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낙천적인 아이 오늘의 젊은 작가 50
원소윤 지음 / 민음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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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윤 작가의 [꽤 낙천적인 아이]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50번째 작품이다. 근래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경계를 너무나도 쉽게 넘어서는 것 같은데 읽다보면 너무나도 재미 있다는 것이다. 대체 이런 형식의 소설을 쓰는 작가는 누구일지 궁금해지고 저자의 현재 직업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책머리의 소개에는 순간 헉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스탠드업 코미디가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이렇게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공연장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고학력 개그를 날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이런 독특한 이력의 작가에 대한 설명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전적 소설이라 불릴 수 있는 주인공 원소윤의 삶은 나이와 시대를 떠나 우리 삶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희극과 비극의 순간들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다가와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저자의 이름과 같고 주인공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내용도 동일하기에 작가의 실제적 경험담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소설의 시작은 유서깊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태어난 것처럼 그려져 앞으로 펼쳐질 내용 또한 종교와 관련된 일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소윤의 할아버지가 치릴로, 할머니가 소피아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로무알도와 로무알다라는 세례명을 갖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면 비극을 견디고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고통을 뜻하는 참척이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참혹하고 슬픈 감정을 애둘러 표현한 이 한자말을 접하고 나서는 부모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크면 이렇게 따로 표현하는 말이 생겨났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어린 자식을 병으로 떠나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어린 아기의 무덤을 부모가 알지 못하게 봉분도 만들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부모보다 먼저 떠난 자식은 누구나 오가며 밟을 수 있도록 봉분 없이 묻는 풍습이 있었다. 천하의 불효자식이니 단죄해야 한다는 발상에 근거하여. ~~ 친척 어른들은 아기의 묫자리를 부모가 알아선 안 된다며 두 사람이 장지에 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없었던 일로 치고 빨리 잊으라고, 매일 찾아가서 울고불고하지 말라고. 천하의 바보들, 봉분 좀 안 쌓는다고 그게 없었던 일이 되겠나. 하여튼 그때나 지금이나 잊고 말고에 대해 오지랖 떠는 인간들만큼 한심한 부류도 또 없다.(100)"


소윤은 아기가 떠난 시점이 이미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기에 오빠의 부재로 인한 기나긴 공허함을 알 수 없을 테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견뎌냈을 그 지난한 고통의 시간을 상상과 공감으로 진득하게 마주한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기함을 금치 못하는 끔찍한 사건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채널을 돌리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금방 잊게 된다. 때로는 그런 비극이 행여나 자신에게도 전염될까 싶어 후다닥 도망가기도 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참으로 어이없게도 너무나도 갑자기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생겨난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 어떤 힘으로도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급체해서 속에 있는 것을 토해내듯이 울분을 터트린다. 신파의 클리세 같지만 자기도 모르게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라는 자아성찰과 고백이 이어진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에게 간절한 기도를 바치게 되고, 이성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만일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선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일련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비극을 마주하고 견디는 시간을 보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아 이게 삶의 우연성이구나" 언제가 어느 작가의 에세이에서 자녀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인에게 이런 독설을 날리는 내용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왜 당신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거죠?" 처음 그 말을 읽었을 때에는 아니 대체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다 있을까 불같이 화가 났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 독설의 말을 들은 여인이 몹시 고통스러워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마음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극의 순간들은 예기치 못하게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위로를 해왔던 시간들을 단숨에 돌아볼 수 있도록 우연히 극도의 고통이 벌어진다. 


소윤은 제목의 [꽤 낙천적인 아이]처럼 고시원에서의 삶도, 재계약이 어어지지 않아 퇴사하는 일도, 갑작스러운 엄마의 낙상 사고로 간병을 하는 시간도 기꺼이 마주하며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인다. 억겹의 슬픔이 다가오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치릴로, 소피아, 로무알도, 로무알다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기쁨을 기쁨으로 누린다. 각박해진다는 말은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다는 것으로 다가온다. 감정의 동물이 몸과 마음으로 발산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누구라도 어떤 식으로든 망가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주인공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며 시시껄렁한 개그를 던지고 무안해지는 공격을 받더라도 피식 웃게 되는 일을 선택한 것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을 알려주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꽤 낙천적이지 않고서는 참 살기 힘든 세상이기에 말이다. 


"서툰 농담으로 주변을 썰렁하게 하던 코미디언이 한 사람 앞에 진담 같은 농담을 내려놓기까지의 과정을 이 소설 가장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성장이라면 가족의 슬픔, 운명의 횡포, 세상사의 표리부동, 서늘한 이별의 예감 속에서 비극을 증류해 희극을 얻고 희극을 제련해 유머를 빚는 과정은 이 소설의 내핵에 숨겨진 성장이다. 더욱이 이게 다가 아니다. 성장하되 끝내 성숙해지지는 않는다는 데에 이 소설의 백미가 있다. 함부로 성숙해지거나 자칫 철들지 않는 '나'는 한 손에 농담을, 한 손에 허구를 들고 세상을 향한 담대한 긁기를 시전한다. 두 팔을 흔들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의 보폭처럼 씩씩한 속도로 스탠드업 코미디 서사의 빅뱅을 시작한다.- 박혜진 평론가 해설 중(267-268)"


#원소윤 ##꽤낙천적인아이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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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리커버 특별판)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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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었다. 작품이 발표된지 50년이 지나서야 주목받기 시작했기에 아마도 저자는 생전에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 같다. 어쩌면 소설이 표명하는 주제이기도 한 남들이 생각하는 소설가로서의 성공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저자가 영문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며, 소설의 주인공 스토너처럼 만족스러운 평범한 삶을 살아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치 저자의 자전적 소설처럼 시작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기존의 소설과는 색다른 감동에 다다르게 된다. 스토너는 뭔가 우유부단하고 야망이 없어 주어진 운명에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들을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열정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표면적인 것들을 중시하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스토너란 소설 속 인물이 주목받기 시작하고, 그런 사람들이 더 없이 귀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그가 평생을 학생과 교수로 보내게 될 미주리 대학이 있는 컬럼비아에서 40마일 떨어진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한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가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기에 윌리엄 또한 아버지를 도와 농부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농업대학을 진학해 살림이 보탬이 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그가 영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기존의 흐름대로라면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윌리엄에게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그따위 쓸데없는 문학을 공부해서 뭐하냐고 반대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윌리엄의 진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윌리엄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학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사람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간은 괴짜나 이상한 사람으로 그려진 아처 슬론 교수였다. 아처 슬론 교수는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윌리엄의 내면에 숨겨진 교육자로서의 적당한 자질을 일찌감치 알아챈 것이다. 


윌리엄이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으며 강사로서의 삶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윌리엄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군입대를 앞두게 된다. 소설에 나온 배경으로 보아 강제징집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자발적으로 입대하여 미국의 위상을 드높이게 된다면 귀환 후에 받게 될 보상이나 명예가 꽤나 드높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반대로 입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면 별다른 신상의 변화는 없을지 모르지만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로 낙인이 찍힐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윌리엄과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함께 박사 과정을 밟던 두 명의 친구인 데이비드 매스터스와 고든 핀치는 마땅하다는 듯이 입대를 결정하고 윌리엄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한다. 하지만 윌리엄은 슬론 교수와의 면담과 친구들의 종용에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고든이 윌리엄의 선택을 비아냥거리는 거리고 전사한 데이비드와는 는 달리 살아돌아와 점차 학교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지만 윌리엄은 그런 말과 변화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두 가지를 꼽는다면 당연히 이디스와의 결혼과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외도, 그리고 찰스 워커라는 학생과 그의 지도교수인 로맥스와의 끝이없는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너에게 있어서 아내 이디스와 동료교수 로맥스는 마치 그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희대의 빌런처럼 보인다.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스토너는 이디스와 일찌감치 이혼을 했을 것이고, 고든의 제안을 받아들여 학과장이 되어 로맥스가 스토너에게 했던 것처럼 괴상한 시간표를 수행하도록 괴롭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캐서린과의 운명같은 지독한 사랑에 빠져, 아내 이디스가 알게 되어 아무렇지 않은 듯 비난하는 소리를 감내하거나 학교에서 소문이 나 평판이 바닥을 치는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캐서린과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캐서린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는 스토너의 모습은 자기가 손에 쥔 것을 결코 놓을 수 없는 비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 스토너의 결단은 지옥과도 같은 이디스와의 결혼생활에 다시 자신을 내던져 캐서린이 다른 곳에서 그녀의 노력과 성과에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열어주는 가슴아린 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주인공 스토너의 말년의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칠 찰스 워커라는 학생과의 만남은 조금은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 후반에 긴장을 야기하며 그로 인해 파생될 수많은 갈등과 논쟁의 시간의 서막을 열게 된다. 사실 찰스 워커와 로맥스 교수의 얼토당토하지 않는 주장과 행태를 지켜보면 누구라도 스토너를 대신해서 화를 내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로맥스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워커 군을 그렇게 감싸고 도는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권한을 갖게 된 이가 앙심을 품고 누군가를 괴롭히려고 작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입대를 거부한 윌리엄에게 비아냥거리던 고든이 같은 교수 생활을 하며 학장으로서의 중립과 스토너가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이다. 스토너는 로맥스의 불의한 결정과 행동에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아주 오랜시간 주어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것처럼 아내 이디스의 종잡을 수 없는 변덕과 그로 인해 자신과 멀어지게 된 딸 그레이스에 대한 그리움을 견뎌낸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스토너가 더 이상 로맥스의 폭정과도 같은 시간표 배정에 항거라도 하듯이 보란듯이 고학년의 주제들을 신입생들에게 다루며 로맥스와의 갈등은 절정에 달하지만, 종신교수로서의 수업 주제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스토너는 작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스토너의 정년퇴직 문제로 다시 한 번 로맥스의 비열함과 부딪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스토너의 건강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거대한 종양을 제거받는 수술까지 받게 된다. 스토너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디스의 반응은 정말 납득하기 힘들다. 마치 스토너가 캐서린을 만나는 것을 알게 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신상에 커다란 변화를 마치 남일 대하듯이 하는 디아스의 정신상태를 견딘 스토너의 삶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번역가의 말에 나온 것처럼 겉으로 봤을 때 스토너의 삶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애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힘든 이디스와의 결혼 생활이나 충분히 학과장을 할 수 있었음에도 욕심을 내지 않고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학생과의 논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종국에는 암에 걸려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한 노교수의 슬픈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스토너를 밖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생각일 뿐일 수 있다. 스토너 자신에게는 이디스와 삶을 견뎌내는 것 그리고 딸 그레이스가 알콜중독자가 되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 그리고 로맥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오랜 시간 신입생들에게 간단한 개론 과목만 강의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살아내며 어느 순간 진정한 교육자와 남편과 아버지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교정의 빛을 그리워하며 충만해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스토너의 삶은 진실될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폭풍같은 일들을 항구하게 견뎌낸 방파제처럼 묵묵히 자신이 삶을 걸어간 스토너 교수를 생각하며 우리 시대의 정말 필요한 귀한 얼굴이지 않을까 싶다.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276)"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대한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398-399)"


#존윌리엄스 #스토너 #김승욱역 #본투리드에디션 #알에이치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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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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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해 작가의 [여름은 고작 계절]을 읽었다. 밀레니엄을 지나 미국으로 갑작스럽게 이민을 떠난 제니가 회고하는 한나와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아주 오래전 고1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친구 S가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국영수 과목을 잘해야했다. 배점이 워낙에 높은데다가 단시간내에 실력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 등급을 매기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과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1때 만난 그 친구는 꽤 유복한 집안의 자녀였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고등학생이 그렇게 잘 차려입고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당시에 주변의 모든 학교가 교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유일하게 사복인 학교였기에) 입성이 좋았다.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메이커가 눈에 띄는 상하의를 반듯하게 다려입고 체격도 건장하고 비교적 핸섬한 편이라 여러모로 주목을 받곤 했다.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방과후 자율학습 시간에 원하는 등수가 잘 나오지 않아 내게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부러울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도 지금의 성적으로는 인서울 대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는지, 어느날 미국에 유학을 가면 어떨까라는 얘기를 넌지시 내게 건넸다. 나는 '설마, 말도 안되' 라는 심정으로 '얘가 성적이 드럽게 안 오르니까 별 생각을 다하는구나' 라고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헛된 꿈꾸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아마도 내가 그에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좀 더 나은 성적 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몇 달 후에 S가 진지하게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며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1학기를 마치고 가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뭔가 심각한 배신을 당한 것처럼 기분이 울쩍해졌지만 미국 유학의 꿈에 부푼 친구 앞에서 그런 서운함과 아쉬움을 쉽게 보일 수 없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부터 S는 더 이상 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았고 몇 달 동안이었지만 짬짬이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가까워진 S와의 공유된 마음이 휑하게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지나고 S는 정말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S는 한국과 비슷한 미국의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간 후 정성스럽게 공들인 몇 장의 편지를 내게 보냈다. 아직도 기억나는 첫 편지의 내용은 미국에서는 우리가 한국에서 영어 시간에 배운 것처럼 헬로나 굿모닝 같은 인사를 하지 않고, "Hey, What's up?"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건넨다는 인사말에 대한 설명이었다. '짜식 잘난 척하기는 나보다 공부도 못하던 놈이'라는 혼자만의 코웃음을 치며 나머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S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었다. 이후에도 몇 번의 국제 우편을 오가며 서로의 근황을 알렸지만, 매번 새로운 미국 고등학교에서의 일상을 전하는 S와는 달리 나는 너무나도 이곳을 잘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해줄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없어서 할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점점 빠듯해지는 학업 일정이라는 표면적인 핑계들로 연락이 끊어졌다. 


소설의 주인공 제니는 내 친구 S보다 10년이나 늦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도 칭챙총이라는 대명사로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이 난무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을 보니, S도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영어도 제대로 못했을 텐데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잘 견뎌낸 것일까, 혹시나 제니와 한나처럼 기막힌 푸대접의 억겹의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된 제니가 미국에서 보낸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한나에 대한 죄책감을 반추하는 회고록의 형태를 띤 성장소설이지만, 십대 소녀들의 친구를 사귀고 무시당하지 않고 주류가 되고자 하는 사춘기를 겪는 학생들의 풋풋한 이야기로만 비춰지지 않는다. 제니와 한나가 만난 미국의 백인 주류의 학생들이 보여준 역겨운 행태들은 인간 본성의 추악한 면모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은 어째서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서 집단을 형성하고 소수의 약한 자를 따돌리며 비열한 만족감을 얻는데 집중하는가? 사실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는 모국어가 달라 소통조차 원활하지 않고 피부색 또한 달라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와 배려가 원만히 형성되지 않는 나이 때의 학생들에게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차별과 배제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단지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배경으로만 생겨나는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똑같이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같은 말을 하고 경제적 상황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디에서든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심지어 종교의 신심활동 단체내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나마 나이가 들고 나면 대놓고 따돌리며 무시하지는 않고 때론 다행스럽게도 좀 더 성숙한 누군가가 배제된 이를 감싸며 공동체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는 단순히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한나의 유약함을 제니가 비난과 질책의 억척스러움으로 극복해나가는 이민자들의 연대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제니의 한나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로 이어지는 반성의 회고록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주류에서 벗어나 밑바닥을 치며 무시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나를 가장 적대시하며 모멸감을 준 이들과 동일한 모습으로의 변화를 시도하는 비겁함을 지적한다. 제니는 한나의 무능력함을 한탄하고 무시하면서도 한나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니는 한나를 괴롭히던 새라와 노라와 같은 학교의 주류를 이루는 친구들의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제니는 한나를 보호하며 마음으로부터 친구가 되고, 좋은 집안의 자녀로 풍족하게 자란 제니의 선망이 된 아이들은 폐쇄된 캠핑장에서 마약과 성행위를 즐기는 그들만의 쾌락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제니는 생일을 맞이하여 한나를 그곳에 데리고 갔다가 영원히 후회로 남게 될 끔찍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서 제니와 한나가 미국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당한 따돌림과 폭력적인 말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 자신의 경험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제니와 한나의 미국 학교 적응기를 읽으며 이건 누군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상으로서는 감히 그려볼 수 없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지켜줄거나 도와줄 이가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권력을 쥔 누군가가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가장 큰 상처와 모멸감을 끊임없이 던진다면 과연 그 지옥같은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학교 폭력과 따돌림이 너무나도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중대한 물음을 던지는 내용이라 그렇게 큰 상처로 아파하는 모든 아이들을 위힌 기도가 절실해진다. 


"모든 일에는 부스러기가 있대.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꼭 다른 일들이 일어난대. 되게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다 이유가 있고, 그게 또 다른 일에 영향을 미치는 거래. 

부스러기라는 게 그냥 영향을 뜻하는 거야?

응, 근데 너무 작아서 안 보이는 거. 그래서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거. 

아까 비가 왔잖아. 그래서 우리가 비에 다 젖었지? 그건 잘 보이잖아. 딱 봐도 비를 맞아서 젖은 거라고 설명이 되잖아. 

근데 만약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떤 사람이 쓸려가 죽었어. 그 사람의 연인은 그때 큰 충격을 받아서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비가 오며 슬퍼져. 심지어 연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렸는데도. 그러면 그 사람이 슬픈 건 비가 많이 온 어떤 날의 부스러기가 되는 거야.(154-155)"


"한나는 언젠가 먼 미래의 부스러기가 될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사람이나 사건이 아니라 내가 오래전에 입은 화상, 지지 않는 흉, 나를 개조한 신, 내가 절대로 잊지 않을 소중한 그림자일 것이다. 그 애는 그때쯤 나를 갖추는 여러 부분의 기원으로만 남을 것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제삼의 눈일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이제야 사람들이 어떻게 상실의 슬픔을 회복하고 사는지 알 것 같다. 수없이 쌓인 슬픔의 부스러기 위에서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만이 미래의 문을 연다.(338)"


#김서해 #여름은고작계절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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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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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었다. <홈 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 <레몬케이크>, <안녕이라 그랬어>, <빗방울처럼>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전 작품이 학생 교과서에 실릴만큼 뛰어난 가독성과 글쓰기의 표본을 보여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번 소설집은 가히 역대급이라 할 만큼 단편 하나 하나의 스토리와 인물들의 감정 묘사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신형철 평론가의 안녕에 대한 기원은 단지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닌 문학 작품이라는 예술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확신을 갖게 만들어준다. 


사실 소설집을 다 읽을 때까지도 7편이 모두 '돈과 이웃'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평론에 나온 내용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단편의 소재와 배경과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마치 연작소설을 읽는 것처럼 내용이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이유는 바로 '돈과 이웃'이라는 유사한 문제에 얽힌 이야기가 펼쳐졌기 때문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겉으로 드러나게 돈을 밝히는 것은 속물처럼 비춰졌기에 마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거나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애써 돈에 대한 욕망을 감추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돈 자랑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태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SNS의 범람은 상대적 박탈감을 가중시켜 모바일 인터넷 세상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의문의 1패를 당한 사회적 루저가 된 듯한 좌절감을 안겨주곤 한다.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것 같은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어찌나 구질구질해 보이던지 갑자기 짜증과 분노가 밀려와 무심코 내뱉은 말과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그나마 얼마되지 않는 대인관계까지 어그러지고, 그러한 상황을 자초한 자신을 경멸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너무 비약적인 성격으로 해석한 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황당무계한 설정도 아닌 것이 사실이다. 세상사 지금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유사한 고통과 어려움 없이 지나간 시대가 단 한 순간도 없었겠지만, 문제는 고통과 어려움의 근본적인 이유는 동일하다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의 갈등과 한계를 어떻게 한 꺼풀 벗겨낼 것인지에 대한 접근법이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 세상은 내적 법정의 최고의 심판자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법과 규율에 위반되지 않는다면 속된 말로 얄미워 죽을 만큼 이기적인 선택을 반복하는 어떤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감정적 답답함이 소설집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악인을 응징하고 선인이 보상을 받는 전형적인 상선벌악의 스토리가 아님에도 결말이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는 하지만 분명 소설의 정황으로 보아 등장인물들의 사정이 별로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음에도, 소설의 시작에서 묘사된 모습과는 달리 뭔가 힘있게 살아갈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극중 인물들이 감당할 수 밖에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을 마주하며 표출되는 감정의 변화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된다.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어려움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란 뒤늦은 깨달음. 그리고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그냥 내 차례가 되었다는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게 된다. 사람은 태어난 모양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바꿔 쓸 수 없다는 다소 염세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가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창조해 낸 예술이라는 영역에 접근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자기 성찰의 시간 뿐이라 생각된다. 그때 마주한 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부끄럽고 비참하고 나약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아침을 맞이하게 해 준다. 이번 소설집의 단편들이 그런 선물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은 감사함을 갖게 된다.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 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 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한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141)"


"오랜 시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한 이들이 뿜는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단순히 재료뿐 아니라 그 사람이 먹는 방식, 먹는 속도 등이 만들어낸 순수한 선과 빛, 분위기가 있었다. 편안한 음식을 취한 편안한 내장들이 자아내는 표정이랄까. 음식이 혀에 닿는 순간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찰나가 쌓인, 작은 쾌락이 축적된 얼굴이랄까. 아무튼 그런 인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기태는 그걸 자기 혼 자 '내장의 관상'이라 불렀다. 음식의 원재료가 품은 바람의 기억, 햇빛의 감도와 함께 대장 속 섬모들이 꿈꾸듯 출렁일 때 그 평화와 소화의 시간이 졸아든 게 바로 '내장의 관상'이었다.(179)"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맨 정신에, 취기 없이.(214)"


"'표현론'의 미학자 R. G. 콜링우드는 이젠 거의 잊힌 고전 [예술의 원리들 The Principles of Art](1938)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예술가가 필요한 이유는 어떤 공동체도 자신의 마음을 전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는 실패한 표현은 '추'가 아니라 '악'이라고 덧붙였다. 남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악의 진정한 근원인데, 좋은 예술은 공동체를 제 마음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의식의 부패를 막는 '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녕을 위해 김애란의 아녕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형철 평론 중에서(312-313)"


소설집의 제목으로 선택된 <안녕이라 그랬어>의 단편 중에 'Love Hurts'라는 팝송이 나온다. 화자인 '나'는 헤어진 연인 헌수와 함께 'Love Hurts'를 듣다가 '안녕'이라는 우리말이 들린다고 했을 때 헌수가 그건 원래 가사인 'I'm young'을 잘못 들은거라고 정정해주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캐나다인 로버트와 화상 영어 수업을 하던 화자는 우리말 '안녕'에는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안부의 인사가 담겨 있음을 설명하다가 언젠가 헌수가 전화를 걸어와 그 때 안녕이라고 들린 것을 틀렸다고 지적한 것을 후회하는 대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화자는 헌수의 노래 가사에 정정 때문인지 그 팝송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내용을 되내이게 된다.


"- I learned from you, I really learned a lot, really learned a lot...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248)"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된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250)"


내 차례를 맞이한 화자는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쉽고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고.(249)" 말한대로 인생을 말한다. 


안녕. 

그래. 세상 많은 안녕. 


#김애란 #안녕이라그랬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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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 오늘의 젊은 작가 48
박대겸 지음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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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겸 작가의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8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작가와 내용과 상관 없이 무조건 구입하기는 하지만, 처음 제목을 봤을 때에는 완독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이전 몇 개의 작품에서도 독서 성향과 맞지 않아서인지 간신히 다 읽은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이번 작품도 그런 류가 아닐까 싶었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SF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에 설마 진짜 외계인이 나오는 얘기일까, 아니겠지, 아니길 바랬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정말로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내용이 주된 골자였다. 헐 근데 왜 이렇게 재미있지? 술술 읽히고 터무니 없는 얘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그럴듯 한데, 종국에는 진짜로 이런 일이 과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란 상상까지 확대되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명제를 못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막연히 이 말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의 삶을 게속 살아나가야 한다는 희망적인 말로 해석했었는데, 이번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다분히 쿨함과 시니컬함을 오가는 방관주의적인 태도가 아닌가라는 해석이 오히려 마음에 와 닿았다. 특히나 민주화 항쟁을 거친 세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세대보다 부유하게 자란 이들이 마치 자랑하듯 쿨함과 시니컬함을 표방할 때 좀처럼 반기를 들지 못했던 답답함이 소설의 주인공 지민의 불호령 같은 말을 통해서 해소되는 듯 했다. 


"나는 이틀 뒤에 정말로 인류가 절멸하면 어쩌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심각하게 고심하고 고민하고 있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래.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인생이잖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아등바등해야지.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겠지. 행동으로 옮긴다고 한들 바뀐다는 보장도 없고. 바뀌지 않을 확률이 더 클 수도 있겠지만, 아니, 바뀌지 않은 확률이 압도적으로 크지만, 그래도 해 봐야지. 그래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그래서 어른들이 사는 게 어렵다거나 인생은 알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거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 모든 일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약간은 방관하는 태도로, 자신은 거기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는 듯, 그 일이 어떻게 되든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쿨하고 시니컬하게 말하고 행동해. ~~ 제발 남아 있는 이틀만이라도 적극적으로 부딪치며 지내 봐.(123-125)"


몇 년 째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 그리고 이어진 이란의 핵시설 무력화를 위한 공격 등으로 제3차 대전이 발발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러다 전세계가 전쟁의 망국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란 공포와 두려움이 양상된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른 지향을 두게 된다. 현재의 삶이 지옥처럼 극심한 고통의 연속이라면 차라리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엄청난 일이 생겨나 모두가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고약한 심보를 품게 된다. 반면에 현재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행여나 이 행복이 갑자기 끝나버릴까 두려워 부디 모든 일이 평화롭게 잘 해결되기를 바라게 된다. 나 또한 뜬금없이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 의지가 아닌 어떤 절대적 힘에 의해 지금의 고통이 단숨에 사라졌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지독하게 이기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내가 하루하루 사는게 별 의미없이 느껴질 때에도 분명 누군가는 매 시간을 충만하게 느끼며 감사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지독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빠져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행복과 불행의 순간이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확대되어 보이거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조금만 돌이켜봐도 한 인간이 보내는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은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한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상의 삶을 살아가며 남기게 될 그 작은 점 하나가 수없이 모여 제대로 된 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내 삶의 점이 곧은 선을 만들어내는 데에 오점이 되지 않도록 항상 의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외계인의 침공으로 인류가 멸망하게 될지 모른다는 믿지 못할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냥 일상을 살아가다 다 함께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죽겠다는 쿨함과 시니커함을 소신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내란 사태 이후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에 은박 보호 담요를 덮은 이들의 몸에 소복히 쌓인 눈이 마치 초콜렛 모형처럼 보여 키세스 시위대라는 별칭이 붙어졌다. 영하의 날씨에 차디찬 바닥에 앉아 한 목소리를 내던 이들의 사진을 보면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대체 어디서 저런 인내와 저항의 힘이 나오는 것일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나 하지 않는 그 일을 자발적으로 나서서 수많은 익명의 동조자들을 만들어내는 용기 있는 선택을 감행한 이들은 바로 소설 속 지민처럼 보인다. 이제 인류의 멸망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평소처럼 하던 알바를 하다가 가까운 이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소중한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 보는 선택할 수도 있지만, 지민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선택이 아닌 작은 영웅이 되고자 한다. 어떻게 어디서 미약한 자신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전혀 알 수는 없지만 마냥 손놓고 있지 않기로 결심한다. 


"만약 어제 루리코와의 우연한 만남이 실은 우연이 아니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맥락과 필연으로 인해 만나게 되었다면. 그리하여 오늘 오전에 받은 아빠의 메시지 내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면. 거창하게 인류를 위해서, 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한다면.

~~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라고, 나의 의지라고(102-103)"


물리학과 우주와 관련된 과학적 설명이 많이 나와서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이 되어 그럭저럭 맥락을 따라갈 수 있었다. 소설의 말미에 지민이 갑작스러운 삿포로 행을 받아들여 인류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담긴 구형 핸드폰이 가득한 배낭을 메고 육체적 죽음을 맞아 소입자로서의 자신을 인지하게 되는 장면은 과연 SF라 할만한 상상력을 가중시켰지만, 언제 어디일지 모를 작은 영웅으로서의 선택의 기로에 초대받게 된다면 지민처럼 미약하나마 기적을 위해 나의 의지를 불태우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어쩌면 소설의 말처럼 "아마 인류는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들이 파동-입자가 되어 자신들을 구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외계 생명체 소동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역사에 기록될 뿐이겠지. 상관없다. 우리가 훨씬 더 넓은 곳에서 훨씬 더 오래도록 살 테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전부 기억할 테니까.(227)"


#박대겸 #외계인이인류를멸망시킨대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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