이기때문이다 .장애인을 대하는 것 역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어떤 것이고. 아직까진 말이다.한계를 넘는 것이 쉽다는걸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시도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저자의 솔직한 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하다. 무딘 우리를 일깨워 주는데 사랑보다 더 좋은게 뭐가 있겠는가. 하여 난 오늘도 유유의 아버지인 마리우스 세라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의 아들 유유에게도.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보여줘서, 그리고 잘 견뎌줘서 고마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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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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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서 질리도록 직장 생활을 해보지 않는 사람들에겐 남모를 로망이 있기 마련이다. 은퇴 날짜를 기다리며 어떻게 해서든 쉬는 날만 기다리는 직장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일하는 사람들을 한없이 낭만적으로 바라본다. 장소가 어디가 되었든지 간에,병원이건 공항이건 학교건 도서관이건 건축 현장이건 전철이건 방송국이건 은행이건.... 그곳이 마치 천혜의 자연환경이 되는 듯 몽환에 젖은 눈으로, 왠지 그곳이 인간의 온기와 열정과 능률과 적절한 의사 소통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친절이 난무하는 곳인 듯 생각 되어 지는 거다. 외부인의 시선이란게 원래 그런거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그림자처럼 배경에 녹아들어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잡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외부인이라면 더욱이나 더... 

 

그런 사람 가운데 공항에 대한 욕망을 적절히 주체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책의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일 것이다. 공항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이 책 저책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더니만 이번엔 아예 공항에 취직을 해버렸다. 일주일짜리 임시직이지만, 공항에서 호텔도 잡아주고, 쿠폰도 주며, 통로에 책상까지 마련해 주니, 대박을 터뜨린 듯 표정을 주체 못한다. 평생 지나가는 이방인이었을뿐인데, 이제 공항의 일부분이 되었으니 이번에는 정말로 소원을 푼 모양이다. 줄곧 다소 심각해 보이는 표정만을 보여주던 서른 아홉의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그는 펄쩍 뛰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짐작으론  아마 테마 파크에 놀러 가기로 했다는 막 아빠에게서 들은 아이처럼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라면 그랬을 것 같으니 말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알랭 드 보통은 공항 관계자로부터 히드로 공항에 일주일간 체류 하면서 그에 대한 글을 써주지 않겠는가 라는 제의를 받게 된다. 광고 회사가 만든 선전문구가 아닌 전문 작가의 눈에 공항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 사람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가지 않을까 라는 것과 자신들에겐 일터일뿐인 공항이 작가의 예리한 눈에 어떻게 비춰 질지도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물었겠지. 돈 많은 사람들에게 고용된다는 생각에 잠시 주춤한 저자는 하지만 공항이라지 않는가?...에 생각을 바꿔 먹는다. 그렇잖아도 딱 한달만 공항에서 일해보면 재밌을 것 같았는데, 어찌 내 마음을 알았누라는 생각에 그는 과거, 돈 많은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글을 써 댔던 출중한 문인들의 선례를 들먹이며 (마지 못해 받아들인다는 뉘앙스로) 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신이 나서 공항으로 출근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얻어낸 글이 바로 이 책이다. 

 

일주일간의 여정이라 그런지 얇다. 그 두께에도 혹시나 독자들이 지루할까 우려 되었는지 글이 전부가 아니라 1/3 정도는 사진이다. 요즘 출간되는 추세가 이렇게 사진 반, 문장 반으로 이뤄진게 많던데, 솔직히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증명용으로 한 두 장의 사진은  괜찮지만서도, 앨범을 보는 것도 아니고, 사진으로 도배한 책은 아무래도 본전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너무 금방 읽히니 말이다. 뻥튀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랄까. 한번은 뻥튀기도 괜찮지만 너도나도 뻥튀기를 내놓으면 그건 곤란하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얇다는것을 제외하면 별 불만은 없는 책이었다. 사진이 많다고 투덜댔지만, 공항 통로에 내 준 책상이랑 의자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마냥 좋아하며 글을 쓰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의 사진은 진기하고 귀여웠다. 영국인다운 점잖은 무게가 없었다면 빌 브라이슨보다 더 방방 뛰고 다녔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천진한 모습이다. 마치, 평생을 백수로 살다가 간신히 직장을 얻게 된 괴짜처럼, 회사가 시키는 것은 무조건 다 해 보이겠다는 열의가 보인다. 더불어, 왠만하면 이 공항에 좋은 것만 보겠다는 자세 역시... 냉소적인 지성인임을 자처하고 다녔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는 바로 허물어지는 그가 별로 나쁘게 보이지 않더라. 오히려 그에게 아직도 자라지 않는 어린 아이같은 심성이 있다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순진한 멍청이가 되고 싶지 않아 발톱을 세우고 살아가긴 하지만, 우리의 근원적인  마음속엔 그렇게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 남아 있는게 아니겠는가. 비록 남에게 보여주기 남새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서도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간 공항에 근무한 그의 일지엔 무엇이 쓰여져 있을까? 공항을 들고 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과 파일럿을 만난 이야기, 공항을 움직이고 있는 컨테이너와 식당과 청소직원들과 목사와 서점과 상점과 정비소와 보안요원들까지... 공항이란 거대한 기구를 요란하지 않게 움직이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는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내려 간다. 그래서, 그는 공항에 대해 이제 더 많이 알게 되었을까? 다시는 공항에 대한 로망에 젖지 않을많큼? 아마도 그래 보인다. 적어도 난 그랬으니까.

 

의외인 것은 그의 이야기가 신선하긴 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별달리 특출난 것은 없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책처럼 별난 것들을 기대한 모양이다. 공항 역시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고, 일의 특성만 제외 한다면 다를게 없을 거라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공항이라는 장소가 제공하는 환영에 한없이 낭만적일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곳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뭔가가 있을꺼야 라고 생각한 것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알았다. 아마도 그건 다른 곳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겐 일상이고, 지루한 작업임에도, 막상 자신의 일이 되기 전엔 마냥 재밌는 일 같이 여겨지겠지. 일주일, 딱 일주일만 근무한다면 좋게 보일지도 모르지만서도... 알랭 드 보통 역시 일주일의 근무가 괜찮았던 모양이다. 다른 직장에서도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상상해보는 걸 보면. 어쨌거나 보통은 자신의 로망이던 공항 근무를 해냈다. 그를 통해 우리도 공항이 어떤 곳일지 간접 경험을 했고. 그나 독자인 나로써나 그닥 나쁜 경험은 아니었던 것 같다. 타인의 신발을 신지 않고서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하니, 공항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공항에 대한 로망을 접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여 이참에 공항에 대한 로망을 접게 해준 보통에게 감사드린다. 잠깐이지만 좋은 읽을 거릴 준 것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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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만나는 조지 오웰의 책이다. <카탈로니아 찬가>이후 그의 다른 책을 만나지 못해 서운해 하고 있던 차라  오웰의 새 책 소식은 가뭄에 소낙비 만난 듯 반갑기만 했다. 표제에 르포르타주( 쉽게 르뽀) 라는 말이 붙어 있어 생소하신 분이 있을려나 모르겠는데, 조지 오웰은 소설보다 오히려 이 분야가 전공이라 할만큼 잘 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을 그만의 독특한 화법과 통찰력으로 풀어 내는데는 따라올자가 없을만치 탁월하니 말이다.  <런던과 파리의 밑바닥 생활>에서도 그랬고, <카탈로니아 찬가>에서도 여지없었다. 그렇다고 소설분야에서의 그의 명성에 흠을 내려는 건 전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그의 르뽀도 소설만큼 좋다는 뜻일 뿐이니 말이다.

 

내용은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채해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고 그가 직접 그곳에서 두 달간 살면서 집필한 글이다. 더러운 환경과 혹독한 작업 환경, 성냥개비 같은 작은 집에서 복닥대며 살아가는 광부의 가족들, 입만 열었다 하면 불만이 텨져 나오는 하숙집 주인과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있을까 싶은 하숙생들의 면면들이 그의 눈을 통해 낱낱이 그려지고 있었다. 더불어 2부에서 그는 영국에 만연해 있는 계급주의의 실태에 대해서도 성토를 하고 있었다. 속물을 길러내는 교육 시스템과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고백담까지 넣어서. 이 책을 통해 왜 그가 버마의 경관직을 그만두게 되었는가 대해 알 수 있었는데,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그를 느낄수 있어 좋았다.

 

탄광의 실태를 고발하는 르뽀라 하여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나 오웰답군이란 감탄사가 나오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시선이 그 부담을 잊게 만든다. " 세상은 석탄으로 굴러 가는 것" 이라면서, 힘들게 석탄을 캐내는 광부들을 노고를 치하하는 그가 한결같이 믿음직스럽다.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은 못한다면서, 육체 노동자로서 무능한 자신을 한없이 부끄러워 하는 오웰, 계급주의와 육체 노동을 천시하는 시대 상황에 반발하면서 일하는 자에게 제 몫이 돌아 가야 함과 더럽고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편견에 맞서 그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육체 노동자를 무시하는 풍토에 대해 실랄한 고발도 잊지 않던데, 공부한 사회주의자들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왜 육체 노동자에게서 유리될 수 밖엔 없는가에 대한 분석은 지극히 타당하게 들려온다. 속물적인 계급주의가 이상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는 넘을 수 없다는 통찰은 과거에도 맞는 말이었지만 지금에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하지만 그가 육체 노동자들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글쓰기 노동--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안타까웠다. 누구나 자신이 잘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반드시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질 않는가. 오웰이 지극히 천재적인 사람이라서 글을 쓰는데 전혀 어려움이 몰랐더라면 모를까, 그 역시 글을 쓰는 순간들이 피를 말렸을텐데, 그걸 육체 노동에 비교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건 지나치지 않는가 싶다.  당시 지식인들의 허영이 너무도 심했던 나머지 자신을 그토록 낮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러실 필요는 없다고 말리고 싶더라.  알고보면 그 역시 다른 어떤 육체 노동자 못지 않게 열심히 산 사람이지 않았던가.

 

거반 70여년전에 쓰인 글인데도 여전히 현대적으로 읽힌다는 것이 장점, 물론 광부들의 삶을 그려낸 것이나 주택 문제를 풀어낸 것들은 이젠 별 의미가 없는 탓에 지루하긴 했다. 따라서 그 부분은 건너 뛰고 읽어도 상관없겠다. 당시 그가 고민했던  끔찍한 주택상황은 분명히 벌써 해결 됐을 것이고, 그가 열악한 환경을 지적하던 광산들은 이미 폐광이 되 버렸을테니 말이다. 책을 읽어 내려 가면서 50년 후엔 그 광부들이 그 일자리나마 없애지 말아달라고 시위를 벌였다는걸 안다면 오웰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해졌다. 시대에 따라 고민하는 것이 그렇게 달라질 것이라는걸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그가 현대에 살고 있다면 다른건 몰라도 아마, 이 시대의 가장 낮은 사람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위해 르뽀 기사를 쓰고, 해결 방안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심장을 지닌 사람이니까. 그렇게 상황이 변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인간에 대한 통찰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적확하기만 하다. 아마도 그건, 그가 시대를 앞서나간 감각을 지녔거나, 내진 그의 인간미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다. 당시론 혼탁하고 혼란스러웠을 정치 이데올로기 상황을 말끔하게 정리한 두번째의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편을 봐도 그렇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자만이 낼 수 있는 그만의 목소리에 정중하게 경청할 수 밖엔 없었다. 마치  찌꺼기를 가라 앉히고 난 뒤 조용하고 맑디 맑은 시냇물을 바라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욕지기와 구역질이 난다. 다양한 시선이나 의견들이 내 놓는 것이 민주주의라고는 하나, 난무하는 저질 지방 방송들은 사태를 오히려 파악하기 힘들게 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오웰같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상념에 젖었다. 그라면 이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한마디 해 주었을텐데 말이다. 비난하는 투도 아니고 조롱하는 투도 아니며 ,단지 사실이 이러하다는 식으로 ...경멸이나 비방이나 유언비어나 낯뜨거운 자화자찬이나 분노와 부화뇌동, 그런 것들은 사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명확한 진단에 명쾌한 해결 방식, 인간을 이해하는 따스한 시선 , 바로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오늘날 그가 그리워 지는 이유다. 물론 그가 살아 온다 해도 사람들이 그의 말에 경청할지는 미지수지만서도. 다들 잘난 사람들만 살고 있는 듯한 현대에서 공정하고 겸허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나 하려는지... 

 



 


 


 


 그는 지긋지긋한 일 하나를 하다 다른 일을 하러 갈때면 언제나 말할 수 없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아침이면 그는 난롯가에 앉아 더러운 물이 담긴 통에 있는 감자를 슬로모션으로 깎았다. 나는 그렇게 분한 마음을 품고서 감자 껍질을 벗길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가 말하는 '빌어먹을 여자들의 일"에 대한 적개심이 무슨 쓰디 쓴 체액처럼 속에서 부글부글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불평불만을 되새김질하듯 계속 되씹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침 식사때 식탁 밑에 가득 찬 요강단지가 있는 것을 본 날, 나는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있다보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더럽고 냄새나고 음식이 형편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의미하게 정체되어 썩어간다는 느낌. 사람들이 지하에 갇혀 바퀴벌레처럼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기어다니며 끊임없이 비열한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다는 느낌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브루커 부부 같은 사람들의 가장 끔찍한 점은 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노라면 인간이 아니라 매일 똑같은 시시하고 장황하고 무익한 이야기를 끝없이 연습하는 무슨 유령 같다는 느낌이 든다. 결국 부르커 부인의 자기 연민뿐인 이야기는 신문지 조각으로 입을 닦는 버릇보다 내 비위를 더 거슬렀다. 

 

공산주의와 카톨릭주의가 비슷한 점 하나는 '배운'사람들만이 완전한 정통파라는 것이다. 영국 카톨릭교도이 경우 자의식이 대단히 강하다는게 특징이다. 그들은 자신이 카톨릭 신자라는 사실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하는 듯 하며, 그것 말고는 아무 글도 안 쓴다. 이런 사실 하나와 거기서 비롯된 자화자찬은 카톨릭 문인만이 가진 유일한 밑천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정말 흥미로운 점은, 정통이다 싶은 것은 실생활과는 전혀 무관해질 정도로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음식마저 종교적 편협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정신 상태가 내 흥미를 끈다. 노동계급인 카톨릭교도는 절대 그만큼 어리석을정도로 엄격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카톨릭 신자라는 사실에 골몰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자신이 카톨릭 교를 안 믿는 이웃과 다르다는 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다...고집불통이 되는 법은' 배운' 사람만이. 특히 문인만이 안다. 이는공산주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순결한 형태의 신조는 진짜 프롤레타리아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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