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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어떻게 쓸 것인가?
이 책은 한마디로 충격과 공포였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향연이었다. 이후 내가 유일하게 좀 읽었던 철학자인 '강신주'가 떠올랐다. 철학자란 누구인지 어떤 성격을 가진 학자인지 깨닫고 나자 알게 됐다. 철학자는 한 마디로 '사회를 설명하는 시인'이란 것을. 한병철 교수는 누구인가?
한 문장을 읽고 생각하고 또 한 문장을 보고 문제가 된 뉴스가 펼쳐졌다.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매우 점잖고 학술적이지만 강신주란 철학자가 보이는 그 느낌 그대로였다. 그럼으로 알게 됐다. 원래 철학자라는 포지션(?)은 그런 것이구나.
한병철 교수는 그런다. 현대 사회는 갑과 을이 동일인인 사회이다. 예전에는 계급사회였다. 양반과 상놈이 있었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기준으로 계급을 나눈다. 어떤 사람은 지식 여부(학벌로 소위 '가방끈'으로 표현한다.)로 어떤 사람은 돈(요즘은 '수저'로 표현한다.) 어떤 사람은 종교(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등)로 아주 소수 사람은 지역으로(미국 국적 유무,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조선족 등) 계급을 나눈다. 이병철 교수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투명사회'는 외모로 "급"을 나눈다. 부수적 산물 값비싼 액세서리(일명 '명품'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예전 나는 소위 가방끈으로 사람은 나눴다. 물론 겉으로 안 그런 척했지만 얼굴에서 분명 나왔을 것이다. 이런 가방끈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작(담임이 성적으로 차별한다 생각으로 시작했다.결국 나중에 알았다. 촌지 여부로 사람을 나눈 것임을.) 해 고등학교 3학년 3월까지 절정이었다. 그 당시 윤리 선생님이 '넌 철학과 가면 진짜 재밌게 공부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때 내가 이해한 그 말 요지를 '너는 대학에서 가장 커트라인 낮은 과에 들어가도 괜찮다.'라고 해석하고 불쾌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로 모든 내 안 계급은 그랬다. 이 책을 읽은 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철학과에 가지 않았는지..
법학과에 들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가끔) 전관예우 때문에 억지 결론에 이른 판결문을 달달 외우면 된다. 의대에 간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 수학은 전혀 필요 없고 암기력이 가장 큰 변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철학과는 아니다. 아무리 달달 외워도 생각을 안 하면 티가 난다. 한병철 교수가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내 머리를 거쳐 이해한 이야기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그렇기에 철학은 어렵다. 생각한다는 건 매우 괴롭고 피곤하다. 한병철 교수가 한 이야기를 읽고 내 속을 지나온 그 생각을 한 번 이해해 보길 바란다. 매우 오만하고 교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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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보여주는 세상. 에로스가 아닌 포르노가 지배. 투명한 세상은 과연 좋은 세상일까? 그는 이야기한다. 결코 좋지 않다. 요즘 이 세상은 오로지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들어낸다. 보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바람직한 세상인가? 저자는 어슴푸레 보이는 세상이 세상을 신뢰하게 하고 사람을 잇는다고 한다. 요즘은 그냥 "까면 다 나온다". 친구 부탁으로 은행 계좌를 개설하면 그 주위 가족이 가지고 있는 온갖 계좌 안에 있는 액수와 부채 비율까지 좌르륵 나온다. 그걸 보고 친구가 부유한지를 강제로 알게 된다. 동사무소 직원이라면 주민 번호만 알면 어떤 사람이 어떤 토지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지 다 나온다. 어떤 친구가 법원 관련 일을 한다면 주민 번호만 치면 언제 어떤 일로 법원이나 검찰에 출입했는지 나온다. 이 세상에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차라리 허구인 이야기를 '그렇다고 믿고 싶은' 사람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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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투명할 수밖에 없는 사회 정점을 찍는다. 파키스탄 어느 구석 무기상이 무기를 팔기 위해 어떤 장군과 일가족을 싹 다 처리해 버리려고 한다. 비즈니스를 위해. 평화가 지속되면 무기가 안 팔리니까 '창조경제'를 위해 하는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순간 인공위성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던 펜타곤에서 그곳에 미사일을 쏜다. 그리고 그 파키스탄 무기상은 서구 세력이 자신 '비즈니스'를 망치게 했다며 반격을 펼친다. 아주 통 크게.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남편이 그런다. 십 년 전부터 미국은 평양에 굴러다니는 차 번호도 알았다고. 그렇다. 애초에 우리가 가릴 수 있는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낫다.
그렇다 보니 세상 사람들은 남 흉보기 두려워졌다. 그 말이 누군가에게 흘러들어가 나를 향하면 곤란해진다. 그렇게 사람들은 '좋아요'만 누른다. '싫어요'는 없고 싫은 소리가 싫다. 그렇다 보니 반작용도 생긴다. SNS 안에서 사이좋은 이웃인데 어떤 이웃에게는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는데 내가 쓴 것만 '좋아요'를 안 누르면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한다 오해한다. 그 사람이 '너는 싫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가 하자는 것에 침묵한다는 이유로 아웃시켜버린다. 이렇게 '긍정'은 또 다른 '폭력'을 양성시킨다. 긍정을 강요하는 사회는 더 이상 어떤 부정적인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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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짱 '아줌마'->몸을 전시하고 '아줌마'로 가까움을 어필한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탈거리화하여 똑같이 거리가 없는 존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37)
전시사회: 투명성은 모든 존재에 권력을 배제하려 한다. 권력을 위해서는 신비로움, 가려짐이 필요하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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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비슷한, 가까운 듯한 사람이 인기를 얻고 성공한다. 권력을 얻는다. 그 후 투명사회는 권력을 얻은 자가 처참하게 추락하길 바란다. 많은 인스타 스타는 '팔이피플'로 변모했고 부자가 됐다. 그 후 뒤에서 익명으로 추악한 뒷모습을 폭로하는 계정이 생긴다.
벌거벗은 말은 매력을 상실하고 평범해진다.(47)
모든 것이 프로세스가 된 사회, 그리하여 "더 이상 아무런 장면도 없고 모든 것이 철저히 투명해진"사회는 외설적이다.(66-67)
디지털 이웃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74)
정보 사회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어떤 사실이 진실이라고 할지라고 그 행동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나에게 이익인 것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너무 많은 정보는 머릿속에 혼란을 가중시킨다. 유명한 소셜 피플이 어떤지 사실 우리가 알아서 뭐 할 건데?
폭로 사회: 모든 배알을 찢어버리고,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며, 모든 어둠을 추방하려는 영웅적인 투명성의 기획은 폭력으로 귀결된다.(90)
폭로는 결국 진실과 대면이 아니다. 이 사실을 보는 사람에게까지 피곤하게 만드는 '폭력'으로 변화된다. 나 자신을 알리는 문제. 그것은 자유다. 내 생각은 자유롭다며 이렇게 공개된 사이트에 내 이야기를 쓰며 이렇게 나는 나를 '폭로'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통제'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만방에 알리며 나는 다시 나를 타인에게 알리며 스스로를 통제해 버린다.
앞에 쓴 '투명 사회'는 자신을 드러내고 스스로가 상품이 되고 가십거리가 된 사람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이 뒤에 있는 '무리 속에서'는 인스타에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고 항상 댓글로 '아-님 정말 예뻐 효! 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을 자신에게 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녀들'에 대한 고찰이다. 이들은 분노가 아닌 자신이 우상화한 사람에 이입이 되어 무비판적인 성냄으로 악플을 생성한다. 이들에게는 발전성이 없다. 쾌락에 근거한 동물적인 분노와 짜증이 있을 뿐이다. 그런 찌꺼기가 한 개인이 아니라 무리로 이루어져 더 큰 폭력으로 돌아온다. 이에 저자는 단순하게 정리한다. 이런 악플러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주권자란 인터넷 악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이다.(123)
그대들이여. 악플에 졸지 말자. 진실된 비판이 아닌, 깊은 고뇌에서 비롯된 성스러운 분노가 아닌 그런 악플을 지배해 버리자.
주민들이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따라 자기를 밝힐 때, 자신의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이 알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것을 뻔뻔하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질 때, 즉 자유와 통제의 구별이 불가능해질 때 통제사회는 완성에 이른다.(212)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본 철학 관점에 대한 철학자 견해를 재미있게(가학적 성향이 있군.) 읽었다. 가끔은 남 얘기라며 남 욕해주는 기분으로 즐겁게 읽고 있다가 마지막 통제사회 완성에 대한 부분을 읽고 두려워졌다. 알고 보면 저자가 한 이 많은 비판과 고찰 대상에 나도 포함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같은 책을 읽은 친구가 쓴 "나도 이제 불투명해져야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공개된 세상에 펼쳐도 될지 두려웠다. 인터넷 세상은 투명 사회다. 의도하면 모든 것이 다 나오는 세상. 상대방 티끌을 아주 쉽게 발견해서 털털 털어 가루가 되도록 깔 수 있는 세상이다. 그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이 공간을 없앨까? 아니면 다시 예쁘게 보이도록 재편할까?라고 생각하다 결국 그냥 놔두는 것을 선택했다.
두려운 존재를 볼 때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 사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호랑이 등에 타는 것. 그리고 피구에서 공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공을 받아 '마이 볼'을 만드는 것. 그게 나의 선택이다.
투명 사회 안에서도 에로스도 가능하다는 좋은 예시가 됐으면 좋겠다. 사람이란 서로 적당한 거리에서 향기를 맡고 인정해주는 게 가장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