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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비가 - 상
조열태 지음 / 이북이십사(ebook24) / 2012년 4월
평점 :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장수" 를 꼽으로라고 한다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먼저 "이순신"을 꼽을 것이다. 조선의 수군을 재건하고, 유지하고, 끝내 승리한 이순신의 업적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육균에서는? 물론 곽재우, 권율, 같은 장군들을 꼽을 수 있겠지만, 정작 "일본인" 들은 김시민을 꼽는다.
행주산성 전투의 패배도 패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본인이지만, 제1차 진주성 전투 만큼은 그들도 패전을 인정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초전부터 승승장구했다. 부산성을 접수하고, 신립의 관군을 격파하고, 상륙 20일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
을 접수하는 성과를 올림으로서, 일본군은 그야말로, 막강한 "힘"을 마음껏 과시했다.
그러나, 제1차 진주성 전투는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사건이다. 진주성 성주 김시민의 지휘아래, 그들은 끝까지 성을 수호했고,
일본군은 상륙후 "육지전"에서 첫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한국에서도 김시민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일본군을 상대로 "육상전" 에서의 "첫승" 이였고, 그 덕분에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시민은 전투중 입은 부상으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성주를 맡은 인물.
그 사람이 바로 이번 "소설"의 주인공 서예원 이다.
그러나 서예원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냉정하다. "조선왕조 실록" 에서 그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눈물을 찔찔흘리며, 전장을 돌아다닌
무능하고, 심약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1817년 조선은 나중에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정려문(육절려) 를 세워주었지만, 사람들이
횡성 구석에 세워져있는 비석을 많이 접하겠는가?? 아니면, 조선의 역사서 조선왕조 실록을 많이 접하겠는가?
신하 하나 때문에, 다 만들어진 실록을 고칠수 없어 내버려둔, 당시의 상황도 어느정도 이해가 가지만,
조선 정부의 안이한 정책과, 방심으로 인해서, 전쟁이 발발했고, 많은 장수들과, 의병, 백성들이 나라와 땅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어간 점,
을 생각하면, 상당히 비정하고, 무책임한 처사이다.!! 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서예원" 그가 이렇게 낮게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중 하나는 그가 초전에 성을 버리고 도주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로는 그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결국
성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론을 우선시하는 한국인의 정서로 본다면, 그는 그러한 평가를 받아도 별 상관없이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작가는 그가 얼마나 비장한 각오로 "충절"을 지켜내려 하였는가.. 제2차 진주성 전투 는 과연 일어나야만, 했는가? 를
주제로 그를 변호하고있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북상하는 일본군을 격퇴함으로서, 전략 ,전술적 으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이였다.
그러나 제2차 진주성 전투는 그 성격이 다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을 발판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북상하면서, 상륙한 병력의 절반을 잃어버리고, 명나라는 커녕 조선국에서, 서로 밀리고 밀리는 싸움을 계속하는
수렁에 빠져버렸다. 결국 명나라와. 일본사이에서 화평조약이 발효되어 일본군은 부산으로 철퇴할 수밖에 없게 되자,
히데요시는 부산으로 향하던 10만의 일본군에게 진주성을 공격해 "김시민"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을 내린다.
(당시 히데요시는 김시민이 아직 진주성 성주로 살아있다고 믿었다.) 결국 진주성을 공격한것은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설욕을 갚는
"보복성" 전투에 가까운 것이였다.
성주 "서예원" 으로서 해야할 상책(上冊) 은 백성들을 이끌고, 진주성을 탈출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선조"는 그에게 "수성" 을 명령했다. 서예원이 진주성에서 "버티고" 외부에서 "관군" 과 "명군"이 합세하여 공격하면,
승리 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부산"을 공격해 왜군의 보급로와 거점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진주성의 수비병력은 관.민 합쳐 3~5천, 외부의 관군과 의병들을 다 합해도, 10만에 이르는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화평조약을 체결한 명군은 왜군의 편도 아니지만, 조선군의 편도 아니였다. 그들은 쓸데없이 피를 흘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조선의 계집과 재물을 탐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이순신의 수군도 부산을 공격하여 탈환하기에는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역사적으로 두 인물은 "임금의 명령" 에 상반된 움직임을 보였다. 이순신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고, 서예원은 임금의 명을 받들었다.
불과 5천의 수비군으로 무모한 방어전을 벌인 결과는 참혹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고 만다.
서예원은 전사했고, 그가 타지에서 불러들인 부인과.가족들도 지아비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결국 남강에 투신하여 정절을 지켰다.
장남인 "계성"만이 일본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군민,합쳐 2만5천의 무고한 백성들이 무참히 도륙되었다.
도륙을 마친 일본군은 전라도는 눈길조차 주지않고 부산으로 철퇴했다.
그렇다면, 제2차 진주성전투는 도데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독기오른 일본군에게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졌다..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였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정신적 거점도 아니였다.
임금의 이상을 위해서, 분전한 서예원은 뭔가? 단순한 패장인가? 아니면, 부조리에 희생된 아까운 인물인가?
작가는 그의 문필속에서, 그의 나름대로의 아쉬움과 분노를 담아내고 있다. 그도 한국인이다. 임진왜란 그리고 한반도에 미친 재앙을
이해하고, 안타까워 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지녔지에 지은이는 제3자의 시선을 가질수 없었고, 중립적인 이야기 꾼이 될수 가 없었다.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본인도 지금까지 와는 다른 소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조차도 제3자의 중립적인 마음가짐을 가질수가 없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불타는 아방궁, 나라의 멸망, 분전한 사람들의 최후에 대한 많은 역사서를 보아왔지만, 이만큼 감정을 두드리지는
많았다. 그렇다, 나도 한국인이다.
이 책으로 인해 분노를 느끼고,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당신들도 한국인의 정서를 가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