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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11명의 작가가 쓴 11개의 단편이 있었건만, 막상 제목을 쓰고 보니 바틀비 밖엔 기억이 안 난다. 제목이 주는 각인 효과가 만만찮지 싶다. 근대 미국을 풍미했던 11명의 작가의 단편을 모든 것으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작가로는 나다니엘 호손, 에드거 알랜 포우, 마크 트웨인, 헨리 제임스, 피츠 제랄드, 포크너 등이다. 그 외 나머지 길먼이나 체스넛, 스티븐 그레인이나 셔우드 앤더슨의 경우는 생소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뭐, 책을 읽는데는 전혀 지장없으니 겁 먹지는 마시길 바란다.
한국에서 이름이 알려졌건 그렇지 않건, 근대 미국 문학계를 주름잡은 작가들의 대표 작품들을 보면서, 역시 단편을 완벽하게 쓴다는 것은 장편보다 더 어려운가보다 했다. 대표작가들의 대표작들만 모은 것임에도 탁월하단 느낌을 못 받았으니 말이다. 특히나 얼마전 읽은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익사체>와 비교해보면 아무래도 싱겁다. 물론 셔우드 앤더슨의 < 달걀 >이나 피츠제랄드의 < 겨울 꿈>,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인상적이긴 했으나, 나머지는 평범한 느낌이다. 특히나 너새니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은 왜 그 작품을 처음에 배치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일 떨어지는 작품을 맨 앞에 내놓으면 도무지 어쩌겠다는 것인지... 처음 겉 몇 페이지만 읽어보고 책을 사는 사람도 많은데 말이다.
포우의 <검은 고양이>는 아마도 다들 익히 아시는 스토리일텐데, 흥미로운 것은 그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여전히 처음 듣는 듯 공포스럽다는 점이다. 저자의 인물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다. 고양이 눈을 도려내고, 아내를 --사랑하는!--도끼로 죽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의 내면을 어찌나 탁월하게 그려내던지, 새삼스럽게 다시금 감탄했다. 천재는 다시 읽어도 처음인 듯 새롭게 들리게 하는 재주를 가진 모양이다. 잠자리에서 매번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이야기 보따리처럼 말이다.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좋은 글이란 인물에 대한 입체적인 묘사과 개연성 있는 전개가 필수라는걸 깨닫게 해준 작품이다. 소심한 변호사에게 필경사로 채용되기는 했으나, "하고 싶지 않다"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을 달고 산 덕분에 결국 쫓겨날 수밖엔 없었던 가련한 바틀비에 얽힌 이야기가 생동감있게 펼쳐지고 있었다. 바틀비란 주인공을 보면서, 얼핏 억지가 아닐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겟는데, 내가 보기엔 바틀비는 자페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표정이 없는 얼굴,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태도, 무엇이 남을 화나게 하는지 도무지 짐작도 못하는 비 사회성등이 자페를 연상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멜빌은 그와 비슷한 사람을 어디선가 만났을 것이고, 그가 너무도 개성적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단편을 쓴게 아닌가 싶다. 그것이 자폐의 증상이라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뭐, 당시론 자페란 말이 등장하지도 않았을때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멜빌이 자페를 이해하고 있던 아니던 간에, 인간 사회와 전혀 소통을 하지 못하는 사내가 어떻게 자신을 소외시키는지 과정을 보여주는 수작이었다.
산후 우울증을 다룬< 누런 벽지>의 경우는 여성들이 보면 이해가 빠를 듯 싶다. 하지만 정말로 그 단편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남성들이다. 산후 우울증이건 아니면 그냥 우울증이건 간에, 그런 증상들이 인간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교본이니 말이다. 왜 그녀가 결국 이혼을 선택할 수 밖엔 없었을까? 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살하게 되는 것일까? 다른 것 같지만 같은 맥락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다보면 결국은 탈출구를 찾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외 <위대한 개츠비>의 전신격인 피츠제랄드의 <겨울 꿈>은 비슷한 줄거리임에도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개츠비란 인물이 피츠제랄드가 젊은 시절 가지고 있던 일종의 강박임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고, 여기 나오는 작품들중 유일하게 블랙 유머로 분류될 수 있을 듯한 <그랜디썬의 위장>은 멍청한 백인 주인과 교활한 흑인 노예의 대비로 유쾌하게 볼 수 있던 작품이었다. <정품>이나 <달걀>,그리고 <소형 보트>도 괜찮았지만, 기대를 잔뜩하고 본 마크 트웨인의 <뜀뛰는 개구리>는 명성이 비해선 별로였다. 마크 트웨인의 대표작으로 분류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란 시같은 제목의 포크너의 단편은 그만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있는 고딕적인 분위기가 매혹적이다. 몰락한 남부 귀족이 처연한 모양새를 한 눈에 들어오게 하는 묘사로 포크너의 천재성을 잠시 들여다 본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 읽은 느낌을 한마디로 하자면 기대 잔뜩 하고 갔던 뷔페에 다녀온 기분이라고나 할까? 많은걸 먹긴 했지만 특별히 맛있게 먹은 것은 기억 나질 않고, 왠지 아직도 허기진 듯한 기분이니 말이다. 꼭 읽어야 하는 단편집이냐고 물으신다면, 글쎄... 대단히 좋은 작품도 있고 , 그저 그런 작품들도 있었지만, 딱 맘에 확 와닿는 작품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하지않았나? 단편이 어쩌면 장편보다 쓰기 힘든 장르인지도 모른다고. 깊은 인상을 남기려면 흠없이 완벽해야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