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자식을 가진 부모님이 ˝교육˝에 대해서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시대는 변했고 교육환경은 산출 대 투입의 경제학적 논리가 지배한다. 물론 부모가 얼마나 학습의 환경을 적절히 제공해 주고 교육에 대한 철학과 실천이 얼마나 뒷받침되느냐에 따라 조금씩은 영향을 주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대개는 이른 바 전통적인 교육방식과 진보적 또는 혁신적 교육의 방식에서 갈팡질팡하거나 그 중심을 잡지 못하는 편이다. 물론 확고한 교육관에 의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 교육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막상 대안학교나 혁신교육에 대한 과감한 모험을 하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논점에서 동,서양의 철학과 교육학 등을 비교하여 도올만의 교육관을 설파한다.
읽으면 우리 애를 어떻게 교육하고 키울지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고민하게 만들 것이다.
또한, 도올이 정치적으로 보수를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진보편에 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작정 이념편향되어 한쪽으로 쏠린 저작물을 싫어하는 나인지라 도올의 이러한 생각들은 참 마음에 든다. 동양철학뿐만 아니라 서양철학을 섭렵하고, 동양종교와 서양종교까지 아우르는 도올 선생의 깊은 학풍이 더욱 더 글에 배여 신뢰감을 주는 책이다.
---------------------본문 발췌 ------------------------
진보주의자들은 심신이원론을 거부함으로써, 전인격을 교육의 관심으로 삼는 전인주의를 택하게 되고, 따라서 신체적 활동을 교육적 활동의 유기적 요소로 간주하게 된다.(...)
보수주의자들은 학생의 정신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는데 반하여 진보주의자들은 학생들의 사회적 적응이나 정서적 발달, 육체적 건강, 그리고 직업적 유능함과 같은 교육요소를 더 중시하게 된다. -19쪽
나는 말한다. 인간의 인식은 감성과 이성의 종합에서 달성되는 것이며, 사실과 원리의 융합, 구체와 추상의 통합, 귀납과 연역의 동시적 적용에서 그 포괄적 성격을 완성하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인식론은 학습의 양면이지 대립적 분립이 될 수 없다. - 24쪽
진리는 우리가 배워야 할 절대적인 실체로서 우리 앞에 엄존하는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야 할 역동적이고 상대적인,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체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학생은 언제나 참인 이론이나 법칙이나 원리나 사실이 엄존한다는 환상속에서 그것을 습득해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앎을 추구하는 그 과정은 단지 잠정적인 결론에 이를 뿐이다. 지나간 세대에 의하여 성스럽게 신봉된 모든 진리를 회의할 수 있어야 하며, 오직 회의와 불확실성만이 경험과 추론에 도달된 결론의 표어가 될 뿐이다. - 30~31쪽
모든 지리는 역의 모험과 결합될 때만이 그 생명성을 유지할 수 있다. - 33쪽
나는 말한다. 인간의 교육이란 궁극적으로 선,악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을 싫어해야 할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화이트헤드의 교육론 첫 구절의 말을 의미심장하게 생각한다. ˝문화라는 것은 사유의 활동인 동시에 아름다움과 인간적 느낌에 대한 민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교육의 목표는 인간에게 선악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 42~43쪽
나는 말한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주제를 둘러싼 보수-진보의 논의는 그 나름대로 모두 취할바가 있다. 단지 교사중심이면 보수이고, 학생중심이면 진보라는 이분법적 사유는 생각이 치졸한 서구인들의 다이카토미 dicahtomy의 오류에 불과한 것이요, 국민교육을 망치는 대본이다. - 61쪽
리버랄리즘의 원조인 존 듀이가 얼마나 교사의 위상을 존엄하게 생각했는지를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나라는 공교육이라는 구실 하에 교사를 학교의 기능적 부품으로 비하시키고, 교사에게서 교육할 수 있는 진정한 권위를 탈색시키고, 문제 안 일으키고 인내만 하는 허수아비로 전락시키고 있다. - 63쪽
왜 학생이 학교에서보다 학원에서 더 열심히 공부하는가?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학원의 선생님들이 보다 명쾌하고 쉽게 기본적인 정보를 잘 ˝주입시켜˝주기 때문이다. ˝주입˝은 ˝강의˝의 효율성에 관한 것이다. 주입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주입이 나쁜 것일때는 학생은 취하지 않는다.(...)
강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교육론자들이 기껏 개발하는 논의가 ˝토론식 교육˝이나 ˝체험식 현장학습˝정도이나, 이 모든 것은 보조수단이지 그 자체를 억누르는 논의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세미나라는 것은 원래 성숙한 인간들 사이에서 유효한 것이다. 빈대가리들이 아무리 토론을 해본들 아까운 시간의 낭비만이 산출된다. - 65쪽
교육은 권위주의를 배척하지만 권위를 신봉하지 않을 수 없다. 권위는 학습자들의 인간적인 존경심의 대상에게만 부여되는 것이다. 권위는 사랑의 교감체이며 성장과 모험의 동력이다. 권위의 초월적 뿌리는 철저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도적 교감의 싸이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권위가 없이는 교육은 성립될 수 없다. 나는 말한다. 교수의 권위는 고수되어야 한다. - 78쪽
공자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의 인간됨의 특징을 ˝호학˝이라는 한마디로 규정했다. 끊임없이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늙어죽을때까지 배움 앞에 자신의 가슴을 열어놓고 살았다는 뜻이다. - 88쪽
철학만 해도 그렇다! 철학은 존재론이나 인식론, 형이상학을 운운하는 한가지 소수의 게으른 담론이 아니다. 철학이 추구하는 모든 진리나 가치의 기준은 오로지 교육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은 철학의 목적이며 소이연이다. - 95쪽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한국정치에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다는 것을! 그럼 뭐가 있는가? 그것은 너무도 쉬운 얘기! 오직 기득권에 집착하여 개인의 부귀영달을 꾀하는 승냥이들의 완고한 집단만 있고, 그들의 폭압과 위압에 항거하여 그래도 다수의 민중이익을 방패막이로 내거는 투쟁집단이 있을 뿐이다. - 119쪽
그렇다면 한국의 교육보수주의는 무엇인가? 이 실체를 명료히 깨닫는 것은 실상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
한국의 교육보수주의는 실상 입시교육주의이며, 입시교육에 성공적인 여건을 이미 보유한 기득권자들의 엘리트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엘리트주의의 실상을 깨닫는 데도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 이 엘리트주의의 궁극적 근원은 일제식민지교육에 있었던 것이다. - 120쪽
교사의 덕성은 [예기]의 <학기>에 나오는 ˝교학상장˝이라는 이 한마디!
˝아름다운 요리가 있어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길이 없고, 지극한 도리가 앞에 있어도 배워보지 않으면 그 위대함을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고 난 연후에나 비로소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가르쳐 보고 난 연후에나 비로소 교육의 곤요로움을 깨닫는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연후에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를 반성할 수 있고, 교육의 어려움을 깨달은 연후에 교육자는 자신의 실력을 보강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노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서로를 키운다!˝ - 148쪽
공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도 않고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생각에만 골몰하여도 보았으나 별 유익함이 없었다. 역시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공허한 토론, 공허한 사색은 말짱 황이라는 얘기다. 서구의 유수 대학의 위대한 강의는 주입식이다. 학생들이 쓸데없는 질문만 남발하는 혼란스러운 강의는 저급한 강의로 폄하된다. - 158쪽
엄마는 나에게 항상 말씀하셨다.
˝아들아! 너는 나보다 더 부귀한 인간들로부터 상찬을 들으려 하지마라. 항상 너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라. 영원히 이 땅의 젊은이들을 교육해야 한다.˝ - 16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