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심리학 - 음식남녀, 그 미묘한 심리의 속내를 엿보다
시부야 쇼조 지음, 박현석 옮김 / 사과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 주변에서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과거나, 지금이나, 중요한 모임 등에서 관

계(인간관계)를 맺을때 무엇보다 상대와 식사를 하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말하자

나와 밥상을 마주하지 않은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라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

인데, 이에 나는 이러한 사상은 그 중국에서만 통용되는 독특한 것(문화) 이라기 보다는, 동북아

시아를 넘어, 전세계에 널리 분포되어있는 일반적인 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식사하는 행위에 신성(神聖)을 부여하는 일본에 이어, 한국도 중요한 '행사'?에 식문화 동반하

며, 사람을 평가하고, 화목을 도모하는 중요한 환경요소로 활용하지 않는가?   일반적으로 사람

들은 만나는 사람들의 밥먹는 모습을 보면서, 흔히 복스럽게 먹는다, 깨짝거린다, 시원스럽다,

같은 묘사를 하면서 해당하는 그 사람의 인격을 측정한다.  그렇기에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의 이미지 측정법 또한 의외로 그 신빙성?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을 읽은 나

의 개인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떠나서, 나는 책속에 등장하는 식사법이 모두 '외식'에 집중되어 있는

이 무엇보다 불만스럽다.   그리고 저자가 일본인이기에 발생하는 식문화의 '이질감'또 한

의외로 내용에 '불만이 있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되어준다.     물론 사람이 만

나고 또 관계를 샇아가면서, 밖에서 식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엇보다 중요하다루어야 할 것은, 남을 평가하는 지식을 쌓기 보다는 자신의 식습

관을 스스로 측정해보고, 필요하다면 개선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지 않을까?     

 

일본에서는 젓가락을 쓰는 것만 해도 "젓가락 빨기' '젓가락으로 그릇 당기기' '젓가락으로 음식

을 찔러먹기' 같은 것은 무척이나, 좋지 않은 식사습관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러한 일반적인 나쁜 습관과, 사람들에게 좋은 인식을 주는 습관에 대해서 좀더 분량

을 늘려야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 책은 단순한 첫만남 데이트를 다룬 책에서, 인성을 길러

주는 좋은 책이라는 인식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벌레들 - 역사 테마 소설집 바다로 간 달팽이 9
강기희 외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고픈 사람은 두명이지만, 그들 앞에는 단 한명만이 겨우 생존 할 수 있는 식량만이 존재

한다.    자... 과연 여러분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사람' 이라면 모자라

도 '두명이서 나누어 먹는다'는 식의 가정(假定)의 의견을 내놓을 것이 분명하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약자를 돕고, 모두가 함께 어울려야 한다는 공동체의식이 '선'(善) 이라는 고정

관념을 지닌 존재가 바로 인간 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뜻밖에도 이 세상을 지배하는 관점은 '약육강식' 즉 강자가 모든것을 소유하고 향유한

다는 의식이다.  이는 인간 뿐 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니는 모든 동물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관점으로서,  오로지 강자에 충성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개미와 벌' 의 생활상

을 엿보면, 보다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정해진 '역활'에 무조건적으로 순

응하며, 일개미는 죽을때까지 일하고, 여왕개미는 죽을 때까지 알을 낳는 운명에 대하여 거부하

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들에게는 '자아실현'의 욕구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느 생물들과는 다르게 그 욕구가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이른바 '높으신 사람

들' 을 향해서 저항의 의지를 표현하고, 또 자신을 속박하는  부조리에 대해서도 저항의 의지를

표현한다.   '저항 할 수 있는 권리' 이 책에서 주장하고 찬미 하는 그 권리는 과연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어떠한 가치관으로 이해되고 발전할까?   한번 그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보자.

 

우선적으로 '과거'의 저항은 한국인 모두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과거의 저항이란 타국의 지배자에 대한 저항이였고, 구체적으로 이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것처

럼 '동학' '독립운동'과 같은 형태를 띄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저항의식을 '구국을 위

한 숭고한 희생' '무엇보다 가치있는 인간의 정신' 이라는 미사여구를 아끼지 않고, 또 그 의견

에 대한 의심의 감정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 저항의 감정

이란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로 이분화 되어, 같은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념과 믿음까지

이분화 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강자들이 스스로 잘못과, 부조리를 행했음에도 불

구하고, 그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는 사실을 보아왔고, 또 그에 대하여 분노한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국익'이라는 단어에 의해서, 서민들인 그들이 소외되고

또 희생되고 있다는 인식이 그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책속

에 드러난 '4.19' '5.18' '삼청교육대' '6월 항쟁'등의 많은 사건들은, 모두가 지배자들이 '독단과

욕심'을 위해서 다수의 약자를 먹이감으로 했다는 것과, 그 주동자 모두가 그에 걸맞는 처벌과,

사회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과거의 어른들은 유신타도, 유전

무죄 무전유죄 를 부르짖으며, 그에 저항했다.

 

그러면 이제 '미래'의 저항은 어떠할까?  미래에는 분명 일제시대처럼 노골적인 착취도, 군사정

권처럼 강압적인 압박도 없을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배자들이 벌이는 '독선'이 아

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독선은 과거에 비해서 더욱 스마트? 해졌을 뿐이다.   먹고

살기위해서 '비정규직' '편법적 재계약'의 부조리한 굴레를 받아들인 사람들, 그리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친북 좌파'로 싸잡아 비난하는 사회분위기, 오로지 '국익'을 위해서라며 밀어붙이기

만 반복하는 지도자들. 이제 그러한 독단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미래의 저항은 '촛불시위' 처럼

평화적이고 또 직접적으로 변화하여야 한다.  이 책은 분명 '소설'이지만,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저항의 역사를 분류하고 또 그 변화를 측정하는 범위의 것이다. 저항하라!  이 책이

독자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실 카스트
스즈키 쇼 지음, 혼다 유키 해설, 김희박 옮김 / 베이직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많은 '어르신'? 들에게 있어서, '학창시절' 은 그리움과 같은 '좋은 추억거리'를 제공하는 소중한

가치 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층에게 있어서, 그 학창시절의 기억이란, 과거처럼 그다지

소중하다거나, 그립다는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잊어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큰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는 '왕따' 라는 존재 때문

인데, 이에 심각한 '이지메' 문화를 지니고 있던 일본에서는 이 '학교 따돌림' 에 대한 문제를 보

다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전문 심리학적인 해석을 통해서, 어째서 집단 따돌림이 일어나는 것인

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이에 이 책은 그러한 노력에 대한 결과물중 하나로서, 특이하게도 따돌림에 대한 아이들의 인식

을 인도 고유의 '전통적 신분제' 카스트 제도의 성격과 비교하였다.   책에서는 학교에서 일어나

는 많은 따돌림이 절대적인 '그들의 신분사회'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주장과 함께, 그 신분이라

는 것이 어디까지나, 주위의 환경과 외부의 압력같은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 아

니라, 학생들만의 의지와 관점으로 만들어진 '독자적 신분제' 라는 것을 정의하고 있다.

 

때문에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어째서 어른들의 노력에도 따돌림 문제가 해소되지 않

는가?" 하는 사회적 물음에 그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놓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앞서 이

미 '그들의 세계' 에 만연한 교실의 신분제에 과연 어른들은 어떠한 방향으로 접근하여야 하는

가? 하는 것을 주제로 학생과, 학부모, 선생들과 같은 '관계자' 들과 꽤나 기나긴 토론의 시간을

가지고, 또 그 진행과정을 이 책의 내용으로 삼았다.

 

때문에 이 책은 근복적으로 이지메의 해결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책이 아니라, 어째서

이지메가 나타나는 것인가?  하는 원인규명에 대한 이야기로 보아야 마땅하다.

 

 

이 책에서 토론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환경, 직업, 접근성에 따라서 각자 다양한 시선

으로 따돌림에 대한 정의를 지니고 있다.   학생들이라 해서 '왕따'를 시키는 상위층에 대한 증오

의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요,  교사라 해서 왕따가 어디까지나 학생들만의 문제라 여기고 있지

도 않다.   심지어는 '상대적 평등상태'인 학생들이 스스로 사회의 구조에 걸맞는 신분

차를 만들어 '스스로 작은 사회를 만든것이' 왕따문제의 근본적인 시작이라는 놀라운

주장도 나온다.  이미사회는 '잘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자'  '실패자'와 '성공자'라는 보이지 않

은 신분제를 가지고 있는데, 세삼스럽게 학교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에 대해

효과적인 해결책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그것인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애초부터 '이지메를 근절하자' 라는 정부와 학부모들의 바램은 절대로 이루어 지

지 못할 이상론에 불과해 진다.

 

학생들은 학생들만의 신분제를 통해서, 잘나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자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 구

분점은 어른들이 원하는 성적차나 능력주의가 아니라, 외모, 스포츠능력, 인맥같은 학생특유의

기준점에 의해서 구분되며, 낮은계급에 대한 그들의 대우는 마치 약육강식에 의한 동물적인 괴

롭힘을 동반한다.  이에 어른과 학생.... 사회적 신분제와 학생의 신분제에서 유일하게

것...그리고 제일 뿌리 뽑아야 하는 큰 문제점은 왕따 그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높은 신분에 있는 자가 뿌리는 '폭력의 씨앗' 의 존재라고 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학생들의 이지메는 집요한 폭력과, 금품갈취, 심지어는 성적인 폭력(인권유린)을 동반한다.   그

리고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해결 해야 할 진정한 왕따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학생들이 편을

가르고, 끼리끼리놀고, 상대방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는 것은 이미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으로 만연한 문제이기에 그 해결책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적어도 소외되는 계층에 대한 무

분별한 불이익에 대한 것만은 막아야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의 하나로서, 무엇보다 학생들에

게 괴롭힘에 대한 대가(사회적 책임) 은 상상이상으로 가혹하다는 진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무

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나의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외계인의 인류학 보고서 - 지구인이 알아야 할 인류 문화 이야기 어느 외계인의 인류학 보고서
이경덕 지음 / 사계절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이 책을 읽은 후, 제일 처음 생각했던 것은 책의 내용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의외로 고정

관념은 무섭구나.." 하는 묘한 위화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때, 책의 '유아

틱한' 디자인을 보고, 이 책은 어디까지나, 청소년이나 유소년을 위해서 만들어진 (내용의 레벨

을 대폭 낮춘) 그저 그러한 책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막상 본문에 들어가자, 단순히 외계

이 ' 제3자의 시선으로' 인간을 평가한다는 특징적 설정만 특이 할 뿐... 전체적인 글

의 수준은 사회. 정치. 종교. 문화 등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창조하고, 또 부수어 온 모

든 정신&물질적 가치에 대한 척도를 재조명한 전문가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외계인 그들이 보기에 아름다운별 지구에서 가장 지적이고, '특이한' 종족은 바로 인류이다.   인

간은 문명을 창조했고, 또 사회와, 문화, 그리고 영혼적 가치인 '신화'를 창조해 스스로 그것을 

섬기기도 했다.    때문에 과거에는 각 문명마다 확연한 특징이 존재했으나, 오늘날의 지구촌 시

대에 들어서서는, 그러한 문화적 특징이 점차 누그러지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들은 분명 과거

의 인간들에 비해서 많은 지식을 습득 할 수 있는 환경을 지니고 있고, 또 그들이 한계를 느끼던

수많은 난관을 극복할 과학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인지, 인간은 '유아독존'

의 자만심 속에서 점차 끝도 모를 '사치'의 늪에 빠졌고, 또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기 보다는

문화, 상식, 영토, 그리고 피부색 이라는 차이점을 들먹이며, 인간끼리 스스로 깊은 갈등의 골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 이는 분명, 많은 이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인간존중의 상식이지만, 오늘날의 세상사를 보면, 이러한 믿음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

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어디 인간의 편 가르기가 '인간들' 에게만 한정된 것이랴?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

라 자부하며, 지구의 모든 동.식물을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로 분류

한다.    그 덕분에 강아지는 주인을 잘 만나면, '개팔자가 상팔자' 라는 소리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 모기와 파리는 태어날 때무터 해충이라는 딱지를 얻을 뿐만이 아니라, 보이는 즉시'에프

킬라'의 세례를 받는 수모를 겪지 않는가? 

 

제3자인 외계인들은 그러한 예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모든 사물에 대한  편애가 너무나도 심

한 종족이다. 라는 결말을 내린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들이 가축을 사랑하고, 보호하려고 하는

방법 모두가 '위선'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개한 인류를 힘으

로 정복하기보다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인류와 섞여 지구에 정착하기 위해서, 그를 위한 사전

공작의 일환으로 인류학이라는 가치관을 만들어 낸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보고, 문화를 보고, 생활상을 보면서, 그들은 각각의 사건들

에 대해서 감탄과 분노를 자아낸다.  그들은 점점 인간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인간이란 다양한

문화를 가진 종족이지만, 상대주의적 배려심이 결여되어 있는 종족이기도 하다. 라는 확

신을 얻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은 인류에 대해서  구제불능' 이라는 일방적인 딱지를 붙이

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인류와 같은 고정관념을 가졌다면... 분명 책 속의 지구의 인류는 어

느 영화에서처럼 '침략군'에 의한 대규모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리라.     

 

실제로 인간이 보기에도 '역사'에 그려진 인간이 발자취란, 피와 살점과 파괴라는 단어를 제외하

면 표현 할 길이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인류는 과거부터 산과 악을 분류하고, 지배자와 피지배

자를 분류했으며, 문명인과 미개인의 잣대를 강자의 관점을 중심으로 재어왔다.     때문에 우리

들은 단순히 자원전쟁을 떠난 '이념적 전쟁' 을 수행한 지구 유일의 생명체라는 불명예를 달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며, 또 그러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방법으로서, 현대의 '주의론자'들이 만

들어낸 갈등에 대체로 상대주의적인 관대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한국이 개고기를 먹는 문화를 가졌다고 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미개인'은 아니

지 않는가?  이 세상에 이유없는 행위는 없다.  상대를 비난하기 이전에 한번 상대를 이해도록

하자, 아니... 그들의 전통과 사고방식을 이해하도록 노력해보도록 하자,  그러면 분명 '미개하

다' 라는 편견은 자연히 없어 질 것이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의 노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9
미셸 오스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 하나된 생각이란 있을 수 없다.  1억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1억개의 인생, 일억개의 사상

, 일억개의 욕망이 있을테니까."

 

이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이, 흔히 입버릇 처럼 말하는 그의 인생철학?(믿음)

중 하나다.  이 말은 물론,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교훈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를 조금만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면, 의외로 무궁무진한 추론거리를 가져다 준다.  자... 그럼 이

책을 중심으로, 그 가치를 적용시켜 보면 아떠할까?  내가 생각으로는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인생은 언듯 일관성 있고 '단순'해 보이지만, 의외로 수 많은 갈림길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고요하게 안정된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언듯 단순하고 일관성있는 인생을 살

아간다.  내가 속한 한국의 사회상 역시,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란 '건강' '취업' '고임금' '복지' 

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이 가능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 '단순해 보이는 사회' 속에서도, 인

간은 아둥바둥 죽을 힘을 대하서 살아가고, 때로는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절망하기도

한다.   괜히 사람이 살면서 "어찌 하고싶은 것만 하면서 살랴.." 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때와 장

소에 따라서, 또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사람은 보이지 않는 '운명'이라는 존재에 의해서 무거운

시련과, 또 행복한 행운을 부여 받는다. 

 

느닫없이 교통사고로 양 부모를 모두 잃은 사람, 길을 걷다가 우연히 고액의 지폐를 주운사람...

이 모두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의 운명에 의해서, 각자 절망과, 기쁨을 맛보는 순간을 맞

이한다.    이렇듯 사람의 인생은 착실하게 노력만으로 구어지는 존재가 아니며, 이러

한 사실은 당연히 '인생의 베테랑'인 우리들의 뇌리에 깊숙히 박힌 상식중 하나다.  그렇기에, 우

리는 사람의 삶을 각색한 '소설'의 세상속에서, 이와같은 비정한 세상사에서 조금이나마 떨어져

'휴식'을 취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해피앤딩' '훈훈한 이야기' '감성의 이야기'

등등 우리는 이러한 '힐링'의 이야기들을 현실성이 없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읽고 접하고 있

지 않은가?

 

그러나 불과 20~30년전만 해도, '읽히는 문학' 이란 그러한 부류의 것이 아니였던 모양이다.  예

를 들어'프랑스 콩쿠르상'을 수상한 이 책의 내용을 보자, 이 책의 내용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쟁후의 프랑스'의 모습을 다룬다.  때문에 소설에 등장하는 소년 아르쉐는 본질적으로 우리와

는 다른 고정관념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젊은인생을 희생한

어머니와, 가족보다 프랑스라는 국가의 내일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한 레지스탕스 영웅의 아버

지를 두었다.    때문에 그는 우리들이 평범하다고 믿는 안정된 나날을 보내지 못했고, 오히려 어

머니의 무심함과, 집을 나가 살아있는지도 모를 기억없는 아버지를 문득 떠올리는 비운한 성장

기를 보냈다.

 

그 때문인가? 덕분에 아르쉐는 친 가족인 어머니와도, 가족의 정을 나누는 따뜻한 마음이 없고,

또 어머니도 '의무의 틀'에 머무르며, 아들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아르쉐에게 어머니는 모성과 사랑의 상징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증오와 미움의 대상도 아

니다.  그에게 어머니란 어머니라는 명찰을 단 '중년의 여인' 그리고 전쟁에 의해서 인간성이무

너진 '동정받아 마땅한 자아'에 불과하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를 비꼬고, 동정하고, 무시하며

살아가지만, 의외로 그들도 '가족이라' (어떠한 '여행'의 상승효과로 인해서) 드물게 서로의 마음

을 교환하는 작은 이벤트도 벌이는 인간다움을 보여주기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은 이벤트' 일 뿐, 그들의 일생은 언제나 무감각과 무관심의 연속

이다.  그러나 그러던중 소년 아르쉐는 점차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그녀들을 통해서, 인

간의 내면의 아름다움과, 지금껏 잊었던 그리움 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자유를 누린다.  그는

그 해방된 자유행동중 하나로 '자신의 아버지'를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 당시 그에게 있어서

, 노력없이 상속받은 '상당한 규모의 공장' 의 존재, '아버지를 찾기위해 어떤 윤락녀에게 건낸

'일만 프랑'의 가치란, 어디까지나 아버지를 찾기위서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부

수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비록 가족을 버렸지만, 그 때문에 불운하고 무미건조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그는 아버지를 미

워한 적이 없다.   프랑스의 영웅, 레지스탕스의 영웅, 그렇게 아버지를 기억하는 무수한 사람들

을 만나면서, 아르쉐는 이미 아버지의 무심함을 용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의 눈앞

에 드러난 아버지의 모습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였다.  아니..정확하게 말하

자면, 그는 전쟁에 의해서 망가진 불쌍한 모습이 아니였다.    그가 만난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명성과, 재물, 그리고 변태적인 성행위에 취한 타락한 영혼 그 자체였다.

 

그동안 간직해온 마지막 인간의 감정... 그것이 철저하게 배반당하는 순간.   그 순간을 접하기

위해서, 주인공은 일만 프랑이라는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 셈이다.   해피앤딩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인공인 그가 철처하게 망가지는 배드 앤딩도 없다.    그는 분명 아버지의 존재

에 실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내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앞으로 나서지도 않았을 것

이다.   그는 그저 실망의 마음을 가슴에 안고, 무미전조한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그 어느일

이 일어나도,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내일이라는 삶이 찾아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