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
아이리스 장 지음, 윤지환 옮김 / 미다스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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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의한 파괴와 학살, 그것은 전쟁의 본질이자 인간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폭력성의 진수라

할 수 있는것이다.   이렇듯 누구를 지배하고 파괴하고 싶다는 욕망은 실제로 역사적으로 무수한

문명과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그것은 바빌론의 부유함도, 카르타고의 삼중성벽도, 로마의 거대

함도, 미국의 근대적 자유주의의(인권주의) 이념조차도 집어삼키며, 고금을 통틀어 변치않는 불

멸의 가치관으로서 지금까지 살아남고 있다.  

 

때문에 역사를 배우고 알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학살' 과 '강간'은 상당히 친숙한 단어로 다

가오는 것이다.     경멸하고 미워하고 경계해야 할 가치관이자 단어이기는 하지만, 전세계에 모

범적인 정복전쟁을 치룬 나라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절대 악' 이라며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 수 만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강간과 학살은 사회통념

상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이다.     때문에 전쟁에 의해서든 평화로운 사회에 있어서이든 그

것은 처벌과 책임을 물어애 마땅하며, 패전국이든 승전국이든 모두 그 죄에 대한 도의적 책

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난징 대학살 (저자는 난징 강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 이르는 극동아시아

에 있어서, 민감한 역사적 분쟁을 일으키는 '역사'중 하나이다.     난징 대학살의 어째서 기억

되고 있는가?  그것은 세계2차대전 즉 근대의 역사속에서 발생한 최근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일본제국에 의해서 비슷한 피해를 당했던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서로 '민족적 동질

감' 을 느끼며 그 기억(역사)를 결코 잊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사건을 포함한 많은 일본제국의 범죄는 '냉전'과 '국가의 이해관계' 라는 핑

계에 의해서 지금껏 잊혀지고 또 감추어져 왔다.    중국. 한국. 베트남에 이른 많은 피해국가가

일본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지만, 일본이 사과는 커녕 그토록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이유 또한 이

미 예전부터 강대국들에 의해서, 그 죄가 (사실상) 용서 받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피해국가

의 입장에서는 일본을 몰아세울수는 있지만, 강제 할 수가 없다.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일본은 그 강대국으로서의 힘과 영향력을 이용해서 지금껏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어

왔다.    물론 이 난징에 대한 역사도 그 많은 감추어진 역사중 하나인데,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

으로 감추었던지 이 책의 저자 또한 "일본.미국에 이르는 많은 '영향력있는 학술지와 교과서' 에

서 난징 학살에 대한 내용은 극히 빈약하며,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는데도 상당한 노력을

했을 뿐 만이 아니라, 많은 일본 우익들에 의해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라면서 그 솔직

한 심정을 내비친다. 

 

그러나 결국 저자는 '난징 대학살(강간)에 대한 하나의 저서를 완성시킨다.     이 책 속에는 역사

적으로 일어난 난징 대학살의 실체, 일본제국이 학살을 해야만 했던 이유와, 당시 일본인의 사회

와 그 민족적 분위기에 대한 분석, 난징 대학살의 비극 속에서, 인간으로서 자애감을 가지고 학

살을 막았던 많은 외국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일본이 패전함으로

서 그에 어떠한 책임을 졌고, 앞으로 극동아시아의 선진국으로서 어떠한 행동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저자의 주장을 담았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의 내용은 (그 내용에 대한 참혹함에 비위가 상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 주장이 합당하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책이 출판된 시

점(1997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일본은 이 책에 대한 모든 내용을 부정한다.

아니 그에 머무르지 않고, 이 책에 대한 저자와, 난징에 대한 역사를 반박하는 서적을 베스트 셀

러로 만들고, 심지어 일부 우익들은 저자(아이리스 장)를 정신적으로 약회시킬 정도로 집요한 인

신공격을 퍼부었다.    그렇기에 결국 그녀는 스스로 자살을 했고, 덩달아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어버렸다.     이에 나는 생각한다  "진실을 되찾는 행동이 어째서 전도유망한 저널리스

트를 자살로 몰고 가게 했는가?"  역시 역사는 강자의 편에 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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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교회 잔혹사
옥성호 지음 / 박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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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허구이지만, 100%진실을 담고있는 책.    저자는 스스로 이 책의 내용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 본연의 내용 덕분에 크게 2가지의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하나는

'정작 본인이 종교에 몸담은 목사이면서도, 한국 기독교의 단점을 폭로하고, 그 반성을 촉구

하고 있다' 라는 긍정적인 반응과,  '누워서 침뱉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작가가 스스로 인기를 얻

으려는 쇼다' '한국 기독교의 명예를 회손하려는 악의적인 시도이다.' 라는 교인들의 (어쩌면 당

연한것...) 격렬한 분노이다.

 

이처럼 이 책은 위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교회와 그 교인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불편

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곳에는 하느님이 없다" 라는 글귀처럼, 소설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초

대형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성직' 과는 다른 '기업'의 모습이며, 주인공이자, 등장인물

중 하나인 장세기 역시, 점점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어, 교인들을 이용하고, 하느님을 이용하기

까지 이르며, 오로지 돈과 직책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타락한 성직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때문에 해당종교와 전혀 인연이 없는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의 이야기는 "성직 또한 인간세상에

속한 하나의 직업에 불과하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로지 성장과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

는 공동체의 움직임과 더불어, 상사와 직원사이의 불화가 결국 "절이 싫으면 떠나라" 라는 막장

에 이르게 되는 현실... 그것이 오늘날의 직장에서 심심치 않게 보여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이

에 저자는 말한다.  "성직이라고 다를 줄 알았는가?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라도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장세기는 못 배우고, 또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변변한 자격증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서초교회에 오랜기간 헌신하고, 성직을 향한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소소하지만 서초교회의 작은 직책(청년부)를 맡는 행복과 가

난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서초교회의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그는 점차 초

심을 유지하며, 성직의 길을  걷지 못하게 된다.  

 

서초교회는 어느덧 목사들에게 스펙을 요구하고, 글로벌 포교를 위한 지식을 요구하고, 언론과,

정치세력을 이용한 로비를 통해서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 것을 최우선사항으로 삼으면서, 자연스

럽게 목사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때문에 신앙심을 제외하면 아무런 재

능도 없는 장세기에게 있어서, 지금의 서초교회는 매우 불안하고 불편한 존재로 다가오지만, 그

는 먹여살릴 가족과, 한국의 초대형 교회라는 간판의 매력에 굴복해, 어느덧 스스로 '글로벌

미션"에 최선을 다하는 서초교회의 충복이 된다.

 

어느덧 서초교회는 하나님보다 실적을, 신앙심보다는 신도들과 헌금의 액수를 중요하게 생각하

는 초대형(기업형) 교회로 변질되었고, 또한 대표장로의 도덕적 문제와, 불투명한 자금운용 등으

로 세상사람들의 욕을 먹는 교회가 되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세상의 시선을 '사탄의 시험' '악마

의 시기심' "이럴때일 수록 변치않는 신앙심이 필요하다" 라는 교구적 슬로건을 이용해서 신도들

을 조종하고, 세뇌시킨다.  

 

'하나님보다 교회가 우선인 교회'  과거의 장세기였다면 스스로 그 서초교회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 가정, 사회적 신분, 수입원에 대한 당연한 미련이 결국 그를 강자에게 굴복하면서

사는 '인간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초교회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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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 언젠가 어디선가 당신과 마주친 사랑
남미영 지음 / 김영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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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연인들도, 그리고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언제나 이성과 지성을 뛰어넘는 제일의 가치관을 가질 때가 있다.      나

의 어린시절 남.녀와의 사랑이란 그야말로 플라토닉 러브라는 단어에 걸맞는 순진함과 두근거림

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세상이 개방되고, 습득하는 정보가 풍부해 지

면서 이제 사랑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사랑의 방식'은 사람 각각의 가치관과 믿음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근래의 드라마나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필요성 때

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믿음'보다는 '조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한 과거 플라

토닉에 대한 이미지도 그야말로 가상의 이야기, '환상의 범주'로 밀려난지 오래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오늘의 세상은 '소나기'를 읽은 감상에 대해서 "앞으로는 좀더 건강한 여자를 사

귀어야 겠다" 라는 답변 따위가 등장하는 시대인 것이다.    로멘스도 환상도 없는 현실적인 세

상... 그야말로 암울하지 않는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

고, 남.녀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사랑을 이어간다.      그것을 생각하면, 사람들의 D.N.

A속에는 이미 사랑에 대한 프로그램이 깔여있다고 생각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사랑이란 자

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인간의 감정이라고도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많은 작가들

과 이야기꾼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회제로 삼고, 또 역사적으로 아름다운 세기의 명작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책의 세상에는 사랑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가문을 버리고 부귀영화를 버리는 로멘티즘과, 강

철의 전함처럼 자신의 믿음을 밀고 나가는 에고이즘, 암사마귀처럼 타인을 파멸시키면서 까지

자신만의 사랑을 고집하는 나르시즘과 마지막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남을 사랑하고 헌신

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마조히즘에 이르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이 등장한다.     때문에 사람들

은 로미오와 줄리엣, 소나기, 오만과 편견, 춘양전, 웨대한 개츠비, 안나 카레리나 같은 수많은

작품들과 그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사랑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에 감동하고,

증오하고 동경하게 되면서, 어느덧 자신의 인생에서의 사랑의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정의를 내

리게 되는 것이다.

 

꿈꾸고, 동경하고, 분노하는 도중에 어느덧 사람들은 그 사랑에 대해서 자신만의 주관을 가진다.

그렇기에 사랑에 대한 책을 접한다는 것은 본격적인 사랑을 이루기 전 행하는 연습이자, 보다 매

끄럽고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기 위한 나침반을 가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자가 우려한 바 그

대로 현대의 사람들은 그러한 문학의 세계보다 보다 현실적이고, 스마트하다는 거짓의 가면을

쓴 대중매체에 더욱 더 관심을 가진다.      이제 우리들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사람의 조건을

본다.   1등급부터, 3등급까지의 계급을 나누는 결혼 정보회사와 같이, 사람들은 이제 상대방의

재산, 직업, 외모에 이르는 다양한 조건을 종합해서 타인에 대한 점수를 매기고 사랑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뿐인가? 과학자들 또한 '사랑의 효과는 최고 3년' 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또 사랑의 감

정이란 인체에 분비되는 흥분제의 영향이라며, 과학이라는 첨단 지식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정

의를 내리기에 열심히다.      때문에 이제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가치관은 더이상 과거처럼 아름

다운 낭만과 환상의 이미지를 지니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에 대해서 일종의 분노와 한

탄과 같은 그의 느낌을 매우 적나라 하게 써내려 간다.     "스스로 사랑의 감정을 가상과 문학의 

세계로 밀어낸 인간이 얼마나 아깝고 어리석은 일을 벌였는가?" 하는 주장과 함께 말이다.

 

열정은 시험과 승부에만 사용되는 가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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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정도전
주치호 지음 / 씽크뱅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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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드라마 정도전의 영향인지... 출판시장에서도 꾸준히 인물 정도전에 대한 서적들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나에게 있어서도 이 책은 대략 3~4번째로 접하는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인데, 그 다양한 서적들의 내용을 하나하나 접한 결과, 아무래도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에 대

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 때문인지, 책들의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의 이야기도 다른 책들과 비슷한 내용과,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썩어빠진 고

려, 개혁을 꿈꾸는 선비, 세상에 둘도 없는 동맹자, 결국 같은 길을 갈 수 없었던 친우와의 이별

등등... 위인 정도전이 꿈꾸고, 원하고, 행동했던 뭐든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짜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뜻밖에 다른 책들과 비교되는차이

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여느 책들이 조선을 건국하는 '정도전' 에서 그 내용이 멈

추는데 비해, 이 책은 조선 이후 '왕자의 난'으로 세상을 등지는 정도전의 최후까지의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데 있다.      

 

때문에 나는 이러한 내용을 읽으면서, 내심 그 이야기에 신선함을 느끼면서도, "어째서 다른 저

자들은 이 책의 저자처럼 정도전 에 대한 그 시작과 끝의 이야기를 고르란히 전하고 있지 않았

는가?"  하는 가벼운 의문을 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의문은 이 책의 후기를 읽음으로서 나름

대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에게 있어, 그 해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도 그럴것

이 그 해답이라는게 "영웅 정도전을 정의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라는 작자들의 주관적

입장에 의한 결과의 탓이 크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은 죽음을 앞두고 '목숨을 구걸하였

다고 한다.'   실제로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에게 "목숨을 부지 할 길은 없는가?" 라고 물으며 목

숨을 구걸하는 정도전의 모습은 고결했지만, 혁명적인 이미지를 가진 정도전의 이미지에 별로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다수의 작가들은 그 정도전의 최후를 일부로 피한 것

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와는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일단 역사적 사실을

전한 이후,  "내가 상상하는 인물 정도전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라는 이유를 들어, 내용의

일부를 그야말로 각색했다.  

 

때문에 이 책의 정도전은 저자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고결한 영웅 정도전' 에 걸맞는 품

격과 인품을 지닌다.     그러나 나는 그 내용이 오히려 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일종의 불쾌

감을 줄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은 분명히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이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절대적인 왕권의 강화를 반대한 민본정치를 주장했다.   그러나 때문

에 저자는 그것을 예로들며, (앞서 언급했지만) 그야말로 인물 정도전을 영웅 정도전으로 만

들어 버린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정도전은 너무나도 고결하다, 그리고 저자는 그

고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품과 인망을 너무나도 쉽

게 깎아 내려간다.    저자에게 있어서, 신돈은 말이 필요없는 요승, 정몽주는 우직하지만 미래

를 보지 못하는 인물, 최영은 충정만을 바칠 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인물에 지나지 않

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묘하게 그 내용에 불만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반도의 3

대 성군으로서 광계토대왕, 세종대왕, 박정희 대통령을 꼽은 저자의 주장에도 쉽게 공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책을 통해서 우리는 무

엇을 얻고, 또 무엇을 버리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을 읽는 독자만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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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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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42년 출판된 소설 이방인은 분명한 고전이다.    때문에 민0사와 같은 고전문학을 중점적으로

출판하는 출판사나 이러한 고전을 '염가판'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다른 출판사의 서적들을 포함

해 다양한 버전의 '이방인'이 존재하는데, 특히 이 책은 그러한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제대

로 된 번역'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독자들의 호주머니를 공략하고 있다.       실제로 외국어를 이

해 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그 편의를 도와주는 '번역'은 그 자체의 질이 매우 중요한데, 이

는 책을 읽는 독자에게 있어서 '저질 번역'의 존재는 생각지도 못할 낭패감을 가져다 주기 때문

이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위의 '저질 번역'으로 인해서 많은 피해를 본 사람 중 하나이다.    한글은

한글이나, 도저히 글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책... 그야말로 그러한 그낌은 과거 대학생

시절 형법.소송법을 공부할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답답함을 전해주는 것이였다.    그렇기에 매

끄럽고 쉽게 쉽게 넘어가는 책의 존재를 만났을때 개인적으로 얼마나 반가웠던지! 이에 이 책의

이방인은 분명히 과거에 없었던 '소화가 잘되는' 품질을 가지고 있다.

 

과거 다른 출판사의 이방인을 보았을때, 나는 분명히 이 비방인의 매력(내용)을 오해했다.  말하

자면 나는 우선적으로 이 작품의 짧은 분량에 실망했고, 또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뫼르소의

성격을 바로보지 못한 것이다.

 

     

과거 내가 이해한 뫼르소는 매사 모든 일에 무감각하고, 삶에 의미를 두지 않는 '죽은 인물'에 불

과 했다.   그렇기에 그는 의미없이 일을하고, 의미없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최종적으로는

의미없이 사람을 쏘아죽였다.   때문에 뫼르소는 검사와 재판장이 어째서 권총을 4발이나 쏘았

는가? 하는 질문에도 무덤덤했고, 최종적으로 재판장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  "나의 형 집행날 사람이나 많이 왔으면 좋겠다" 라는 태평한 생각만을 품는다.      세상에 3차

원의 인간이 존재한다지만, 과연 세상에 그러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아니... 도대체

소설가 카뮈는 이러한 인간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나는 과거 이

러한 이방인을 읽으면서, 그러한 감상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고 나서, 이 책을 들여다 보니, 나의 그러한 과거의 감상은 그야말로, 번역

이 가져다준 오해가 무엇보다 컸다는것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나는 현재 이 책의 역자의 주장

과 같이, 과거의 '선배'들이 마음대로 고치고, 의역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가짜 이방인을 접했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그렇다면 실제 카뮈의 이방인은 어떠한 내용일까?"  라

는 의문이 조금씩 고개를 쳐든다.  자...과연 진정한 이방인은 어떠한 내용을 품고있는가? 

 

이책에서 이해한 이방인은 보다 인간의 내면에 대한 복잡한 내용이 더욱 돋보인다.   특히 주인

공 뫼르소는 현실에 무감각외계인? 이 아니라, 단순히 표현이 서투른 내성적인 인간

이라는 케릭터로 인식되면서, 보다 소설의 내용이 현실과 맞닿은 것이 큰 매력이라 하

겠다.    이 때문에 그를 둘러싼 '사건' 과 '재판' 역시 그 현실성을 더해간다.     뫼르소는 싸움

에 말려들어 사람을 쏘아 죽었다.   이에 검사와 재판장은 그가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였는가?'

 아니면 '그가 본래부터 살인자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쏘았는가?' 하는 판단을 위해서 뫼르소

에 대한 심리를 계속한다. 

 

재판도중 검사와. 변호사의 격렬한 공방전이 오가고, 뫼르소의 혼약자의 증언이 오가면서, 뫼르

소는 겉으로 드러내며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앞으로의 현실에 대하여 공포와 비슷한 마음

을 품었다.   그러나 말그대로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기에, 재판은 결국 그를 차디찬 영혼을 가진

살인자라는 판결을 내리고 만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뫼르소는 그 판결을 받아들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독

자들은 분명히 그 판결에 대해서 인정하기 보다는 그 판결에 대하여 '분노'의 감정을 품을 것이

라 장담한다.      그야말로 이 소설의 재판은 현대의 '재판'과 비교했을때,  상당한 종교적 편견

이 그 사형 판결과 직결되었기 떄문이다.     이처럼 사람이 위기에 빠졌을때 오늘날의 인

은 그 상대의 완전한 몰락을 바라는 악마의 이면을 지니고 있다. ​   실제로 뫼르소가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을때, 그를 둘러싼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차디찬 영혼을 가진 사람'이

라며 그의 유죄를 주장한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 같이 밤을 지새운 수위, 양로원의

어르신들, 심지어 그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했던 마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의 유죄를

주장한 것이다.   때문에 뫼르소가 항소를 하지않고 모든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

이 든다.       사회와 대인관계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유죄'라고 인정받은 인간... 그렇기에 스

스로 무죄를 믿어봐야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떄문에 그는 오기로라도 스스로 사형대에 오

를 결심을 한 것이 아닐까?  

 

"나를 죽인 살인자는 바로 사회와 너희들이다!" 라는 그만의 감정을 품은 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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