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루저의 나라 - 독일인 3인, 대한제국을 답사하다
고혜련 지음 / 정은문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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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 결과적으로 이는 오늘날 외국 등을 바라볼 때 (저마다)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상식이 된지 오래이지만, 그럼에도 한때 그 상식이 미흡했었던 시대... 이른바 근대 제국주의시대의 흐름 가운데서, 그나마 이러한 내용의 기록이 남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매우 독특했다고 생각되는 일면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과거 한반도를 방문했던 이 '외국인'들이 이른바 '헌대적 가치' (또는 진보적인 정신)을 통하여 오롯이 그 나라를 존중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기록에 등장하는 '채산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결국 이들이 한반도의 자원을 탐사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국(독일)과의 교류를 어느 정도까지 확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한반도가 지닌 가치를 얼마만큼 가늠하여야 하는가? 하는 나름의 척도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난다.

조선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독일과 무역을 위해서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말하자면 조선은 자주국가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조선이 언젠가 이웃 나라의 보호와 지배를 받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151쪽 /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

그러나 어디까지나 점령과 수탈이 아닌 '교류'를 위한 눈은 그 나름대로의 온건함으로 타인을 마주하게 한 모양이다. 실제로 책 속에는 조선인 (또는 대한제국인)을 바라볼때, 크게 인간과 문화 등에 주목한다. 그야말로 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나름 형식적이고 경직된 예의 친절함과 대비되는 인간 내면의 천진함... 그리고 그무엇보다 중국 문화와는 (나름)차별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급격한 체질변화로 '근본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일본제국과 비교하여, 분명 조선은 그 문화적 본질(순수)을 간직한 국가였다.

세창양행이 수입한 1900년 대한제국의 무기 주문서를 보면 1.200개의 총알, 소총2상자, 대포6대다. -중략- 숫자로 판단할 때 세계 흐름에 대한 현실적인 대처 능력이 전무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64쪽 / 대한제국은동아시아의 황금사과인가

허나 안타깝게도 그 정체성을 기준으로 한 '변화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한반도 속 국가의 자주독립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소위 일제시대의 결과를 진단하여, 먼저 당시 대한제국의 한계를 '무능'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적어도 책은 그러한 인식에 자그마한 변화를 주문한다. 특히 국제사회에 한반도가 무가치한 땅으로 인식되었다는 상식...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조선사회의 느긋함이 일종의 나태함과 무능함으로 인식되고 또 경직되어 전해진 것은 일종의 일제 식민사학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과거 조선이라는 국가가 일본처럼 '서구화'를 서두르지 않은 것이 '실책'(일반적인 역사적 평가)이라면, 결국 그것 역시(결과론에 비추어) 크게 자책하고 반성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적어도 대한인이 그 본연의 전통과 사고를 버리지 않은 것이 결국 당시 국제사회의 질서, 즉 약육강식의 흐름에 저항 할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는 것, 더욱이 오래도록 독립을 염원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결국 현대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근본에는 이 나름의 '특징' 즉 이 책에 기록된 외국인들이 보고 마주한 한반도 문명의 특징 또한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하기 충분하다 여긴다.

이들은 서구문명화를 위해 내재된 유교전통문화를 깡그리 없애고 서양일본인이 되고자 몸부림친 이웃과 다르다. -중략- 이들이 없었다면 독립된 주관을 소유한 21세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313쪽 / 조선인의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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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치밀하고 친밀한 적에 대하여 -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가스라이팅의 모든 것
신고은 지음 / 샘터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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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패를 끼치지 말아라' 이는 분명 공동체를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상식이라고 생각되지만, 세상에는 그에 반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양심과 도덕의 범위를 넘어, (심지어) 법률에 이르기까지 보다 올바른 인간관계를 위한 권장과 제제가 병행되어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 사회의 단면에는 이른바 '가스라이팅'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현상이다.

세상의 요구와 가치관이라는 틀에 맞춰 조종당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또다시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중략- 강요하면서 불필요한 아픔을 옮깁니다.

20쪽

그러나 앞서 언급한 현상은 나름 개인의 난폭함을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더 나아가 책 속의 내용을 통해 바라본 가스라이팅의 본질에는 그 개인 뿐만이 아닌 공동체의 상식이 이라는 명목하에 개인의 존엄 등을 억압하는 것도 포함이 되어진다.

이처럼 나는 이것을 기만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정확한 비유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특히 타인에게 심리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 그러나 그것이 괴롭힘과 폭력만이 아니라,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하게 하는 강압의 수단이 동원되지만, 그 무엇보다 상대보다 그 당사자 스스로가 죄책감을 가진다는 점에 있어서, 이 현상은 매우 교묘하고도 치명적이다.

적절한 단절은 오히려 더 따뜻한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내지요.

나가는 글

이처럼 교묘한 강압에 저항하기 위해서... 과연 개인은 그 어떠한 방어수단을 가져야 하는가? 이에 책은 스스로가 저항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고 한다. 세상의 눈과 관계의 상처가 생기는 것에 두려운 마음을 품는 것을 넘어,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스스로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크게 병이 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오만하다" 또는 속된말로 "싸가지가 없다"는 타인의 일방적인 평가에 스스로가 주눅이 든다는 것은 반대로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뜻도 된다. 물론 사회적인 관계에서 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그것을 통해 필요이상으로 휘둘리는 것도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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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말 - 새로운 번역과 원문을 통해 만나는 셰익스피어의 인생 철학 110가지
가와이 쇼이치로 지음, 박수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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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마음이 가는 문구를 넘어, 교훈이 되는 문구] 를 주장하는 이 책의 주제는 분명 이를 접하는 수 많은 독자들을 격려하기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때때로 어떠한 격려과 용기를 받고자 할때.. 이에 많은 사람들은 이때 비로소 '학문의 문'을 두들기지만, 곧이어 생각해보면 그 아무리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인물이라 해도 셰익스피어는 소위 '극작가'의 삶을 산 인물이기에, 이에 그가 현실적으로 어떠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나름의 의구심을 품을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생각이 된다.

물론 셰익스피어 스스로가 후대를 위한 '학술적 글쓰기'를 행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극작가로서, 수 많은 작품들을 써내려가며, 그 작품의 내면에 나름의 주제를 녹여냈고, 이에 저자는 그 주제의 일부를 꺼내어 '인생의 메시지'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저 먹고 자기만 하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신은 우리에게 앞을 내다보고 뒤를 되돌아보는

큰 사고력을 주셨다.

그 능력과 신에 버금가는 이성을

가졌음에도 썩혀두어 좋을 리 없다.

햄릿 제4막 제4장 164쪽

물론 세상은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빛을 발한다. 예를 들어 문학으로서, 그리고 오랜 지성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그의 작품들은 그 영국이라는 하나의 나라를 넘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덕분에 셰익스피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알고, 또한 책을 읽지 않아도 '베니스의 상인'의 줄거리를 알게 되었지만, 허나 그렇다고해서 단순히 상식으로서 아는 것만으로 셰익스피어가 지닌 오늘날의 명성과 가치까지 오롯이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나 스스로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각설하고 저자는 그 나름 깊이 셰익스피어를 이해한 인물이다. 그야말로 옛 영어권의 작품을 접하고자 할 때 마주하는 난관과, 또 이를 번역하는 와중에 마주한 어려움에 대하여, 저자는 이를 두고 "대사의 의미를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권하겠다" 고 했다. 말 그대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그리고 인물들의 대사를 비롯한 수 많은 표현을 포함하여, 저자는 오롯이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분명 셰익스피어를 향한 (나름의)애정이 없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좀더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싶은 열망, 그리고 무엇보다 셰익스피어의 의지가 왜곡되는 일이 없이 알려지고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열망이 이 책의 이곳저곳에 드러나는 것 같다. 때문에 저자가 말한 '인생의 격언' 또한 한낮 어느 작품 속의 독백이나 대사가 아닌 또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야말로 리어왕과 포샤... 다른 수 많은 인물들의 말이 드러난 그의 작품들은 결국 그 시대의 삶을 살면서 단련한 '인물' 스스로의 가치를 오롯이 담아낸 그릇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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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왕릉실록
이규원 지음 / 글로세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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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 나 스스로가 흥미를 가져온 역사... 그중 (과연) 한반도의 역사는 '나에게 있어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을까?' 예를 들어 단순히 (스스로) 독서로서 마주한 여러 역사서의 대부분은 서양사와 일본사 그리고 인물로 나누어지는 타국의 것이 많았다. 물론 이는 이미 어린시설부터 '국사'(지금의 한국사)를 통틀어 크게 교육을 통해 학습한 지식에 만족하고 말았다는 일종의 '나태함'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수 많은 사람들은 해당 (국가) 스스로의 역사에 대하여 '유구하다'라고 하지만, 정확히 각각의 역사가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에 대한 탐구에는 게으르다. 예를 들어 이 책에도 기록에 있어 가장 크게 기대는 것은 어쩌면 '삼국사기'가 아닐까 하지만, 과연 지금 현대인의 입장에서 그 삼국사기는 어떠한 가치관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왕 19년 2월, 여우때가 궁중으로 몰려와 그중 백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 책상에 걸터 앉았다. 4월 태자궁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460쪽 백제 부흥운동

예를 들어 현대의 가치관에서, 과연 알을 깨고 태어난 '인간' 그리고 더욱이 150년 이상을 장수한 어느 인물 등을 비추어 이를 오롯이 진실이라 인정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역사라는 학문은 단순히 그 기록을 마주하고, 읽고 이해하는 행위 죽 기록의 유무를 앎으로서 만족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역사는 오래될수록 그 진실을 발견하기 어렵고, 또한 기록의 양에 따라 견고함이 더해지는 학문이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고대 한반도 역사는 그 기록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한계를 오롯이 가지고 있으며, 이에 사람들 또한 역사와 야사를 구분함으로서, 역사의 정체성?을 이끌어내려 하였지만, 과연 그 경계를 구분짓는 것만이 역사의 쓸모를 증명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 도리어 역사학은 그 존재의 증명을 넘어, 그 (해당)기록이 지닌 역사성 등을 탐구함으로서, 이를 현대의 후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 학문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역사를 풍미한 유명 인물의 공과는 사서에 기록된 행적이나 사가들의 연구 결과에 의해 평가된다. - 중략- 동일인의 평가에 대해서도 사학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

442쪽 김유신

실제로 과거와 오늘날 어느 한 인물과 문명 그 경계를 넘나들며 생겨난 '상식'또한 이후 소위 방향성에 의하여 크게 변화해 왔다. 물론 이는 역사학의 수 많은 가설들이 충돌함으로서 만들어진 '합리적인 역사'이기도 하지만, 크게 생각하면 과거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발견됨으로 하여 수정된 지식, 즉 유물과 기록의 발견과 연구의 결실로서 수정되어진 역사학의 진보의 일면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처럼 결국 역사의 가설을 증명하는 방법은 바로 과거의 증거를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기록을 탐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자는 더 나아가 이 땅에 남아있는 증거, 즉 무덤에도 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무덤은 그 주인의 인물이 실제했음을 증명하기도 하지만, 이후 부장품과 수 많은 유물을 통하여, 그 당시의 문화와 기술 등을 가늠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한반도의 왕릉을 역사의 중심축으로 삼고, 그 해당 인물들을 바탕으로 한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표현했다.

물론 덕분에 이 책의 삼국시대는 소위 지도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인물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그밖에 주변의 여러 국가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이에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남긴 무덤의 주인들은 어떠한 삶을 산 인물들이였을까... 이에 한번 그 궁금증을 가지고 역사에 다가서 보는 것도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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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역사학 선언 - 근대 동아시아에 나타난 역사적 전환들
강상규 지음 / 에피스테메(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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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극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걸어 나아가려 하는 길' 그리고 그 배경 속에서 피어난 갈등과 그 갈등의 중심에 선 역사에 대한 인식과 정의에 대하여... 어쩌면 사람들은 그 역사 자체를 미래의 전진에 방해가 되는 일종의 족쇄로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예를 들어 각 국가의 사회 속에 만연한 '비판'과 '혐오' 사이에서 그들은 저마다의 현상 속에서 (나름의) 정의를 품고 있다.

어째서 일본은 과거의 전쟁범죄에 반성하지 않는가? 어째서 중국은 새로운 질서를 꿈꾸며 '패권주의'에 매달리는가? 또 이를 이유로 지적하고 수정하려는 한국(국내)에서의 움직임은 과연 어떠한 인식과 정의를 배경을 가지고 있을까... 이처럼 (적어도) 대한민국의 수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또 불안해하는 어느 현상에 대하여, 적어도 이 책은 역사를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보다 폭 넓은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감상을 준다.

이처럼 동아시아 삼국에 19세기는 상이한 패러다임의 만남과 충돌 속에서 빚어지는 고민과 혼돈, 모색과 좌절이 뒤섞인 '위기의 시대'였다.

67쪽 서양의 팽창과 '동아시아 문명기준의 역전'

그야말로 저마다 걸어 온 역사의 패러다임 속에서, 분명 각각의 국가들 또한 (저마가) 추구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 속에서 적어도 한반도의 민족은 힘에 유린되었고, 또 정복되기도 한 과정을 거쳤다. 이때 이를 극복하는 와중에 형성된 '정의'가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관의 중심에 서 있다면? 결국 힘에 기댄 정의는 적어도 대한민국의 정의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가치로 다가올 것이다.

허나 현대 국제적인 현상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그 경계의 과정은 갈등을 이끌어내었다. 특히 역사의 과거를 옳고 그름으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가 만들어낸 폐해는 그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특히 더 두려운 것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이르기까지 앞서 언급한 흑백논리가 통용되면서 더욱 더 커다란 갈등을 만들어내는데 있을 것이다. 때문에 과거 역사의 인식을 대신할 새로운 인식을 주문하면서, 저자는 과연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각자의 내러티브는 내부자들간의 유통되고 소모될 뿐, 국경이나 진영을 넘나들며 공유되거나 풍요로운 대화로 들어가지 않는다. -중략- 역사의 진실은 없고 자기중심적인 해석들만이 평행선을 그리며 대결한다.

37쪽

결국 저자가 제안하는 바는 이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어느 사건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과 정의가 충돌할때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류와 안목으로 다져진 '지성'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어쩌면 이 책이 드러내려는 가장 큰 주제가 아닐까? 물론 오늘날의 수 많은 사람들 또한 저마다 정의와 지성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들이 만들어낸 인식을 통하여, 국가가 이익을 탐하고, 공동체를 선동하며, 끝끝내 과거의 상처를 가리려는 비봉책으로 소모하려 한다면... 결국 역사라는 학문이 가지는 가치 뿐만이 아니라, 그 학문이 나아가려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그 수 많은 방향 또한 일그러게 된다는 것을 한번 경계해 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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