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잘하는 일이 돈을 별로 못 버는 일일 수 있다.
씁쓸하지만 현의 주변은 다들 엇비슷했으므로 속상할 일이 자주 있지 않았다. - 225쪽





난 가장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간다.
씁쓸하지만 나의 주변은 다들 엇비슷했다.
헌데, 속상할 일은 많다.
가장 잘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버는 인생도 있다. 극히 소수지만 우린 이런 삶을 꿈꾼다.
대개는 가장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돈도 별로 못 벌고 산다.
일상의 푸념은 소수를 바라보는 꿈 때문이고,
다짐은 안정적인 돈벌이 때문인지라
마치 시계추처럼 푸념과 다짐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조울처럼 애처롭다.
이젠 내가 진정으로 뭘 잘하는지, 좋아하는지도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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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짝지가 3번째 읽기 위해 주문한 책이라며
추천한 책. 제목은 보들레르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사무실 옆자리에 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힘들 때나 무료할 때 가끔 책 얘기로 수다를 떨 수 있어 좋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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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아인 오방간다˝ 프로그램 이후로 젊은 청춘들과 조우하며 최대한 글을 쉽게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김용옥. 반야심경을 풀어쓰기 전 우리나라 불교의 고승과 그 일화를 이야기 하는데 이런 편집 방향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260글자로 이루어진 반야심경에서 20대의 도올이 해우소에서 체험한 미증유의 파문, 전 우주가 춤을 추기 시작한 충격을 조금이라도 느껴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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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알수록 모르는 영역이 늘어난다는 사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주에 대한 인류의 지식은 4%에 불과하단다.(...)
어쩌면 앎과 무지 사이의 이 기묘한 비율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안다는 건 더 광대한 무지의 영역을 발견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 158쪽


이전에 글쓰기는 정착민들의 것이었다.
크고 우아한 서재를 가진 자들, 지식을 잔뜩 짊어지고 있는 자들, 천재성으로 무장하고 창백한 자의식으로 넘치는 이들의 몫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서재도 지식도 자의식도 필요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은 스마트폰에 다 들어있다. 그저 필요할 때 참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디지털 노마드다. - 175쪽


책을 보는 것도 일종의 수행이에요. 책을 보려면 집중해야 돼요. 명상을 해보면 ‘마음이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구나, 사방팔방 날뛰고 있구나.‘ 이런 걸 깨닫게 되죠. 책을 읽어도 똑같은 깨달음이 일어나요.(....)
그뿐 아니라 책 속에서 자신에 대해 엄청 많이 알게 돼요. 잘 따져보면 책에 담긴 내용이 다 나에 대한 것이에요. 나랑 무관한 건 하나도 없죠. 그걸 느끼게 되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길이 있구나!, 하는 것도 깨닫게 되죠. - 210쪽


책을 읽고 글을 쓰라고 하면 ‘공부를 생업으로 할 생각이 없는데 그걸 왜 읽어요?‘ 이런 식으로 반문하는 분들이 더러 있어요. 이게 공부가 뭔지 모르는 겁니다. 내가 육체노동을 하든 공무원이 되든 혹은 택배를 하든 공부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자존감이 생깁니까? 자존감이 있어야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대할 수 있어요. 진실한 태도를 만들어 내는 힘, 그게 바로 집중력이고 책을 읽어야 되는 이유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힘과 지혜는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건 일생을 살아가면서 늘 꺼내쓸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을 확보하는 거예요. -216쪽


가장 큰 문제는 사유하는 것을 쓸데없는 짓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현대인은 공무원 시험, 임용고시, 사법고시 같은 어려운 일들은 기꺼이 해냅니다.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거죠. 하지만 정신의 확충이나 인식의 자유에 대해선 대체로 무관심해요. 자기에 대한 사유, 삶에 대한 탐구는 내팽기치는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철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추상의 영역이 아니고 바로 내 행동과 일상과 관계, 나아가 삶 전체를 규정하는 키라고 할 수 있어요.-245쪽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도 역사에 대한 거대한 판타지라는 게 판명되었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청년들에겐 그보다 더 멋진 비전이 없었던 거죠. 근데 제가 특히 마르크스의 글에서 감동받았던 건 문체의 역동성이었어요. 철학이라고 하면 우리는 막 깝깝하고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를 연상하는데 와 ~ 마르크스의 문체는 정말 싱싱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어요. 특히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이 그랬던 거 같아요. 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런 욕망을 불러 일으켰죠. 아마 이념이나 대의보다 그런 역동성이 민주화의 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 248쪽


그럼 이런 사슬을 끊으려면 욕망과 행동의 패턴을 다시 그려야겠죠.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대칭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욕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소유와 증식을 향해 나아갈 때, 쾌락의 무한질주를 하기 시작할 때가 문제인거죠.자본주의는 그런식으로 사람들을 유도하는 데는 도가 텄으니까 다 거기에 걸려드는거죠. 일단 그런 구조를 철저하게 성찰을 하고, 그런 욕망의 궤도를 자아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소유와 쾌락은 생명의 본성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요. 거기에선 애착과 분노, 그리고 각종 질병밖엔 안 생깁니다. 창조가 아니라 파괴 혹은 퇴행이 일어나죠. 그래서 행동의 동선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욕망이 치달리는 걸 멈추게 하려면 일단 나의 동선을 그 반대방향으로 틀어야 합니다. 그러면 욕망도 재구성되구요. 그러다보면 욕망과 행동이 일치되는 때가 오겠죠. - 253쪽


이건 정말 우주의 이치예요. 인생은 결국 관계와 배움, 두 가지가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관계만 있으면 갈등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배움만 있으면 너무 적막하죠. 상생상극의 현장을 통과하면서 순간 인생과 세계에 대해 깨달아 가고, 그럴 때만이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자유의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비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자가 그랬고, 부처, 노자, 소크라테스 등등 인류의 현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결국 그게 인류 전체의 비전이 되었어요. - 257쪽


특히 고전에는 이미 내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탐색과 방향이 다 있거든요. 그걸 길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그 길을 열어 놓았으니, 그걸 적극 활용하는 거죠.
소크라테스, 융, 니체와 스피노자, 사주명리학과 <주역> 등등. 이런 거울을 가지고 내 질문과 번뇌를 투사해보는거죠. 그러면 ‘아, 이 방향이 잘못됐구나.‘ ‘전혀 엉뚱한 곳을 보고 있었구나.‘ 그런 깨우침이 있으면 저절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 262쪽


늘 그렇듯이, 마지막 완성의 최고 걸림돌은 자의식이죠. 그 자의식의 장벽을 넘는 것도 철학이고 수행입니다. 현대인은 특히나 자의식의 비만이 심각한 수준이라 <축의 시대>의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영적 탐구란 ‘자아를 굶기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굶긴다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자의식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훈련, 그게 바로 ‘에세이-하라‘의 핵심입니다. 이런 글쓰기가 아니면 언제 그런 요상하고 괴상한 자기자신과 마주치겠으며, 그런 자신과 대결을 해보겠습니까? 괴로울수록 즐기세요. 은근 재미집니다. -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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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책은 보통 이론편과 실전편으로 나뉘는 것이 많다.
이 책도 1부는 이론편, 2부는 실전편으로 되어 있다.
글쓰기 분야에 대한 책은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대개 1부의 이론편은 재미있으나, 2부 실전편에서는 교과서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어 흐지부지 읽게 마련이다. 물론 실전편을 참고삼아 직접 논술문제를 풀듯이 연습해 보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고미숙 작가의 이 책은 용두사미가 되지 않아서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 일관성과 내용의 충실함을 유지하는 느낌이 좋았고, 글쓰기라는 것이 그저 연습을 통하여 잘 쓰게 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쓰는 것 자체에서 얼마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지..그 배움이 바로 ‘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다. 라는 관점을 열어주었다.

말하자면 읽는 것에서 끝나면 그것은 나 개인만의 단절이고 소외이지만, 쓰는 것은 어쨌든 독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점에서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배움이라는 것은 신영복 선생님이 <담론>에서 하신 말씀,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로 전해져 이 땅을 밟는 것이라 하셨다.
한평생 머리에서 머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배움이 가슴을 울리는 사람이 있기도, 극히 드물지만 뜨거운 가슴에서 느낀 공감을 발로 뛰어다니며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삼중주는 읽기만 해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쓰기가 전제되어야지만 읽기에서 방심한 디테일을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기에 그저 보고 나서, 아하~ 그렇네..그렇구나..하고 덮으면 내 마음의 내밀한 부분과 한번도 대화해보지 못한 채 언제나 그저..그런 것이 될 뿐이다.



이 책의 제목. 읽는다는 것은 거룩함이고, 쓰는 것은 통쾌함이다는 말. 책의 첫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관통하며 섬세히 배어있다. 고미숙 작가의 농익은 내공이 돋보이는 책이자, 열하일기에서 읽은 그녀의 깊이가 녹슬지 않았구나. 하는 기쁜 마음이 드는 책이다.


첨단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디지털화 되어 갈수록 인간은 더더욱 소외되기에 나의 존재에 대해, 서로의 관계에 대해 궁구할 것이다.
책이란 것,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몸이 자본주의의 욕망과 쾌락에 노예가 될 때 ‘멈출 줄 아는‘ 지혜를 가져다 주고, 소비와 향락에, 인정욕과 성공욕구에 감긴 쇠사슬을 끊어, 우리에게 조르바의 자유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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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5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5 23: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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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를 통해 <에티카>를 통독한 회원이 말했다.
˝내 독서의 이력은 에티카를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 <천개의 고원>에 흠뻑 빠진 한 청년은 말했다. ˝이젠 철학을 하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어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삶의 행로를 바꾼 한 중년은 ˝이제 니체를 읽지 않는 시간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책이 주는 기쁨이란 이런 것이다.
그 기쁨 속에서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그것은 실로 거룩한 체험이다. 나 또한 기꺼이 간증을 해본다면,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책을 보면 지식이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그 모든 책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을 누린다는 사실이다. - 83쪽


책이 아니고는 타자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책이 아니고는 자신을 온통 뒤흔들어대는 욕망의 배치와 유래를 가늠할 도리가 없다.
책이 아니고는 타자의 심연에 가닿을 방법이 없다.
- 95쪽


아드레날린,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이 쾌락인데, 그것은 계속 강도를 높여 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끝없는 갈애에 빠지게 된다. 반면, 세로토닌이 분비되면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고. 바로 그렇다. 책을 만나면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그렇게 신체가 평온하게 리듬을 타면 벗이 찾아온다. 벗이란 본디 그런 존재다.
이익과 권력의 장에서는 벗이 아니라 라이벌을 만난다. 감정이 휘몰아치는 곳에서는 연인 아니면 연적을 만난다. 전투적 경쟁심도 감정의 파토스도 벗어날 수 있는 관계가 곧 친구다. 권력투쟁에 지칠 때, 사업이 망해갈 때, 연인 때문에 괴로움을 겪을 때 우리는 친구를 찾는다. 권위, 재물, 격정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 그 자체로 힐링과 멘토링이 동시에 가능한 존재, 그게 곧 벗이다. -101쪽


그렇게 많은 도서관이 있고, 대학보다 훨씬 수준 높은 강의가 진행되어도, 그리고 또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고 또 배우는데도 듣는 사람은 계속 듣기만 하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 말하기만 한다.
무엇 때문인가? 간단하다. 우리 시대 교육이 읽기와 쓰기의 동시성이라는 이치를 외면한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쓰기를 배제한 채 읽기만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배움의 핵심이자 정점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배움터에서 쓰기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다.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일기, 수필, 독후감에 불과하다. 글쓰기를 고작 감상적 토로나 자기위안 정도로만 여기는 것이다. 그건 정말 오산이다. 글쓰기의 영역은 무궁하다. 존재와 세계, 몸과 우주, 사랑과 우정 등, 삶의 지도에 관한 모든 것이 다 해당한다. 왜 이 방향을 설정하지 않는가? 그저 취미나 위안, 소일거리 정도에 묶어 둔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계급적 차별이 아닌가? - 107쪽


읽기가 타자의 언어와 접속하는 것이라면 쓰기는 그 접속에서 창조적 변용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접속과 변용은 연결이면서 또 도약이다. 남이 걷는 길이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워도 내가 걷는 단 한걸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이 읽는다고 절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
쓰기는 다른 활동과 능력이 더 요구된다. 하여, 더 고도의 수렴과 집중이 필요하다. 읽기는 약간의 산만함을 허용하지만 쓰기는 그런 방심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이치를 알게 되면 읽기가 달라진다. 이전에는 그저 구경꾼의 자세로 대충 음미했다면 이젠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담긴 강밀도를 읽어 낼 수 있다.
이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이 사람이 발이 얼마나 많은 거리를 오갔을지, 혹은 얼마나 많은 문헌을 뒤졌을지, 얼마나 고도간 밤을 보냈을지 등등, 그래서 온몸의 세포들이 움직이게 된다.- 112쪽


천재성이 절대 통하지 않는 영역이 바로 글쓰기다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루쉰은 마흔이 다 되어서 데뷔작을 썼고,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쓰려고 마음먹은 것이 쉰일곱, 출판한 것이 쉰여덟이다.
대니얼디포의 <로빈슨크루소>가 쉰아홉,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를 쓴 것은 쉰셋, 스탕달이 첫 작품 <적과 흑>을 쓴 것은 쉰둘, 그리고 헨리 밀러가 20세기 문학의 금자탑<북회귀선>을 완성하는 것은 마흔 셋, 등등. -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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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다는 것이 삶의 총체적 실천이라는 주장에 점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끔 책을 좋아하는 나 자신에 대해 문약하다느니, 책을 좋아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좋아한다느니, 읽고 쓰는 시간만큼 괜시리 자책도 따라붙는다.
고미숙 작가는 책을 읽고 쓰는 것은 타인을 만나는 것이고, 내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고, 삶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이라 한다. 나에게, 또는 책을 좋아하는 여러분에게 책을 읽고 쓰는 것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행위라 위로하고 보다듬는다.
읽는 행위가 약간의 산만함을 허용한다면, 쓰는 행위는 그런 방심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문장에서, 또 한번 쓰기의 어려움과 그 밀도가 가져다주는 깊이를 공감한다.

알랭드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서 좋아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평소 우리를 교묘히 피해다니던 보다 신중하고 고독한 자아와 만날 기회를 갖게 된다˝ - 32쪽

예술작품이 우리의 인성 중 잃어버린 부분을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역할을 한다면, 읽고 쓰는 것은 우리의 기울어진 자아의 적당한 균형을 회복하고 세속의 노동과 가족, 그 속에서 만나는 소외와 책임 사이에서 늘 흔들리는 우리 영혼을 어루만져 최고의 평온을 가져다주는 양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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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4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5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