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코 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 - be동사에서 주저앉은 당신에게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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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어 공부라기 보다는 언어를 배우면서 다양한 생각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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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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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열풍이 거세다. 3년째 ‘응답하라’ 시리즈가 계속 인기다. 사실 이번 1988년 이야기는 과연 먹힐 수 있을까 걱정했다. 아무래도 예전 시리즈에 비해 그 시절을 추억할 거리가 과연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내 생각과 달리 예전보다 더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다. 왜일까? 이에 대한 의문은 이 책 ‘스토너’와 연결되어 있다. 시간이 달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본질은 같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시간 어떤 환경에 갖다 놓아도 연결되는 고리가 있고 공감대가 있다. ‘응답하라.’를 만드는 사람들은 점점 삶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 솜씨가 일취월장한다. 이 책 ‘스토너’는 그 당시 인기는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 평범한 ‘스토너’란 사람의 일대기가 매우 강력한 울림으로 돌아온 경우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 시각으로 이 책을 바라보았을 때 두 가지 큰 맥락이 보였다. 이 책은 잘 쓴 책이다. 그 이유는 독자를 위한 적당한 여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처음 소설을 쓸 때 쉽게 실수를 한다. 내가 말하려는 의도와 의견을 무식할 정도로 글 안에 다 퍼부어 넣는다. 그러면 독자는 피곤해진다. 읽으면서 자신이 생각할 틈이 없는 소설은 바탕색 모두 칠해버린 수묵화와 같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주인공 ‘스토너’라는 작명에 있다. 보통 성은 조상의 직업을 뜻한다고 한다. 에를 들어 ‘가드너’라는 성은 정원사인 조상을 뒀다는 것. 우리나라 말로 ‘스토너’를 해석하면 ‘돌쇠’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돌 같은 사람이라는 얘기. 바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잘 변하지 않는 꿋꿋한 성품이 이 성씨 안에 녹여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바위처럼’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자. 소름 돋게 주인공과 비슷한 면을 볼 수 있다.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니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가며
마침내 올 해방 세상 주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꾸나.

그렇다. 제목이 주인공의 성품을 다 설명해 준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그의 성격을 이름으로 얘기해줬음에도 친절하게 여러 군데 그의 성품에 대한 힌트를 넣어준다. 주인공 아버지 또한 꿋꿋하게 어려운 농사를 지었고 농사를 짓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부분. 그리고 비트겐슈타인과 많이 닮아있는 친구 매스터스의 입을 통해서다.

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 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얘기가 아냐.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46)

이 책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단조로운 성향을 가진 스토너라는 농촌에서 온 청년이 미주리 대학에 입학한다. 농업을 배우러 왔지만 슬론 교수가 가르치는 영문학 수업에 매력을 느껴 평생 영문학을 공부하고 교수로 그 대학에 헌신하다 죽는다. 좀 더 살을 얹어 보면 평생 친구인 핀치가 학장으로 있었고 자신을 괴롭히려고 반려자가 된 것 같은 부인 이디스, 알콜중독자가 된 딸 그레이스, 평생 자신을 괴롭히는 일에 헌신한 학과장 로맥스, 로맥스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워커라는 학생, 평생에 유일한 소울메이트 캐서린이 그의 인생에 함께했다.

아내 이디스와 딸 그레이스

 주인공은 세 번, 인생에 큰 도전을 한다. 처음에는 농업이 아닌 영문학에 인생을 바치기로 한 것. 두 번째는 부인 이디스를 만나 결혼한 것. 세 번째는 말년에 로맥스의 계속된 불이익에 항거해 반항을 한 것이다. 이 세 개의 행동 중 그의 가장 큰 실패작은 단연코 이디스와 결혼이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이상했다. 그래서인지 어색한 만남 후 스토너가 급하게 청혼을 했음에도 수락을 해버린다. 이디스의 부모는 사위가 될 사람의 이름도 묻지 않은 채 서둘러 결혼 날짜를 잡는다. 결혼 후 이디스는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한다. 병적으로 청소를 하는가 하면 언젠가 아이를 낳겠다며 무턱대고 임신 시도한 후 애를 낳고 책임을지지 않는다. 이디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리하게 스타일을 바꿔보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그녀의 시도는 다 헛된 것이다. 계속 행동과 말들로 스토너를 자극하지만 스토너는 그 성격 그대로 그냥 그녀를 관조할 뿐이다. 그녀의 시도를 보면서 우연히 다른 책을 보다가 이 문구가 그녀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 하는 일마다 금방 싫증을 느끼거나 지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도전이 아니라 도피이다.(어른은 겁이 많다-손씨)

어쩌면 이디스 그녀의 인생은 도피 그 자체였다. 집이 아닌 이모 집으로 도피,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유럽에 간다고 하는 계획도 도피, 그레이스를 낳은 것도 어쩌면 스토너만 마주해야하는 공간에서의 도피가 아닐까? 결국 이디스의 그런 마음은 딸 그레이스에까지 전이되어 버린다. 각자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도 서로의 집에 가지 않을 정도로 매정했다. 스토너의 마지막 만찬에 아내의 좌석을 빼버릴 정도였다. 마지막에 다다라 이디스도 변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단 하루도 혼자 힘으로 자기 몸을 돌본 적이 없고, 자신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책임을 지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 또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79)
이제는 그녀를 바라보아도 후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이 주름 없는 젊은 얼굴처럼 보였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무정한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사람을 좀 더 사랑했더라면. (384)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인정’이었다. 깨끗한 집에 대한 감사, 그레이스라는 딸을 준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사소한 대화들. 그러나 스토너는 첫날 결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이후부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절정이었다. 아내와 슬픔을 같이 나눌 시간조차 주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다. 로맥스와 화기애애한 저녁식사 후에 이디스는 유혹하듯 나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무시하고 이불을 덮어주는 스토너. 아내가 아버지를 여의고 잠시 친정에 있다가 돌아왔을 때는 오히려 스토너는 더욱 행복한 모습이었다. 필요 없는 존재라는 증명이라도 받은 것 같은 이디스는 다시 절망에 빠진다. 스토너가 죽기 직전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이디스는 그제야 자신의 위치를 찾고 악담과 비아냥이 아닌 순수한 감정을 표현한다.

의사 말이 온몸에 퍼졌대요. 아, 윌리, 가엾어서 어떡해.(378)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이디스가 따뜻하게 스토너에게 건넨 한마디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스토너의 대답이 황당하다.

뭐. 당신은 걱정할 필요 없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니까.

 ‘네 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랑 다른 점을 찾기 힘들다. 차라리 ‘걱정해 줘서 고맙소. 이디스.’라고 얘기했다면 이 대화는 이렇게 끊어지지 않았을 거다.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스토너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까지 술에 의지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식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351)
캐서린

스토너의 두 번째 사랑인 캐서린. 사실 그녀 또한 이디스와 많이 닮아있다. 내 사랑은 언제나 끝이 좋지 않았다고 불안해하는 캐서린에게서 이디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녀와 좋은 관계를 꽤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이 공유하는 학문이 있었고 언젠가 이 관계가 끝날 것이라는 둘 사이의 암묵적 예감이 있었다. 만약 스토너가 이디스를 버리고 캐서린을 아내로 맞이했다면 그는 좀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캐서린은 분명히 또 다른 이디스가 되어 스토너를 괴롭혔을 거다. 이디스를 히스테릭하게 한 대부분의 문제는 스토너에게 기인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캐서린을 통해 스토너는 이디스가 아닌 다른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272)
로맥스

 로맥스는 등장부터 까칠했다. 다른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갖지 않는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스토너에게는 예외였다. 스토너가 초대한 만찬에서 로맥스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얘기한다. 물론 그 다음날 자신이 그런 얘기를 꺼냈다는 생각에 자존심 상해하지만 말이다. 그는 스토너의 부인을 깍듯하게 대접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그 주위 사람들에게 무조건적 호의를 베푸는 방식이 아마도 로맥스가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추측되는 부분이다. 로맥스는 자신이 아끼는 제자인 워커에게 스토너 강의를 들을 것을 추천한다. 그만큼 로맥스는 스토너를 신뢰했다. 로맥스가 워커를 아끼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책에서 로맥스가 주장했듯이 상상력이 뛰어난 제자일수도 있고 스토너와 캐서린 관계처럼 그렇고 그런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교수인 입장에서 로맥스가 비굴하게 스토너에게 워커에 대해 관대히 생각해달라고 요청함에도 스토너는 자신의 기준으로 칼같이 워커를 잘라버리려고 한다. 결국 워커는 대학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종적은 알 수 없다. 로맥스의 연줄로 들어온 교수가 워커가 아닌 것으로 보아 결국 워커 자신의 실력의 한계가 발각되어 대학에서 퇴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굳이 스토너가 아니라도 워커는 언젠가 나갈 형편없는 실력의 사람이었다. 유연하고 사교적인 친구인 고든 핀치였다면 분명 워커에 대해 눈감아줬을 것이다.

저 친구와(로맥스) 워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궁금하군.(242)

 하지만 융통성 없는 사람인 스토너는 그렇지 못했다. 로맥스가 가졌던 스토너에 대한 애정은 증오와 분노로 바뀌어 20년 동안 스토너를 괴롭힌다. 스토너는 원칙에 의해 움직였을 뿐인데 로맥스에겐 평생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 로맥스는 절음발이임에도 교수일 때는 그 장애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상아탑이 장애인에게 주는 특혜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불구자인 워커도 이런 특혜를 누리길 바란 것은 아닌가 한다. 스토너는 학문을 기준으로 워커를 거부했지만 로맥스에겐 불구자를 모욕하는 행동으로, 곧 자신의 치부를 모욕하는 행동으로 해석했다.

아처 슬론

이 책의 시작은 아처 슬론으로부터 비롯된다. 아처 슬론이 1학년 과목을 맡지 않았다면 스토너는 아버지와 같은 농부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스토너는 기준이 확고했다. 그렇기에 그 기준에 맞지 않은 것을 외부의 어떤 압력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학문의 불변성을 대변해 주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과 파도치는 사람들의 감정 앞에서는 무례해보였다. 이런 특성을 아처 슬론도 갖고 있었다. 둘은 매우 닮아있다. 그리고 스토너가 아처 슬론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들의 사상은 완전 합체되어 둘은 동일 인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처 슬론과 마찬가지로 그도 세상을 미지의 종말로 몰고 가는 비합리적이고 어두운 힘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무익한 낭비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처 슬론과 달리 스토너는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향해 조금 뒤로 물러났기 때문에 눈앞의 급박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311)

스토너가 아처 슬론과 달랐던 점은 ‘연민과 사랑’이다. 이 연민과 사랑을 갖게 된 근원은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자신을 괴롭혔다고 생각했던 이디스와 딸 그레이스다. 아처 슬론은 학문 안에서 홀로 연구에만 매진한 사람이었다. 스토너는 인생에서 자주 일어나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익성, 두려움 등을 겪으며 아처 슬론을 이해한다. 이 부분을 통해 기성세대가 지독하게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고 반대하는 이유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며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었던 평범한 영문학 교수 스토너의 인생에 대한 책이다. 좋게 말하면 학자적 기개가 넘치지만 나쁘게 말하면 지독하게 융통성이 없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던 사람이었다. 태어나 자신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스토너는 자신의 성품대로 평생을 살아나간 사람이다. 그렇기에 타인을 매우 의지하는 아내 이디스를 광기로 몰고 갔고 학과장과 평생 적으로 살아야 했으며 학장인 친구 핀치를 항상 힘들게 만들었다. 그나마 이들은 돌과 같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스토너를 조금씩 깎으며 다듬어주었다. 이디스는 미술 작품을 만들겠다고 여러 일을 펼치다가 결국 석고 만들기를 가장 오래 했다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사례일 것이다.
  이 책을 보통 ‘위대한 개츠비’와 비교한다고 한다. 순수했던 자신의 사랑을 위해 불나방처럼 불인줄 알면서 위험 속에 뛰어든 개츠비와 자신의 기준으로 꿋꿋하게 학자의 길을 걸었던 스토너는 ‘사랑’과 ‘열정’이라는 측면에서 많이 맞닿아 있다. 이 책에서 큰 사건은 없다. 그럼에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 이유는 이런 밋밋한 삶 속에서 ‘내 순수한 자아’를 유지하면서 세상에 맞서려고 하는 독자의 욕망이 스토너와 만나기 때문이다. 스토너의 삶은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아있다. 소신껏 의견을 말하려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사랑했던 사람이 평생의 짐이 되기도 한다. 무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딸에게도 어떤 도움을 줄 수 없는 무능한 부모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 이게 바로 작가가 말하려던 인생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아처 슬론과 마찬가지로 그도 세상을 미지의 종말로 몰고 가는 비합리적이고 어두운 힘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무익한 낭비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처 슬론과 달리 스토너는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향해 조금 뒤로 물러났기 때문에 눈앞의 급박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311)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272)

이제는 그녀를 바라보아도 후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이 주름 없는 젊은 얼굴처럼 보였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무정한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사람을 좀 더 사랑했더라면.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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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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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년 세상을 달리했던 신해철님이 가장 재밌었다고 했었던 책이다. 내가 읽기에도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은 전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작가가 만든 세상의 배경은 작가가 글을 지을 때도, 몇 년 전에 내가 읽었을 때도, 지금 읽을 때조차도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 세상 시간이 끊임없이 지나가도 변치 않는 가치가 있는 건 아닐까?

두 번째로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처음 읽었던 때보다 시간은 배로 걸렸다. 마치 이 책에 등장하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가 된 듯 느릿느릿 읽었다. 세상의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가는데 책을 읽고 있는 순간의 나는 참 많이 느렸다. 아마도 내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회색신사처럼 조급해했던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을 변신하고 이 책에 녹아들기 위해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모는 유적지인 원형극장에서 노숙을 하는 고아 소녀다. 그녀에겐 원형극장을 소개하는 가이드인 기기와 천천히 신중하게 청소를 하는 베포라는 가장 친한 친구들이 있다. 아이들은 원형극장에 모여 모모와 자신이 가진 상상력을 동원해 놀이를 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회색신사가 이 동네에 왔다. 이발사 푸지씨는 회색 신사의꼬드김에 넘어가 시간을 아끼며 돈을 버는 데 집중한다.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나누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도 점점 회색 신사의 농간에 휘말려 영혼없이 일만 하는 기계가 된다.
이 때 모모는 아이들과 함께 시위를 하며 회색 신사를 무찌른다. 이후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목적지)라는 거북이를 만나 호라 박사에게 간다. 호라 박사는 시간이다. 그는 모모에게 회색신사를 일망타진할 방법을 알려준다. 그 사이 기기는 자신의 달변을 이용해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만 속은 텅 비어 언제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가 탄로 날까 불안에 떤다. 베포는 회색 신사의협박에 정신없이 청소만을 하는 삶을 살아간다. 모모는 세상에 나와 호라 박사에게 받은 시간의 꽃을 무기로 회색 신사와 싸운다. 결국 회색 신사들은 천천히 가지만 30분 후를 아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와 모모의 넉넉한 마음을 무기로 무찌른다. 회색 신사들은 사람들이 받은 시간의 꽃을 말려 담배로 말아 피우면서 생명을 연장시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모만이 갖고 있었던 시간 꽃을 얻기 위해 달려가다 모두 존재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결국 회색 신사가 없어지면서 각성된 마음사람들은 다시 원형극장에 모여들며 끝이 난다.

이 책은 시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시각화했다. 이는 요즘 나온 영화 ‘인타임’이나 블랙홀 안은 변형된 시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는 ‘인터스텔라’보다 앞서 나온 참신한 생각이다. 언듯 보면 쉽지만 이 시간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회색 신사와 모모의 행동을 분석해보면 참 복잡해진다. 회색신사들은 돈을 모으는 은행처럼 시간을 모으는 사람들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 아낀 시간들을 회색신사에게 맡기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시간과 돈이란 개념이 참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시간을 아낀답시고 사람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행동을 흡사 자신의 빚을 갚겠다고 사랑하는 부모나 친구를 죽이거나 배신하는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선물을 주는 게 전혀 아깝지 않듯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시간 또한 아까운 것이 아니다. 이를 토론에서 승희 언니는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주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는 행위”라고 표현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노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23)
톨스토이의 단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생각이 났다. 인간이 된 천사가 하나님에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지 알아오는 벌을 받는다. 결국 천사가 얻은 답은 ‘사람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 산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알고 보면 호라 박사가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한 이유는 서로에게 시간을 주면서(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사랑하며 지내는 삶이었다. 그 사이에 회색신사의 농간은 사람이 사는 목적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잉여 재산에 대한 탐욕이 타인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이렇듯 회색신사가 주장하는 시간을 아끼는 행동은 타인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으려는 탐욕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인생을 철컥거리는 가위질 소리와 쓸데없는 잡담과 비누 거품으로 허비하고 있어요. 당신이 죽고 나면,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예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바라시는 대로, 제대로 된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시간이 충분하다면 아주 다른 사람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필요한 건 바로 시간이에요.(81)
회색 인간이 주장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결말이 가능할까? 그 결말은 소설에서 기기의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기기는 모모와 같이 얘기하고 상상했던 이야기보따리를 이용해 유명한 작가가 된다. 유명세를 얻은 뒤 계속 팬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원한다. 하지만 기기에게는 이미 이야기가 없다. 이미 기기가 유능한 작가라는 고정관념을 이용해 겨우 자신의 유명세를 이어나간다.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지만..
이 기기의 불안을 보면서 요즘 모든 프로에서 하차한 정형돈의 불안에 대한 증세가 생각났다. 나 같은 시청자가 보기에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형돈은 분명 기기가 느낀 그런 불안을 마음에 안고 지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이야기들처럼 이 이야기도 단숨에 꿀꺽 삼켜졌고, 금방 다시 잊혀졌다. 사람들은 기기에게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엄청난 속도에 얼이 빠진 기기는 모모에게만 들려 준 이야기를 정신없이 차례차례 털어 놓았다. 드디어 마지막 하나 남은 이야기마저 털어 놓자, 그는 불현 듯 자기가 고갈되고 텅 비어 버려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꾸며 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234)
결국 회색신사들은 모모가 가진 시간을 얻으려고 서로 탐욕으로 싸우다 전멸해버린다. 그리고 모모의 동네는 예전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소설에서는 행복한 결말로 끝난 것이었다. 전에 봤던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와 같은 결말인 것이다. 같이 지냈던 사람들이 평등하게 같은 곳에 오순도순 모여 사는 모습. 분명 난 그런 모습을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썼음에도 어떤 분이 결말이 비극이라는 얘기를 하셨다. 아마도 그 분은 주인공을 로펌 대표 한정호에 이입을 한 게 아니었을까? 여기서 한정호는 회색 신사였다. 어쩌면 요즘 세상은 모모 생각이 지배하는 세상이 이상향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회색신사가 활개하는 세상이 정상이라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이 책에서 분명 행복하게 끝나는 것인데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난 일인 듯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앞으로 일어날 일인 듯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그래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364)
책을 읽기 어려웠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회색 신사처럼 살았던 게 아니었나 싶다. 모모 편에 서서 책을 보는 것이 참 불편했단 생각이 든다. 마치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뒤집어 봐야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나는 남보다 많이 있는 것에 만족을 했지,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일로 만족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물론 이론적으로는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읊조렸음에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물질이나 지식의 양으로 내 행복의 척도를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진 않았나 생각해 본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노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23)

나는 이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난 일인 듯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앞으로 일어날 일인 듯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그래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364)

다른 모든 이야기들처럼 이 이야기도 단숨에 꿀꺽 삼켜졌고, 금방 다시 잊혀졌다. 사람들은 기기에게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엄청난 속도에 얼이 빠진 기기는 모모에게만 들려 준 이야기를 정신없이 차례차례 털어 놓았다. 드디어 마지막 하나 남은 이야기마저 털어 놓자, 그는 불현 듯 자기가 고갈되고 텅 비어 버려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꾸며 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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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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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각자 선정한 도서를 돌아가며 읽고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각자가 고른 책이 이상하게 주제들이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번 주 시간을 시각화하여 메말라가는 인간성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던 ‘모모’를 읽었다. 이번에 읽은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에 물들어 무너졌던 가정에서 탈출해 새로운 가정으로 도망간 한 가장의 이야기인 이 ‘소금’이 다른 이야기 같지 않았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엄마가 가출해서 가정이 흔들리고 그의 존재를 떠올리며 반성한다는 스토리를 가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플롯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 ‘소금’에 대한 인터뷰를 하다가 짧게 그 당시 큰 이슈였던 신경숙 작가의 표절에 관해 이 책을 쓴 작가 박범신 님은 이렇게 얘기했다.
“사실 소설이란 게 현실을 표절한 것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것이 표절에 표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두 책을 심층적으로 읽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같은 작가로서 어느 정도 이해는 합니다.”
라는 말에 많은 공감이 갔다.
물론 비슷하다는 것뿐이지 이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작가의 느낌도,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하는 바도 전혀 닮은 점을 찾을 수 없다.
줄거리
소금은 어떤 염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 장은 갑자기 모든 배경이 바뀌며 어느 폐교에서 화자인 시인과 어느 당돌한 여자인 시우와의 첫 만남이 그려진다. 시우는 췌장암 의심 소견을 들은,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의 고향까지 찾아 온 막내딸이었다. 아버지는 어떤 염부의 가장 공부 잘 하는 아들로 자라 부잣집 여인과 결혼하고 대기업 임원까지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속사정은 딸이 본 것과 달랐다. 아버지 선명우는 과거부터 염부인 아버지가 그를 이용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갈 수단으로 키워진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결혼 또한 사랑하는 세희가 아닌 억지로 만난 당돌한 부잣집 딸 혜란과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기에 가정은 아내 위주로 돌아가고 자신은 늘 주변인일 뿐이다. 막내 딸 생일날이자 자신이 시한부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온 날, 그는 자신과 같은 위험에 쳐했던 사내를 구하지 않는다. 죄책감에 따라간 병원에서 그의 가족과 일행이 되어 방랑길을 떠난다. 결국 시우의 아버지 선명우는 길에서 주어 온 여자 아이 시내와 지애, 그리고 사내인 김영민에게 맞고 살았던 윤영미란 이름을 가진 함열 댁, 그들과 새로운 가정을 꾸려 살기로 결정한다. 선명우 비밀을 알게 된 시인인 화자와 시우는 아이를 갖고 새 가정을 꾸리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주인공 선명우
사실 선명우란 남자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잣집 딸 혜란이를 임신시킨 것. 그리고 계속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묵묵히 이어나간 것. 그리고 말도 없이 가출해 가정을 풍비 박살낸 것. 결국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인공 선명우는 책임감 없는 자신의 삶을 정당화한 악인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그에게는 깊은 피해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오로지 자신만 희생하고 자신만 남을 위해 사용된다고 착각하며 산다. 한없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주인공 선명우가 작가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옹호되고 심지어 아름답게 그려진다. 왜 작가는 어떻게 이런 주인공을 이해하는지, 그의 생각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아버지 선기철
선명우의 아버지는 배운 사람이었으나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없는 노동력을 요하는 염부 일을 한다. 그러면서 내면에는 켜켜이 분노가 쌓인다. 그는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꿈을 갖는다. 바로 가장 똑똑한 셋째 아들이 대학까지 나와 집안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애비들이 치사하면 세상이 모두 치사해진다는 아버지의 말은 하나도 그른 데가 없었다. 치사한 아버지들과 치사함을 견뎌내는 아버지들에겐 모두 ‘새끼’들이 딸려 있었고, 아버지들의 소망과 달리, 그 새끼들 역시 치사하게 살아가며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를 대물림받는 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76-77)
선기철이 가진 아들 선명우를 통해 이루려는 욕망은 정도가 심했다. 자신이 다쳤다는 말에 먼 길을 걸어 온 아들을 ‘공부나 하라’며 내쫓는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다시 걸어 돌아가는 길에 쓰러진 자신을 보살펴준 세희란 누나와 사랑을 키워가게 된다. 결국 선명우가 염전 일을 하다 쓰러진 아버지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 일으켜 세워봤자 혼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때의 아버지 행동은 나중에 자신의 딸들을 무뚝뚝하게 대하는 모습으로 변형된다. 앞서 언급하듯 부모의 모습은 그대로 자식의 미래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내 혜란
선명우가 가출 한 뒤 아내 혜란은 자살한다. 겉모습으로 자신을 지탱하던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자신의 모든게 무너지고 있어도 겉만 멀쩡하다면 자신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돈줄인 남편을 잃자 정신을 놓고 결국 세상을 등진다.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서 품격을 잃는 법이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어려운 일이 생길수록 몸단장, 마음 단장, 놓치면 안 돼!” 어머니는 늘 말했다. 세상은 무너지는 사람을 붙잡아주지 않는다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무너지는 사람을 보면 더 밀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라는 것이었다.(45-46)
가출
이런 겉모습에 집착하는 부인 안에서 선명우는 괴로워한다. 그나마 마음을 나누는 막내딸 시우와 쫄면 데이트를 하며 가수가 되고 싶었다는 꿈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결국 아내에게 둘이 모양 빠지는 일을 했다며 혼난다. 그런 그가 가출을 한다. 그는 정말 행복했다.
놀랍기는커녕 사흘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다른 세상에서의 일처럼 아득하고 또 잔잔하게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별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꼽이 떨어지는 것처럼, 모든 게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심지어 통쾌하기까지 했다.(149)
그가 꿈꾸는 가정이란
작가는 선명우가 과거에 가졌던 가정과 이후에 새로 만든 가정을 이어 보여준다. 과거의 가정은 자본주의로 찌들었던 겉만 번지르르하기만 했다 . 이에 반해 비록 핏줄이 아닌 인연으로 이어졌지만 내면은 행복으로 가득 찬 단단한 현재 가정을 그린다.
작가 본인의 이야기일지도 모를 현대 중년 가장의 대표 격인 선명우의 묘사는 이렇다.
가족은 차츰 그 자신을 다만 ‘통장’같이 취급했다.
아내는 물론이고 어린 딸들과도 따뜻이 지내던 시절의 짧은 추억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잉여 재산이 불어나면서 그는 차츰 그 모든 사랑의 관계를 잃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그는 자식들을 괴물로 만들었을 뿐이었고, 아내와의 사랑 역시 서로 ‘빨대’를 꽂아 빠는 기능적 관계로 변모됐다. (248)
주인공을 통해 자본주의의 한계를 설명하는 작가의 어조는 점점 강해진다. 이른바 ‘빨대론’을 통해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욕망에 대해 설명한다.
가출 전의 그는 빨대 하나 들고 세상의 구조에 충직하게 복무했다. 만족은 오지 않았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 중심의 체제에 기생해 그 역시 빨대를 꽂고 죽어라 빨았으나, 넷이나 되는 처자식이 그의 몸뚱이에 빨대를 또한 꽂고 있었으므로 그가 빨아올리는 꿀은 늘 턱없이 모자랐다. 모자라면 더욱 몸이 달았다. 그 체제는 그에게 약간의 꿀을 제공하는 대신, 그를 계속 노예 상태로 두고 부려먹기 위해 그의 후방에 있는 처자식을 끊임없이 부추겨 그가 빨아 오는 꿀을 더 재빨리 소모시키도록 획책했다.(330)
결국 선명우 위에 있는 조직은 ‘깔때기’를 물고 있는 거대 자본주의 세력으로 묘사한다. 이런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새로 만든 가정을 통해 보여준다.
“나의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울 거야!”
자본의 저 거대한 ‘깔때기’와 무분별한 ‘빨대’가 사랑하는 그 애들을 제 입맛에 맞는 노예로 만드는 걸 다시 또 방치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무엇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애들은 아주 건강히 크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그 애들 아버지가 된 게 참으로 좋았다.(337)
그는 스스로 생산성의 사슬을 끊었다. 외부에서 ‘이 정도는 살아야지.’, ‘이 정도 살아야 중산층이지.’라는 기준을 걷어찼다. 그럼으로 선명우는 행복을 되찾았고 딸은 멀리서나마 아버지에게 찾아온 행복을 목격한다. 그러면서 시인의 아이를 임신해 새 가정을 만들 용기를 얻는다.
남자가 만든 소설
몇 권의 소설책을 읽어보니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의 근본적 생각이 참으로 많이 다르다. 이 작품에서도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는 남자의 심리가 잘 나타난다. 바로 시인의 전처 우희나 세희, 마지막으로 시우의 거짓말에 대한 부분이다. 보통 남자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특히 주인공 선명우는 그 부분에 있어서 심각한 수준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내쫓았다고 아버지에 대한 정까지 끊어버린다. 결국 선우는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는 용기 뿐 아니라 타인의 말 속에 담긴 다른 속뜻을 이해하는 데도 참 긴 시간이 걸린다. 시우가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냉소어린 말이 거짓말일 것이라는 힌트를 시인에게 들려줄 정도의 여유가 이제야 생긴 것이다.
앞서 말한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와 이 소설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엄마를 떠올리고 그 분의 상황을 뒤돌아 본다. 그러면서 가족들은 어머니의 아픔을 공감하고 추모하며 답을 찾는다. 이에 반해 이 소설 ‘소금’은 주인공 선명우와 이어지지 않은 인연 ‘세희’의 마지막 보낸 장소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아버지 이름인 ‘선기철’ 이름을 따서 소금을 만든다. 한마디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식으로 그들을 나름대로 추모하며 끝을 맺는다. 그 뿐 아니라 가정의 문제를 가정 내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부패한 자본주의가 들어와서` 라는 의견까지도 집어넣는다. 신경숙 작가가 어머니의 희생을 개인적 감성에 의존한 부분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마치며
어쩌면 이 소설은 어느 아버지의 성장 소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자녀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남과 같이 살려고 하지 말고 너만의 길을 가라고.
네 생각을 제대로 말하고 살라고.
세상이 흔들려도 너는 너의 길을 가라.
아니면 선명우처럼 긴 방황을 하고 평생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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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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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발제했던 ‘로드’를 제치고 이제껏 읽은 책 중 가장 읽기 힘든 책으로 선정 되었다. 코맥 맥카시의 ‘로드’는 지구 종말을 전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 제목처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쳐야 할 ‘늙고 병들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읽으면서 바로 전해지는 늙는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이 내 신경까지 자극하는 듯했다. 차라리 삶이 끝났다는 게 해피엔딩일 수 있는 이 소설. 이렇게 같이 읽지 않는다면 내 재미를 위해서 절대 선택하지 않을 단 한 권의 책이다.
줄거리
책의 시작은 한 남자의 장례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이름은 없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역시나 안 보인다. 그 후 그가 살았던 어린 시절, 그리고 세 번이나 이어진 결혼, 계속된 수술과 아픔, 마지막으로 여생을 지낸 은퇴자 마을에서 미술 선생님으로서의 삶, 그리고 죽음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삶
그가 느낀 고통은 어릴 때 탈장 수술부터 시작된다. 탈장 수술하기 위해 입원한 첫 날, 같은 방에 있던 다른 아이가 죽는다. 그는 그 전에 바닷가에서 난파선에 있던 시체를 만나기는 했지만 삶과 죽음을 지척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경기 불황에도 수완 좋은 ‘에브리맨’이란 가게 보석상이었던 부모는 아들 둘을 훌륭하게 키운다. 둘째 아들인 주인공은 그런 부모에게 보답하듯 누구나 하는 결혼을 해 독립한다. 첫 번째 결혼은 실패였다.

진정한 반려자 피비를 만나 귀중한 딸 낸시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던 중 노화에 따른 몸이 얘기하는 징후를 겪는다.
그 일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었다. 이제 한해도 입원 없이 지나가지 않았다. 장수한 부모의 아들이고,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에서 공을 들고 뛰던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건강해 보이는 여섯 살 위의 형을 둔 동생이었지만, 그는 아직 육십 대에 불과한데도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몸은 늘 위협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애인들과 자식들과 성공을 안겨준 흥미로운 일자리를 가졌지만,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76)

이렇게 아파오자 그는 건강한 형 하위를 진심으로 질투한다. 이렇게 올라오는 질투는 정말 속수무책이다. 임신을 간절히 원할 때, 왜 우리에겐 아이만 주시냐고 그랬더니 상도 주셨다며 농담이랍시고 얘기하는 네 명의 자녀를 둔 여자 개그맨의 발언을 듣고 잠이 오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나를 배려해 말을 가려서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올라오는 질투란 게 참 추하고 이기적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렇게 불가피하게 올라오는 못난 감정. 그걸 작가는 잘 설명해 주었다.
노인이 되어서야 그는 질투하는 사람에게서 평온, 나아가서 심지어 현실적인 태도까지 빼앗아가는 감정 상태를 발견했다-하위가 생물로서 부여받은 것이 자기 것이기도 했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위를 미워했으니까.(105-106)
그는 죽어가는 자신의 육신 때문인지 일탈을 감행한다. 젊고 야한 여자와 놀아난다. 그 정도는 심해져서 정숙한 부인 피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른다. 피비는 떠난다. 요즘 읽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그런다. 보통 싸움이란 이기는 사람이 있다면 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만 ‘이혼’만은 둘 다 지는 게임이라고. 그래서인지 피비는 헤어진 이후 충격때문인지 병에 걸려 팔 한 쪽이 마비된다.
이제는 내 생각을 감추지도 않을 거고, 입을 다물지도 않을 거야. 당신 앞에 성숙하고 똑똑한 여자가 나타났어. 상호관계라는 게 뭔지 이해하는 짝이 나타난 거야. 이 여자는 당신한테서 세실리아를 없애주고, 훌륭한 딸을 낳아주고, 당신 인생을 완전히 바꿔줬어. 그런데 당신은 그 여자를 위해 뭘 해야 좋을지 몰랐어. 덴마크 년하고 그 짓을 하는 것 말고는 말이야. 나는 손목시계를 볼 때마다 파리는 몇 시인지, 둘이서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하곤 했어. 그런 일이 주말 내내 계속됐다고. 모든 일의 기초는 신뢰야. 안 그래?(126)
광고 일을 했던 주인공. 그는 은퇴를 하지만 예전 직장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들은 한 명 한 명 늙어 죽는다. 이런 일들을 목격하며 한 마디로 정리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162)
이렇게 우울하게 책을 읽고 있다가 긴장 풀라는 듯 웃긴 대목이 있었다. 주인공이 큰 수술을 앞두고 자신이 죽으면 묻힐 공동묘지에 가게 된다. 거기서 너무나도 슬프게 울고 있는 여인을 보며 대화를 나눈 대목이다.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봤지요. 내심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아니, 댁이 틀렸소.” 남자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저 여자는 늘 저랬소. 오십 년 동안이나 저랬단 말이오.” 그는 절대 용서 못 할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저 여자는 자기가 이제 열여덟 삶이 아니기 때문에 저러는 거요.”
그리고 그는 수술 중에 심장마비로 죽는다.
왜 이 이야기가 그토록 무서운 것일까?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죽는다. 친엄마라면 모두 아이를 낳는 것처럼. 그런데 글을 읽고 있자니 정말 잔혹하단 생각이 든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고 우리에게 ‘죽는’ 형벌을 내리셨다고 한다. 그게 과연 왜 형벌인건지 항상 궁금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니 명확히 알겠다. 늙어 죽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생각들
나이 많은 분들이 만나면 항상 하는 얘기가 있다. 병원 얘기와 아픈 얘기. 젊은 사람들이 싸고 질 좋은 옷과 가방 얘기를 한다면 노인들은 친절하고 저렴한 병원 얘기를 한다. 앞 집 할머니와 대화는 이렇다. 여든 가까운 할머니는 이제 ‘죽는’ 얘기를 하신다. “몇 동 몇 호 할머니가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몇 동 몇 호 할머니는 아직도 병원에서 돈만 쓰고 죽질 않는다.” 듣고 있으면 나도 곧 죽을 사람인 냥 진이 다 빠진다.
내가 사는 곳은 70년대에 지어진 당시 고급 아파트였다. 많은 분들이 이사 가지 않고 아파트와 함께 늙어가셨다. 이곳에 온 나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주위에는 모두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 뿐, 나랑 동갑인 사람은 하숙생과 다르지 않은 딸과 손자들밖에 없었다. 여기 사는 8년 동안 나는 죽음 수용의 5단계를 모두 거쳤다. 당장 이사 가야지.(부정) 왜 하필 이런 아파트야?(분노) 그래, 조금만 견디면 재건축하겠지.(타협) 도대체 재건축은 언제 되는 거야?(우울) 현재는 수용단계다. 그냥 주위 노인들에 대한 타협.
그러면서 내 시각도 달라졌다. 옛날에는 남에게 약점 잡힐 일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따라서 이런 SNS같은 곳에 내 자국을 남기는 것 또한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현재가 언제 숨기고 싶은 과거가 될지 모른다고. 항상 죽음을 염두 해 두니 이 또한 나에 대한 역사고 내 딸을 위한 기록이 된다. 내 생각의 파노라마가 된다.
마치며
책 시작부터 이 책을 읽지 말길 권했다. 내 생각이 달라졌다. 언제든 죽는 게 예정되어 있는 사람이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삶이 감사하고 감사할지도 모른다.

죽음을 염두 해 둔 사람은 후회란 게 없다. 아마도 주인공이 젊은 여자를 보며 저지른 이탈도 어쩌면 자신이 죽지 않을 거란 오만함이 원인인 것을 아닐까. 죽기 전날에서야 주인공은 옳은 일을 행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186)
이 책은 비록 얇은 소설이지만 결코 얕게 생각할 수 없는 묵직함이 있다.

결혼은 그의 감옥이 되었다. 그래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잠을 자야 할 시간에도 그를 사로잡는 수많은 괴로운 생각 끝에 발작적으로, 고민하면서, 밖으로 나갈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39)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 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83)

우리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186)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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