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크리스마스연휴와 연말 연휴는
도올의 신학탐색 여정을 함께 합니다.
이웃님들 코로나에 집콕하시면서
양서 많이 읽는 알찬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메리크리스마스 해피뉴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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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 나! 이봉창 - 제1차 위대한 시민의 역사 33 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프로젝트
김수박 지음 / 광복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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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봉창은 그날 나에게 말했다...

˝제 나이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해도..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178쪽


김구는 이봉창과 일왕 처단을 추진하면서
임시정부의 특무활동 기구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호 단원으로 이봉창을 천거했다.

거사전 찍은 유명한 사진속 선언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나는 적성으로부터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13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앞 이봉창˝



오늘날 이봉창 의사의 자세한 이야기를 우리가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김구가 이봉창이 쓴 이력을 바탕으로 ˝동경작안의 진상˝이라는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김구가 이봉창을 처음 만난 1931년 1월부터 1932년 10월 10일까지 약 20개월간의 기록이다.-193쪽



김구는 해방후 박열을 불러 일본 사법대신을 상대로 이봉창의 유해를 요구하고 천신만고끝에 해방호 열차를 통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한다.

열차가 지나는 역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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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최진기쌤도 그렇고
설민석쌤도 비슷한 실수(?)를 하셨다.
솔직히 생업으로 힘든 일반인도
관심분야에는 전문가 못지 않게 깊이를 가지게 되는데 하물며 본업이 역사를 가르치는 분이 기본을 잃고 이런 사태를 만들다니. 초심은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고 허망하다.



어찌 이번뿐이겠나.
아래는 제가 2019년도에 설쌤에,미디어에 실망해서 올린 글을 캡춰했다. 많은 분들이 아마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해왔으리라 본다.
의견과 사실은 분명해야되고
전달 또한 명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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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만드는 것이지, 역사 이외에 무슨 다른 목적을 위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사회의 유동상태와 거기에서 발생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적는 것이지, 지은이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거나 달리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_조선상고사 553쪽
신채호의 총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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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21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어제 정규 방송을 안하고 스페셜을 방송한 걸까요?
설민석이 또 무슨 실수를 했나요?

북프리쿠키 2020-12-21 19:17   좋아요 1 | URL
네.설민석의 벌거벗은세계사 강의내용 이집트 편중에서 곽민수 고고학자가 사실 오류투성이라고 공개저격한 내용이 기사에 여기저기 떴네요 ㅠ.

stella.K 2020-12-21 19:56   좋아요 1 | URL
앗, 저런... 저 그 방송 재밌게 보기 시작했는데...
근데 정작 TVN측은 반응이 없고 오히려 M본부가
반성을 하고 나오다니.
설 선생 보단 설 선생을 받들어 주는 사단이
있을 것 같은데 잘 못 받들어 주는가 봅니다.ㅠ

북프리쿠키 2020-12-21 20:09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시청률이 최고니 방송사도 문제겠지예. 뭐 모든 부문이 하루이틀 일이겠습니까만은
강사가 신뢰가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한동안 힘든 시간 보낼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0-12-21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째 위태위태하다 하더니만 결국...

자신의 활동 영역을 너무 넓히려고
하다가 벌어진 사단으로 보이네요.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잠시 방송을
쉬고서라도 내공을 쌓았어야 했는데,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기엔 자본
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지 않았나
싶네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편에서도 그랬지만, 자기만의 책 해석
능력이 보이지 않더군요. 방송인으로서
는 그 정도까지만 해도 갠춘하겠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고 했다면
그에 따른 내공수련이 필수 조건이었는
데 그 과정을 걸렀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나름 스타강사이니 전화위복의 계기
로 삼길 바랄 뿐입니다.

북프리쿠키 2020-12-21 22:04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께서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네예~

아는 것과 강의 능력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기에, 각자의 역할에 우열을 비교하는 건 어리석지만 레삭매냐님 말씀대로 조금만 욕심을 버렸다면 내공을 쌓는 기회가 있을텐데 말이죠. 물론 그쪽 업계에선 물들때 젓지 않으면 그 순간 도태되는 무시무시한 곳이겠지요.

주화입마... ^^
재미있는 표현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주인공은 항상 주화입마를 극복하더라구요.
그래도 당분간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설쌤이 다시 심기일전해서 방송과 집필을 줄이고 깊이를 얻는 계기가 되길 저도 바랍니다!

ebond 2020-12-21 2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본래 역사 전공도 아니었지만 이분은 역사 전문 지식이 풍부 하다 기 보다는
남에게 요약해서 잘 가르치는 능력은 뛰어 난 분이긴 해요.
본인의 전문 분야만 파도 모자라는 것이 학문인데 예능을 학문으로 따지는 것도 좀 그렇지만
이것은 주변의 방송하는 사람들의 욕심이 빚어낸 참사라고 봅니다.
한국사 한 가지 만 해도 후덜덜 할텐데 그렇게 범위를 넓히니 무슨 일인들 안 일어나겠어요.
저도 관심 가지고 보고 있는 사안이라...

박균호 2020-12-22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해당 분야에 10년은 연구를 해야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할 수 있는 내공이 있지 않을까요. 설민석은 그냥 역사 캐스터(?) 정도의 위치에 머물렀야 한다고 봅니다. 그 양반이 삼국지까지 손을 뻗은 걸 보고 실소를 ㅠㅠㅠ . 그냥 자본의 탐욕이 만들어낸 참사라고 생각합니다.

북프리쿠키 2020-12-22 18:47   좋아요 1 | URL
네 박균호님 ~ 방송이 설쌤을 신격화하고 설쌤또한 유명세를 즐기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사실 설쌤한테 시청자들이 역사학자의 깊이를 요구했겠나만은. 삼국지때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였으면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껄.
감당이 어렵더라도 설쌤이 직접 사태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네예.

서니데이 2020-12-23 1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프리쿠키님, 제 서재에서 소소한 이벤트를 시작했어요.
시간 되시면 놀러오세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북프리쿠키 2020-12-25 11:08   좋아요 1 | URL
네 놀러갈께요~
서니데이님도 메리크리스마스^^
 
 전출처 : 북프리쿠키 > 내 안의 또 다른 나

4년전에 열심히 읽고 고민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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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 : 영원의 총탄 윤세주 - 제1차 위대한 시민의 역사 33 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프로젝트
이상훈 지음, 양광민 그림 / 광복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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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최고 사나이 윤세주.
김원봉과 형제의 우애를 나누고, 이육사와도 함께 의를 나눈 항일의사.
우리나라에서 만주로 다시 화북으로 중국 팔로군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에 젊음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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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로군?
정식명칭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이며, 1927년 난창[南昌] 폭동 때는 홍군(紅軍)으로 불렸다.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 후에 국민혁명군 제팔로군으로 개칭하고 신사군(新四軍)과 함께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한 부대이다. 1947년에 인민해방군으로 다시 명칭을 바꾸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당시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망 위기에 처해 있던 중국공산당은 국민정부(國民政府)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에게 마오쩌둥[毛澤東]·주더[朱德]·펑더화이[彭德懷]·린뱌오[林彪] 등의 이름으로 전문을 보내, 전체 홍군은 장제스 위원장의 지휘하에서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항일전쟁에 임할 것을 표명했다.

7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공부국난선언(共赴國難宣言)’을 발표하고, 국민정부에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그들은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국민당정권의 전복운동 및 적화운동의 취소, 폭력에 의한 지주들의 토지몰수정책 중지, 소비에트 정부 취소, 홍군 명칭 취소 및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을 조건으로 제시했고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를 것을 약속했다.

1937년 8월 22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중공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했다. 총지휘에 주더, 부총지휘에 펑더화이를 임명하는 한편, 총 3개사(師)에 병력수를 2만 명으로 제한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팔로군 산하에는 린뱌오의 제115사, 허룽[賀龍]의 제110사, 류보청[劉伯承]의 제129사가 있었고, 팔로군에 대한 지휘권은 여전히 중국공산당이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팔로군 간부들에게 ‘중일전쟁은 본당의 발전에 좋은 기회이고, 우리들이 결정한 정책은 70%를 자기발전에, 20%를 타협에, 10%를 대일작전에 두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제2차 국공합작은 항일전을 위한 중공군의 일시적인 전략이었다. 신사군이 화중(華中) 지방에서 활약했던 데 비해, 팔로군은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항일전을 벌였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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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 6.
경남 밀양 출생

- 1910.11.
천장절(일왕의 생일)에 일장기를 학교 똥통에 처박아 버리고 김원봉과 함께 자퇴

- 1911.
김원봉의 연무단(체력단련모임)에 가입

- 1919. 3. 13.
밀양 3.13 만세시위 기획 및 주도

- 1919. 11.
만주 길림에서 의열단 창립 멤버

- 1932. 10.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1기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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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란?

1932년 중국 난징(南京)에 설립되었던 군사간부양성학교.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 장개석(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난징(南京)교외 선사묘(善祠廟)에 설립한 학교이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3년여 동안 운영된 이 학교의 명칭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인데 정식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이다.

이 학교의 설립목표는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에 두고 동교 졸업생은 국내와 만주로 파견되어, ① 일만요인 암살, ② 재만항일단체와의 제휴, ③ 선만 노동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공작, ④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교란, ⑤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획득 등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 훈련반은 6개대로 편성되어 제5대까지는 중국인들이 수용되었고 한인은 제6대에 소속되어 교육을 받았으며, 학교의 임원도 교장 김원봉 이하 간부들은 한중 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육내용은 정치과목·군사과목·실습과목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과목은 파괴·기습·유격전 등 특무공작에 필요한 과목들이었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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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 7.
민족혁명당 창립대회 중앙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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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혁명당이란?
중국 난징에서 결성된 민족연합전선의 성격을 띤 독립운동단체.


1930년대에 들어서 만주사변·상하이사변 이후 중국지역의 민족운동이 활성화하자, 1920년대 후반 이후 분산되어 침체상태에 있던 독립운동 세력이 전선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32년 10월 한국광복동지회·한국독립당·한국혁명당·조선혁명당·의열단(義烈團)의 5개 단체를 중심으로 중국 지역 통일전선운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단체가 연락기관의 역할밖에 못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더 견고한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해, 1935년 7월 난징[南京]에서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의열단의 5당 대표 14명이 모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이것은 동맹의 연합체적 성격을 넘어서는 강력하고 광범위한 통일전선체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한국독립당 내의 일부 세력이 불참했다.

조직체계는, 중앙에는 중앙집행위원회 아래 실무기관으로 서기부·조직부·선전부·조사부·훈련부·군사부·국민부를 두었으며, 지역에는 지부(支部)·구부(區部)·조(組)를 두었다. 1936년 초에는 화중(華中)·화남(華南)·화동(華東)·화서(華西)·화북(華北)·만주·조선의 7개 지부가 있었다.

강령은 삼균주의(三均主義)를 표방하고 민주공화국 수립, 토지 국유화, 대규모 생산기관의 국유화, 민주적 권리의 보장 등 통일전선이었으며, 군사공작·당원훈련·정보수집·자금조달 등의 활동을 수행하면서 기관지 《민족혁명(民族革命)》을 간행하였다.

민족혁명당은 인민전선론의 영향으로 1937년 12월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혁명자동맹 등과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했으며, 1938년 10월에는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조직하여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1년부터는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가 연합전선을 이룬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1942년 7월 산하 군사조직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8·15광복 후인 1946년 2월 좌익계 정치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6월 인민공화당(人民共和黨)으로 개칭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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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
항일가요 ˝최후의 전선˝ 작사

- 1939. 9
한구에서 조선의용대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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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조선의용대는 1938년 우한에서 김원봉이 만든 중국관내 최초의 한국인무장단체.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중국과 한국이 공동전선을 형성하면서 만들어짐. 중국도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제2차 국공합작이 나타나 힘을 합침.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중국공산당이 있는 옌안에서 중국공산당과도 활동하였고, 그들은 따로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부르기도 함.
그리고 중국국민당과도 활동하였는데, 1942년 김원봉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되면서 옌안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군단체로 조선의용군을 만들게 됨. 따라서 완전히 별개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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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 6.
중국 화북성에서 일본군에게 피격되어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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