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야성의 부름 - 문예 세계문학선 077 문예 세계문학선 77
잭 런던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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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명인들은 박애정신이 투철하다. 이 모두는 항상 법을 준수하고 범죄나 부정을 증오하며, 특히 정의를 관철하여야 한다는 최선의 목표를 이상향으로 미래를 꾸려 나아가는 (광범위한) 공동체라 할 수도 있다. 때문에 이들의 일원인 '나' 역시도 선과 정의에 대한 나름의 명확한 인식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때때로 그 정의는 현실 속 이모저모의 과정 속에서, 잠시나마 뒷전으로 밀려나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 역시 '야만'에 대한 그 나름의 과정과 형성 그리고 설득을 품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비록 한낮 짐승들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그 주인공 뿐만이 아닌 인간 본연의 모습 또한 "혹시 이 이야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일종의 위기 의식의 메시지가 깊이 받아들여진다.

각설하고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개 '벅'은 남쪽지방 판사의 애완견으로서, 그야말로 문명 속에서 길들여졌다. 그러나 결국 무뢰한들에게 납치되고, 팔려가고, 혹독한 환경 속에서의 썰매견으로서 노동을 강요당해가는 과정 속에서, 벅은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야생동물로서의 '본능'을 되찾고 또 그것을 발판삼아 어느 무리를 이끄는 리더로서 우뚝서게 된다.

이처럼 벅이 살아가는 과정은 어쩌면 '적응'으로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것이 분명하다. 애초에 (주인)판사의 손에서 귀여움과 온갖편의를 제공받는 입장에 있어서, 벅은 그저 체격과 풍체가 남다른 대형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후 그가 마주한 환경과 '의무'를 겪으면서 그는 타고난 투견이자, 눈여겨볼 썰매견들의 리더, 그리고 사납고 영리하며 위협적인 짐승으로서 떠올려지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에 결국 그가 야성에 눈을 뜨게 된 원인을 찾아보자면 그 무엇이 있을까? 이에 안타깝게도 책 속에서 주인공 스스로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사연과 과정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니! 혹여 벅이 겪었던 모든 과정이 '어느 인간'이 겪은 과정이라면? 반대로 그 사연과 과정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 분명하지만, 저자는 모든이는 환경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그에 걸맞는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나름의 주장을 담담히 드러낼 뿐이다.

그는 도덕적 문제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모면할 줄 알았다. 바로 그런태도가 그가 문명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입증해주는 것이였다.

37쪽

몽둥이(권력) 에 복종해야 한다는 깨달음, 비록 원하지 않던 일(의무)이였지만 결국 그것이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아이러니, 그리고 그 무엇보다 적자생존(경쟁) '강한자만이 살아남는다'... 라는 논리는 분명 지금의 위치에 놓여있는 '나'로서는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메시지다. 그러나 그것을 야만으로 이해하고, 또 멀어지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던 과정에도 불구하고, 자칫 개인과 공동체! 이 모두는 어느 상황과 환경에 의해서, 그 '부정적인 가치관'에 젖어들고 또 익숙해진다. 그렇기에 '나'는 주인공 벅의 변화를 단지 타락으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단순한 환경의 나락과 더불어, 인간 또한 사회의 나락을 통해 언제든지 벅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나름의 생각이 (나를)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어쨰서일까?

예전 어느 프로그램에서 강연자는 "인간도 어느 환경이 갖추어지면 (도덕성을 저버지는) 행동을 보인다."는 주장을 했다. 그 오랜 교육을 통해 길러낸 소양과 양심, 품격의 존재가 '환경' 을 통해 깨어질 수 있다는 것! 이에 과거 그 순간에는 선듯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결국 이 책은 그 내용을 통해 나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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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 중국 민주 자유를 위한 간절한 외침
우쩐룽 지음 / nobook(노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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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받아들인 중국 정치난민! 그리고 그가 기록으로 표현한 '중국 민주화를 향한 열망' 이처럼 이 책에서 보여지는 내용은 매우 명확한 편이다. 그러고보면 한반도와 그 속의 대한민국에게 있어서 중국이라는 나라는 분명 오랜관계를 쌓아온 이웃이라 할 만하다. 다만 그 관계속에서 피어난 것이 무언가의 계승일 수도 있고, 또는 애증과 증오같은 단순한 감정의 연속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지금! 또 앞으로의 미래에까지 이어질 어떠한 형태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분명 국가와 국민 이 모두에게 있어서, 그 나름의 경계와 관심이 지속되어야 한다 생각이 된다.

그도 그럴것이 '개인'인 나의 입장에 있어선 중국은 그저 (동방)사상과 역사에 대한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이웃나라다. 실제로 삼국지와 초한지 그리고 홍루몽 같은 이들의 유산을 마주하면서, 이를 즐기고 또 나름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이는 분명 중국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으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안타깝게도 앞으로 드러내야 할 것은 중국 근.현대사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공산화'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다.

공산당은 전 국민에게 3년~5년 이내에 공산주의로 전향하라는 임무를 지시했다.

97쪽

이처럼 저자 스스로가 오랜 '공산주의 체제'를 겪고 또 그에 순응하고자 하는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를 모두 저버리고 난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저자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높은 계몽과 자유를 꿈꾸었다기보다는 그저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소망조차 인정치 않는 중국의 현실에 절망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항상 글쓰기를 소망했고, 다양한 원고를 쓰면서, 그것이 조국의 품 속에서 당당히 출판되기를 희망했지만, 정작 중국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개인의 주장'조차도 감시와 검열의 눈을 번뜩일만큼 저자의 권리를 처참하게 뭉개버렸다.

때문에 저자는 조국을 떠났고, 더욱이 조국의 변화를 주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에 저자는 개인의 자유가 매우 심각하게 침해받는 (오늘날)중국의 현실을 고발하였지만, 반대로 이미 많은 한국인들은 그 '공산화'의 모습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각설하고 최근의 홍콩의 모습과 함께, 천수스 기자의 실종 (우한 코로나를 밀착 취재한 인물) 더욱이 중국 공산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많은 사람들의 예가 한국의 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드러나는 것이 현실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정치의 개념... 더욱이 국제관계와 경제의 개념으로 바라보았을때도 역시 중국은 공공연히 반목하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나라다. 물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소중한 체제에서 살아온 '나'로서도 중국의 민주화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저자 역시 대한민국에게 보다 더 적극적인 활동을 주문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중국 민주화를 꽃피울것인가? 에 대한 그 방법과 주장에 대해서는 이 책은 그 내용이 매우 부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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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나카오 사스케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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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문명의 태동' 그리고 이를 상징하는 농업은 그야말로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랜세월동안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요한 근본이자 필수적인 요소로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덧 농경시대로 불리우는 과정을 거친 인류는 결국 산업과 첨단의 시대로 나아가면서 점차 그 처음의 중요성을 잊고 또 경원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일반 대중의 인식에 있어서의 농업은 더더욱 그 위치가 낮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여느 사람들의 주변에 진지하게 농업과 농부의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그리고 마땅히 감내해야 할 고된 육체노동과 낮은 수입을 마주하며, 과연 현대인들은 이 조건에 기꺼워하고 또 감내하려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농업이란 이미 충분히 정형화 된 형태의 기초산업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동양, 특히 대한민국의 농업에서 쌀 과 감자를 제외한다면 과연 앞서 농업을 온전히 설명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주장하는 체계는 '농업의 역사는 재배 식물이 말해준다'는 원리를 전제로 완성되었다.

226쪽

각설하고 결국 이 책은 그 나름 농업의 틀(또는 지식)이 완성되기 까지의 과정... 이른바 농업의 시작과 그 흐름 속에서 선택되고 또 확산된 재배식물들을 논하는 '식물학'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에 혹 고대문명의 발달과 함께 엿볼수 있는 농업의 개성과 방법론에 주목하고 싶은 독자들이 있다면, 안타깝게도 이 책은 그리 매력적인 내용의 것으로서 인식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오늘날까지 재배식물으로 인식되는 많은 곡물과 채소 등의 먹을거리의 예를 들어 결국 이 책은 그 야생식물들을 개량하고 또 (인공적으로) 재배하면서 완성한 오늘날까지의 농업과 그 현상을 정리한다. 때문에 흔히 한국과 베트남 그리고 일본의 쌀을 생각해보았을때, 그 각각의 곡물이 저마다의 개성을 오롯이 드러나는 이유 또한 본래의 다른 환경과 더불어 더 나은 생산성과 기타 필요성으로 인하여 끝임없는 개량의 시도로서 형성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원시시대부터, 인류는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골라냈고, 또 생산하려는 시도를 통해, 본래의 원시식믈을 토종식물로 변화시키고 더욱이 그것을 문명의 팽창과 축소의 과정으로서 전파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결과적으로 그 과정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은 여느 지식의 가치를 떠나,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과정이였다 생각한다. 애초에 무언가의 시작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그에 따른 신비감과 일종의 경외의 마음을 품게되지 않는가? 그러고보면 식물 또한 스스로의 증식을 위하여, 독성과 가시 등 여러가지의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지킨다. 그러나 인류는 그 특징을 걸러내고, 독성을 제거하고, 보다 인간에게 유리한 형태의 증식을 도모하며, 문명사회의 기초를 닦고, 또 '세계4대문명'과 같은 독특한 역사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정형화 또한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축척한 인류의 지식과 기술의 집합체라 생각할수 있다. 다만 오늘과 미래... 이른바 최신의 농업과학에 기댄 또 다른 농업의 모습은 분명 기존의 과정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그것이 과연 (인류에)어떠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대로 끝임없이 추구한 인류의 기질. 그야말로 어느 기원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는 변화와 개선을 추구하며 나아간 진화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이에 나는 그 모든 현상이 오롯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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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
리처드 플레처 지음, 박흥식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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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십자군 전쟁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을 접하였을때, 이에 (당시의)저자는 어떠한 주장을 드러냈다. "서양은 중동이 허락한 것만을 먹으며 자라는 굶주린 늑대와 같았다" 이는 풀이하자면 중동이 동방과 서양의 중간지점이라는 이점을 활용해 무역을 중계하고, 교역품을 독점하며, 그 필요성에 목마른 서방에게 있어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또 그것을 마음껏 휘둘렀다는 말이된다.

물론 위와같은 해석이 역사의 관점에 있어서 완전히 틀리다고는 주장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후 등장한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그 부족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론으로서 십자군의 정의가 합리화된다면? 적어도 나의 입장에서는 그 현상이 매우 우려스럽기도 하고, 또 (개인적으로) "가증스럽다" 라는 생각을 품는다.

각설하고 흔히 많은 사람들은 '중세시대'의 동 서양을 논할때 갈등과 충돌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에는 그 무엇이 필요한가? 결국 상호간의 교류... 일종의 접촉이 있어지만 우정이든 우호이든 오해이든 그 어떠한 것이 피어나지 않겠는가. 이때 이 책은 그 교류의 흐름 속에서, 결과적으로 '극단적인 접촉'(전쟁)으로 치닫기까지의 과정을 드러낸 일종의 역사서이다. 이처럼 책 속에는 고대부터 (로마제국)연결되어온 실크로드와 그 흐름사이에서 전파된 문화.지식.갈등 등의 가치관이 그 어느 순간부터 경직되고 또 축소되어지는가?에 대한 나름의 주장을 드러낸다.

두 문명의 이질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의아스러운 점은 양측 모두 상대 문명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113쪽

이에 상식에 준하여 생각해본다면? 그 가장 큰 이유에는 언제나 '유일신 사상' 즉 종교가 떠오른다. 실제로 십자가와 초승달, 성경과 코란 사이의 갈등은 과거나 지금이나 깊고 어둡다. 다만! 그 결과와 상식에 가려져 과정을 등한시하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고대부터 파생된 유일신 사상과 그로 인하여 분리되어 발전한 두개의 신앙에 있어서, 과연 그 시대에서도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오롯이 배척하기만 했을까? 이때 결과론을 드러내자면 서로간의 접점은 신앙이 아닌 일상이 이루어냈다. 그야말로 유럽인과 사라센인... 이른바 000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확립되기 이전의 세상 속에서, 분명 종교는 확실한 집단의 (정신적) 울타리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로 그 경계에서 벗어나 이익을 취해야 할 순간이 올때, 사람들은 생각외로 스스로의 종교적 신념보다는 생활과 교류에서 얻어 낼 수있는 장점을 취하기 위한 선택을 곧 잘했다.

그 덕분에 당시 이슬람 문화권의 '포용력'은 고대 그리스와 견주어 손색이 없는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의학과 천문학 등에 대한 비약적인 발전을 자랑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등장하게 된 '절대적인 가치관'은 곧 그 절대를 제외한 다른 가치관을 눈여겨볼 기회를 박탈했고, 박해했으며, 더욱이 기존에 쌓아올렸던 업적을 모두 쇠퇴시키는 악영향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특히! 더 불행했던 것은 그 배척의 현상과 움직임이 결국 이슬람과 기독교... 그 모든 영향력 아래에서 발생되었으며, 또 확대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흔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상식, 이에 서로간의 무지가 곧 전쟁(십자군)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겠다. 분명 이후 서로간의 교류와 왕래, 특히! 인종과 종교의 다름으로 인하여,발생하는 트러블은 그 서로의 증오와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어 갔을 것이다. 다만 과거 우르바노2세가 열혈이 원정을 주문하던 당시에 있어서도, 분명 사람들의 뇌리에는 단순히 영혼의 구원 뿐만이 아닌, 중동에서 얻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이익이 그 뇌리를 지배했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적어도 예전부터 교류를 이어왔던 '이탈리아 상인'들은 더욱 더 그 과실에 욕심이 동하지 않았겠는가?

이처럼 교류의 단절(또는 축소)가 가져온 역사적 불행은 어마어마하다. 더욱이 이에 서로간의 포용성과 다름을 이해하고 또 연구할 가능성조차 묵살한 '절대적 영향력' (종교)는 아쉽게도 그 시대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피의 역사의 형성과 과정...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버린 끝없는 갈등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는 지적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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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하고 역동적인 바이킹 - 전 세계의 박물관 소장품에서 선정한 유물로 읽는 문명 이야기 손바닥 박물관 4
스티븐 애슈비.앨리슨 레너드 지음, 김지선 옮김 / 성안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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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많은 사람들은 바이킹을 '전사'라고 이해한다. 그야말로 춥고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늑대와 곰털가죽을 뒤집어쓰고, 하늘높이 솟아오른 뿔투구와 전투도끼를 뽑내며, 유럽과 아이슬란드 (최근에는) 더욱이 캐나다까지 그 야만성을 뽑낸 약탈민족이 바로 대중에 뿌리깊이 각인된 바이킹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일부 영화와 판타지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바이킹의 모습은? 분명 역사 속 바이킹과 비교해 일부의 모습만이 비추어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단순한 약탈을 통해 살아가는 '민족'이라면, 과연 당대에 뛰어난 조선술을 어떻게 지닐 수 있었으며, 또 뛰어난 금속세공을 통해 '바이킹 양식'이라는 하나의 문화.예술의 틀을 형성 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이 책의 여러 예술품(또는 유물)을 들여다볼때, 바이킹들은 본래 속해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환경 속에서 뿌리내리고 또 그 속의 자원을 활용하며 발전하는 '농경민족'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도끼와 칼, 황금과 은... 그러나 바이킹으로서의 진가는 배에 있다고 본다.

이처럼 그들은 소위 해양민족의 길을 선택함으로서, 그 과정에 마주치는 모든 환경에 적응하려 했다. 밖으로 나아가 개척을 하고, 장사를하고, 때로는(주로) 풍요를 약탈하면서... 비록 그 과정 속에서 단일국가 단일민족주의의 길에 들어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시대의 한 켠에 있어서 가장 강렬한 개성을 드러냈고, 또 북방 여러 민족에 흡수되면서 발생한 '문화융합'의 장점 등이 드러나게 되면서! 이에 바이킹은 또 이 책 속에 녹아있는 바이킹으로서의 흔적은 분명 피와 도끼의 야만성보다는 다른 보다 현실적이면서도 독특한 특성의 것으로서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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