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소개했다.

니체의 어떤 책들을 읽어야 하는지 궁금한 분들을 위해 포스팅한다. 

* 발췌한 부분을 나름 생략, 편집하였음을 양해바랍니다.


니체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 거의 백 년이 다 돼 간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니체라는 이름과 몇가지 소문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니체 이해가 어렵다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라고는 하지만, 유행과 이해의 괴리가 우리만큼 큰 곳이 또 있을까.(...)

재작년 니체에 관한 책<니체-천개의 눈, 천개의 글>을 낸 후로 니체를 읽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니체 읽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 도대체 무슨 책부터 읽어야 하느냐. 하지만 내가 그 분야 책들을 쫙 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마땅히 기막힌 입문서를 발견한 경험도 없는지라 대부분의 경우 그냥 니체 책들을 직접 읽는 게 좋다고 해왔다.

나역시 어떤 입문서를 읽고 니체를 접한게 아니었다. 우연히 <도덕의 계보학>을 읽다가 '감전'된 터라, 그저 감전될 기회를 기다리라고,(...)

그래도 누가 고집스럽게 묻는다면 내가 권하는 책은 오이겐 핑크와 알렉산더 네하마스의 책 정도였다. - 402쪽



1. 오이겐 핑크(E.Fink), <니이체의 철학 : Neitzsches Philosophie (하기락 옮김, 형설출판사, 1984)



- 1960년에 출간, 국내에 1984년에 번역, 소개되었다. 절판되어 도서관이 아니면 구하기가 쉽지 않다. (역시 알라딘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학술 서적 읽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이나 문체에 많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들을 추천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이 책들이 니체의 저서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부조가 아닌 환조로서 니체의 상을 조각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조각된 얼굴이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핑크는 원래 하이데거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의 해석 "니체는 최후의 형이상학자이자 형이상학의 완성자다"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고 "존재와 생성이 유희로서 파악될 때, 니체는 이미 형이상학에 붙들려 있지 않다"고 한다.


2. 알렉산더 네하마스(A.Nehamas) <니체-문학으로서의 삶 :Nietzsche-Life os Literature (김종갑 옮김, 책세상, 1994)


오~알라딘에 있다.

1985년에 출간, 번역은 1994년에 이루어졌다.

네하마스의 니체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을 끌어들여 공동의 세계를 창조하고 싶어하는 말 그대로의 '작가'이다.

그는 읽는 사람들을 자꾸 동료로 끌어들인다. 이야기를 듣는, 책을 읽는 너의 입장은 무엇인가? 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생각은 이렇다. 그렇다면 네 생각은 어떤가? 그것은 니체 자신의 물음이면서, 동시에 세계가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네하마스는 해석을 강조하는 니체에 주목한다.(...)



>>>> 외국 원서를 직접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핑크나 네하마스의 것에 견줄 수 있는 책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 것이다.

물론 이들 책에도 아쉬움은 있다. 핑크 책은 번역 문장들이 너무 예스럽고 오역이 제법 있는 편이다. 게다가 구하기까지 어려우니 누군가 재번역을 했으면 싶다. 네하마스 책은 영미 철학의 전통 때문인지, 지식의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문제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그 입장도 다소 어정쩡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3. 고병권 <니체-천개의 눈, 천개의 길 (소명, 2001)


각 장이 주제별로 뚜렷이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각각의 개념들이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어 하나의 니체를 구성한다.(...)

저자의 색깔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으나, 그것을 감추기 위해 니체로부터 직접 인용의 형식을 많이 취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 책에서 니체은 예수,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맑스, 비트겐슈타인, 들뢰즈 등과 소통한다.(...)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그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또한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 그 진정성을 찾아내는 일도 아니다.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니체를 창조하는 일이다"




4. 박찬국 <해체와 창조의 철학자, 니체 (동녘, 2001)>


니체 원문의 맛을 느끼면서 그 해설을 듣고 싶으면 박찬국의 책을 보는 게 좋다.

박찬국은 니체의 책에서 뽑은 잠언들을 주제별로 묶어, 간략하면서도 꼭 필요한 해설들을 담고 있다.(...)

저자 말대로 그 동안 '니체 잠언록'이란 이름으로 여러 권의 책들이 나온 게 사실이지만, 대부분이 단순한 모음집이어서 독자들이 니체를 이해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며, 심지어는 황당한 편견까지 조장해 온 게 사실이다.

책에 인용된 니체의 잠언들도 적절하지만, '오버'하지 않으면서 차분히 인정할 수 있는 사실들만을 기록한 점에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때문에 책은 무척 검소한 느낌을 준다.



5. 김상환 외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 (민음사,2000)>


니체 사상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그리고 그와 관련된 논쟁들의 지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니체 사후 100년을 기념해서 나온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들은 또한 니체와 니체 해석자들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이해 수준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자신감 있는 어투다. 그 동안 우리는 니체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는 고사하고, 저자가 니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작품들을 접해 왔던 것이다.




6. 성진기 외 <니체 이해의 새로운 지평,(철학과 현실사, 2000)


메뉴로 보면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보다 이 책이 훨씬 다양하다.(...)

저자들의 색깔은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보다 덜 두드러지고 문체도 전형적인 학술 논문투다.

하지만 제기된 문제들로 보면 이 책이 훨씬 풍성하다. 각 부마다 짤막하게 번역된 외국 저자들의 글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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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중요한 니체 해석가들의 글을 직접 읽어보고 싶은 이들을 위한 소개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새로운 니체'에 관해 알고 싶다면 하이데거,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의 글을 직접 읽어보는 게 좋다.

(무시무시한 이름들이 나오기 시작한다..그래도 명품들이 이들의 책에서 쏟아지는 것을 감안하면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7. 마르틴 하이데거(M.Heidegger) <니체> (김정현 옮김 <니체철학강의 I>, 이성과 현실사, 1991 / 박찬국 옮김 <니체와 니힐리즘>, 지성의샘, 1996)


하이데거 사상의 난해함이나 그 엄청난 분량을 생각하면 도저히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지만, 중요성을 놓고 보면 읽지 않으면 안 될 책이 분명하다. 하이데거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니체를 연구하든 하이데거를 연구하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가르칠 것은 자기 극복의 강화가 아니라(니체의 말), 세계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이라고 주장한다.



8. 질 들뢰즈(G.Deluze) <니체와 철학>(이경신 옮김, 민음사, 1998)


이 책은 고병권 작가가 가장 좋아하고 최고로 꼽는 책이다.

1962년 이 책이 출간되자 프랑스에서는 니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었을 정도다.

국내에는 <니체, 철학의 주사위(신범순,조영복 옮김. 인간사랑)>라는 제목으로 1993년에 번역, 소개되었고 1998년에 <니체와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들뢰즈의 니체 해석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질적인 차이에 따른 힘의유형화다.(...)

둘째로 들뢰즈는 니체의 비판이 갖는 급진성을 부각시킨다. 그는 오성과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법정에 세웠던 칸트의 비판 기획과 법정 자체를 법정에 세우는 니체의 비판 기획을 대비시킨다.(...)

셋째로 들뢰즈는 니체의 사유를 헤겔의 사유, 특히 변증법과 대립시키고 있다.(...)

넷째로 들뢰즈는 차이의 긍정과 그 생산의 긍정 속에서, 들뢰즈 자신의 철학 개념인 '차이와 반복'을 발견해낸다.


9. 미셀푸코(M.Foucault) <니체, 계보학, 역사>(이광래, <미셀푸코>, 민음사, 1989)

알라딘에 검색해 보니 나오지 않는다.

니체의 계보학에 대한 설명으로는 짧은 논문, 이 글이 단연 뛰어나다.

푸코의 글을 통해 우리는 계보학자와 역사학자가 과거의 사실들을 다룸에 있어 얼마나 다른 태도를 견지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니체가 지식이나 도덕 감정의 '기원'을 파헤칠 때, 그는 그것들의 숭고한 기원을 밝히려는 게 아니다. 그는 그런게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

푸코의 니체는 니체의 여러 얼굴 중 내가 가장 전율하는 얼굴이다.




10. 자크 데리다(J.Derrida) <에쁘롱-니체의 문체들>(김다은,황순희 옮김, 동문선 1998)


'에쁘롱'이란 말은 '돛을 단 범선의 충각'이나 '박차'처럼 뽀죡하게 튀어나온 것을 의미한다. 문체(스타일)란 말 또한 뾰족한 펜 끝을 나타낸다.

데리다는 참 가볍고 경쾌하다. 무게로만 따지면 데리다의 지체가 제일 가벼워 보인다.

심각한 철학자는 쉽게 그의 놀림감이 될 것이다. 그중 '하이데거'가 딱 걸렸다.

데리다의 니체 해석은 하이데거를 겨냥한다.(...)

데리다의 에쁘롱은 <오늘날의 니체>에 기고되었던 논문인데, 197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번역이 괜찮다고 <에쁘롱>이 쉽게 읽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당한 집중력을 요한다.



11. 뤼드거 슈미트(R.Schmidt) & 코르드 슈프레켈젠(C.Spreckelsen) <쉽게 읽는 니이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김미기 옮김,이학사,1999)


이 책은 고병권의 책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상당히 쉽게 쓰였다.(...)

이 책의 미덕은 확실히 니체에 관한 다른 어떤 책보다 쉽다는 것, 그리고 설명도 균형이 잡혀 안정감을 준다. 적은 분량에도 상당히 다양한 메뉴를 준비했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하지만 적은 분량에 많은 메뉴는 장점보다는 약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각각의 글들이 말 그대로 메뉴판에 실려 있는 설명 같은 느낌이 든다. 호흡이 짧은 것은 철학책을 읽는 게 서투른 독자들에겐 미덕임에 분명하지만 어쩐히 허전한 느낌이다. 짜라투스트라를 위한 '포켓용 콘사이스 사전'같다고나 할까. 용어설명 있고 용례 있고 하는 식으로.



12. 안네마리 피퍼(A.Pieper)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대한 철학적 해석>(정영도 옮김, 이문 출판사. 1996)


니체 생애에 대해서는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단점은 니체의 성장기에 지나치게 많은 지면을 할애한 점이다.



13. 니체 <이사람을 보라>


이 빨간책은 설명할 필요 없는 책일 것이다.

고병권은 니체의 생애와 관련해서 이 책을 권한다.

이 책에 담겨있는 작품중에 <이 사람을 보라>가 바로 그것이다.

전기란 이렇게 써야 하지 않을까, 인물이나 작품의 배경 지식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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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을 하다보니, 소개된 책들의 면면이 대중적으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독자들이 있게 마련이라, 이 글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

물론 고병권 작가의 책에서 발췌한 소개지만, 소개글만 대충 읽어보아도 니체를 어떻게 만나야 될지 감이 잡힐 것이다.

고병권 작가가 <도덕의 계보학>을 처음 접하고 감전된 것처럼, 나또한 고병권 작가의 책을 읽고 제대로 니체를 만난 듯한 느낌이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부동의 1위 도스토예프스키의 자리를 니체가 꿰차지 않을까.

선악, 신의 죽음, 영원회귀, 위버멘쉬(초인) 등의 주요한 개념들에 대해 정확하고 깊이 알지 못했던 예전에..항상 니체를 거론하기 두려웠었는데, 이젠 적어도 그 용어에 대해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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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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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치누아루모구 아체베(Albert Chinualumogu Achebe) : 1930~2013(84세)

나이지리아에서 출생, 목사인 아버지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 남편의 이름을 따 아들의 세례명을 앨버트라 함.



[치누아아체베의 5부작] 의 배경

1.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1958) : 영국이 나이지리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침입해 오기 시작한 19세기 말

2. 신의 화살(1964) : 영국의 지배체제가 완전히 정착되고 기독교가 전통 종교를 무너뜨리는 1920년대

3. 평안과의 이별(1960) : 독립으로 나아가는 정권 이양기 동안 도덕적 해이에 직면하는 1950년대

4. 민중의 사람(1966) : 소망하던 독립을 이루고 민족국가를 세웠지만 이후 무질서와 정치적 부패가 만연한 1960년대 말

5. 사바나의 중심가(1987) : 혼돈과 좌절 그리고 정치적 불안정과 새롭게 다가오는 외세 속의 1980년대



>>>> 발췌(작품 해설)


p.251

영국이 노예무역에 머물던 단계를 지나, 직접 아프리카 내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19세기 중반부터다. 영국에게 아프리카는 정복할 가치와 용이성이 있는 마지막 대륙이었고, 1841년부터 시작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의 선교 활동과 탐험은 결과적으로 그 선발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p.252

1960년 나이지리아가 공식적 독립을 이룰 때까지 외세의 무력은 오랜 세월 지속해 온 토착 전통 체제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

이 소설이 발표된 1958년의 나이지리아는 이제 독립이 약속되고 정권 이양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

그는 자신들의 공동체와 전통이 서구에 의해 폭력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되돌아보고, 풍요로웠던 전통문화를 기억하면서 이에 내재된 정신을 새로운 국가 건설의 도덕적이자 문화적인 토대로 재설정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p.253~254

역사에서 보이듯 주인공 오콩코와 그의 우무오피아가 맞은 파국에는 서구 제국주의와 문화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체베는 이 작품을 통해 주인공 개인의 책임과 그 개인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가 져야 할 책임 또한 거론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 비극의 원인은 가장 크게는 정치사회적 변화, 특히 서구 제국주의에 있지만, 작가는 자신의 사회 문화가 갖는 한계와 약점을 지적하는 것 또한 바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큰 것은 아니지만, 이를 간과하지 않고 냉철한 눈길로 점검하는 것은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p. 257

사실 아체베 이전의 나이지리아, 나아가 아프리카는 스스로를 알리기보다는 항상 알려지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더 많은 경우는 서양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단순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아프리카를 가장 진지한 배경으로 사용한 영문학 작품으로는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과 케리의 <미스터 존슨> 등이 있다.

(...)

아체베가 이후에 분명히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콘래드가 어떻든 아프리카에 대해 우호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일반적 평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p. 259

아체베는 작품의 제목들을 서구 문학 작품에서 빌려 오는 것에 서슴지 않는다. 이 작품의 제목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W.B.Yeats)의 시 <재림>에서 따왔다.(....) 아체베는 문학적 접촉과 교류에 있어 관용의 폭을 넓힐 것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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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보자.


-> 그(치안판사)는 많은 생각 끝에 이미 책의 제목을 정해 놓았다. "니제르 강 하류 원시 종족의 평정"


우무오피아란 마을에 영국의 선교사가 들어옴으로써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비극을 주인공 오콩코의 눈으로 그려내다가 

마지막에 지배자인 영국이 모든 스토리를 한줄로 못 박아 버렸다.

마치 조정래 선생이 <아리랑>에서 일제치하 농토를 빼앗겨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직접 그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냈는 상황을, 

역사책에는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 한줄로 명명한 그 느낌처럼.


빼앗긴 자는 늘 빼앗은 자의 배경으로 남는다.

문학이나 예술이나 혹은 인간관계 모두에서 말이다.

그리고 빼앗긴 자의 분노는 그들의 체념만큼이나 적.막.하.다.

그리고 반드시 그 체념에는 부지불식간에 빼앗은 자의 폭력을 회피 또는 순응하게 됨으로써 정당화의 구실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실례로 4천년간 나라없이 떠돌던 쿠르드를 보면 알 것이고,

멀쩡한 자기네땅을 빼앗겨 핍박받는 팔레스타인을 보면 분명하다.

쿠르드는 터키와 이라크, 시리아와 이란에게는 그저 떠돌이 산악부족이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게 걸리적거리는 쓰레기일 뿐이다.

우린 그들의 이야기를 미국의 뉴스에서 듣고, 유력지 헤드라인에서 요약한다.

바로 우리가 한때 쿠르드였고 팔레스타인인 것을 모른체 말이다.


우리의 전통과 혼이 일제 치하에서 얼마나 산산이 부서졌는가를 알면, 

아프리카 문학을 대할 때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되는가도 생각해 볼일이다.

그리고, 특정 민족에 속해 있는 한 작가가 객관적인 또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집필하려는 그 노력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지를 안다면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의 파국적 상황에 대해 갖는 책임과 동시에 나이지리아 전통문화의 한계를 동시에 이야기하고자 한

치누아 아체베가 과연 '중용'의 칼날위에 서 있는지 그 균형감에 대해서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막연히 선과 악으로만 읽어왔던 아프리카 문학, 

아름다운 자연으로만 보다가 질척한 밀림 속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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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거의 다 모으다보니 예전처럼 책구입을 덜하는 편이다.

책을 살때 내 딸이 커서 읽기에도 세월의 타격을 받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 위주로 구입하다 보니, 

소장하고 있는 작품 대부분이 고전이다.

때론 신간을 사고 싶은 유혹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피한다. 

간혹 신간중에서 구미가 당기는 책은 전자책이나,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다 읽고 책장에 놔두면 왠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비싼 옷을 산 것처럼 저거..어떻게 처리해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기 때문이다.

책장에 꼽혀 있는 책만 다 읽기에도 버거운 판에 쏟아져 나오는 신간까지 손댈 순 없다는 마음도 한몫한다.

혹여 신간중에서도 굵직한 두께와 풍성한 깊이의 책이 나올 땐..그건 뭐..또 살 수 밖에 없다..빌려서 보기란 스트레스 받지 않은가.

이번에 구입한 12권의 책도 모두 중고책이다.

줄을 긋고, 정리를 해야만 온전히 그 책을 읽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순결한(?) 새 책보다는 중고책이 훨씬 맘편하기 때문이다.

뭐, 사실 형편이 안되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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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10-19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책장 정말 볼 때 마다 좋아요~

북프리쿠키 2019-10-19 20: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초딩님~
더 많은 책, 더 넓은 책장 욕심이 가끔 생기기도 하는데 딱 요 정도 채우고 사는게 적당한 것 같아요.
뒤적거리면서 연관된 책 문장들끼리 포스팅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박균호 2019-10-1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좋아하지만 절제를 하면서 한 권 한 권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보기도 좋고 닮고 싶고 그러네요.

레삭매냐 2019-10-19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것도 그렇지만 사는 것도
쉽지 않아지는 것 같습니다.

잘못(?) 구입한 책은 정말 처분하기
도 난감하더라구요.

저도 그래서 요즘엔 중고 위주로
사고 있답니다.

kanos5 2019-11-28 0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저랑 책구입하는 이유가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저도 초2학년 딸이랑 나중에 같이 읽고 토론하고 싶어서 고전 위주로 구입하고 있습니다 엄마 마음은 다 똑같은가 봐요ㅎㅎ 오늘 처음 방문인데 자주 오고 싶네요 반갑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다.

책 표지 그림은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가 그린 <압생트 마시는 여자(1875~1876)>이다.

압생트는 '고흐의 술'이라고 불린다.

쑥을 주원료로 하여 만드는 증류주로 75도에 이를 정도로 독한 술인데, 값이 비싸지 않아 서민들이 즐겨 마셨다.

독성으로 사람들을 환각상태에 빠지게 한다는 이유로 '악마의 술'이라고 불리며 한 때 생산이 금지되기도 했으나,현재는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싸구려 독주를 마시는 여인의 모습에서 파리의 우울함이 엿보인다. 그건 아마도 보들레르가 경멸했던 '대중'의 초상화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가 그린 <압생트 마시는 여자(1875~1876)>출처-Wikipedia

 

 

 

 

 

고흐의 그림에서도 압생트가 등장한다.

 

반 고흐 <압생트와 카페 테이블> 1887년 作 출처-Wikipedia

 

 

 

그리고, 고흐의 초상화에서도 압생트가 등장한다.

 

로트렉<고흐 초상화>1887년 作  출처-Wikipedia

 

 

 

 

 

 

다시 유명한 그림에서 압생트는 또 등장한다.

 

 

반 고흐 <아를의 밤의 카페> 1888년 作 - 출처-Wikipedia

 

여긴 고흐의 친구 카페 여주인 마리 지누가 운영하던 카페 드 라 가르(Cafe de la Gare)였다.

뜻은 오고 가는 사람들의 정거장이라는 뜻이다. 테이블 위에 보면 압생트가 보인다. 고흐는 이곳에 오면 기분이 묘해져 자포자기하거나 미치고 싶어하거나 또는 죄를 저지르고 싶었던 장소였다고 말한다. 

 

 

 

출처-Wikipedia

 

다양한 압생트의 생산품이다.

고흐, 피카소, 랭보, 드가, 모파상, 헤밍웨이, 에드거앨런포, 에밀졸라, 오스카 와일드등 수많은 화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한다. 가격이 싸고 도수가 높아서.

주성분인 향쑥이 환각증세를 유발해 녹색의 요정이 보인다고 하여 녹색요정의 술이라고도 불리웠다.

현재 문제되던 주성분만 빼고 수백개의 압생트 브랜드가 판매되고 있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The Absinthe Drinker)1901 - 빅토르 올리바(Viktor Oliva) 출처-Wikipedia

 

 

 

 

피카소의 생소한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압생트는 등장한다.

 

 피카소 - 압생트마시는여인,1901 [출처] 다소 생소한 피카소 작품 전시

 

난 술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포스팅을 하고 나면 한번쯤 맛을 보고 싶다.

여러분도 땡기지 않나요?

 

 

보들레르는 아르센 우세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헌사에서 ‘소산문시‘에 대한 최오의 영감은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유명한 <밤의 가스파르>를 끈질기게 정독한 데 있었다고 허심탄회하게 고백한다.-10쪽

어릴때부터 시인은 사람들 속에서 ‘가족 사이에서도‘고독을 느꼈고, 이 고독감은 머지않아 그의 유명한 ‘댄디즘‘의 모체가 된다. 속인들과 구별되는 정신적 우월감이 보들레르의 댄디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정신적,도덕적 원칙이며, 이 추구속에서 댄디는 고독할 수 밖에 없다.
‘진정한 영웅은 오로지 혼자 즐긴다‘라고 그는 <내면일기>에 쓴다.-23쪽

자연이 주는 황홀감 속에서 동시에 느끼는 절망감은 보들레르의 사랑에서도 나타나며, 그것이 사랑과 예술의 공통되는 이중성이다. 예술가는 자연 앞에서 환희와 동시에 절망을 느끼며, 여인앞에서도 사랑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낀다.-33쪽

시인이 말하는 ‘우울‘은 낭만주의의 감상죽의적 우수가 아니다. 영혼의 거의 초자연적 상태 속에 맛본 황홀경과 몽상에서 깨어나는 비극적인 전복으로 전개되는 이 시의 리듬은 또한 <악의 꽃>의 많은 시들의 리듬을 말해 주며, 나아가 <악의 꽃>의 큰 흐름인 우울과 이상의 리듬을 요약해 준다.
미의 추구는 이처럼 보들레르에게 끊임없는 유혹이고 모험이며, 또한 끊임없는 좌절이었다.-34쪽

대중에 대한, 특히 프랑스 대중에 대한 그의 경멸과 혐오는 유명하며, 그의 작품 많은 곳에 나타난다.
"프랑스인은 매우 잘 길들여진 가축장의 동물인지라 감히 울타리를 뛰어넘을 생각도 못한다. 그들은 라틴 종의 동물로, 우리에 있는 오물을 싫어하지 않는다. 문학에서 그들은 식분류의 곤충으로, 분뇨에 미쳐 날뛴다."<마음을 털어놓고 XXXIV>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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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0-19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압생트가 그렇게 독한 술이라고
하던데...

한 번쯤은 마셔 보고 싶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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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 중에서


p.181 

한트케가 주제나 소재 면에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많은 작품들과 여러 인터뷰를 통해, 적어도 문학 활동과 관련해서는 자신 이외의 여타의 것에 대해 관심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

그 중에서도 특히 [소망없는 불행(1972)]과 [아이이야기(1981)]가 그런 주제 의식에 부합하는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며 그의 작가로서의 발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p.182

[소망없는 불행]은 1971년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고 자살한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씌어진 산문으로 어머니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한 인간이 자아에 눈떠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

[아이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것으로 한트케가 연극 배우였던 첫째 부인과 결별한 후, 딸 아미나를 맡아 기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씌어졌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러 의미에서 '폐허'로 가득 찬 자신의 어린 시절로 인해 가정생활이라든가 가족 관계 등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자신이 딸을 키우며 그것들의 소중함을 인식해 가고 결국은 한 인간 속의 소우주까지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 이 작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 본문 발췌(소망없는 불행)


p.9 첫문장

케른텐에서 발행하는 신문 <폭스차이퉁> 일요일 자 부고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토요일 밤 A면(G읍)의 51세 가정주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



p.11

경악의 순간들은 언제나 아주 잠깐이고, 그 잠깐이란 시간은 경악의 순간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현실의 감정들이 치미는 순간이며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다시 모른체해버릴 순간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군가와 함께 있게 되면, 마치 지금 막 그에게 불손하게 굴기나 한 것처럼 이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p.17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이란 없었다.

사소한 불장난, 몇번의 킬킬대는 웃음, 잠깐의 당혹감, 그러고 나서 처음 짓게 되는 낯설고 침착한 표정. 다시금 찌들린 집안 살림이 시작되고 첫아이가 태어난다. 부엌에서 바쁘게 일한 후 잠깐 사람들 틈에 끼지만 여자들의 말은 처음부터 누구나 건성으로 들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여자들 자신도 점점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게 되고 혼자말이나 중얼거리게 된다.

나중에 두 다리로 서는 게 불편해지고, 혈관 경련이 오고, 잠자면서 중얼대기 시작하고, 자궁암에 걸리고, 드디어 죽게 되면 예정된 섭리는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을의 여자 아이들이 많이들 하고 노는 말잇기 놀이도 <피곤하고/기진하고/병들고/죽어가고/죽고>라는 식으로 여자의 삶을 나타냈다.



p.57

그녀는 나와 함께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팔라다, 크누트함순, 도스토예프스키, 막심 고리키를 읽었고 그 다음엔 토마스 울프와 윌리엄 포크너를 읽었다.(...) 독서를 함으로써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감싼 껍데기로부터 벗어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



p. 87 마지막 문장

나중에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훨씬 더 자세히 쓰게 될 것이다.



>>>>>> 본문 발췌(아이 이야기)


p.109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아내와 나누었던 가장 다정하고, 가장 친밀하고, 가장 은밀한 동작과 말없이 가만히 이름을 부르곤 하던 행위를 깊은 생각이나 망설임 없이 아이에게로 옮겨 했고 나중에는 그만큼 아내의 존재를 비하해 버렸다. 마치 아이야말로 자기에게 합당한 존재이고 이제 아내 따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

그럼에도 그는 아내 없이 돌볼 것 투성이인 아이와 단둘이 사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p.113

그들에게 낯선 아이는 평화를 깨뜨릴 뿐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에도 어긋났다.

남자는, 지겨워하면서 싫증내거나 평온을 침해 당해 흥미없어 하는 많은 시선들이 자기 아이에게 쏟아지는 것을 이미 보았다.

어쩌면 그 자신도 그런 시선을 보낸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p.115

아이들은 모든 인간에게 영혼이다.

이것을 체험하지 못한 자는, 비록 별로 고통을 당하지 않더라도, 그 편안함은 온당치 못한 행복이다.



p.117

다시 불화, 그는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녀의 행위를 비난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기의 천부적인 취미를 살리겠다고 자기 아이를 떠날 수 있었을까?

<아이>에 대한 의무는 이러쿵저러쿵 질문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되는 자연스러운 것, 분명한 것이 아니었던가, 자명한 것을 부인하고 구속력 있는 현실을 부인함으로써 얻게 된 업적은 그것이 아무리 놀라운 것일지라도 처음부터 불명예스럽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었던가?



p.118

아내가 집을 나간 바로 그날 정오, 아이가 잠든 동안 남자는 미친 듯이 자기 일에 매달렸다.

글 쓰는 행위야말로 세상사를 적대시하며 승리감에 싸여 계속 일하게 된 동기였다.



p.119

방해받지 않고 자기 속에 침잠해 있으면서 늘 하는 식으로 그냥 아이와 함께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p.120

당시 일거리도 없었던 그의 일상은 오직 아이가 내는 소리와 아이의 물건들로만 이루어지고, 아이의 생활 리듬에 따라 흐르는 일상을 잔인하고도 무의미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더 강도 높게 체험했다.



p.128

아이가 구현하는 인간 존재는 남자에게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진리의 척도를 제시해 주었다.



p.143

그때 그는 날마다 벌어지는 일에 영감을 주었던 것이 바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가 없다는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이다.



p.159

더군다나 많은 교사들이 평생토록 아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 죄악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 교사들은 아이와 말을 했지만, 소리가 없었고, 아이를 관찰했지만 시선이 없었다. 모든 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평정과 참을성은 학생들이 느끼기에는 그저 무관심일 뿐이었다.


p.171

아이들의 두 눈은 -그 눈을 보아라!- 영원한 정신을 전해 주었다. 만일 그런 시선을 못 본다면 그대는 정말 안됐다!



p.179 마지막 문장

이미 씌어진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 아이의 모든 이야기에 언제나 부합될 어떤 시인의 문장을 깊이 생각한다.

바로 <칸틸레네-사랑과 모든 열정적인 행복이 충만하길>라는 문장을.





>>>>>> 감상


작년인가 한트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관객모독(1966)>을 읽었다.

등장인물도 대사도 지문도 없는 그냥 산문으로 이루어진 희곡작품이었다. 

아방가르드나 전위, 실험적 기법, 모더니즘 등등 무서운(?) 용어들로 작품을 추켜 세우면 읽을 맛이 나지 않는다. 아니 읽는 것이 겁난다.

그러니 한트케 책을 몇권 소장하고 있었지만 읽을 순위안에서 멀어질 밖에.

특히, 노벨문학상 수상을 못했더라면 관객모독을 읽고 받은 '모독'때문에 아마 영영 읽지 못했을 수도..

며칠전 <페널티킥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970>을 호기롭게 집어 들어 다 읽어버렸지만..아..이 책은 스토리도 있는데...왜..왜..여전히ㅠ.ㅠ

이왕 배린 몸..이라는 오기로 연달아 <소망없는 불행(1972)> 첫 문장을 읽어버렸다.

다행히 엄마의 자살 이후 인생을 되돌아보며 쓴 자서전 격인 글이었다. 그래도 한트케 형님이 1970년대 이후로 서사로 턴했다고 소문이 났던데..군데 군데 문장에서 다시 날 안드로메다로 보냈다.

엄마의 자살은 1971년, 그리고 첫번째 부인과 이혼한 것도 1971년.. 한트케 형님 최고의 힘든 시절이었지 아닐까?

이혼 후 갓난아이 딸 '아미나' 를 키우면서 겪는 어려움과 행복을 <아이 이야기(1981)>에 담았다.

개인적으로 2가지 이야기 중에 <아이 이야기(1981)>에 많은 공감을 받았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이 동시에 아이키우는 일에도 매달리는 것 자체가 어느쪽 하나도 온전히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이.(내 경험으로 보아 집중해서 책 읽을 때 아이가 옆에서 놀아달라고 하면..무조건 두 개중에 한개는 완전히 포기해야 된다..늘 반성하는 부분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여자들이 독립된 방을 갖지 못하고, 온갖 잡다한 집안일에 몰두하며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또 같은 이유로 제인오스틴은 이 테마에 대해 당시의 사회제도 속에서 얼마나 고민하며 글을 써 왔는가..

이러한 명제가 바로 홀로 딸아이를 키우는 한트케가 직면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글을 읽으며 떠오른 또 한 사람의 작가가 있다.

바로 천재의 광포한 이기주의에 빠져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 루소..아~그렇게 비난받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처절히 옹호했건만..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욕을 먹고 있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


"자식들을 고아원에 넣었다는 데 대한 비난이 약간의 말재간으로 쉽게, 아이들을 싫어하는 몹쓸 아버지라는 비난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까닭은 바로, 다른 방도를 취했을 경우 훨씬 더 나쁘고 피하지도 못할 내 자식들의 운명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자식들의 장래에 보다 무관심했더라면, 직접 캐울 수 없는 내 처지로서는 아이들 버릇을 망쳐놓을 아이들 엄마와 괴물로 만들어놓을 외가 친척들이 기르도록 맡겨야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오싹해진다.(...)

아이들에게 가장 덜 위험한 교육이 고아원 교육임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들을 보냈던 것이다."

- 문학동네: 장자크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아홉번째 산책 146쪽


아무리 루소가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고 있던 바로 그 시기가 정열을 바쳐 자신의 일을 할 나이였지만,

루소 자신이 <에밀>에서 주장하고 또 이행을 회피하는 자에 대해 강력이 비난하고 있는 바로 그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게을리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과오에 대한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속죄'라는 말을 사용하며 과거의 그 행위를 참회하고 있다.

<에밀>에서 아버지로서의 중요함을 밝힌 대목을 보자


"참된 유모는 어머니이듯이 참된 가정교사는 아버지이다. 교육 방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역할의 순서에서도 부모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라. 어머니의 손에서 이어 아버지의 손으로 옮겨가게 하라.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선생보다는 평범하지만 분별이 있는 아버지에 의해 아이는 더 훌륭하게 교육될 것이다." - 한길그레이트 출판사 : 장자크루소 <에밀> 82쪽



한트케는 프랑스 최고의 천재라 일컫는 루소가 실천하지 못했던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물론 한트케와 루소를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구석이 있다.

또한, 누가 더 잘 했고, 잘못했고 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위대한 일을 해낸다는 것은 반드시 예술이나 문학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의 겸허한 의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트케의 작품은 워낙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된 2가지 사건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 말하는 문학동네판 <긴 이별에 대한 짧은 편지(1972)>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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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0-15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트케고 루소고 뭐고 간에 정말 ....서재 정말 으리으리합니다 압도적이닷! 진짜!

북프리쿠키 2019-10-15 08:4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님.
가진 거라곤 달랑 서재밖에 없는데 일케 칭찬을 해주시니 기분이 참 좋으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