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모든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모든 기준은 나이고,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나에게는 내가 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나"라는 세계는 상대방에겐 한낱 의미없는 세상의 일부일 뿐이지요.
반대로 상대방 또한 나에게는 작은 사건일 뿐입니다.
하루키의 이 책은 내 속의 더 깊은 우주속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아닌 작은 사건들이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 흔드는 기억을 소환해서 맞이합니다.
그 기억들은 서로의 우주 안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나"와 "너", "일인칭"과 "이인칭"이 어우러집니다. 때론 "그들"도 함께요.
이처럼 지나간 일을 떠올리다보면 아주 사소한 사건이 당시엔 나의 우주 전부였다..라는
기억~ 누구나 경험해 봤을거예요. 어쩌면 우린 일인칭 단수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닐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야말로 의미없는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은 자전적 이야기지만, 다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또 다시 보여주는 환상적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엔 어렵습니다. 하루키 말처럼 문학에서 비교적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 과연 미덕인지는 의문입니다.
우리 삶도 대체적으로 이성이 관여하는 부분은 극히 미미하다고 하지요.
이 책을 굳이 이해하기 위해 읽으시면 이 책 뭐지? 라고 실망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하루키니까요~
'일인창 단수'란 세계의 한 조각을 도려낸 '홑눈'이다.
그러나 그 단면이 늘어날수록 '홑눈'은 한없이 서로 얽힌 '겹눈'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私)는 이미 내가 아니고, 나(僕)도 이미 내가 아니다.
또한, 그렇다. 당신도 더이상 당신이 아니게 된다.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 무라카미 하루키
총 8개의 단편 중 2-3가지 단편 중에서는 예의 하루키 소설처럼 재즈나 클래식이 나옵니다.
난 재즈나 클래식을 잘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좋아할 수도 없구요. 설령 알더라도 취향은 아닙니다.
몇번 친해질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피에르부르디외가 그의 저서 <구별짓기>에서 언급한 "아비투스"의 한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처럼 태생적이고 계급적인(?) 이유로 하루키 책안의 재즈나 클래식에 대한 사설은 솔직히 고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재즈나 클래식 얘기가 싫지않은 건(좋다!라고는 말못하겠습니다.)
하루키의 총합을 이루는 구성 요소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1Q84>의 첫 장면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는 건 클래식 덕분이지요.
아오마메가 정체된 도로위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첫 부분을 듣고 알아맞히는 장면!
여담이지만, 하루는 지인과 하루키 이야기를 하다 이 첫장면과 이 교향곡명을 정확히 이야기해주니 저보고 "대단한 덕후"라고 놀라더군요. 그 때 첫 장면을 <신포니에타>교향곡을 들으면서 읽었으니. 어찌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저처럼 재즈나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도, 또 즐기는 사람도 이런 저런 연유로 하루키 월드 음악에 대해서는 "싫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래는 8편의 단편 중에서 줄친 문장입니다.
◈ 두번째 단편 <크림>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말고, 고민도 하지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게가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 48쪽
◈ 세번째 단편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
고등학교 건물의 어둑한 복도, 아름다운 소녀, 흔들리는 치맛자락, 그리고 <위드 더 비틀스> - 77쪽
그렇게 기억이란 때때로 내겐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 79쪽
그리고 그 정경은 순식간에 내 마음속 인화지에 선명히 아로새겨졌다. 아로새겨진 것은 한 시대 한 장소 한 순간의, 오직 그곳에만 있는 정신의 풍경이었다. - 83쪽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저 요란하게 꾸민 소모품일 뿐인지도 모른다. - 87쪽
여동생은 내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듯했다.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무표정한 눈으로 -냉장고 안쪽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건어물이 아직 먹을 만한지 점검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은 항상 내게 어딘가 켕기는 기분을 안겨주었다.이유는 모르지만, 그애는 나를 쳐다볼 때 외모는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고(하긴 그렇게 볼만한 외모도 아니었지만) 나라는 인간의 내면을 똑바로 투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것도 다 실제로 내 마음에 제법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 91쪽
◈ 여섯번 째 단편 <사육제(Carnaval)>
딱 한 곡만?
그래요. 딱 한 곡만. 하고 F*는 말했다. 말하자면 무인도에 가져갈 피아노곡(...)
"슈만의 <사육제>"라고 나는 끝내 마음먹고 말했다. - 161쪽
언젠가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사육제>를 꼭 들어보고 싶다는 건 나 하나만의 소망이 아닐 것이다. - 164쪽
"슈만은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젊어서 매독에 걸렸고, 그 병을 몸속에 지닌 채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갔어. 게다가 원래부터 분열증 증세가 있었지. 일상적으로 집요한 환청에 시달리고, 몸이 한번 떨리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어. 그는 자신이 악령들에게 쫓긴다고 믿었어. 악령들의 존재를 진짜로 믿은 거야. 끝나지 않은 무서운 악몽에 쫓겨서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했어. 라인강에 몸을 던지면서까지.(후략)" - 168쪽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 - 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 169쪽
<사육제>의 새로운 음반도 여전히 사모으고 있다. 그리고 노트에 채점을 매긴다.수많은 신보가 나왔지만 나의 베스트는 지금도 변함없이 루빈스타인이다. 루빈스타인의 피아노는 사람들의 가면을 억지로 벗기려 하지 않는다. 그의 피아노는 가면과 민낯 사이를 바람처럼 부드럽고 경쾌하게 빠져나간다. 행복이란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야. 그렇지 않아? - 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