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2 - 전2권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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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디케르의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2]을 읽었다. 신간 목록을 살펴보다가 미리보기를 잠깐 읽어보았는데, 단숨에 흥미유발이 되었다. 이전까지 저자의 책을 보지 못했지만 출판사의 안목에 기대어 보기로 했다. 읽다보니 이전에 발표된 소설들이 언급되었고, 이전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전작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지금 읽고 있는 신작을 멈추고 절판된 전작들을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이미 알래스카의 살인 사건이 발생된 이후 숨가쁘게 진전되는 스토리에 몰입되어 행여나 전작의 스포일러가 나온다 하더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마도 저자의 절묘한 배려로 전작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란 의구심만 부추길 뿐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아서 오랜만에 중고서적을 뒤적여 전작을 주문하도록 만들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거둔 기욤 뮈소와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조엘 디케르의 소설 또한 반전의 반전을 기하며 페이지 터너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이런 소설책만 있다면 여행을 홀로 떠나며 기차와 비행기를 장시간 탄다해도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을 것 같다. 책을 들고 있는 팔이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면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청하다가도 궁금한 이야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설렘으로 인해 여행은 더욱 즐거워진다. 이번 출장에도 가방이 무거워짐에도 불구하고 1권을 다 읽고 나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 2권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어깨의 통증을 견뎌내며 2권까지 짊어지고 갔다. 역시나 업무를 마치고 술을 한 잔 걸친 상태에서도 노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마커스의 행보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가가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런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실존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더군다나 화자인 마커스 골드먼이 스승인 해리 쿼버트의 사건을 통해 슬럼프를 극복하고 저명한 작가가 되어 스승의 사건을 풀어나갈 때 만났던 경감 페리와의 조우는 장대한 시리즈물을 연상시킬만큼 긴박감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추리소설과 형사물이 그렇듯이 사건의 발단 전개와 점점 미궁에 빠지는 등장인물들간의 긴장감은 결말에 이르러 용두사미 되는 꼴이 많았는데, 이번 작품도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는 절정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실망감과 더불어 뜻밖의 인물들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마무리가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알래스카와 얽힌 월터와 에릭 그리고 페트리샤의 이중적인 면모에 대한 전개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어디까지 극단적일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과거와는 다르게 요즘 소설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당연히 이성애적인 관계에만 집중해왔는 모습과는 반대로 주인공의 성적 지향이 동성애나 양성애일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성적 지향으로 인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때로는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알래스카의 양성애적인 성적 지향이 드러나면서 미궁에 빠졌던 사건은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요즘들어 포털사이트의 메인에 걸리는 기사 제목을 보기가 두려워질 정도로 기괴한 사건들이 반복되고 있다. 일명 ‘묻지마 살인이나 폭행’이 빈번히 일어나고 익명의 다수를 헤하기 위한 무모한 시도와 성폭행을 하기 위해 의도적인 접근과 죽음에 이르는 폭행까지 서슴치 않는 범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의 범행은 마치 갈때까지 간 망쳐진 인생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미지의 대중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알래스카의 죽음에는 분명 서사가 있다. 알래스카를 죽인 범인으로 오인된 월터와 에릭의 정황도 다 이유가 있었고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그들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기도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범죄들은 서사가 없다. 죄를 저지른 이들의 서사의 정당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납득하기 힘든 그저 정신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죄의 결과들만 남아 있어 희생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너무나도 흔하게 발생된다. 허구의 이야기임을 알고 보기에 잔혹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일시적인 공감에 불가하기에 다시금 쉽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실제로 주변에서 벌어진다면 나와 관계된 누군가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듯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흉악한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사건의 정황에 대한 뉴스 보도와 더불어 희생당한 분들의 가족들의 인터뷰가 기사로 전해질 때가 있다. 단 몇 줄로 요약된 인터뷰에서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 사건이 발생되고 난 직후에는 아마도 머리가 정지된 것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닐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염려스러운 것은 그 끔찍한 사건이 대중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질 때가 아닌가 싶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겉으로 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만 희생자의 가족들을 바라볼 때 홀로 남겨진 이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을 대체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생각하면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들이 마치 내 가슴에 못을 박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소설 속에서도 알래스카, 월터, 에릭, 엘레노어의 부모를 인터뷰하는 페리와 마커스의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간신히 마음 속에 꾹꾹 눌어두었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야만 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제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화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그럼에도 잃어버린 자녀와의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 살아가는 힘이라고 생각하듯이 페리와 마커스의 질문에 대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비극적인 사건이 가져온 태풍과도 같은 변화를 실감케 만든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그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접하게 되면 그 이전의 자신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앞으로의 삶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번 작품에서 마커스와 해리 쿼버트의 사건을 해결한 후 절친이 된 페리 형사 또한 아내를 잃게 되는 슬픔을 맞게 되고, 마커스는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 속에서 헤어진 연인과 사촌들에게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과 [볼티모어의 서]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회상 장면들은 마커스 골드먼의 과거가 어떠했을지, 스승인 해리 쿼버트는 어떻게 놀라 켈러건을 살인한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뒤늦게 저자의 책을 접하게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소개된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로 돌아가도록 이끄는 저자의 놀라운 이야기의 힘에 박수를 보낸다. 


“돈의 함정이 뭔지 아니? 돈을 주면 모든 종류의 감각을 살 수 있어. 하지만 감감과 진짜는 달라. 돈은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감각을 만들어줘. 진짜로 사랑받는 게 아니어도 사랑받는 느낌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돈으로 비바람을 피할 지붕은 살 수 있어도 내면의 평화를 사지는 못 해.(1-195)”


#조엘디케르 #알래스카샌더스사건 #밝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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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 우짖는 새 - 개정판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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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읽었다. 극장을 밥먹듯이 다니면서도 아주 유명한 영화들은 외면한 채 재미에 치중해서 영화를 보던 때가 있었다. TV에서 고전 영화를 방영해주는데 우연히 미션을 보게 되었다. 이미 스토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배우들도 다른 영화에서 익숙히 보아왔던 얼굴이고 OST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마치 그 영화를 몇 번이나 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몰입이 되었다. 아메리카의 엄청난 대지를 폭력으로 점령하여 원주민들을 몰살시키고 영토 확장에만 열을 올렸던 당시 유럽의 몇 강대국은 가톨릭 선교를 수단으로 삼아 그들의 더러운 욕망을 정당화시켰다. 원시 생활을 해오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총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고 선교사를 앞세운 무리배들은 그들을 무지몽매한 이들로 치부하며 강제로 교회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복속시켰다. 열 명의 악인 중에 한 명의 선인에 해당되는 가브리엘 신부는 원주민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성체거동을 하며 가브리엘 신부가 총을 맞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원주민의 땅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그들의 풍습과 문화를 무시한 채 선교라는 이름으로 내지른 폭력을 정당화시킨 것일까? 


어찌보면 유럽 교회가 일찌감치 무너진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불가지론자들이 갑자기 늘어나서 혹은 급격한 세속화라기 보다는 영화 미션의 사례처럼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리를 이룬 이들이 저지른 추악한 과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처럼 맹목적인 믿음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과도한 추앙은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성경에 나온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극단적인 행동의 밑바침으로 삼곤 한다. 우리나라에서 지속적으로 사이비 종교가 난립하는 것은 신생교의 이름만 바뀔 뿐 사람들을 현혹케 하는 방법은 아주 유사하여 불안과 불확실에 사로잡힌 이들의 빈구석을 꿰뚫고 다가가는 이들의 얄팍한 상술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종교에 대해 무심하면서도 관대한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두 차례의 민란을 다룬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선교에 대한 생각을 되짚어 보게 해준다. 어릴 때 역사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 살짝 등장했던 ‘이재수의 난’이 어설프게 기억이 난다. 조선 말기에 민란이 꽤 많이 일어났기에 그런 류의 난 중에 하나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을 천주교에서는 ‘신축교안’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제주시에서 남동쪽의 황사평에는 당시의 민란으로 가톨릭 신자 300여명이 죽임을 당하고 묻혀 있어 순교자들의 성지로 불리고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이후 약 200여년에 걸쳐 조정에 의해 기나긴 박해가 끝난지 20여년이 지난 1901년 제주의 신자들은 어째서 민란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일까? 1901년에 일어난 민란의 희생자들을 기리며 순교터로 기억하는 황사평 성지와 반대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단한 것으로 민심을 드높인 ‘이재수의 난’의 장두들을 기리는 삼의사비가 있는 제주는 종교가 정쟁의 도구로 사용될 시 어떤 기만과 만행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희생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대희년을 맞아 한국가톨릭교회는 신축년에 일어난 사건의 과오를 반성하는 심포지엄을 갖게 되었고, 2년 전에 120주년을 맞아 신축교안과 이재수의 난이 더 이상 대립과 반목이 아닌 화해와 용서를 요청하는 화해의 탑을 세워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소설의 화자라고도 할 수 있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 거객 운양 김윤식으로 눈으로 지켜본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은 당시의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 부폐한 조정의 민낯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제주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내륙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틈을 타고 목사로 임명된 이들의 수탈과 세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을지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소설에 틈틈히 묘사된 백성들의 가난과 허기짐은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물똥을 싸지른 어린 아기의 엉덩이에 묻은 똥을 키우던 개에게 핧도록 만드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세상에 매길 수 있는 모든 것에 세금을 매켜 가혹하게 수탈해 가는 봉세관과 마름들의 지독함은 치를 떨 정도로 매정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법국 신부들을 믿고 오만방자해진 교인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을지도 짐작이 간다. 교세를 확장한다는 미명하에 법국 신부들은 세폐를 교폐로 연결지어 관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교인이 되지 않은 이들을 뱀의 눈으로 지켜보다 작은 꼬투리라도 잡을라치면 교당에 끌어다 매를 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니 과히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성교를 기쁘게 받아들일 백성들이 누가 있었을까 싶다. 


“교리책에 쓰인 말과는 실지가 영 딴판이더라 이거여. 천주 십계를 열심히 수계할 생각은커녕 도리어 욕되게 하니, 그런 개망나니들이 천당 가는 교라면, 난 죽어서 지옥불 속에 떨어질지언정 그런 교는 못 믿어. 마방이 안되려면 당나귀들만 들어온다더니, 시방 교당이 그 꼴이 아닌가. 왼 섬 몽니꾼, 심술패기는 다 모여들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쥬.(245)”


#현기영 #변방에우짖는새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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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리커버 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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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그 어느 작가보다도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 같다. 장편소설은 거의 다 본 것 같고, 에세이류는 재즈를 비롯한 하루키의 취미에 반해 나의 관심사가 너무 동떨어져서 그런지 아직도 읽지 못한 게 있다. 마라톤에 대한 하루키의 사랑은 이미 다른 글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던터라 조금은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짐작했지만, 막상 벌써 15년 전에 발표된 책의 내용으로 보건데 작가이자 마라토너라는 수식어를 붙임에 전혀 이상이 없다는 놀라움을 갖게 된다. 그냥 막연히 글을 쓰기 위한 체력 유지를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 루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열정적인 러너인지 미쳐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하루키가 단지 뛰어난 재능만이 아니라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기에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달리기를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을 살펴봄으로써 여실히 드러났다. 


오늘이 광복절이니 일본 작가에 대한 찬사를 시작부터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조금은 계면쩍기에, 벌써 몇 년 째 해다마 광복절이면 81.5km를 달리는 션 씨를 기억하고 싶다. 책에서 하루키가 100km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81.5km면 거의 그 수준에 달하는 웬만한 러너들은 언감생신 엄두도 못내는 거리가 아닐까 싶다.  오후에 션 씨의 인스타에서 완주한 그래프를 올린 사진을 보았는데, 새벽 5시부터 무려 8시간 가까운 시간을 뛰어 완주했다고 한다. 인간 군상이 너무나도 다양할 수 밖에 없고 처지에 따라서 각자도생할 수 밖에 없는 세상사이지만, 어디선가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며 잊혀져 간 이들을 기억해 달라고 땀을 흘리고 있다. 그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아는 이들은 8.15km를 함께 달리며 션 씨를 응원해주고 기부에 동참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번역자인 임홍빈 님은 역자 후기에서 하루키의 소설이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 것 계기가 옴진리교 사건과 한신 대지진이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설 - 그것은 하루키가 1인칭 소설만을 쓰면서 그 작품들 속에 깃든 자아의 존재와 가치, 그리고 상실과 재생의 세계에 중점을 두고 사회나 타인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무관심에 치중했던 이른바 디테치먼트의 문학세계에서 헌신이나 참여를 뜻하는 커미트먼트로의 문학 영토 확장 내지는 전환을 선언한 것이라는 지배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273-274)”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비혼주의가 만연해지면서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적인 삶의 태도가 정형화되어가고 있다. 이른바 고독사에 대한 사회적 심각함을 인지하면서도 공동체적 삶으로의 회귀는 불가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디테치먼트적인 각박한 세상 속에서 커미트먼트적인 휘귀한 행동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동을 받게 된다. ‘아니 요즘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라며 멀리서나마 박수를 보내게 된다. 하루키의 소설이 변화된 것은 옴진리교 사건이나 한신 대지진처럼 아무리 내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 모든 정성과 애정이 엉뚱한 누군가의 악의나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자연재해와 같은 일로 너무나도 허무하게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허무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허비하게 보다는 미약하게라도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또 다시 세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덜 비참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면에서 션 씨가 해다마 흘리는 땀은 커미트먼트로서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생업에 종사하며 주변을 돌아볼 틈 조차 없을지 모르지만, 찰나의 순간에 고개를 돌렸을 때 누군가가 그렇게 세상에 대한 헌신과 참여를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리라. 


하루키가 이 책을 쓰기까지 25번의 마라톤 완주를 했으니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몇 번의 완주를 더 했을 것이다. 거기에 울트라 마라톤과 트라이애슬론까지 섭렵하는 작가는 아마도 지구상에 하루키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그가 달리면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달리다 걷지 않기 위해 부단한 결심을 반복한다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그의 진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고 있다. 


책에 나온 작가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첫 번째는 당연히 글쓰기의 재능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천재적인 아주 소수의 작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재능만으로는 소설을 계속해서 써낼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인간의 경험치는 한정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로 중요한 자질은 집중력이라고 말한다.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인터뷰 내용이나 소설의 말미에 붙는 작가의 말 부분을 보면 그들이 한 작품을 탈고하고 위해 얼마나 기나긴 자신과의 싸움을 벌였는지 짧게나마 고백하고 있다. 아주 어렵지 않은 소설이라면 짧게는 서너시간 길게는 하루 이틀이면 다 읽게 되는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작가가 보낸 긴 고뇌의 시간을 독자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애써 한 편의 소설을 냈다고 해서 바로 이어서 새로운 작품이 구상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기에 자신이 쓸 수 있는 분야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지속력(지구력)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로 논하고 있지만 어찌보면 앞의 재능과 집중력도 지구력 없이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 때 예술의 영역에 속한 이들이 무언가를 창작하는 과정 속에서 클리세처럼 여겨지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었다. 술을 진탕 마시거나, 손에서 담배를 놓지 않고 줄담배를 태우며 자욱한 연기 속에서 격한 기침을 내뱉던가, 문란한 성생활을 지속해서 연인에게 버림받거나 하는 극단적인 삶의 행태를 계기로 위대한 창작물이 나온다고 보는 시선 말이다. 실제로도 그런 류의 예술가들이 있었고, 작품이 유명해진 이후에 그들의 기이한 삶이 주목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삶의 행태들은 결국 요절과도 같은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왔기에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에 반해 대중에게 남겨줄 작품들은 소수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면에서 하루키의 지극히 범생 같은 하루의 루틴은 이제는 고령의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긴 장편 소설을 출간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나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생각에 따라 인생을 살아왔다.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결과적이긴 하지만,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피할 수 없는 여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타인으로부터의 고립과 단절은 병에서 새어 나온 산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녹여버린다. 그것은 예리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내벽을 끊임없이 자잘하게 상처 내기도 한다. 그와 같은 위험성을 나 나름대로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40-41)”


“그렇지,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 밖에 없다.(107)”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잘 된다고 하는 가정이지만) 다다를 수도 있다.(255-256)”


#무라카미하루키 #달리기를말할때내가하고싶은이야기 #문학사상 #적어도끝까지걷지는않았다 #리커버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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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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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몫’, ‘일년’, ‘답신’,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전에 다른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들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수록된 소설들이 다 좋았다. 이런 주옥같은 단편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얼마나 긴 시간을 고뇌하며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기에 페이지가 휘리릭 빨리 넘어갈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빨리 읽으면 안되는데, 한 문장마다 좀 더 주의를 기울이며 읽어야 하는데 주인공들의 마음이 못내 궁금해져서 한치도 머물지 못하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이야기는 끝이 나 있었다. 한 편의 이야기들이 끝날 때마다 뭔가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하나씩 생기는 것처럼 휑덩그렁한 느낌이 들어, 새로운 제목으로 기다리는 이야기에 선뜻 다가설 수 없었다. 분명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일텐지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동시대의 삶을 살아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단편들의 주인공은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있지만 읽고 나면 한결같이 쓸쓸했다. 우리 내 삶이 이렇게 쓸쓸하고 안쓰럽기만 하다면 대체 다들 어떻게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인지를 생각하다보면 서글픔이 밀려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극복하는 것이 과연 의미있을까란 무력함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주인공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단 한 발자국도 도저히 내딛을 수 없을 것만 같고, 단 하루도 더 이상 숨쉴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한 발자국을 내딛고 하루를 살아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둑한 길에 몸을 웅크려 고개를 숙이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젊은 여자를 보았다. 얼핏봐도 엣되보이는데, 술에 취한 것인지 조금은 위태롭게 보였다. 다가가서 괜찮냐고 물어보려다가 아직 한밤중도 아니고 외진 곳도 아니기에 별일 없겠지란 마음으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걸으면서 행여나 복잡한 상황에 휘말릴까 두려워 도움을 주기를 주저한 것은 아니었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 찰나에 노숙자에게 다가서는 젊은 두 청년을 보게 되었다. 아웃리치라는 글자가 새겨진 노란 조끼를 입고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사이를 뚫고 나오는 작은 리어카가 보였다. 많지 않은 폐지와 빈 박스 몇 개를 실은 리어카를 가냘픈 몸의 할머니가 끌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초저녁 잠이 많다고들 하는데, 이미 예전에 초저녁 잠이 많은 나이에 이르렀을 분이 한낯의 더위를 피하고자 하심인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폐지를 수집하고 계셨다. 리어카를 끄는 작은 몸의 할머니는 그렇게 나를 지나쳐 갔다. 


우리는 사실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괜찮냐고? 힘들지 않냐고?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지나가는 말일수도 있지만 그 질문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별 생각없이 예의상 물어본 말에 오랜시간 침묵을 지켜온 이들이 봇물 터지듯이 그동안의 애환을 털어놓을 수도 있다. 우리가 책을 읽고 만나지 못한 세상의 많은 이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것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괜찮냐’는 말을 건넬 용기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들였음에도 무심히 그들을 지나친 나의 발걸음은 과연 그동안 모아온 나의 지식과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냐고 따진다. 그래서 그런지 ‘몫’에서 희영의 말은 수치심을 증폭시킨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79)” 

양경언 평론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희영은 해진에게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읽고 쓰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 지난한 과정이 삶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의미 역시 휘발되어버리기 쉽다고 전한다.(330)”


이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사회적 이슈들이 정쟁의 도구로 악용되고 좌우의 이념적 프레임을 덧씌워 옳고 그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어찌보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의식있는 척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삶이라는 긴 시간을 영위하는 몸뚱아리가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지켜볼 때 큰 감동과 위로를 받는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그 조각조각의 시간들이 얼마나 길고 지루할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썼다.(43)”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115)”


#최은영 #아주희미한빛으로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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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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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재 작가의 [탱크]를 읽었다.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본 적이 없었던 심사위원 만장일치 수상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에 더욱 기대감이 컸고, '탱크'라는 짧은 제목이 주는 강렬함과 궁금증이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기에 충분했다. 우선 소설 속에 나오는 '탱크'는 가장 대표적인 뜻인 전쟁 중에 쓰이는 무기인 탱크와는 무관하며, 에어탱크, 물탱크처럼 무엇인가를 저장하는 공간을 뜻한다. 그래서 이 '탱크'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철제 컨테이너를 지칭한다. '탱크'의 실질적 모습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는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탱크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는 탱크가 컨테이너라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소설 속에 중요한 공간인 탱크를 중심으로 연결된 인물들의 이야기는 종교와는 무관하지만 믿음이라는 자신을 존재케 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귀결된다. 첫 등장인물로 나오는 도선은 우연한 계기에 시나리오 작가로 주목을 받지만 그 이후에는 이러타 할 작품을 쓰지 못하는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원래 그런 재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운이 억수로 좋아서 첫 번째 시나리오가 영화화까지 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도선은 영어 학원에서 만난 제임스와 사랑에 빠지고 제임스의 나라에 가서 살며 로사까지 낳고 이혼하기까지 기나긴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딸 로사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에 다다르자 도선의 무력한 육신은 잠에서 깨어나 실체적 고통과 마주하게 되고 어떻게든 성공해서 로사 앞에 당당히 서겠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도선의 꿈과 희망은 탱크라는 특정한 공간의 기도를 통해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하게 된다. 


사실 탱크는 어떤 면에서 종교적 공간으로도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이 세력을 불리는 사이비적인 의식 공간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산 중턱의 어느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진 탱크라는 이름의 컨테이너는 비밀스런 조직처럼 은밀하게 방문 예약이 이루어지고 탱크를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정해진 규칙이 종용되며 그곳을 방문한 이들은 홀로 어둠 속에서 기도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탱크를 방문하고 기도했던 이들은 탱크가 가진 영험함을 믿게 되고, 은밀하게 퍼진 소문은 더욱 강력한 힘을 갖게 되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들에게는 탱크에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 


탱크를 도입하고 유지 관리하는 황영경은 탱크에서는 어떤 특별한 예식도 없고 지도자도 없으며 특정한 교리도 없기에 종교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탱크가 사이비 종교의 시발점이 광신도를 양산해 낼지 모른다는 우려는 터무니 없다고 생각한다. 탱크를 방문한 사람들은 홀로 짙은 어둠 속에서 그저 혼자 머물다 나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도선을 시작으로 탱크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가는 가운데 어찌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양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평범한 공장 직원인 양우는 동료들에게 이런 사람으로 비춰진다. "그러니 너도 사람들이 큰일로 여기는 것을 큰일로 여겨라,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지 마라, 이 작업보다 더 중요한 자신만의 생활이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도, 세상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것도 그만두어라(39-40)"라는 양우를 챙기는 두수 씨의 말. 이런 양우에게 어쩌면 운명처럼 다가온 둡둡은 마테라 라는 가보지도 못한 이탈리아 남부의 어느 마을을 매개체로 가까워지고 연인이 된다. 동성 연인이라는 둡둡이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를 떠나서 양우와 둡둡은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왔다. 


탱크라는 공간을 통해서 믿음을 키우고 그럼에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 이들은 머나먼 외계에 사는 희귀종이 아니라 그냥 내 옆에 있거나 때론 나일 수도 있는 부류이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 등장한 도선과 양우와 둡둡, 그리고 손부경과 황영경을 이해하고 그들을 응원하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 이들을 한 명이라도 마주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최대한의 인심을 써서, 아량을 베풀어야 두수 씨 정도의 애정어린 말을 해 주는 것이 다가 아닐까? 그렇다면 양우와 둡둡처럼 소수로 남을 그리고 탱크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감옥에서까지 탱크를 되살리고자 하는 황영경은 누구에게 이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종교적 신념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도 몰락에 빠지게도 만든다. 절대적 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때로는 인간이 만들어낸 믿음의 항로가 이탈한 이들을 마음껏 매도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로서의 묶여진 삶으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선사할 수 있는 것처럼 들려온 감언으로 인해 익숙해진 무한 경쟁과 자본주의 틀은 누군가 도태되어야지만 내가 그 위에 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고, 소수로 지정된 이들은 언제든 실패자로 낙인을 찍을 수 있음을 정당화 한다. 결국 탱크라는 희망의 동아줄에 목매인 사람들은 두 번이나 발생한 야산의 불로 성찰의 공간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도선과 양우는 탱크라는 공간에서 떠나간 둡둡을 통해 서로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둡둡의 아버지 강규산이 아들의 부재가 가져온 고통을 매일매일 감내하며 아들과 함께 보았던 마테라가 나오는 영화를 되돌려보는 모습은 못내 안타깝고, 둡둡 또한 마테라를 가보지 않았음에도 양우에게 마테라가 나오는 영화를 줄줄 읊어 댈 수 있었던 것은 그 영화를 보던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시간을 몹시도 그리워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 더 서글퍼진다. 


"결국 떠난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들을 통해서 기억되고 회자된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와 어떤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아니, 어쩌면 삶과 죽음을 통틀어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그뿐이다.(162)"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그렇지만 그게 탱크의 잘못이나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닥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러면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던 미래가 평생을 기다린 모양을 하고 다가오는 날이 올 거라고.(261)"


"늘 그랬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쓴다.(267)"


#김희재 #탱크 #제28회한겨레문학상수상작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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