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장자크 상페의 그림 이야기
장 자크 상뻬 지음, 최영선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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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전거를 못 하는 자전거 전문가 따뷔랭.
결국 자전거로 스타가 된 후 자전거를 못 탄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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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읽는다 - 막스 셸러에서 들뢰즈까지 대우휴먼사이언스 5
박찬국 지음 / 아카넷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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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즘 내 독서를 보자.
나 왜 이러니? 철학서를 보고 있다. 아주 가볍게 설명해주는 입문의 정석 '강신주'부터 요즘 핫한 글로벌 철학자 '한병철'을 거쳐 이제 '니체'다. 니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바로

8회. 이진우와 함께하는 '니체의 인생 강의' 프롤로그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독자적인 책 수다를 통해 '니체'에 대한 쉬우면서도 심오한 강의를 듣고부터이다. 나는 이 분 책을 읽고 '니체를 읽는다'란 책을 읽었다. 이진우 교수님 강의가 평범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쉬운 입문서였다면 지금 읽고 있는 '박찬국' 교수님 책은 좀 더 심오하고 범위가 넓다. 
 
사실 나는 '니체'나 철학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없다기 보다 싫었다. 철학자는 오만하다. 신에 대해 평가하다니- 당신이 누구길래? 니체와 같이 따라오는 말인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내게 분노를 사기 충분했다. 내게 신이란 신성한 존재다. 그런데 자신 마음대로 신이 어쨌다 저쨌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태도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니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 알길 거부했다. '니체'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잘난 척'하려는 사람 일종으로 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냈다. 이제 알았다. 나야말로 '니체를 알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생각하기를 기피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나는 그냥 먹고 자고 싸고.. 그런 돼지 인생을 살았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 대해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니체는 결코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신이 왜 죽었을까? 바로 인간에 의해 죽임당했다. 맞는 말이다. 나도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했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말을 하고 우리를 설득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잘난척'한다며 니체 말을 무시했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가 어떤 주장을 내세웠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 내면을 들여다보며 생각하기 싫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나는 니체를 무시했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니체야 말로 신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했다. 신과 인간관계를 어떻게 하면 발전적으로 정립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깨우치려 노력한 사람이다. 계속 전통적인 종교 사상과 그에 따른 서양 철학 사조를 비교하며 니체가 이에 대해 내린 결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전 종교는 인간을 얽매였다. 분명 신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자 했으나 우리 스스로 '신'이 원한다는 명목으로 죄책감을 만들고 온갖 규율을 만든다. 결국 그 규율에 얽매인 사람들은 스스로 지쳐 결국 신을 버려버린다. 그 사실을 발견한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이다.

                

왜 사는가? 실존주의 철학자들

철학자를 보면 모두 다 말랐다. 나도 생각을 하니 금방 배가 고파졌다. 그렇지만 또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왜 사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니 쾌락을 위한 탐식이 내키지 않았다. 
 니체는 결코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신을 죽인 것은 '신' 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규범과 틀을 만들고 이를 어겼을 때 죄악임을 강조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신이 원하는 세상은 인간이 독립된 존재로 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자신에게 치우쳐 어떤 일마다 '신의 뜻'이라며 현재 삶을 부정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기도나 행동으로 현실을 싸우며 발전해 나가는 인간(초인)이 되길 원한다.

 난 항상 내 존재를 '먹음'으로 느끼려고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먹을 수' 있다는 자유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니체는 더 큰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은 사회에서 강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준으로 삶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자유라는 말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 자신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
둘째, 고난, 시련, 궁핍 심지어 생명의 위협에 대해서까지도 무관심하게 되는 것.
셋째, 자신의 대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을 언제라도 희생할 용의가 있다는 것.
넷째, 전쟁과 승리를 즐기는 남성적 본능이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과 같은 다른 본능들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77)

니체가 가진 자유는 스스로가 만든 규율 안에 철저히 지켜진다.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삶이라는 큰 목적은 어쩌면 '탐식'이상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달콤한 케이크 대신 이런 글 쓰는 행위에 내 자유를 사용한다.

 '니체를 읽는다'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처음은 니체가 주장한 핵심 사상을 종교와 세계,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는 초인과 예술을 통해 소개한다. 그 후 니체 이론에 반발한 사상가에 대한 주장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니체가 가진 사상을 가지고 해석한 학자 견해에 대해 설명한다.

 이제껏 나는 '생각한다고 착각한 돼지'였다. 니체를 읽고 다시금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제 난 니체를 읽는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본다. 내 나이 서른다섯. 아직 늦지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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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7 0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키아벨리 2016-06-17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찬국 교수님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아직 시작은 못했습니다.(조금 어려워 보이는 것 같던데요) 이진우 교수님책이나 <곁에 두고 읽는 니체>같은 초보자용 책은 좋았고 박찬국 교수님 <초호인수업>도 좋았는데 이 책들과 비교해서 <니체를 읽느다>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지 궁금합니다.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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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쓸 것인가?

이 책은 한마디로 충격과 공포였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향연이었다. 이후 내가 유일하게 좀 읽었던 철학자인 '강신주'가 떠올랐다. 철학자란 누구인지 어떤 성격을 가진 학자인지 깨닫고 나자 알게 됐다. 철학자는 한 마디로 '사회를 설명하는 시인'이란 것을. 한병철 교수는 누구인가?

               

한 문장을 읽고 생각하고 또 한 문장을 보고 문제가 된 뉴스가 펼쳐졌다.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매우 점잖고 학술적이지만 강신주란 철학자가 보이는 그 느낌 그대로였다. 그럼으로 알게 됐다. 원래 철학자라는 포지션(?)은 그런 것이구나.

 한병철 교수는 그런다. 현대 사회는 갑과 을이 동일인인 사회이다. 예전에는 계급사회였다. 양반과 상놈이 있었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기준으로 계급을 나눈다. 어떤 사람은 지식 여부(학벌로 소위 '가방끈'으로 표현한다.)로 어떤 사람은 돈(요즘은 '수저'로 표현한다.) 어떤 사람은 종교(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등)로 아주 소수 사람은 지역으로(미국 국적 유무,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조선족 등) 계급을 나눈다. 이병철 교수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투명사회'는 외모로 "급"을 나눈다. 부수적 산물 값비싼 액세서리(일명 '명품'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예전 나는 소위 가방끈으로 사람은 나눴다. 물론 겉으로 안 그런 척했지만 얼굴에서 분명 나왔을 것이다. 이런 가방끈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작(담임이 성적으로 차별한다 생각으로 시작했다.결국 나중에 알았다. 촌지 여부로 사람을 나눈 것임을.) 해 고등학교 3학년 3월까지 절정이었다. 그 당시 윤리 선생님이 '넌 철학과 가면 진짜 재밌게 공부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때 내가 이해한 그 말 요지를 '너는 대학에서 가장 커트라인 낮은 과에 들어가도 괜찮다.'라고 해석하고 불쾌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로 모든 내 안 계급은 그랬다. 이 책을 읽은 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철학과에 가지 않았는지..
 법학과에 들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가끔) 전관예우 때문에 억지 결론에 이른 판결문을 달달 외우면 된다. 의대에 간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 수학은 전혀 필요 없고 암기력이 가장 큰 변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철학과는 아니다. 아무리 달달 외워도 생각을 안 하면 티가 난다. 한병철 교수가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내 머리를 거쳐 이해한 이야기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그렇기에 철학은 어렵다. 생각한다는 건 매우 괴롭고 피곤하다. 한병철 교수가 한 이야기를 읽고 내 속을 지나온 그 생각을 한 번 이해해 보길 바란다. 매우 오만하고 교만할 수 있다.

투명하다는 의미
                

모든 것을 보여주는 세상. 에로스가 아닌 포르노가 지배.

투명한 세상은 과연 좋은 세상일까? 그는 이야기한다. 결코 좋지 않다. 요즘 이 세상은 오로지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들어낸다. 보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바람직한 세상인가? 저자는 어슴푸레 보이는 세상이 세상을 신뢰하게 하고 사람을 잇는다고 한다. 요즘은 그냥 "까면 다 나온다". 친구 부탁으로 은행 계좌를 개설하면 그 주위 가족이 가지고 있는 온갖 계좌 안에 있는 액수와 부채 비율까지 좌르륵 나온다. 그걸 보고 친구가 부유한지를 강제로 알게 된다. 동사무소 직원이라면 주민 번호만 알면 어떤 사람이 어떤 토지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지 다 나온다. 어떤 친구가 법원 관련 일을 한다면 주민 번호만 치면 언제 어떤 일로 법원이나 검찰에 출입했는지 나온다. 이 세상에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차라리 허구인 이야기를 '그렇다고 믿고 싶은' 사람만 존재할 뿐이다.

   

이 영화는 투명할 수밖에 없는 사회 정점을 찍는다. 파키스탄 어느 구석 무기상이 무기를 팔기 위해 어떤 장군과 일가족을 싹 다 처리해 버리려고 한다. 비즈니스를 위해. 평화가 지속되면 무기가 안 팔리니까 '창조경제'를 위해 하는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순간 인공위성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던 펜타곤에서 그곳에 미사일을 쏜다. 그리고 그 파키스탄 무기상은 서구 세력이 자신 '비즈니스'를 망치게 했다며 반격을 펼친다. 아주 통 크게.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남편이 그런다. 십 년 전부터 미국은 평양에 굴러다니는 차 번호도 알았다고. 그렇다. 애초에 우리가 가릴 수 있는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낫다.

긍정/전시/명백/포르노/가속/친밀/정보/폭로

 그렇다 보니 세상 사람들은 남 흉보기 두려워졌다. 그 말이 누군가에게 흘러들어가 나를 향하면 곤란해진다. 그렇게 사람들은 '좋아요'만 누른다. '싫어요'는 없고 싫은 소리가 싫다. 그렇다 보니 반작용도 생긴다. SNS 안에서 사이좋은 이웃인데 어떤 이웃에게는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는데 내가 쓴 것만 '좋아요'를 안 누르면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한다 오해한다. 그 사람이 '너는 싫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가 하자는 것에 침묵한다는 이유로 아웃시켜버린다. 이렇게 '긍정'은 또 다른 '폭력'을 양성시킨다. 긍정을 강요하는 사회는 더 이상 어떤 부정적인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26)
                

몸짱 '아줌마'->몸을 전시하고 '아줌마'로 가까움을 어필한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탈거리화하여 똑같이 거리가 없는 존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37)

전시사회: 투명성은 모든 존재에 권력을 배제하려 한다. 권력을 위해서는 신비로움, 가려짐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가까운 듯한 사람이 인기를 얻고 성공한다. 권력을 얻는다. 그 후 투명사회는 권력을 얻은 자가 처참하게 추락하길 바란다. 많은 인스타 스타는 '팔이피플'로 변모했고 부자가 됐다. 그 후 뒤에서 익명으로 추악한 뒷모습을 폭로하는 계정이 생긴다.

벌거벗은 말은 매력을 상실하고 평범해진다.(47)
모든 것이 프로세스가 된 사회, 그리하여 "더 이상 아무런 장면도 없고 모든 것이 철저히 투명해진"사회는 외설적이다.(66-67)
디지털 이웃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74)

정보 사회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어떤 사실이 진실이라고 할지라고 그 행동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나에게 이익인 것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너무 많은 정보는 머릿속에 혼란을 가중시킨다. 유명한 소셜 피플이 어떤지 사실 우리가 알아서 뭐 할 건데?

               

    

폭로 사회: 모든 배알을 찢어버리고,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며, 모든 어둠을 추방하려는 영웅적인 투명성의 기획은 폭력으로 귀결된다.(90)

폭로는 결국 진실과 대면이 아니다. 이 사실을 보는 사람에게까지 피곤하게 만드는 '폭력'으로 변화된다. 나 자신을 알리는 문제. 그것은 자유다. 내 생각은 자유롭다며 이렇게 공개된 사이트에 내 이야기를 쓰며 이렇게 나는 나를 '폭로'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통제'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만방에 알리며 나는 다시 나를 타인에게 알리며 스스로를 통제해 버린다.

무리 속에서:디지털의 풍경들

앞에 쓴 '투명 사회'는 자신을 드러내고 스스로가 상품이 되고 가십거리가 된 사람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이 뒤에 있는 '무리 속에서'는 인스타에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고 항상 댓글로 '아-님 정말 예뻐 효! 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을 자신에게 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녀들'에 대한 고찰이다. 이들은 분노가 아닌 자신이 우상화한 사람에 이입이 되어 무비판적인 성냄으로 악플을 생성한다. 이들에게는 발전성이 없다. 쾌락에 근거한 동물적인 분노와 짜증이 있을 뿐이다. 그런 찌꺼기가 한 개인이 아니라 무리로 이루어져 더 큰 폭력으로 돌아온다. 이에 저자는 단순하게 정리한다. 이런 악플러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주권자란 인터넷 악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이다.(123)

그대들이여. 악플에 졸지 말자. 진실된 비판이 아닌, 깊은 고뇌에서 비롯된 성스러운 분노가 아닌 그런 악플을 지배해 버리자.

주민들이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따라 자기를 밝힐 때, 자신의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이 알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것을 뻔뻔하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질 때, 즉 자유와 통제의 구별이 불가능해질 때 통제사회는 완성에 이른다.(212)
난 어떻게 살 것인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본 철학 관점에 대한 철학자 견해를 재미있게(가학적 성향이 있군.) 읽었다. 가끔은 남 얘기라며 남 욕해주는 기분으로 즐겁게 읽고 있다가 마지막 통제사회 완성에 대한 부분을 읽고 두려워졌다. 알고 보면 저자가 한 이 많은 비판과 고찰 대상에 나도 포함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같은 책을 읽은 친구가 쓴 "나도 이제 불투명해져야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공개된 세상에 펼쳐도 될지 두려웠다. 인터넷 세상은 투명 사회다. 의도하면 모든 것이 다 나오는 세상. 상대방 티끌을 아주 쉽게 발견해서 털털 털어 가루가 되도록 깔 수 있는 세상이다. 그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이 공간을 없앨까? 아니면 다시 예쁘게 보이도록 재편할까?라고 생각하다 결국 그냥 놔두는 것을 선택했다.
 두려운 존재를 볼 때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 사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호랑이 등에 타는 것. 그리고 피구에서 공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공을 받아 '마이 볼'을 만드는 것. 그게 나의 선택이다. 
 투명 사회 안에서도 에로스도 가능하다는 좋은 예시가 됐으면 좋겠다. 사람이란 서로 적당한 거리에서 향기를 맡고 인정해주는 게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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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6-17 0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책한엄마 2016-06-21 16:4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30금 쌍담 - 섹스.폭력.정치.종교
강신주.이상용 지음 / 민음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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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 그분(?), 강신주

강신주 박사님은 사람을 자극한다. 강연 중에 자신은 물론 어쩜 그렇게 다른 사람을 까는지 듣는 내가 민망할 정도다. 그래도 나는 강신주 박사님이 쓴 책은 일단 보게 된다.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온다는 그 비유처럼 그 강의를 듣고 있으면 몇 번이고 내가 생각했던 원칙이 깨어지는 경험을 한다. 내 지식과 사유가 이제껏 사회를 통해 교육받아오고 (어쩌면) 세뇌받았던 관념이 없어지고 자유를 얻는다. 온전한 내 경험과 내 신념을 기초로 단단한 의견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사람을 화나게 한다.  어떤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고 분노하며 뒤엎기. 그리고 내가 왜 그 감정을 갖고 있는지 근원에 대해 성찰해 보기. 그가 원하는 강연이 주는 포인트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강연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 다만 (결코)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고 싶지는 않다. 강연을 통해 내 험담을 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내 귀를 긁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전에 보여 준 이상용 평론가와 강신주 박사가 함께 역사에서 유명한 영화를 보고 이야기해 보는 '씨네 상떼 이어진 강연이다. 영화 역사상 큰 문제와 이슈를 낳은 작품을 보고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의도에 대해 평론가와 철학자적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영화는 네 부분으로 나눈다. 섹스, 폭력, 정치, 종교. 각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와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설정한다.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일은 전적으로 개인 자유의지에 따라야 한다.
 나는 먼저 강연을 아주 오래전에 들었다. 난 벙커 1 유료 회원이다. 남편이 회식으로 늦어 잠이 안 올 때 야금야금 들었다. 강연과 책이 함께 해서인지 나에게는 둘 다 뜻깊게 다가왔다.

섹스(감각의 제국)
                                 

 

               

옛날 중학생 때 밤늦게 공부하며 들었던 "자정의 영화음악"에서 자주 언급됐던 영화다. 얼마나 놀랍고 징그러운 이야기일까 생각하며 어른이 되면 꼭 봐야겠다는 영화를 이 강의를 들으며 보게 됐다. 심지어 이 영화는 실화에 기초한다.

 

실존 주인공 사다

평범해 보이는 이 여인. 요정 주인의 기둥 서방과 눈이 맞는다. 결국 그 둘이 하는 애정행각은 정도를 넘어선다. 결국 성행위 도중 사다는 남자 목을 졸라 죽인다. 그 후 그 남성 성기를 잘라 갖고 다닌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우리는 보통 성행위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한다. 어쩌면 사랑하는 요소 중 하나인, 아주 사소한 부분일 뿐이다. 육체만 탐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은 결국 죽음이다. 

기한에 맞춰 숙제를 하느라 만사 급급한 사람은, 아무리 졸업을 했더라도 결코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생이 숙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숙제를 하듯 섹스를 하고, 숙제를 하듯 여행을 가고, 숙제를 하듯 독서를 하고, 숙제를 하듯 영화를 보고... 끝도 없다.

본질은 그게 아니다. 육체를 탐하는 자가 겪는 파국을 보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재미도 없는 프로를 억지로 보지는 않는가? 관심도 없는 무엇을 '안정된다'거나 '고연봉'이라며 꾸역꾸역 하고 있지는 않는가?

폭력(시계태엽 오렌지)
                                 

               

이 영화도 열심히 봤다. 강사는 그런 말을 했다. 주인공이 다 큰 어른처럼 보이지만 우유를 먹고 과감한 행동을 벌이는 것은 어린아이 행동과 같다. 맞다. 지금 내 둘째가 딱 저렇다. 때려도 아프지 않고 작은 몸이기에 해봤자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뿐이지 저 주인공과 같다. 말썽꾸러기. 그러다가 사회 제약으로 훈련받는 것은 영화 속 주인공이 감옥 안에서 교화 받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사회가 원하는 행동을 한다.  머릿속으로는 음흉한 생각을 하면서 주인공은 자유를 얻었다며 웃는다. 어쩌면 우리는 어렸을 때 원초적으로 생긴 폭력을 내면화하며 사는 게 아닐까?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관찰해 보면, 이것이 약함을 강한 척으로 보이려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출현한다. 독재자가 시민들에게 공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는 건, 그가 시민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자인 것처럼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내심 무서운 것이다. 또 아이들을 폭행하는 부모는 자신을 쏘아보는 아이의 눈매가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다. 결국 폭력은 약자나 위축된 사람, 혹은 정당성이 없는 사람이 취하는 부질없는 몸부림이다.
정치(살로, 소돔의 120일)
                                 

               

인분을 먹는 장면으로 문제가 된 작품. 이건 생각만 해도 역겨워서 안 봤다. 네 명의 권력자가 흠 없는 아홉 명씩 남녀를 선출해 자신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이야기다. 결국 그들은 피를 뿌리며 끝난다고 한다. 이 내용은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현실보다는 미화된 측면이 있다. 

이걸 정면으로 보지 못한다면 진짜 세상에 대해선 아예 편히 눈 감아 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가뜩이나 힘든데 이런 잔인한 일을 봐야 해?'하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죠. 이 세상은 기아, 기근, 재해, 지진.... 수많은 참사가 일어나는 고통의 현장입니다. 이것을 외면해 버리면 더 강한 쾌락만을 추구하는 저 파시스트들과 뭐가 다르겠어요? 그래서 보아야 합니다.
일단 공부를 잘하니까, 어머니는 누구든 오냐오냐했을 거 아니에요? 그 때문인지 '내 생각과 상대의 생각이 다르고, 또 다를 수 있다.'라는 걸 몰라요.(186)
종교(비리디아나)
                                 

               

눈부시게 예쁜 비리디아나. 그녀는 수녀가 되길 기다리는 견습 수녀다. 어느 날 원장 수녀님 명령이 떨어진다. 비리디리아 숙부는 수녀원 큰 손(?)이니 인사하고 오란 것이다. 그곳에 가서 결국 비리디리아는 강제로 숙부와 결혼을 하고 초야를 치른다. 비리디아나는 불쾌해하며 수녀원에 가 버린다. 숙부는 자살을 하고 숙부 재산을 상속하는 비리디아나와 숙부의 사생아 호르헤가 숙부 대저택으로 온다. 비리디리아는 집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내어주고 자선을 베푼다. 결국 가난한 자들은 이런 자선을 권리로 알고 행패를 부리고 급기야 비리디아나를 겁탈하려 한다. 혼란에 쌓인 비리디아나는 호르헤를 유혹하려 그 방에 들어간다.
 '착하다'의 개념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결국 우린 '주님'을 위한다면서 '착한 나'에 취해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명품 백이나 다이아몬드로 자신을 꾸미는 것처럼 타인에 대한 자선이 결국 그런 액세서리 중 하나라 치환된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그런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종교를 빌미로, 독실한 신자라는 자기만족을 위해 가정을 무당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집을 성전으로 만들고 싶다면, 아예 자기 집을 교단에 내줘야 마땅하다. 정녕 비리디아나가 숙부로부터 물려받은 집을 성당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응당 그 저택을 성당에 기부했어야 옳다. 그녀가 성과 속이 애매모호하게 결합한 '자선 공간'을 만들어 낸 이상, 약자들에게 역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책과 강연을 마치며

진정한 사랑이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다. 스스로를 절대 약자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다. 그런 일을 거부한다면 결국 육체 탐닉, 폭력으로 강한 척, 정치로 사람을 짓누르기, 어설픈 자기만족인 종교로 빠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난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무교인 친구는  내가 독실한지 모른다. 목 놓아 외쳐도 그저 웃을 뿐이다. 사실 난 종교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갖고 있다. 같이 성당을 다녔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꿀꿀아, 너는 정말 신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미사 드리면서 계속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아."
처음 놀랐다. 나보다 더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친구가 이런 대단한 고백을 내게 하다니!! 그럼에도 나나 이 친구는 주말마다 꼬박꼬박 성당과 교회를 다닌다. 나도 항상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다가 확신이 들었다. 신은 분명히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이런 물음을 할 자유를 준 것이다. 우린 너무 무식해서 보이는 시각이 너무 편협해서 모르는 게 많은 것일 뿐. 분명 신은 우리에게 그 진리를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정적이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강신주 박사에게 끊임없이 대들었다. 내가 신이 없을 것 같다는 물음을 생각해 낼 수 있다는 사실로 관대한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신주 박사가 편협한 생각을 진리인 듯외치는 것도 어쩌면 나름 용기다. 이에 반발하는 수강생을 원하고 그렇게 나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그게 아마 강신주 박사가 강연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래서 나는 그를 유능한 강연자라고 생각한다.
그를 통해 이상용 평론가라는 좋은 분을 알게 된 것도 영광이다. 그분이 해설해주는 무서운 영화에 관한 평론도 정말 재미있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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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1~6 세트 - 전6권
최규석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불편하지만 눈 뜨고 보아야할 진실. 군대와 마트 노동운동을 통해 보여지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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