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번째~19번째 독립운동가를
내 방안으로 모셔왔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때
항상 ˝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던 그들.

오늘은 4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한백봉
이육사
이태준
안규홍

이육사를 빼면 이름이 낯설다.
그런데 이육사는 저항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당황스러운 건 내가 그에 대해 시 말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학창시절에 배운 시가 다라니..



항상 배움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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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06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에 푹 빠지셨나 봅니다.^^

북프리쿠키 2020-12-06 20:55   좋아요 1 | URL
물 들어올 때 노젓고 있습니다.ㅎ 묘한 의무감?뿌듯함도 한몫 하는거 같아예 ^^
 
김마리아 : 나, 김마리아 - 제1차 위대한 시민의 역사 33 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프로젝트
김성희 지음 / 광복회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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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

일본이 잔인한 고문으로 가슴을 도려냈지만
그 가슴안에 품은 마음과 사랑은
빼내지 못했다 하신 김마리아 선생


피와 상처가 나지 않지만 같은 곳을 같은 힘으로 계속 때려 꿈속에서도 ˝따각,따각˝하는 악몽에 시달리는 새로운 고문 기술의 희생양이 되어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면서 남긴 말은 내내 가슴에 남는다.

˝내 일신을 위한 성취를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시대의 청춘이 할 수 있는 낭만이자 헌신이었소.....
독립된 나라에서 개인의 성취가 청춘의 낭만이자 헌신일 그대들은 나의 꿈이라오˝



현재의 풍요로움은
김마리아 선생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선물이다.


올해 출간된 1차 독립운동가 33인 중
열다섯 분의 이야기를 읽었다.
연예인들이 릴레이로 독립운동가 한분씩 기억을 되살리는 tv프로그램 <기억하여 기록하다>와 같이 하면 생생한 그날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다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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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북프리쿠키 > 인생은 번식과 죽음의 방대한 움직임이다.

100권만 소장한다면 망설임없이
손꼽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지적 쾌감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던
2년전의 소중한 기억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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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희망도서 신청한게 도착했네요

<앵무새 죽이기> 그래픽 노블입니다.
판형이 일반 책에 비해 조금 크네요.

요즘 읽고 있는 독립운동가의 만화들 중간에 잠깐 미국의 소설맛을 볼 수 있겠네예.





˝하퍼 리는 메시지가 미학에 가려지는 것을 거부한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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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順) 1860.6.25~1935.8.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촬영)

 

-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사진 한장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사진 찍은게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비분강개해 시아버지가 의병으로 출정하자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을 창작 보급하면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진력하였고,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데도 적극 앞장섰다.

이어 경고문 《왜놈 대장 보거라》를 써서 여성들도 의병활동에 나설 것임을 천명 하였다.

 

 

 

* 선생이 지은 의병 가사 중 [안사람 의병의 노래]와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사본

- 출처 : 네이버캐스트

 

 

 

 

 

 

 

1911년 가족 모두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으며 1912년 운영자금을 모금하여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설립 하였다. 노학당의 '연설 잘하는 윤교장'으로 불렸던 그녀는 이후 중국의 여러 마을을 돌며 반일 선전과 모금활동을 이어나갔으며 반일 정신을 심어주었던 노학당에서 5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구국운동에 전념하였다.

 

 

 

- 윤희순 의사가 설립한 환인현 보락보진 ‘노학당’ 자리에 후손들이 세운 유지비. 오른쪽에 새겨진 ‘환인현 동창학교 분교’ 부분이 지워졌다 복구된 흔적이 보인다.

- 출처 : 세계일보

 

 

 

 

1935년 7월 큰아들 돈상이 제사를 지내러 집에 들렀다가 중국 푸순[]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 아들의 죽음앞에서 울분을 참지 못하였던 그녀는 《해주윤씨 일생록》을 지어 삶을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정리한 후 곡기를 끊어 숨을 거두었다. 1935년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랴오닝성[] 하이청현[] 묘관둔() 북산()에 안장되었던 유해는 1994년 고국으로 봉환되어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에 남편과 함께 합장 하였다. 춘천시립도서관에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강원도 춘천시 남면 발산리의 생가터에는 《해주윤씨의적비》, 묘소에는 《애국선열윤희순여사사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 추서되었다.

 

 

강원도 춘천시 춘천시립도서관 뒷마당에 있는 동상

- 출처 : doopedia.co.kr

 

 

- 윤희순 의사 제85주기 추모 헌다례, 춴천의병아리랑 보존회 "초혼무"  2020년 8월 29일 개최

- 출처 : 강원도민일보

 

 

 

 

- 내용 출처 : 두산백과

- 두산백과의 내용을 요약하고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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