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스의 과학수사 - 홈스의 시선이 머무는 현장에는 과학이 따라온다
스튜어트 로스 지음, 박지웅 옮김 / 하이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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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스'는 아직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고 최고의 탐정 중에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홈스를 읽다보면 어떻게 관찰로도 추리가 가능한지 궁금할 때가 많다. <셜록 홈스의 과학수사>에서는 홈스가 활동한 시기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 상활을 소개하고 홈스의 수사 기법과 추리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셜록 홈스'를 창조해 낸 작가 코난 도일은 의사 교육을 받은 덕분에 홈스를 쓰는 동안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추리에는 세 가지 유형으로 시작한다. 하나의 진술이나 가설에서 결론을 끌어내는 작업인 연역법, 연역법과 반대로 증명할 수 있는 관찰을 기반으로 이론이나 결론을 도출하는 귀납법이 있다. 귀추법은 하나 이상의 관찰한 사실로 시작한다. 여기서 관찰 내용을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가정을 추론한다. 이런 세 가지 추리법을 기반으로 홈스의 추리는 시작된다. 셜록 홈스의 연역법이라고 부르는 추리 방식이 사실은 귀납법이며 대부분은 귀추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홈스 소설이 등장한 1900년대에는 과학 기술이 지금과 비교해도 발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크게 없었으며 사람을 정확하게 구별하기 어려웠다. 용의자와 범죄자의 사진을 찌는 머그샷 제도는 184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외모는 변장하거나 나이가 들면 달라지는 한계가 있었다. 1890년 무렵 '바스커빌 가의 개'라는 작품에서 신원 식별 방식인 지문 감식법이 탄생하게 된다. 지문은 같은 사람이 있을 확률이 거의 없으므로 지문 감식 결과는 정확성이 무척 높다. 지문을 신분 확인에 사용한 역사는 길고 다소 번잡하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필적은 특히 펜과 잉크로 쓴 글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필적 연구는 글씨를 대조하여 필자를 특징하는 신뢰할 수 있는 기술과 사람의 성별이나 심리 상태, 성격을 추리하는 필적학이 있다. 홈스도 이 필적학을 알고 있었고 '네 사람의 서명'이라는 소설에서도 등장한다. 필적 분석이외에도 타이핑이나 전보, 전화, 암호학 등도 수사에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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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알지만 당신은 모르는 30가지 - 돈, 성공 닥치고 지식부터 쌓자
이리앨 지음 / Storehouse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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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에 관한 공식 같은 것들이 있다. 성공한 멘토를 따라하거나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하는 등의 공식과도 같은 법칙이 있다. 이런 법칙을 따른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알지만 당신은 모르는 30가지>에서는 성공을 이끄는 3가지 법칙을 알려준다.


성공의 길은 제각각 다르지만 성공을 이끄는 선택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가끔 급하고 중요한 일을 하지 않거나 뒤로 미루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 일을 끝낼 자신이 없거나 잘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런 습관을 고쳐야 성공할 수 있다. 일을 우선순위별로 정리만 잘해도 인생이 정리되고 바뀔 수 있다.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고 일에 데드라인을 설정하는 것이다. 콘테스트나 대회에 참가하고 연중행사나 휴일에 엮어서 데드라인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면 페널티를 적용한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다보면 미루는 습관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일을 미루는 시간을 계산해 보면 1년이나 10년 단위로 계산하면 엄청난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미루는 원인을 파악하고 원인을 공략할 명확한 공략법을 설정하고 단기적인 유혹을 없애는 것이다. 멘토를 찾아야 하는 경우 주위에 없다면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비법을 자신의 방식으로 전환시킨다. 미국의 수백 억 자산가인 게리 바이너척은 자수성가 모델이다. 러시아에서 8명의 대가족이 이민와 뉴욕의 가난한 동네의 단칸방에서 살았다. 14살 때부터 가족이 운영하는 와인 소매접에 종사한 경력을 바탕으로 TV 쇼에도 출연했다. 미국에서의 삶은 이민자, 사업가로서 시작했지만 어릴 적부터 죽기 살기로 사업에 임하는 집념이나 사업 감각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기존에 운영하던 와인 사업을 와인 라이브러리로 브랜딩하고 수백만 달러 매출을 내는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다. 금융인인 레이 달리오는 인생의 원칙을 가지고 성공했다. 그 인생 원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목표나 문제 봉착, 진단, 설계, 실행의 과정을 거쳐 원하는 것을 얻는다. 또 극단적으로 오픈 마인드가 되고 사람들이 어떤 문화에 길들었는지 파악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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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권력의 비밀, 지도력(地圖力) - 지도를 읽으면 부와 권력의 미래가 보인다
김이재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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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면 필수품이 '지도'였었다. 지도를 펼쳐보며 어디를 갈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등을 미리 체크하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이런 지도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손 안에 들어가는 스마트폰에는 또다른 세상이 있고 그 속에 지도까지 있어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어쩌면 조만간 종이지도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적지만 보여주는 스마트폰 지도보다 목적지로 가는 길과 주변을 보여주는 종이지도가 장점이 더 많다. 수천 년 지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지만 우리는 지도의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부와 권력의 비밀, 지도력>에서는 지도가 부와 권력, 미래까지도 보여준다고 한다. 무역과 항해술에 능했고 개척자 정신이 충만했던 그리스 사람들은 늘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지역 정보를 수집해 지도력을 길렀다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는 다양한 지리 정보가 가득 담겨 있다. 이 책들이 문학책들이라고 알고 있지만 당시 세계에 대한 정보가 담긴 지리 교양서이기도 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듯 로마제국은 그리스와 페니키아가 확장해 놓은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도로는 서양 토목기술의 최대 걸작품이고 그 길로 로마와 세계를 연결하고 발달된 문명과 라이프스타일을 전파했던 것이다. 지도에는 한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 종교와 문화가 다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문화에서도 지도 제작이 활발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과 세계지도가 아랍어로 번역되어 탐험가와 지리학자들이 세계를 누볐다.  

 

 

일찍부터 세계지도를 그렸던 나라 중에 고려와 조선이 있었다. 고려는 인삼과 도자기를 수출하는 등 대외 무역에 개방적이었고 전 세계의 교통과 물류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글로벌 무역을 주도하던 원나라로부터 세계지도와 해외 지역 정보를 입수했다. 조선 초기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 일본, 인도, 중동뿐만 아니라 아프리카까지 표시된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무역을 위한 지도가 제작되어 무역이 활발해지고 우리의 생활도 많은 변화를 하게 된다. 그런데 지도는 이런 역할뿐 아니라 병의 원인도 찾을 수 있었다. 1854년 영국은 콜레라 환자가 급증해 하루에 500명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콜레라의 원인이 나쁜 공기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런던은 악취가 진동할 정도로 대기 오염이 심각했다. 영국 의사 스노는 지리적 상상력을 발휘해 콜레라 환자 발생 지역을 지도에 표시하고 환자 수를 막대 그래프로 표시해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을 찾아내게 된다. 식수 펌프 주변에 가장 많은 환자가 있었고 오염된 물을 통해 전염되는 수인성 전염병인 것을 밝혀낸다. 지도는 이렇게 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이용되고 권력과 부까지도 모두 가질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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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 - 공주에 새겨진 조선 역사 이야기 공주가 좋다 2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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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은 조선시대 각 도에 관찰사가 업무를 집행하고 거처하는 관청으로 전국에 모두 8곳에 감영이 있었다. 충청도의 감영은 공주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감영은 현대의 '도청'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공주가 감영지가 되었을까? 우선 공주의 역사부터 알아보자. 공주는 백제의 수도로 알려져있다. 백제 동성왕의 뒤를 이어 강국의 주인공이 된 무령왕은 왕위에 오르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백제의 국경을 굳건히 지켰다. 무령왕이 죽자 성왕이 그 뒤를 이어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하고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다. 신라의 배신으로 백제는 성왕을 비롯해 많은 군사를 잃고 참패를 당한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무너뜨린 후 신라는 고구려까지 무너뜨리고 삼국통일을 완성한다. 정식 명칭이 공주가 된 것은 후삼국 통일을 이루고 전국에 걸쳐 기틀을 다질 무렵이었다. 고려가 거란을 물리치고 현종이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에 들러 머물게 된다. 시까지 남긴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공주는 여전히 호서의 요지로 꼽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국가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각 도의 감영을 재배치하였는데 이때 충청감영을 공주로 옮겼다.


호남 교통의 요지로 공주는 명성이 높았는데 육로를 통해 한양과 삼남을 오가고 물자의 교류 중심이었기에 일찍부터 호서의 중심지 역할을 한 것이다. 공주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본 이는 유성룡이었다. 공주는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가 병영을 설치한 곳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공주는 교통의 요지라는 장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군사요충지로서도 인정받는 곳이다. 조선의 감영은 군주의 명령을 각 지방 백성에게 전달하고 교화를 실행하는 것이 기본 임무였다. 감사 혹은 관찰사는 관할 지역 안의 수령들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실행하는지 감찰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또 농사를 권장하고 인재를 기르기도 했는데 조선은 농업을 경제의 근본으로 삼은 나라였기에 농업을 중히 여겨 풍년을 기원했다. 나라 경제의 근본은 농업이고 조선의 이념과 정치는 성리학에 기초를 둔 나라였다. 그 바탕이 되는 교육제도를 정비하고 가장 기초적인 교육기관인 서당이나 학당이나 향교에 유학을 보급하고 교화했다. 관찰사가 도내 각 고을 수령이 자기 지역 향교를 잘 관리하고 있는지 평가하고 향교의 교수를 감독하여 교생들의 일과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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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 - 웅진백제 발굴 이야기 공주가 좋다 1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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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석장리'는 지금의 충남 공주 석장리동에 있는 구석시 시대의 유적지이다. 공주라는 도시는 역사문화의 도시로 삼국시대의 백제 웅진이라 불리기도 했다. 한국 고고학에서 한획을 긋는 발굴이 두 건이 있는데 석장리와 무령왕릉 발굴이 그것이라 한다. 먼저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은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한반도에는 구석기 문화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1964년 늦은 봄 역사책에 나오는 뗀석기가 한반도에서도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뗀석기는 구석기시대의 도구로 금강변의 한 언덕에서 4점의 뗀석기와 10여 점의 석기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이 석장리 유적 발굴은 당시까지 학계에 팽배해 있던 가설 '식민사관'을 단박에 타파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수촌리 유적 발굴에서는 지역공동체 내에서 독자적이고 차별적인 지위를 인정받은 지방 세력가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물품을 학계에서는 위세품이라 하는데 이런 위세품들은 금동관과 금동신발 외에도 많이 발견되었다. 정교한 금귀걸이나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장식품들 등도 출토했고 백제시대의 토기들도 다양하게 발굴했다.



백제의 중흥을 이끈 무령왕의 고분은 고고학의 보물창고로 불린다. 무덤의 축조 양식과 사용된 재료는 당시 기술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무덤 속의 껴묻거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누렸던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사회적 배경, 그 나라의 문화, 더 나아가 외국과 교류 관계까지도 유추할 수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일본인 교사가 공주에 거주하며 개인적으로 백제의 유구와 유물을 다양하게 조사, 연구했다.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송산리 6호분에 들어갔고 자신이 첫 발견자라고 자신의 책에도 기술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임의로 들어가서 조사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약 40년 후 완벽하게 보존된 무령왕릉이 우리 손으로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 역사의 진면모와 만나는 우리 고고학과 역사학이 가장 빛나는 성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971년 송산리 고분군의 6호분 뒤쪽에 배수로 공사를 하다 발견된 것이 무령왕릉이다. 아무런 훼손의 흔적이 없는 무덤이 나타났다. 당시만 해도 체계적인 발굴조사 프로세스가 정립되지 않아 졸속으로 진행되어 아쉬움을 남겼지만 무령왕릉은 발굴 그 자체로 한국의 고고학계에 큰 의미를 남긴다.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시의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군의 관불리 유적과 부소산성 등 총 8개로 구성된 연속 유산으로 유네스코세계역사지구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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