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인터내셔널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9j1873a


세인트 마틴 홀 (1850) By Numerous Engravings * 인터내셔널 창립총회가 열린 장소.






제1인터내셔널은 전문직 종사자, 공장 노동자, 일부 이데올로그, 그리고 한두 명의 수상쩍은 모험가들로 구성된 기묘한 혼합체였는데, 이들 가운데 지성,혁명의 경험, 의지력 면에서 마르크스에 견줄 만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인터내셔널은 그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지만 수입에는 보탬이 되지 못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철도회사의 접수원 자리에 지원했지만 다 헤진 옷과 위협적인 외모가 고용주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을 리없다. 더욱이 그의 지원서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접수조차 되지 못했다. - 9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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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ish Museum Library (2005) By http://www.cgpgrey.com, CC BY 2.0







당시 런던은 독일인 망명자들의 집합소였다. 그들은 대개 해체된 혁명위원회들의 구성원들, 추방된 시인과 지식인들, 혁명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영국에 정착해 있던 모호한 급진주의적 성향의 직공들이었다.

마르크스는 매일같이 대영박물관의 열람실에 갔다. 대개 오전 9시에 가서 열람실이 문을 닫는 오후 7시까지 있었다. 귀가 후에는 밤늦게까지 줄담배를 피우며 연구에 몰두했다. - 8 런던에서의 망명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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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과 1848년의 세계 https://ws.or.kr/article/20064






『공산당 선언』의 시작과 끝부분은 요약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잘한 요약도 원문이 담고 있는 본질적 특징과 힘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괴적인 선전의 도구로서 『공산당 선언』에 필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산당 선언』이 후속 세대들에게 미친 지대한 영향은 종교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견줄 데가 없다. 마르크스는 이 문건 하나만으로도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 18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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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사진가 다이앤 아버스에 관하여 읽고 있었다.



A young man in curlers at home on West 20th Street, 1966 - Diane Arbus - WikiArt.org








"내가 묘사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이 모든 게 조금씩 이야기하고 있는 바다. 다른 사람의 비극이 자신의 비극과는 다르다는 것."

"나는 좀 두 얼굴의 인간 같다. … 그건 정말로 뭐랄까 괴로운 일이다. 나는 그냥 너무 나이스하다. 모든 게 우와아아이다. 내 입으로 ‘멋져요’라는 말을 하면… 그건 정말 진심으로 멋지다고 말한 거다. 그건 내가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뜻이 아니다. 내 아이들이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뜻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키스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게 놀랍도록, 부정할 수 없도록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행에서 면제받아 괴로워하느니 세상의 역경을 만나겠다는 아버스의 결심이 손택이 주장했듯이 나이브하건 아니건, 아버스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기형들을 늘 "왕국"과 "귀족"과 결부시켰다.

그녀는 사진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치료되어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고통을 택했다.

"내가 찍지 않았다면 아무도 보지 않았을 것들이 있다고 나는 정말로 믿는다."

〈웨스트 20번가 집에서 컬을 말고 있는 젊은이, 뉴욕〉(1966)에서 머리카락의 컬, 밀어버린 눈썹 위에 진하게 그린 선, 부드럽게 열린 입술이 시사하는 여성성의 가면은 턱에 희미하게 보이는 수염 자국과 우아하게 담배를 들고 있는 너무 큰 손과 굵은 손가락, 매니큐어를 한 손톱에 의해 거짓임이 드러난다. 젊은이의 눈은 카메라를 대담하게 바라보며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와 자신이 만드는 이미지 사이의 틈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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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오늘 포스팅한 '여성철학자 에디트 슈타인' https://blog.aladin.co.kr/790598133/15044921


에디트 슈타인 Edith Stein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4426a


'처음 읽는 여성 철학사(원제 The Philosopher Queens: The lives and legacies of philosophy's unsung women)'로부터 발췌한다.

Philosophia (personification of philosophy), 1502 - Albrecht Durer - WikiArt.org


올해 출간된 '질문하는 여자 - 삶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지적 여행'은 '처음 읽는 여성 철학사'와 동일한 책으로 보인다.






후설의 조교로서 슈타인의 주 업무는 시간의 현상학에 관한 후설의 기록물을 출판 가능한 원고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슈타인은 편집자에게 기대하는 일반적인 역할 이상의 일을 해냈다. 후설은 초고를 따로 챙겨 주지도 않았고, 원고를 고쳐 쓰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슈타인은 홀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 자료들을 모아 톤을 맞추고 순서를 재배치해 일관성 있는 철학 서술을 구성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가 초고를 만든 것이다.

슈타인은 조교 계약이 끝날 즈음 장래를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하빌리타치온(독일의 대학교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싶었으나, 후설이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일반 대학을 떠나 가톨릭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재직했던 학교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1928년 후설은 슈타인이 작업한 원고를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On the Phenomenology of the Consciousness of Internal Time)》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저작권은 후설에게 있었고, 이른바 편집자는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가 출간을 위해 원고를 준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겠지만, 원고의 상당 부분은 슈타인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든 것이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이 한마디만 끼워놓았을 뿐이다. [슈타인이 후설의 강의 속기록을 원고로 옮겨놓았다.]

슈타인의 사례는 철학계에서 여성의 현실, 곧 업적을 저평가하거나 완전히 무시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제이 헤털리 (Jae Hetter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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