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단편전집 2권 '배반의 여름'에 두번째로 실린 '저렇게 많이!'는 197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영문과 졸업생이 나오는 이 소설의 제목은 엘리엇의 그 유명한 '황무지' 속 시구와 겹친다. (박완서가 젊은 시절 625 전쟁 때 미군 PX에서 일했다는 전기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박완서는 국문과를 잠시 다녔지만 취직 잘 되라고 영문과 학생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황무지 중 첫 편 '죽은 자의 매장'의 일부로서, 내게 있는 황동규 번역 시집(구판)에는: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음이 망쳤다고 나는 생각도 못했다(so many, I had not thought death had undone so many)." 검색하니 "저렇게 많이, 죽음이 저렇게 많은 사람을 해치웠다고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역문도 있다. 


엘리엇이 황무지를 발표한 해는 1922년,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에 끝난다. 엘리엇과 박완서, 참혹한 전쟁을 겪은 그들에게 죽음이란 그토록 많고 또 많았다. 그리고 전후의 황무지는 미래의 후세에 유산으로 남았다. 


시 원문에 없는 '저렇게 많이!'의 느낌표를 주목한다. 그것은 사람떼가 망령떼로 보인 그녀 자신의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박완서의 작가정신을 '나만 억울하다!'로, 느낌표를 넣어 표현한다! "한번 지나가버린 것은 뒤돌아볼 수 없다. 반복이 없기에 그러하다. 제자리에 한시도 머물 수 없음이 근대의 속성이라면 소설 또한 이 변화에 응할 수밖에 없다. 그 끝에 ‘나만 억울하다!’가 놓이며 이 역시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다." (출처: 김윤식, '내가 읽은 박완서')


사진: UnsplashJordan Whitt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눈 뜨고 걸어가면서 시시덕대기까지 하는데도 살아 있는 사람 같지를 않고 죽어 있는 망령의 떼거리처럼 보였다. 저렇게 많이! 나는 망연히 입을 딱 벌린 채 감탄을 했다. 그러자 오래전에 깡그리 까먹어버린 엘리엇의 시의 한 구절이 주절 주절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렇게 많이, 나는 죽음이 저렇게 많은 사람을 멸망시켰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 저렇게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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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2-01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동규 번역의 황무지 저도 가지고 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녹음을 한 도서입니다.
반갑습니다. 박완서의 저렇게 많이,와 겹쳐지네요. 전쟁 후의 피폐함과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배반의 여름, 담아갑니다. 좋은 페이퍼 고맙습니다.

서곡 2022-02-01 22:28   좋아요 0 | URL
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곡 2022-09-02 13:03   좋아요 1 | URL
예전에 쓴 이 포스트 보다가 그때 달아주신 댓글 다시 읽습니다. 좋은 댓글 달아주시고 소통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릴 때 동화로 읽은 피터팬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 완역본으로 읽으니 훨씬 더 재미있다. 내 경우에 어릴 때는 아이로 남는 선택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고 바라지는 않았지만 계속 아이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기억도 없다. 지금 피터팬을 읽으며 즐거워하는 나의 심리는 도대체 뭘까. 사실, 아이와 어른이 제각기 무리지어 피터지게 패싸움하며 끝장을 본다는 점에서 피터팬 이야기는 잔혹동화이자 차라리 매우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 지식인 남성이 쓴 만큼, 현재의 관점에서 시대착오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내용이 당연히 거슬리지만, 풍자적으로 재해석하며 읽으면 굉장히 웃긴다.


영화 '네버랜드를 찾아서' 2004 https://youtu.be/JQ4LkJysnkA


조니 뎁이 저자 배리 역을 맡은 영화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피터팬의 탄생 배경을 다루는데, 다소 미화된 인상이지만 참고하면 흥미롭다. 아역 주인공은 지금은 장성한,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도 주연한 - 여기도 조니 뎁이 나오네 -  프레디 하이모어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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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 아래 글은 문석우 저 '안똔 체홉'으로부터 발췌했다.


똘스또이의 영향이 특별하게 지배하고 있는 ‘지루한 이야기‘는 똘스또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도전하고 있다. 체홉은 경험주의자로서, 그리고 휴머니스트로서 똘스또이의 도그마에 직접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결국 반항하기에 이른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1886년에 발표되었고, ‘지루한 이야기‘는 3년 후인 1889년에 발표되었다. ‘지루한 이야기‘에서 체홉은 똘스또이에게서 영향을 받은 흔적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비평가 베벨리한은 주장한다. 특히 죽음을 앞두고 히스테릭한 감정폭발을 일으키는 두 주인공의 비교는 이런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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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작가가 쓴 ‘속초에서의 겨울’, 전미도서상 번역부문 수상 엘리아 수아 뒤사팽 데뷔작… 속초 배경 경계인의 마음 그려]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618395&code=61171511&cp=du


몇 년 전 발간 즈음 서점에서 초반을 읽었었다. 올 겨울 다시 읽기 시작. 기사를 검색해 보니 작년 말 미국 내셔널 북 어워드(전미도서상) 번역부문상을 이 책 영문판이 탔다. (표지의 한글 '소설'이 눈길을 끈다.) 

사진: UnsplashPhotos of Korea


[‘언젠가 속초’에 가시려거든 ‘속초:대한민국 도슨트 01’ 김영건 지음]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613 여기 '속초에서의 겨울' 이야기도 조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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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말'에서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제목짓기에 대해 저자 박완서 작가가 한 말을 옮긴다. 미시마 유키오의 '비틀거리는 여인'(송태욱 역)이 바로 제목이 비슷하다는 그 일본 소설로 보인다. 원제 '美德のよろめきよろめき 일한사전에서 찾으면 "휘청거리다, 비틀거리다, 유혹에 빠지다" 등으로 나온다.



미시마 유키오 1961 林忠彦 - 『文士の時代』 著 林忠彦, CC 表示-継承 4.0, 위키미디어커먼즈


미시마 유키오의 이 소설이 원작인 일본 영화 '흔들리는 미덕' https://www.koreafilm.or.kr/movie/PM_009304





『휘청거리는 오후』를 쓸 때 처음에는 ‘휘청거리는 도덕’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제가 일본 소설을 많이 읽는데 『휘청거리는 미덕』이라는 소설이 있었던 게 생각나 ‘아, 내가 이것을 연상했구나’라고 깨달아서 제목을 ‘오후’로 바꾸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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