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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8년전 동업자가 경찰과 야쿠자를 물먹이고 도주한 바람에 둘 다에게 미운 털이 박혀 있는 탐정 사와자키는 사라진 가족문제를 의뢰하고 싶다는 한통의 전화를 받고 의뢰인을 만나러 간다. 일진이 좋은 날인가보다 룰루랄라 거리며 의뢰인의 집에 도착한 그는 난데 없이 돈 가방을 건네주는 주인때문에 황당해 한다. 하지만 영문을 파악도 하기도 전에 들이닥친 경찰들은 그를 소녀를 유괴한 범인으로 체포해 버린다. 경찰서로 끌려 간 그는 비로서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소설가의 딸인 유명한 소녀 바이올리니스트가 외삼촌 댁으로 레슨을 받으러 가던 중간에 유괴를 당했는데, 유괴범이 전화를 걸어와 6천만엔을 요구했으며, 그 돈을 가져가기 위해 사와자키를 보내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사건 의뢰를 받는 줄 알고 좋아했다가 졸지에 유괴 공범이 되버린 사와자키는 일진이 심하게 꼬였음을 직감한다.
그간 그를 돈을 들고 튄 동업자의 공범이라고 의심을 했던 경찰들은 역시 그가 범죄형이였다면서 신이 난다. 결국 몇 번의 취조 끝에 그가 그곳에 간 것은 전화 한 통 때문이며, 소녀가 유괴될 당시 알리바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풀이 죽어 버린다.자신의 혐의를 벗겨지자 사와자키는 도대체 왜 자신이 그런 소동에 휘말리게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한편 혐의를 벗은 그가 경찰서를 나가려고 할 즈음 갑자기 경찰관들이 그에게 친절해진다.이유인 즉, 유괴범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는데, 돈 가방을 직접 사와자키에게 전달하게 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소녀는 죽은 목숨이라는 말에 소녀가 걱정이 된 사와자키는 마지못해 전달에 나선다. 하지만 유괴범을 만나 보기도 전에 그는 두 깡패에게 폭행을 당하고 정신을 잃고 만다. 깨어나 보니 돈 가방은 사라지고, 아뿔싸, 유괴범이 지정한 시간마저 지나가 버렸네! 시간 안에 돈을 못 받았으니 소녀를 죽이겠다는 전화를 끝으로 유괴범이 소식을 끊어 버리자, 사와자키는 자신이 소녀를 죽였다면서 자책감에 시달린다.
그런 그 앞에 소녀의 외삼촌이 나타나 수사를 의뢰한다. 음대 교수인 그는 조카인 소녀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며 키우고 있었다. 소녀가 유괴 된 것만큼이나 걱정에 시달리던 그는 사와자키에게 쪽지에 적힌 네 명의 사람이 유괴와 상관이 없음을 밝혀 달라고 주문한다. 그 네 명이 외삼촌의 장성한 자녀들이며, 그들이 최근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애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와자키는 탐정으로써 수사에 나서기 시작하는데... 과연 그 네 사람은 유괴와는 관련이 없는 것일까? 사건을 파헤치면 파헤칠 수록 드러나는 소녀 가족들의 이상한 행동들. 사와자키는 멀쩡해 보이는 가정도 들어가보면 사연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소녀를 유괴한 사람은 누구일까? 가까운 사람이었을까? 살아있는 그녀를 찾아낼 가능성은?
정말 추리 소설은 이렇게 써야지 싶을정도로 흡인력 하나는 최고였다. 어찌나 흥미진진하게 썼던지 , 일단 한번 잡으니 결말을 알기 전에는 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한번에 쭉 읽어버린 책이 되겠다. 그만큼 재밌었다는 뜻이다.
우선 사건 자체가 참신하다. 사건 의뢰를 받을 줄 알고 갔더니 유괴범 공범이 되버린 탐정이라... 그것도 모자라 돈가방까지 잃어 버리면서 그의 처지는 난처하게 된다. 무엇보다 소녀를 죽음으로 몰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는 탐정, 뜻하기 않게 타인의 사건에 휘말리면서도, 따스한 인간성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는 탐정이 무척 인간적으로 비춰졌다. 뜻밖의 사건들을 현란하게 전개 시켜 나가는 노련함이나 사건을 쉴새 없이 터뜨려 대는 속도감, 이야기가 막힐 즈음 다른 단서들을 흘려 대면서 끌고 가는 입담덕분에 한 순간도 지루한 줄 모르고 봤다. 거기에 잔잔하고 평온해 보이는 가족안에 실은 가장 가공할 적이 숨어 있다는 설정은 고개를 끄떡이게 하는 개연성마저 지닌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을 들라면 주인공 사와자키였다.
탐정의 모습을 어찌나 개성 넘치게 그려 놨는지, 특이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주인공을 만들어 낸 자체만으로도 작가에게 점수를 줘야 할 판이었다. 어리버리하니 냉철함이랑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 능력있는 탐정이라 자부하는 사와자키가 건들거리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은 무척 통쾌했다. 긴박하고 숨 막히는 순간에서 유들대며 유머를 날리는 점도 맘에 들던데, 유머를 던지는 타이밍도 기가 막혀서 혀를 내둘렀다. 유머 작가로 등단하셔도 실패하지는 않으실 듯... 거기에 야쿠자나 누이를 잃은 소년이나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똑같이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사와자키를 주인공으로 해서 시리즈를 만들어도 아마 성공할 듯 싶다. 셜록 홈즈나 필립 말로(레이먼드 챈들러), 긴다이치 코스케( 요코미조 세이시)등 유명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못지 않는 개성을 자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책의 저자가 과작하는 작가라 거반 7년만에 하나씩 책을 낸다는 점이다. 작가가 쓴 시리즈를 읽고 싶으신 분들은 왠만하면 오래 사셔야 할 듯. 오래 걸리는 만큼 완성도는 장담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이 책만 봐도 이야기 전개 자체에 빈틈은 없어 보이니 말이다. 아주 아주 재밋는 추리 소설이 고프시다는 분들에게 주저없이 강추~~~!
☞ <경고--스포일러 있으니 책 다 읽으신 분들만 보셔요> ☜
하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완전 무결한 책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부모가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태연하게 유괴계획을 세웠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평소 가학적인 부모였다면 모를까, 평범한 부모가 더군다나 사랑하는 외딸을 잃었는데도 그렇게 태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식이 죽는다는 경험은 이성을 넘어서는 일이니 말이다. 아무리 다른 자식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 작위적인 설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범인을 잡는 과정에서도 역시 석연찮은 대목이 눈에 뜨인다. 외삼촌이 바람을 피워 낳은 딸이라는 여자 말이다. 그녀와 그녀 남편이 범죄에 연루되는 과정이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유괴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소녀의 먼 친척이 되는 그들이 범인을 만나게 되고, 그를 따라가다 흘린 가방을 주었는데, 그 가방이 바로 유괴범에게 준 가방이었다는 설정 말이다.도쿄가 그렇게 좁은 도시인가? 지나가다 가방을 주었는데 , 그것이 유괴범이 버린 가방일 정도로? 아마도 이야기를 심하게 문어발 식으로 늘려 나가보니 생긴 부작용 같던데, 옥의 티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소소한 때론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추리 소설로썬 거의 최고였다. 이야기에 살짝 무리가 섞었으면 또 어쩌랴? 몰입해서 읽다보면 그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걸, 그만큼 이 소설이 재밌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