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學]에도 서른 살 이전에는 


박학불교(搏學不敎)하고 내이불출(內而不出)하라고 했다.


즉 20대의 학생들은 넓게 배우되 남을 가르칠려고 애쓰지 말고, 속에 집어 넣되 나의 내면에 함축시킬려고 노력할 것이지 그것을 밖으로 드러낼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대단한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얄팍하게 남을 가르치고 얄팍하게 남을 비판만 한다면 큰 그릇이 될 수가 없다. 나의 내면세계 속에서 온축(蘊蓄)되는 것이 크면 클수록 나중에 敎하고 出할때 크게 되는 것이다. - 46쪽






나 자신을 반성하고 되돌아보게 만드는 구절이다.

물론 남을 가르치려고 들지는 않지만, 배운 것이 있고 깨달음이 있으면 그것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그렇지, 들어주면서 맞장구라도 쳐줄 사람이 있으면 出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그것이 배우는 자의 초라한 모습임을 알면서도 얕은 허영심과 뽐냄의 욕망앞에서 늘 좌절한다.

그 이면에는 내 자신이 너보다 낫다는 교만에서 기인한다.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지식을 과시하지 않는다. 진정한 학문이란 함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깊이 쌓아가는 것이기에..그리고 그 쌓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겉으로 배어나오는 것이 진정한 학문과 수양이 모습이다.

배운 것을 입으로 옮기기에 급급한 사람은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없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가르침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다. 그리고 일과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공부의 마지막 순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체질상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또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까 매일 서향을 짙게 풍기는 창호지 고서들만 읽고 살게 되고 따라서 현실에 매우 어두운 사람이다.(...)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테레비를 본 적이 거의 없다.(...) 테레비도 안 보고 신문도 거의 읽지 않는 나의 생활에 무슨 정치성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사회는 알려고 들면 하도 복잡해서 모르고 사는 편이 속 편하고 또 나의 양심과 행동을 지킬 수 있기에 편하다. 무식이란 때때로 참 고마운 것이다. - 42쪽

그 앎, 그 가르침, 맹자가 천하를 다스릴 대권을 준다해도 바꿀수 없다고 당시의 부귀권세의 인간들을 향해 호통쳤던 삼락(三樂)중의 한 낙으로 "득천하영재이교육지(得天下英才而敎育之)"를 집어 넣었던 이유를 그 누가 알랴! -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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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학당, 수다승철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로 자진 출연의사를 밝혀 나온 김응수 배우.
그가 20대 초 도올이 1985년도에 고려대학교에서 2천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한 내용을 엮은<여자란 무엇인가>를 읽고 내면이 흔들릴 정도로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86년도 초판발행된 이 책은 업무상 만난 감정평가사와 식사 후 커피로 담소를 나누다가 추천받은 책이기도 하다. 지금 서재에 도올 선생님의 책이 30여권 있지만 이런 연유로 먼저 집어들게 되었다.
도올 30대 후반의 기세와 70대 도올의 학풍과 방향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전에 <도올아인 오방간다>프로그램은 유아인의 넘치는 의욕 때문에 좀 부담스러워 많은 시청자를 끌어모으지 못했다. 라고 자평하는데 이번 프로그램은 영리하고 푸근한 이승철의 수다덕분인지 꽤 시청률이 높은 편이다. 금일 이청아가 게스트로 나오는 6회 본방이 11시부터 하는데 기대된다.











다시 한번 상기시키지만, 우리가 소위 명문이라고,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모두 문법이 없는 시대에, 표준말이 없는 시대에 태어난 작품들이다.(...)
지금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법이란 "입시준비를 위한 규칙"일 뿐이며, 그것은 "이렇게 이렇게 쓰지 말라"는 "금지의 체계"일 뿐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표현력을 쐐기박은 하나의 구속일 뿐이다. -26~27쪽

우리는 남자의 성기, 여자의 성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운 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도덕적 타부라는 고상한 이유로 고상한 자들의 언어에서 지속적으로 회피되고 있는데 그 말은 "자지"와 "보지"라는 것이다. 자지와 보지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어떠한 표현에도 양보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을 가지며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의미의 면적을 가진다. -28쪽

우리는 우리 존재의 가능성의 탐구를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동원해야 할 것이며, 또 우리의 의식을 구속하고 있는 타부로부터 일단 해방되어 우리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타부를 만들지라도 일단 과거의 타부로부터 벗어나보는 어떠한 과감성이 없이는 "나"를 분석할 수가 없다. 나는 음담패설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자지, 보지, 씹을 과감히 쓸 것이다. 나의 이러한 단순한 표현 때문에 나를 욕하실 거룩한 분들은 이 책을 덮어라! 읽지 말어라! 내가 나의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 민주사회라면 그대들이 나의 생각을 읽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 또 민주사회다! 그대들이 나를 비판하는 것이 자유라면, 나는 그대들의 비판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자유다! - 30쪽

시몬 보봐르는 그녀의 <제2의 성>의 논의를 분명히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나의 논의를 시자가는 것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 33쪽

억압되어온 자들에 대하여 그 억압의 구조가 무엇이었나 하는 것을 밝힘으로써 그만큼 많은 우리 인간의 문제를 개선하는데 신선한 자극을 주는 주제가 부상할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결론 부분에서 상술하겠지만 여자의 문제는 곧 남자의 문제이다. 여자의 해방은 곧 남자의 해방을 뜻한다. 여자는 남자를 통해서 자기의 모습을 확인할 수 밖에 없으며,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자기의 모습을 확인할 수 밖에 없는 소외와 합일의 관계를 유지한다. 서로를 소외시키면서도 서로를 부정할 수 없는 운명에 놓인 상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 35쪽

나는 강의를 정직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의 마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학기의 강의를 하나의 드라마라 생각하고 나는 학생이라는 청중 앞에서 기획, 연출, 연기를 다 해가면서 나의 드라마가 의도하고 있는 주제를 전달하기에 온갖 열정을 다 쏟는다.(...)
나자신 대학시절에 몇 십년을 중복되는 노교수님들의 강의가, 그분들이 사신 시대적 배경을 잘 이해하면서도, 너무도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뼈저린 체험이 내가 교수가 된 오늘날 나의 학생들에게 똑같이 전달되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사명의식이 나를 집요하게 지배했기 때문이다. - 37쪽

강의란 교수가 학자적 양심을 걸고 자기의 뜻을 사회에 펼 수 있는 가장 신성한 마당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제일의적이고 또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 38쪽

누가 나를 구태여 규정한다면 나는 도가계열의 사상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나의 노자와 장자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제도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만큼 또 제도의 탓만 하지도 않는다.-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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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4-16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이런 책도 썼군요.
저도 대체로 쿠키님과 같은 생각이어요.
유아인 언제부턴가 이미지를 구기고 도올도 좀 센 발언들을 많이 해서
저도 그 프로는 잘 안 봤는데, 이승철이 중간에 역할을 잘 하더군요.
도올이 좀 도가 지나친 발언을 하면 그건 개인의 생각일 수 있다고 돌리기도 하고.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사람이 지적인 우위에 있으면 지나칠 정도로 신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그럴 땐 중간에서 역할을 잘 해줘야죠.ㅋ

북프리쿠키 2020-04-16 15:55   좋아요 1 | URL
통나무에서 나온 최초의 책으로 최대발행부수를 기록한 책이래요~ㅎ 이승철과 도올은 이 프로그램에서 서로 원윈이고 궁합도 잘 맞는듯 ~
이승철의 겸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보기가 흐뭇합니다. 네네~비슷한 느낌을 받았네예 텔라님과^^
 

총 81장 중에 도경에 해당하는 1장~37장 까지를 담은 책이다. 덕경 38장~81장은 후설에서 한의사로서의 업을 위해 다음에 펴내겠다 하셨지만 아쉽게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아쉽다.
1편부터 꾸준히 읽어온 3권의 책, 내 삶에 노자가 이렇게 깊이 들어올 줄이야. 조금 과장하자면 노자를 읽기 전의 나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독서와 삶에 대한 자세가 달라질 것 같다.
노자를 저같은 몽매한 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그 배면에 깔린 엄청난 학문적 수고에 경의를 표한다. 도올하면 역시나 노자다!

그리고 언어란 논리보다 느낌이고 지혜는 본디 깨달음이란 것을 다시한번 명심. 평생 새기고 살아야겠지.

요즘 <도올학당, 수다승철>이란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대중속으로 들어오신 걸 환영하며, 73세의 나이에도 학문에만 심취해온 그 소년같은 표정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감동받는다. 꼭 한번 뵙고 한마디라도 나눠볼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이 시대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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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중국일기 3 - 고구려 재즈 도올의 중국일기 3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5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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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엄청난 돌무지 무덤(적석총)들의 향연에서 겨우 벗어났다. 우리가 배운 것들은 1%에도 못 미친다.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보고 다양한 전문가들과 토론해서 일궈진 3권이다. 실로 부럽다. 사진들이 일품이다.

오회분, 국내성, 미천왕릉, 천추묘(고국양왕릉), 소수림왕릉, 태조대왕릉, 서천왕릉, 장천1호분, 장천4호분, 염모총, 환문총이 담겨 있다.

도올이 설파한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말해본다면, ˝역사는 기본적으로 유물의 총화˝ 정도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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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수요일

나의 삶에 있어서는 나의 ˝주관적 느낌, Subjective Feeling˝이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객관적 명제들보다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의식주라는 기본적 삶의 모든 명제들을 타자화시킨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명제보다도 훨씬 더 극심하게 일상생활이 타자화되어 있는 것이다. - 8쪽



커피는 생콩을 사서 내가 직화에 직접 볶아먹는다. 그리고 볶은 커피는 미세하게 갈 필요가 없다. 나는 이 통찰을 기본으로 내가 귀국하면 나만의 독특한 커피세계를 구축할 구상을 굳혔다. - 9쪽



10월 10일, 금요일, 아름다운 날씨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시니피앙(음성이미지)와 시니피에(소리심볼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했는데, 시니피앙의 단계에서 그 음성을 시각기호화하는 것이 표음문자라는 것이고, 시니피에의 단계에서 그 개념을 시각기호화하는 것이 표의문자라고 한다. - 20쪽



10월 11일, 토요일, 너무도 아름다운 늦가을 날씨

한국사람들은 짬뽕이나 짜장면이 중국음식인줄 알지만 그런 음식은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중국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에 살던 산똥화교들이 개발한 한국인 입맛화된 특수한 중국요리다. 중국에는 한국식 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짜장˝이란 문자 그대로 ˝된장을 볶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중국의 짜장은 문자 그대로 한국 된장 같은 것을 기름에 볶은 수준의 것이다. 산똥화교들이 개발한 그런 새까만 색깔의 오묘한 짜장은 없다.

˝짬뽕˝만 해도 그것이 중국말인줄 아는데, 중국어에는 ˝짬뽕˝이라는 발음에 비슷하게 가는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짬뽕˝은 한국말인가? 그것은 한국말도 아니다. 그럼 어디서 온 말일까? 그것은 일제시대 때 일본의 속어에서 유입된 것이다. 그 원어는 ˝챤퐁˝이다. 종류가 다른 것을 뒤섞는다는 말이다. 일설에 의하면 19세기 말기에 큐슈나가사키에 살던 화교들에 의해 개발되어 우리나라 인천항 화교방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그것은 일본말이다.

일본에 가면 어딜가나 ˝챤퐁˝이 있고, 뒤섞는다는 의미로 일상회화에서도 사용한다. 그런데 일본식 짬뽕은 그렇게 얼큰하지 않다. 수타면을 사용하는 짬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는 짬뽕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내가 어릴 적 습관대로 ˝벤또오˝라고 마라면 ˝도시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지랄지랄해대는 사람들이 내가 ˝짬뽕˝하면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그것도 왜식이라고 지랄지랄해대야 할 것이 아닌가? 국어 순화주의는 본질적으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순수한 국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음일 뿐이다. 음은 사용해서 의미가 전달되면 그 사명을 다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본질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어는 사용일 뿐이다. 사용해서 의미가 통했으면 사용으로서의 언어는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언어가 이 세계의 정확한 그림일 수 없다고 말한다(후기 비트겐슈타인) - 27쪽


사실 요즈음 세상에서 ˝외식˝이란 어떻게 맛있게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사악한 화학조미료를 덜 처먹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셰프가 대세인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셰프가 만든 음식은 자연미가 부족하다. 전 인류에 엠에스지 msg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화학조미료 때문에 전통적 젓갈이나 발효음식이나 향료의 지혜를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 28쪽




10월 14일 화요일, 개임

구조주의는 이와 같은 인간의 사고나 사회나 국가의 권력이나 언어나 도덕이나 가치관 같은 그 모든 것의 구조, 그 설계도면을 알고 싶어한다. 그 구조를 파악하는 날카로운 시각, 겉으로 부분적으로 드러난 감각적 체험이 아닌 어떤 통찰력, 그 통찰력의 방법론을 제각기 제시한 사상가들이 모두 크게 보아 구조주의라는 카테고리 속에 들어올 수 있다.- 39쪽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의 기나긴 역사가 플라톤의 각주일 뿐이라는 유명한 얘기를 했지만, 나는 서양철학 이천사오백년의 역사가 파르메니데스 철학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데리다가 간파했듯이 서양철학의 역사는 존재론의 역사이다.
˝있음의 형이상학˝의 역사이다. (...)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기실 매우 황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인의 사유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 42쪽



데리다의 대 binary opposites의 문제의식으로 말하자면 서양철학은 항상 존재를 센터에 놓고 생성을 변방화시켰으며, 불변, 초월, 이성을 센터에 놓고 변화, 내재, 감성을 변방화시켰다. - 45쪽



맑스를 얘기하면 우리는 곧 유물론적 변증법이나 그것의 발전단계도식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필연적 도래라는 정치적 이론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의 가장 큰 혁명은 자아라는 개념을 자기가 필연적으로 속할 수 밖에 없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의식의 주체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코기탄스의 개체성을 해체시켰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가 아니라 노동하는 자아, 생산하는 자아, 행동하는 자아가 된다. - 46쪽



맑스, 프로이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로서 인간이라는 주체를 지배하는 가치관, 도덕의식이 결코 나의 주체적 결단의 소산이 아니라, 외적 규범에 불과하다는 것을 외친 사람이 바로 니체다. 니체 하면 우리는 ˝신은 죽었다˝라든가 ˝초인˝을 외친 사람으로 기억하지만 그보다는 ˝도덕의 계보˝를 주장한 사상가로서 기억하는 것이 보다 니체를 정확이 이해하는 첩경이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의 가치, 당위적 명령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시대나 지역의 고유한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니체의 수만은 저작 중에서도 그의 <도덕의 계보>를 가장 탁월한 수작으로 평가한다. - 47쪽



도덕의 계보를 펼치면 니체의 서문 첫 줄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자기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 본적이 없다. 그리고 서문 제6단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도덕적 가치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는 우선 그 자체로 문제시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가치들이 성장하고 발전해온 조건과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얘기는 미셸 푸코의 ˝지식고고학˝의 주요 명제로 들린다. 푸코의 사회철학은 니체의 계보학을 계승한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동시대인(현대인)은 억측에 의한 판단의 포로일 뿐이다. 그 억측, 자기들에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가치판단이나 심미적 판단이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형성된 편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류일반에게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동시대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끔찍한 바보일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현대인은 바보가 되었는가?(...)
니체의 위대함은 누구보다도 앞서 당대 출현하고 있는 20세기의 대중사회(근대적 시민사회보다 더 어드밴드된 개념)를 예언적으로 비판했다는 데 있다. 대중이란 ˝짐승의 무리˝와 같으며, 그 특징이란 균질적 행동패턴을 갖는다는 것이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균질성이 바로 노예의 특징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동일하게 되는 것 자체에서 행복과 쾌락을 찾는다. - 50~51쪽



이날 강의를 위하여 내가 참고한 교재가 하나 있다. 동경대학 불문학과를 나온 학자인데, 우찌다 타쯔루 교수가 쓴 <코를 골면서도 배울 수 있는 구조주의>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우찌다는 서양의 20세기 사조를 아주 쉽게 잘 풀어 말해주었다. 철학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한계도 있으나 철학전공자의 현학주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책이 이경덕에 의하여 <푸코,바르트,레비스트로스,라캉 쉽게 읽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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