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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전쟁 -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
로빈 베이커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학사 / 2007년 2월
평점 :
임신과 수태의 과정에 대한 과학적인 내용을 일반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 수작이다. 과학의 대중화와 과학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높이는 것이 절실한 오늘날의 세태에 아주 잘 맞는 적절한 책이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을 읽는 것은 조금 낮뜨겁기도 하다. 포르노 풍의 책은 정녕 아니건만, 책에 나오는 묘사들이 좀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이미 결혼을 한 중년인 내가 읽어도 좀 불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도덕적 관념에 너무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내용은 대중적이라곤 하지만 철저히 과학적인 연구에 기인한 것이고 선정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인의 몸이 어떻게 우수한 정자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이미 우리가 접한바 있는 개념이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실제로 인간이 남기는 것은 자신의 유전형질이다. 그래서 자신과 닮은 자식에게 자신이 평생을 고생해서 모은 유산을 아낌없이 물려주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인간은 자녀의 보전과 자신의 유전형질을 남기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과 닮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한다. 성인이 되고 난 후의 일생의 대부분을 자신의 형질을 간직한 자녀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유전형질이 다음 세대로, 다음 세상으로, 다음 세기로 시간을 가로질러서 이어지는 것이다. 생명은 사라지나 유전형질은 남는다. 아쉽게도 어떤 유전형질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자손이 대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형질은 그 수가 번창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유전형질을 가지고 살아간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그 사람은 유전형질 보존에 성공한 것이다.
이 책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유전형질의 전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기적유전자에 비해서 이 책은 좀 더 마크로한 환경에 주의를 집중한다. 바로 그 유전형질을 지니고 있는 정자와 난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면서 유전형질을 전달하는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묘하다. 그 과정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정밀하다. 그 과정이 바로 이 책이 서술하려는 주안점이다.
여성의 몸은 성공적인 수정을 위해서, 그리고 가장 건강하고 튼튼한 정자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다양한 장치를 가지고 있다. 힘이 세고 건강하고, 그래서 다양한 수정방지 장치에도 불구하고 난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수의 강하고 또 운이 좋은 정자만이 자신의 형질을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다. 난자는 또 수정이 되었더라도 그 형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유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그 형질을 폐기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가장 건강한 형질을 가진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자신의 법적인 배우자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정자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된다. 임신과 출산의 주목적은 남편의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생존확률이 높은 아이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이 책의 제목과 관련해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여성의 몸은 무차별적이다. 남편이나 남편이 아닌 남성의 정자나 여성의 몸은 가리지 않는다. 단지 건강한 정자를 받아들이려고 작동하는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장치를 가동시키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남편이 아닌 사람의 정자가 더 건강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법적인 남편이 아닌 정자와 수정을 할 수도 있다. 여성의 몸은 법을 따르지 않는다. 단지 생존 가능성을 따질 뿐이다.
정자전쟁이라는 개념은 확실히 타당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남편의 수많은 정자들 중에서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한다. 물론 그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서로 돕는 정자들 중에는 유전형질이 다른(다른 사람의) 정자도 함께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여인의 몸은 그 모든 가능성 중에서 가장 훌륭한 가능성을 선택한다. 여인이 한 평생 나아서 기를수 있는 아이의 수는 제한되어 있으므로, 출산을 한 후 생존할 가능성이 높은 우수한 자질을 가진 정자를 선택적으로 골라서 수태를 하려는 것이다. 한 아이를 출산한 후 재빨리 다음 아이를 수태하는 것보다는, 다소 시간을 끌더라도 우수한 형질을 가진 정자를 선택해서 수태하는 것이 결과적인 유전형질의 재생산에서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자들은 힘겨운 전쟁을 벌인다. 생존을 위한 경쟁은 이미 출생하기 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 승리한 정자들. 힘겨운 승부를 이겨낸 정자들. 그 엄청난 수의 정자들 중에서 극히 소수들만이 살아남아서 햇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나,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이나, 이 책의 저자들까지. 우리 모두는 그런 힘겨운 전쟁의 승자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세대를 향한 경쟁을 위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승부를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