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 영국 보수당 300년, 몰락과 재기의 역사
강원택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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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서방세계를 떠나서,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영국의회라는 것은 나름의 멘토이자 동경의 대상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입법기관으로서의 지위도 그렇지만 소위 영미법으로 불리우는 근간을 구축하고 또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선두주자로서의 지위 또한 누리고 있기에, 이에 (대륙법과의 개념은 다를지라도) 저자가 추구하는 국정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당이란?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서 배워야 할 역사적 사실과 가치등이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결과적으로 그는 영국의 보수당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영국 의회의 역사는 오롯이 보수의 기치아래 발전되어 온 역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도 그럴것이 사전적인 의미에서도 '전통'을 지킨다는 뜻을 지니기도 하기에, 이에 편향된 눈높이로 바라보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계속되어진 왕권과의 대립, 혁명과 전쟁(내전)의 발발, 보다 진보되어 온 법의 편찬과 개정의 과정을 올바르게 판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계1.2차대전과 같은 위기 속에서 영국사회의 방패가 되어준 것!, 그리고 점차 변화하는 산업의 체질변화를 이끄는데 필요한 것! 이른바 '강직함'을 상징함과 동시에 이를 이를 결과적으로 장점으로 승화시킨 보수적 가치가 만들어낸 역사의 모습 또한 흔히 영국정치의 한 축으로서 중요하게 작용했다.

보수당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이익을 있는 그대로 지키고자 하기보다는 영리하게 양보할 것은 양보함으로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뿌리째 위협받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다.

459쪽

때문에 이에 '영국의 보수' 는 그 전통적인 역사의 계승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다 낡고 또 사회적 갈등요소로 남아있는 어떠한 것을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제의 역활을 수행하기도 한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그야말로 국가에 대한 의무와 사명감, 그리고 (연방국가로서의) 역사와 그 계속성을 유지하려는 역활에 충실함으로서 생기는 관습과 전통 등의 축척 과정은 결국 그에 속하려는 시도에 있어서도 일정 이상의 의무와 역활의 짐을 지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에 속하고 또 선도하는 것에 대하여, (국가와 또 그들 스스로에게 있어서) 미래와 명예를 제시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영국 의회의 '발전사' 그리고 그 속에서 활약한 보수당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시나 그 역사 속에서 필요한 조건과 실행을 선도하는 정치와 정치가가 결국 리더의 역활을 수행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더욱이 특정 정당과 그 성향이 두드러진다 하여,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어떠한 것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하며, 또 외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역시나 그것이 큰 규모와 역사와 전통을 지닌 것이라 하더라도 여지없이 무너진다는 것또한 이 영국 정치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기도 하다.

'강하면서 부러지지 않는것' 이에 예전부터 그 오랜 역활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켜야 하는 테두리에서 변화시켜야 할 사회, 그리고 조정자로서의 정부와 의회의 역활을 수행하고, 최종으로 이에 안정과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 이처럼 영국 보수는 보다 안정된 형태의 변화를 주도하는 정치.권력의 모습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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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레이하 눈을 뜨다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 3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 지음, 강동희 옮김 / 걷는사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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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현대문학으로서의 러시아 소설 들을 바라보았을때 어쩌면 가장 일반적인 주제이자 메시지로서 '지키다'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고는 한다. 예들 들어 대외적으로 '어머니의 땅'을 위하여 행하고 또 희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많은 이야기들은 대체로 수많은 등장 인물들의 헌신을 요구한다. 그야말로 조국. 민족. 영토. 더욱이 연방국으로서 합일을 이루어야 하는 정치.사회 메커니즘이 녹아들어간 그 많은 이야기들의 한결같은 분위기... 이에 어쩌면 어느 독자들은 그 러시아의 독특한? 색채를 마주하면서, 소위 볼셰비키의 그림자를 엿볼수도 있겠다.

물론 이 책 또한 그러한 영향을 받은 소설로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 그러나 최근의 현대소설로서 변화를 겪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이전보다 솔직하고, 진실되며, 반면교사의 눈높이로 쓰여진 수 많은 표현들을 통하여 보다 리얼한 옛 소비에트의 모습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유배문학이라 칭하여지는 이 소설의 특징은 혁명과 혼란 그리고 독재자 아래의 권력구조와 정치가 만들어낸 매우 독특한 역사의 사실이 만들어낸 장르라는 것이다. 실제로 주인공인 여성 줄레이하는 과거 제정 러시아의 신민으로서의 삶, 그리고 전통적으로 억눌리는 가부장제의 그림자에서 살아가는 시골 아낙네에 불과했지만, 결국 이후 등장한 혁명정부아래 '부농'(부유한 농부)로 분류되어 본래 가졌던 모든 것을 잃는 과정을 겪는다.

이에 저자는 줄레이하의 삶을 통하여 '인민(모두)을 위한 정부' 아래 자행된 무능과 불명예, 그리고 범죄와 다름이 없는 정책과 실행의 과정과 결과가 만들어내는 수 많은 이야기를 그려낸다.

정부에서는 현명한 조치를 취했다. 성장을 즉시 중단하게 했고, 죄인들을 처벌했으며, 수용소에서 근절하기 어려운 개인주의의 본질을 뻔뻔하게 드러낸 부농들을 집단농장으로 보냈다. 부농에 대한 처형은 수송열차 운영과 함께 내부인민 위원회에서 담당했으며,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전체적인 흐름을 이루었다.

503쪽

불순분자를 구분하고, 이를 처벌하고, 또 보다 건설적인 조국을 만든다는 명목하에 강제로 이루어진 이주정책과 그 와중의 (민중의) 희생에 대하여, 결국 인터네셔널의 기치 아래 자행된 모든 것은 과연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이였을까? 이에 줄레이아 개인에 있어서도 수많은 상실과 강압... 그리고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으며, 스스로 회교도로서의 신에게 빠른 구원과 안식(죽음)을 간청했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이에 줄레이하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여느 조국과 명예 그리고 스스로의 생명이 아니다. 다만 그는 시대의 변화, 더욱이 강압된 변화 가운데서도 '운명적'으로 낳은 아들 유주프를 지킴으로서, 결국 자신에 대한 의미를 되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줄레이하는 봉건 소작농의 아낙네가 아니요, 혁명정부의 불순한 부농출신자도 아니다. 그야말로 그녀는 1930년대 러시아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아들을 키우고 또 독자적인 자아를 지닌 자유인으로 키워내고 또 떠나보냈다. 전쟁에도, 조국에도 의무에도 정부에도 빼앗기지 않은 자유의지와 자아를 자진 사람을 키워낸 어머니. 이에 저자는 어쩌면 과거의 흐름가운데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키고 또 계승해야 할 것을 바로 자유의 의지라 생각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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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르카 서간문 선집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작가와비평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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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흔히 (서양) 중세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역시나 그 '개인'의 삶 가운데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종교의 구속력... 특히 사실상 학문적 개념과 이념을 넘어서, 생활방식에 있어서도 그 그림자를 드리웠던 실질적인 모습과 (그것이 만들어낸) 한계를 마주하는 것이였다. 때문에 이루 르네상스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의 영향력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한 시대' '고대. 그리스 로마문명의 부흥' '보다 자유로운 철학과 예술의 형태가 표현되기 시작한 시대' 로 이해하고 있는데, 물론 나 또한 그러한 설명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이 책 속에서 발견한 '한 개인의 기록'을 통해서, 보다 세세한 르네상스인의 정서?를 알 수있게 되였다는 계기를 통해 결국 내가 나름대로 이해한 르네상스인에 대하여 한번쯤 글을 쓰고 싶었다.

젊은시절 문법학자 프리스키아누스를 읽고, 나중에는 (대) 플리니우스를 읽고, 또 최근에는 노니우스 마르켈루스를 읽고 얼마나 많은 알지 못하는 책 이름을 알게되고 얼마나 자주 군침을 흘렸던가. 그것을 하나하나 떠올리다가는 끝이 없을 겁니다.

328쪽

이처럼 페트라르카 서간문의 내용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르네상스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였던 (또는 공화주의자?) 저자는 흔히 '중세인'이라 생각해온 많은 인식들과 비교하여 다른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개인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목표를 부지런함과 성실함 그리고 끝없는 학문의 탐구라 정의했고, 특히 고대 로마의 인상적인 위인과 국가관을 사랑한 나머지 '아프리카' (스키피오)의 이야기를 집필했다. 또한 이에 지식인이자 문학인으로 성공하는 명예를 자랑스러워 했기에, 이에 보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면면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데. 바로 그러한 조화?야 말로 이미 앞서 언급한 르네상스가 지닌 가장 큰 개성이 아니였는가? 하는 생각이 미친다.

그야말로 종교와 (고대)문화가 조화롭게 섞여 들어가는 시대. 그리고 그 현상이 크게 박해받고 외면받으며, 또한 바쁜것이라 배척받는 것이 아닌, 예의 예술가들과 문학가 그리고 지성의 이름으로 녹아들어가 보다 자연스러운 융화과정을 겪어낸 것이야 말로 보다 그 시대를 보다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개인적으로 나는 이 서간문 뿐만이 아니라 '칸초니에레'와 같은 사랑의 시, 인간의 삶 가운데서 가장 역동적인 감정의 표현일 수 있는 어느 것에 대한 많은 기록을 접한 기억이 있다. 물론 이러한 많은 것을 접하였을때, 오늘날의 현대인은 그것이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것이며,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발전해온 '자유'의 영역 아래의 역사라 그저 이해하고 넘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전환점' 또는 변화의 시기에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이 모든것이 어느 소수의 선지자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닌, 첨차 구축되어가는 기술과 사회발전의 진행...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변화하는 필요성과 그 실현이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다 더 나은 내일' 을 희망하는 현대인들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치.사회의 안정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축척하고 계승되고, 발전되어가는 의료와 다른 많은(농업.물류.산업) 서비스가 그 바탕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서간문에서, 어째서 그가 성실함을 미덕으로 생각했는가? 고대 로마의 많은 장점을 추구하였는가? 에 대한 그 많은 부분에 대한 이유를 따진다면, 결국 그것이 '인간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 (저자) 그가 믿어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갈리아인에게 이탈리아가 신하로 조롱당하는 시대' 그리고 흑사병으로 인하여 보다 더 안전한 또다른 장소인 '데카메론' 이 표현되면 시대 또한 앞서 찬란하다 언급했던 페트라르카의 삶에 비추어진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결국 저자가 그토록 원했던 '로마'란 보다 인간에 의해 질서와 안정을 완성한 시대. 그리고 그 바탕아래서 로마의 문화를 꽃피운 시대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담겨있기도 하나는 감상 또한 받는다.

이처럼 그의 서간문에서는 개인의 목표, 후대에게 전하는 메시지, 그가 원하는 (실질적) 세계의 안정과 번영에 대한 많은 부분에 대한 르네상스적 가치가 녹아있다. 휴머니즘, 그리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추구한 한 지성인의 한 목표를 엿보고 싶다면 나는 분명 이 책을 권할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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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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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철학과는 다르게, 흔히 인문학이라고 하면 나름 인류사 모든것을 포괄한 것 뿐만이 아니라, 무언가 현실의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필요한 (어느) 실질적인 가르침을 얻기 수월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을 들여다보았을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문학의 모습은 앞서 기록한 것과는 반대로, 각각의 현실에 있어서 이용당한 인문학의 모습을 들추고, 지적하고, 보다 올바른 모습의 인문학이 어떻게 정의되고 활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 나름의 믿음이 굳게 자리잡은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이처럼 나 개인의 학습과 인식에 있어서도, 흔히 지성을 마주하려는 시도에 비추어 흔히 '대세'를 따르려고 했다. 그야말로 학교의 필독서로 그리스.로마신화가 추천되고, 정작 조국의 역사와 철학을 마주하기보다 서양의 고대철학을 접하려고 했으며, 더욱이 고대 이집트 등의 웅장함과 화려함, 그리고 서양세계의 정복과 전쟁과 같은 소위 영광의 시대라 포장되어 온 서양사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결국 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리 될 수 없었던 다른 문화권(문명)에 대한 비판의 눈초리를 보내며, 이른바 '학문의 권장'에 고개를 끄덕이던 때가 젊은날의 나의 모습이였다. (아니,그것이 세상의 상식으로 통할 때가 있었다.)

물론 저자 등이 그 흐름을... 역사를 부정하라는 메시지를 위해서 이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 그리고 더 나아간 미래의 인류를 생각하며, 이른바 인문학은 보다 참된 인간의 가치를 빛낼 더 높은 인식을 주문하고, 실현시키려 노력해야 하는 학문이 되어야 마땅하다. 는 것이 어쩌면 이 책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감상이 든다.

서양 고대가 그리스.로마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의 역사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기보다는 위대한 역사로 숭상해왔다.

159쪽

때문에 점차 비평을 넘어서 드러나는 주장에 따르면, 저자 개인의 삶 뿐만이 아니라, 이 책의 주장에 이르는 많은 것이 매우 진보적인 것으로도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강대국의 논리와 승자의 논리가 큰 영향을 미치는 현실 속에서 결국 인문학의 가치 또한 그에 따른 변명거리를 제공해 왔다. 예를 들어 '제국의 길'을 언급한 그리스의 페리클레스의 인식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애써 외면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게다가 흔한 역사가 아닌, 그 결과가 낳은 인식에 있어서도, 인문학은 계급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문명간의 선진과 야만을 나누는데 쓰이며, 세상에 갈등과 차별을 낳았고 또 그것이 폭발한 전쟁을 정당화하는데도 쓰인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때 저자는 이 모든것을 시대의 흐름 중에서 '최선'을 선택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닌, 오롯이 인문학의 거짓과 타락?이라 주장하는 것 같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가 느낀 진보의 메시지 또한 지금까지 의심치 않았던 많은 교훈과 가치에 대한 비평과 지양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였다. 그렇기에 이에 그 메시지를 마주하는 독자들 특히! 국가의 존재와 사회를 결집시키는데 있어서 활용된 (상식이라 생각되어진) 현실 속의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과연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지 나는 그 감상이 사뭇 궁금해졌다. "희망하는 모든 민족이 독립의 길을 걸어야 평화와 인권이 보장된다"는 말을 혹 중국 등에 넌지시 던져보면 어떠한 반응을 할까? 물론 개인적으로 그 주장이 오롯이 어리석다, 비난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은 힘의 논리 위에 드리워진 불평등, 번영을 위한 희생과 강요, 그리고 자칫 최악으로 흘러갈 상황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정의론의 하나로서, 이를 인문학이란 더 높은 것을 향하는 추진체가 아닌, 최악을 막는 브레이크로서 생각하는 '나'는 분명 저자와는 다른 생각과 정의를 가지고 있다. 새삼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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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선정에서 들리는 공부를 권하는 노래 - 겸산 홍치유 선생 권학가, 2020년 지역출판활성화 사업 선정 도서
홍치유 지음, 전병수 옮김 / 수류화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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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듯 펼쳐보았을때 그 주제를 알 수 없었던 책... 그러나 의외로 (그 내용을) 접하다 보면 오늘날에도 끝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속의 학문의 흐름이 그 바탕에 깔려있지 않은가? 하는 감상을 받는다. 각설하고 처음 주자학을 더해 퇴계 이황의 계보를 따른다는 것과 같이 옛 정통성?을 드러내는 서문에 있어서는 솔직히 나 스스로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였다. 특히 이미 대세를 떠난 '한학'의 지위와 그 가치에서도 오늘날 바쁜시대에 걸맞지 않는 낡은 학문, 더욱이 아주 오래전의 가치를 되내어, 보다 보편적인 도덕을 강조해 온 것이 바로 한학의 존재이자, 그 한계라고 생각하여 온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이 책 또한 그 옛 가치의 계승을 위한 책에 그칠 수 있다는 예상을 했지만, 의외로 더욱 더 깊이 읽어내려가다보면, 과거 근.현대의 한반도... 예를 들어 성리학의 마지막 지식인? 로서 마주한 세상의 흐름과 해석 그리고 이후 암울한 미래의 불확실함을 마주하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가치'는 무엇이었나? 에 대한 나름의 기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데 있어서​, 나는 이에 큰 의미를 발견하였다.

물론 책 속의 주제는 '학문이 천성을(옳은 방향으로) 바꾼다'는 본래 성리학의 골자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이에 '공자 왈' 태평성대와 존귀한 인품을 향한 끝없는 주문과 필요성에 대한 주장에서, 예나 지금이나 이를 배우는 학생들은 쉽게 지치고 또 지루해하지만, 때문에 이 책에서의 '노하우'를 전하자면 예로부터 이를 노래로 지어 부르면 더 재미있고 쉽게 마주하고 학습 할 수 있단다.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여 태평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기에, 늙은이의 한마디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시오.

278쪽

안타깝게도 역시 문자와 활자의 연속인 책을 통해서, 그 노래의 음율을 이떻게 되는지, 어떠한 방식으로 암기를 하려고 있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나라 조선, 그리고 그 조선의 마지막과 병탄의 과정, 이후 일본의 항복과 군정으로 이어지는 역사에 있어서, 이 책의 글은 분명 그 시대속의 저자가 이 각각의 사건을 마주하고, 또한 저마다의 학문적 잣대를 통해 이를 비판하고 또 해석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이를 기록하는 활동(또는 전파하려는) 을 활발히 벌였다는 것을 증명한다는데 있다.

그렇기에 한반도의 성리학이... 그 골자가 근.현대사의 흐름을 따르지 못한 '못난 학문'이라 여기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닌가 하는 감상이 미친다. 흔히 사람이 선.악을 판단하고, 보다 예의를 차리고 상대를 마주하는 개인의 영역에서 지금도 한학의 가치는 그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세계의 정세와 국가의 국방,정치,사회의 건강함을 측정하고, 마주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 과연 오늘날에도 한학은 그 얼마까지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에 적어도 이 책은 그 어느 순간의 '시대'에서 활약한 한학의 역활 '한학을 바탕으로 본 세계 눈'을 독자들에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한 독자는 적어도 옛 학문과 지성, 그리고 그에 따른 사고방식이 그저 낡고 고루하고, 답답한 것이 아니였음을 알고 또 나름의 한학의 역활에 대한 재인식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감상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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