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림, 조선의 586 - 그들은 나라를 어떻게 바꿨나?
유성운 지음 / 이다미디어 / 2021년 6월
평점 :
조선의 사림은 여말선초 무렵 조선의 건국에 반대해 지방으로 낙향한 지식인들의 후예이다. 중소 지주 출신인 이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지역에서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고, 조선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로 진출한다. 성리학에 대한 강력한 실천 의지를 가지고 '소학'을 중시했다. 그런데 당시 훈구 세력과 충동해 네 차례 사화를 입으며 타겻을 입었지만 선조 때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조선을 세운 세력도, 훈구 세력도, 사림 세력도 모두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이다. 하지만 조선 초기의 지도층이 성리학을 국가 통치에 유용한 도구로 생각했다면, 사림은 성리학이 사회 밑바닥까지 스며들어 모든 곳에서 적용되는 절대적 이념으로 생각했다.
조선의 사림은 1519년 11월의 밤, 기묘사화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중종 14년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는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들을 숙청하게 된다. 당시 중종의 오른팔이자 개혁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던 조광조와 그 세력이 하룻밤에 몰락했다. 조광조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은 사림계의 기대주였다. 20대에 진사 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할 때부터 학문 수준이 높다는 평이 자자했다. 조광조를 가르친 김굉필은 우모사화의 시발점이 된 김종직의 제자였다. 조광조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중종 역시 조광조를 신뢰했다. 사림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결집했고 훗날 기묘사화로 숙청되기에 이들을 기묘사림이라고 부르게 된다. 조광조는 현량과를 설치했는데 이는 기존 인재 등용 방식을 전면 부정한 것으로 가묘사림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정책이다. 사림이 장악해야 할 거점으로 삼은 것은 삼사였다. 성리학적 기풍을 진작하고 새로운 정치를 열고자 했던 성종은 삼사를 적극 후원했고 사림은 삼사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현량과는 추천제로 무엇오바도 과정과 결과의 불공정 가능성이 지적됐다. 그럼에도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줬고 현량과가 실시됐다. 현량과에 대한 세간에서 지적했던 불공정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고 현량과에 합격한 28명 중 절반이 당시 청요직이라 불린 대간이나 홍문관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뜻이 같으면 천거를 하고 뜻이 다르면 배척을 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토지 문제로 세워진 나리이다.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에 반발하며 이를 바로잡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조선 공신들이 특권을 향유하면서 관료에게 나누어줄 토지가 바닥난다. 유희춘이라는 인물은 조선 중종부터 선조 때의 인물이다. 문관에 급제한 관료지만 을사사화에 연류돼 20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선대부터 이어온 토지와 노비를 빼앗기고 가족들은 친척의 도움으로 겨우 연명하게 된다. 사림파가 복권되면서 유희춘은 유배에서 풀려나 벼슬에 오르지 이재에 집착한다. 한번에 집을 4채나 짔는데 모든 것을 공공 수단으로 해결해 지역 수령과 군인들, 승려까지 동원해 대규모 주택 공사에 들어갔다. 유희춘의 첩과 누이까지 집을 지었고 남의 녹패를 가져다가 쌀을 수령하는 꼼수까지 부린다. 이런 부도덕에도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던 것은 사림파 출신 중진이었기 때문이다. 권세가 막강해지자 지난날의 보상을 받기 위해 엄청난 부를 축재하고 국고를 횡령하는 일은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