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장류진 지음 / 오리지널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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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을 읽었다. 꽤 오래 전에 헬싱키를 경유하는 핀에어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경유 시간이 짧아 공항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기에 그저 깔끔하고 모던한 헬싱키 공항을 둘러보다 가판대에 적힌 콜라값을 보고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북유럽의 물가가 상상 이상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거의 두배값에 달하는 가격 표시를 보고 이곳이 경유지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잊고 있었던 헬싱키 공항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이번 에세이는 핀란드에 대한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고, "여름에 서유럽을 왜 가? 무조건 핀란드지"라는 저자의 단호한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핀에어 항공 사이트를 뒤적거리게 된다. 


핀란드의 쿠오피오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역에 교환학생으로 당첨된 저자의 회상과 더불어 에필로그에서 가명을 쓴 친구 예진과의 리유니언 여행을 다녀온 후기를 따라가다보니, 나도 모르게 2008년이라는 평행이론에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2008년 1월부터 교환학생으로 쿠오피오에 머물렀다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2008년 2월부터 해외살이를 시작했었다. 아 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같은 시기에 비슷한 낯섬과 새로움을 느끼며 긴장감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냈겠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그때는 그곳이 그렇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벗어나고 싶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가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함께 교환학생으로 절친이 된 저자와 예진이라는 친구는 15년 만에 다시금 쿠오피오를 방문하게 된다.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졸업과 취업,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의 커다란 획을 그을만한 사건들이 훅훅 지나가고 21살 때의 발자취를 뒤따라 가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그때의 자신을 커다란 나무 뒤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평행이론에 끼어맞춰보자면 2년 전에 가장 친한 동기와 내가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곳을 방문했었다. 사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일부러 기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가야했기에 구태여 바쁜 여행 일정에 넣을 필요가 없었지만, 내가 머물렀던 곳을 동기 또한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해줬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재방문하지 않았기에 내심 그곳을 가보고 싶었던 나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설레이는 순간이었다. 성탄절을 앞두고 있기에 단테의 동상이 서 있는 광장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었고 온통 붉은색과 녹색이 앞다투어 꾸며진 아치를 지나 아기자기한 장식물을 파는 가판대를 휘휘 둘러보고 나니 먹거리 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출출한 배를 채워줄 티롤 지방의 소세지와 더불어 차가워진 몸을 데워줄 글루바인을 먹고 마시니 내가 진짜 여기에 다시 왔구나 라는 새삼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컨디션이 떨어진 동기가 잠시 쉬겠다는 찰나에 나는 혼자 2008년에 부단히도 많이 걸었던 아주 오래된 다리를 가보았다. 서재의 메인 화면에 걸린 사진 속 오래된 다리의 강변길이 마치 마음의 고향처럼 아련히 새겨져 있었기에 옷긴을 여미고 아직 남겨진 낙엽을 밟으며 지나온 15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에는 나이가 많은 분들을 보면서 '도대체 저 분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이미 인생의 황혼기를 지나 체력도 떨어지고 어딘가 몸이 아픈 곳이 있어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병원을 다녀야 하는 뭔가 서글프게만 보이는 시기에 이른 분들을 보고 나 혼자 지레짐작으로 그분들을 동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져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세세히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십대에는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나노 단위로도 세밀하게 떠올릴 수 있다. 오늘 뭘 먹었는지가 아니라 지난 주에 친구 누구랑 몇 시에 만나서 어디로 걸어가 무엇을 먹으며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낱낱이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심지어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도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내 삶의 어느 부분이 뭉텅이로 잘려나간 것처럼 안개 속에 가려져 돌아보면 하루, 한달, 한해가 지나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세밀하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축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해도 우리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너무나도 생생하다면 남겨진 시간이 두려기만 할테니 말이다. 


이전에 출간된 저자의 소설을 전부 읽었기에 당연히 소설가의 삶을 꿈꾼지 알았다. 그런데 저자가 교환학생으로 머물 당시만 해도 소설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니 정말 앞으로의 15년 후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겠지만 부디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계속 쓰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책에 나와 있듯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소설은 읽은 이에게 분명히 무엇인가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주는 삶이 아마도 가장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이 내 마음속에 남긴 무언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건 정말이지 '무언가'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소설을 읽고 났을 때 각자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형태로 남는 고유한 자국이다. 소설마다 다르고 또 그 소설을 읽는 사람 각각이 다른, 두 지문의 결합같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자국.(122)"


두 친구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배려하고 지나온 시간 덕분인지 사우나 안에서 너무나도 간절히 사진을 찍고 싶었던 욕심을 내려놓도록 만든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절친의 몰입에 방해가 될까 싶어 후회할 선택을 똑같이 품은 마음이 아마도 15년 후에 다시금 리유니언하는 원천적인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생이 여행이라고 치면, 일기는 마치 여행 중에 찍은 사진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그 여행지에서만 찍을 수 있는 그 순간의 내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는 사진. 나는 인생이란 여행을 하면서 일기를 쓰지는 못했다. 한 마디로 사진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신, 소설을 썼다.(391)"


아 자작나무 키친웨어 '코이비코'를 사는 부분을 읽고 아무리 검색을 해도 그런 브랜드가 나오지 않기에 정말 우리나라에는 소개가 되지 않은 레어템인가보다 생각했었는데, 에필로그에 나온 가상의 브랜드라는 말에 실소가 터졌다. 아 작가님 진짜 진심이구나, 나중에 코이비코가 대박을 터트리길 기대해본다. 


#장류진 #우리가반짝이는계절 #오리지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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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뷰티풀
앤 나폴리타노 지음, 허진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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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나폴리타노의 [헬로 뷰티풀]을 읽었다. 친하지는 않아도 살다보면 가까워지고 근황을 나도 모르게 전해듣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냥 간단힌 신상정보만 아는 정도에 그쳐서 그런지 평소에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은 사람인데, 갑작스럽게 그 사람에게 닥친 불행한 소식이 전해져 올때면 유난히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나 대신 그 사람이 대신 이 극심한 고통의 순간을 맞이한 것은 아닐까란 기우에서부터 시간이 지나 극심한 고통을 겪던 그 사람이 견디다 못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면 한동안은 나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별로 가깝지 않은 나 또한 이럴텐데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사이라면 그 무너진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대낮에 지하철을 타면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많다. 이제는 가장 구석에 있는 노약자석만으로는 연세가 많은 분들을 감당할 수 없기에, 그분들도 예전처럼 젊은이들의 양보를 무턱대고 바라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머리가 희긋한 분이 힘겹게 손잡이를 잡고 있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게 마음 편할 수는 없다. 설상가상으로 분주한 역이 지나고 조금은 한산해진 지하철 안에서 편하게 다리를 꼬을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찰나에 한쪽 발이 약간 기울어진 채 슬리퍼를 끌며 앉아 있는 이들에게 작은 종이를 내려놓는 분이 나타난다. 때로는 그 종이가 아주 너덜너덜해져 별로 손에 대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무릎 위에 놓여진 그 종이가 아주 예의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은 비까지 많이 내려 눅눅해진 옷가지와 이미 비에 젖어 축축한 양말에 자꾸 쓰러지려는 우산을 고정하며 슬슬 짜증이 나려는 찰나 내 무릎에 놓여진 종이의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있는데 일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라 작은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종이에 담긴 내용을 읽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혹시 누군가가 지갑을 꺼내지 않을까? 아 그런데 오늘따라 현찰을 넣고 다니는 지갑을 가져오지 않고 핸드폰에 부착하는 카드지갑만 가지고 나왔으니 천원짜리 한 장도 없는데. 결국 내가 탄 칸에서는 한 푼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종이를 회수하고 다른 칸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이 내린 자리에 덩그러니 종이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아마도 내일이면 그 사람을 금방 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른다. 또 다른 사연이 담긴 종이를 건네는 사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럼 또 마음이 불편해지고 잠시 동안 안쓰러워지고 그날따라 현찰을 갖고 있다면 쭈삣거리며 천원짜리 한 장을 건넬지도 모르겠다. 요즘 같은 때에 천원갖고 뭘 하지도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만원짜리를 줄 만큼 배포가 크지도 못한다. 이렇게 시시때때로 편협하게 갖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했다니, 알고 지내온 이가 망가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왔던 무력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만하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네 자매의 삶을 관통하는 남자인 윌리암 워터스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누나 캐롤라인이 죽게 된다. 윌리암의 탄생과는 별개로 딸의 죽음을 맞이한 윌리암의 부모는 둘 다 상실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윌리암을 방치하게 된다.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농구공이 튀어오르는 움직임에 위로를 받게 된 윌리암은 자기 자신을 안에 가두어 둔 채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틈도 없이 줄리아를 만나게 된다. 찰리와 로즈의 장녀인 줄리아는 주도적인 성격으로 윌리암의 바른 성정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와의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게 된다. 윌리암을 역사학도로 만들어 안정된 수입을 유지하고 자녀를 낳는 그럴듯한 계획을 세운다. 윌리암은 부상으로 농구선수의 삶을 지속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정말로 교수의 삶을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줄리아의 제안에 이끌려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아직 명확한 자녀 계획이 없었던 줄리아는 쌍둥이 동생 중의 하나인 세실리아가 갑자기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게 되어, 화가 난 엄마 로즈가 세실리아를 내쫓으며 분열된 가족을 다시금 하나로 모으기 위해 아이 갖기를 결심한다. 세실리아의 아이가 태어나던 날, 아빠 찰리는 딸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갓 태어난 아기를 축복하고 나오다 병원 복도에서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줄리아의 집안이 그려질 때에 찰리는 경제력은 꽝이지만 시를 암송하는 로맨시스트로 나오고 아내 로즈는 찰리의 그런 면을 아주 불만스럽게 여기며 오로지 텃밭에만 집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줄리아는 찰리의 장례식에서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조문을 바라보며 자신이 아빠를 잘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찰리의 친절을 기억하며 찾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찰리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며 위로하지만 로즈는 찰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미혼모가 된 세실리아의 상황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로즈는 파다바노의 화목한 가족이 살던 집을 처분하고 갑자기 플로리다고 떠나게 된다. 곧이어 줄리아의 딸 엘리스가 태어나지만 윌리암은 더 이상 줄리아의 계획에 편승하지 못하고 이미 구멍날만큼 커져버린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호수에 빠져 죽으려 한다. 


줄리아와 막역한 사이인 둘째 실비는 이미 윌리암의 공허함을 눈치채고 있었고 딸들 중에 유일하게 아빠 찰리의 시 암송을 좋아했기에 윌리암과 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윌리암의 자살 시도 이후 줄리아는 큰 충격을 받지만 자신을 거부하는 윌리암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일자리를 핑계로 뉴욕으로 떠나게 된다. 윌리암과 줄리아의 이별과 더불어 윌리암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져가던 실비는 용기를 내어 윌리암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되고 윌리암을 살리기 위해 줄리아와의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 


형부를 사랑한 처제라는 통속적인 얘기가 될 수 있는 소재이지만, 윌리암이 어린시절 부터 겪은 커다란 상처의 구멍을 메워가는 실비의 헌신적인 사랑과 용감한 선택은 줄리아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도저히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납득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담겨져 있다. 실비의 용감한 결정이 비록 줄리아와 엘리스의 삶을 고독하게 만들고 파다바노의 자매들이 다시 모여 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게 되지만, 종국에는 실비의 뇌종양이 다시금 자매들을 모이게 만들고 행여나 윌리암이 자신으로 인해 딸 엘리스의 삶을 망가뜨릴까 두려워 혈연 관계를 포기했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준다. 윌리암은 실비의 죽음으로 엘리스를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되고, 엘리스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빠 윌리암의 어처구니없던 과거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된다. 


윌리암의 부모는 어린 딸의 죽음 이후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견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에 어린 윌리암의 마음마저 구멍나게 만들 만큼 망가진 삶을 살다 떠났다. 어쩌면 윌리암이 실비를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우울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또 다시 비극적인 선택을 감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다바노 자매는 각자의 부족함을 잘 알았고 서로를 채워주고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에, 배신의 상처에 가슴 아파하며 의절한 상태로 아주 오랜 시간 지내왔음에도 단숨에 원래의 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구원과 화해의 장을 마련하게 된다. 


언제든 누구나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삶의 커다란 생채기가 만들어내는 구멍을 방치해서 허우적 거리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곁에 머물며 정감어린 눈으로 바라봐주는 것, 당신에 대한 침묵의 지지가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윌리암과 네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넌 뭘 원하니?

예전의 실비라면 대답이 두려워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겠지만, 이제 그녀는 진실하고 강렬하게 자신이 되고 싶고 가장 진실하고 강렬하게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을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더욱 확실히 그랬다. 줄리아와 함께일 때는 다른 사람이었고, 쌍둥이와 함께일 때는 조금 더 솔직한 사람이었다. 실비는 자기 생각과 가정을 통제하고 자신과 싸우면서 자신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길로 스스로를 끌고 가려고 애썼다. 함께일 때 온전한 자신이 된 기분이 드는 사람은 딱 한 명, 윌리엄 밖에 없었다. 실비는 그와 함께일 때면 온전한 자신이었고 심지어 그 이상이 될 여유마저 느꼈다. 윌리엄은 어떤 판단이나 기대도 없이 그녀를 보았고, 실비는 그 여유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씩씩함과 명석함과 다정함과 즐거움의 가능성을 느꼈다. 이 모든 돛이 그녀라는 배의 갑판에 있었다. 그녀의 것이었지만 실비는 처음 보았다. 윌리엄의 병실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기 전에는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했다.(279)"


#앤나폴리타노 #헬로뷰티풀 #허진역 #복복서가 #AnnNapolitano #HelloBea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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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뷰 -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우신영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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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영 작가의 [시티 뷰]를 읽었다.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10여 년 전에 송도국제도시를 갔을 때만 해도 해가 지고 나면 넓은 도로에 차가 거의 없어서 도로주행 연습 하기에 딱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한산했다. 여기 저기서 아파트 공사가 한창 중이었고 다리를 건넌 바로 근처에만 주거지가 형성된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차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게 느껴졌다. 아직도 대단지의 주거지가 공사 중인 곳이 남아 있지만 몇 년 후에는 간척지로 만들어진 새로운 땅에 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하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어마어마한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늘어서 이렇게 단 기간에 완전히 탈바꿈된 도시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거품은 수십년간 지속되어 온 심각한 문제지만, 그 누구도 안정된 주거지를 약속할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아니 방법을 아는 이들은 오히려 안정되는 것을 거부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골이 아닌 수도권에서 자기집을 마련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지 오래이고, 영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회를 포착해 엄청난 대출금을 감당해 가며 하우스 푸어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게 지혜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그런 무모한 도전이 두려워 정도를 걸으려던 이들이 바보 취급되며 지나간 기회를 아쉬워하지만 불과 1-2년 사이에 집값은 폭등해서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내집 마련이라는 꿈은 너무나도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송도 신도시의 이야기는 그동안 겉으로만 봐왔던 휘황찬란한 외관과는 다르게 혹독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실상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송도 신도시에 편의점보다 많이 개업하고, 카페보다 많이 폐업한다는 필라테스 센터(14)"라는 표현은 다른 운동보다 비용이 이 더 많이 들어가는 운동 센터조차 너무 많아서 극심한 경쟁 상황에 이르렇다는 믿기 힘든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평생을 부유하게 살아온 수미가 남편 석진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가 허름한 횟집에서 식사를 마치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와 투덜대는 대사는 그야말로 경제적 부로 계급을 나누려는 이들의 사고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호텔 숙박비랑 오마카세 가격 올렸으면 좋겠어. 거품 좀 빠지게.(220)"


보통은 가격이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가격을 올렸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소수의 돈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들은 오히려 최고의 서비스를 자기들만 누리고 싶은 욕심에 일반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가격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에 반해 석진은 덕적도의 칼국수집을 하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한 평생 얻어 맞고 희생하며 살다 병에 걸려 돌아가신 어머니를 둔 시쳇말로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이다. 의사라는 최고의 스펙을 가진 석진은 이미 한 번 아주 짧게 결혼 생활을 했던 수미를 만나 혼인하게 된다. 수미의 집 안에서 의사라는 배경 말고는 딱히 별 볼일 없는 석진과의 혼인을 반대하지 않은 이유가 이미 이혼한 경력이 있다는 것 때문이라는 내용이 둘 사이의 대단한 로맨스가 아님에도 함께 사는 이유를 짐작케 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수미와 석진의 결혼 생활은 어쩌면 너무나도 풍요롭고 완벽해서 서로의 내면을 보살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경제적 문제로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로이기에 그들 사이에는 보통 부부 싸움에 단골로 등장하는 돈문제는 서로를 미워하는 계기가 될 수 없었다. 수미는 석진에게 민낯을 보인적이 없었지만 피트니스 트레이너 주니와의 만남에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맨 얼굴을 보였으며, 석진 또한 면도칼을 반복적으로 삼키고 병원을 찾은 조선족이라 칭하는 중국 동포 유화에게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이들 부부는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서로가 부정한 만남을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 쿨함의 정점에라도 이른 것처럼 현재의 부부 생활을 문제 없이 유지할 수 만 있다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는 호혜와 같은 아량인 것일까. 


언젠가 썩어 없어질 몸이라서 젊고 건강할 때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이 만연되어 가고 있다. 마치 돈만 있으면 언제든 부수고 하늘에 닿을 것 같은 마천루를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듯이 반복되는 바벨탑 쌓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마천루의 한 귀퉁이라도 제것을 만드는 것이 인생의 최종목적이 되어버린 현대의 삶이 씁쓸하기만 하다. 


#우신영 #시티뷰 #다산책방 #제14회혼불문학상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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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앉아 있네 -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문지혁 지음 / 해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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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 작가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읽었다. 제목부터가 왠지 모르게 스스로를 디스하는 비아냥의 뉘앙스가 담긴 재미와 더불어 '그래 말 그대로 글을 쓰려면 앉아 있어야 하지'라는 당연한 귀결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람마다 책을 고를 때의 취향은 각양각색이겠지만, 아마도 단연코 소설이 가장 많이 읽히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당근 제일 재미있으니까, 근데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재미를 뛰어넘는 감동과 깨달음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심지어 SF소설의 등장인물도 우리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겉모습만 보고 지나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겨진 삶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많다. 사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몇 배는 힘들다. 그러다보니 친한 사이라도 해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때가 많고, 그러다보니 나중에 시한폭탄이 터지듯 고름이 터져나오는 고통을 마주하고서야 왜 자기한테 자세히 말하지 않았느냐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사람들의 속내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게 된다.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들이라도 부턱대고 자신의 상처와 아픈 과거를 손쉽게 드러낼 수 없다.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하고 적절한 타이밍과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을 만한 신뢰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쓸데 없는 소리를 늘어놓다가 기회를 놓치기가 일쑤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상상하며 내 주위의 사람들을 한 명씩 대입시켜 보곤 한다. 가끔씩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평소에 아예 재쳐놓았던 부류의 사람들이 갑자기 떠오르며 그런 황당한 행동은 어쩌면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사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란 미약한 이해의 마음이 동하기도 한다. 


엊그제 저녁 8시가 지난지 얼마되지 않아 평소 듣던 라디오에서 갑자기 한강 작가의 이름이 거론되며 축하드린다는 인사가 들려왔다. 설마하는 마음에 검색창을 열어보니 그야말로 오 마이 갓! 노벨문학상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어 줄줄이 이어지는 단신들을 살펴보았다. 이튿날부터 대서특필된 한강 작가님에 대한 기사는 메인 페이지를 도배하기 시작했고 서점가에서는 한강 작가의 책이 없어서 못팔 정도라고 한다. 어떤 분의 인터뷰 대답처럼 우울한 소식만 이어지던 우리나라의 요즘 현실에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정말 오랜만에 흐믓해지는 소식이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인스타그램의 기성작가들은 거의 다 한강 작가의 사진을 올려 축하의 인사말을 전하고 노벨문학상을 원어로 이미 읽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평소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책이 번역되어도 거의 읽지 않았는데, 나 또한 이미 읽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생경한 기분이다.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독서의 붐이 일었으면 좋겠다. 요즘 MZ 세대에는 또 다른 유행으로 독서모임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골린이, 테린이처럼 단명하지 말고 책린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꿈꿔봤을 소설 쓰기에 대한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따끔하게 정석의 길을 보여주는 안내서처럼 다가왔다. 다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은 정말 소설가들은 대단한 분들이구나, 애시당초 이렇게 긴 호흡의 글을 상상해서 쓴다는 것은 정말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구나 라는 처음의 결론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책머리를 읽을 때에는 아주 희미한 희망이 엿보였지만 책장을 덮으며 충실한 독자로 남기를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리뷰를 남기는 것으로 저자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처음부터, 단번에, 쉬지 않고 좋은 글을 쓴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에는 쓰레기와 다르지 않았던 우리의 글을 얼마나 어떻게 고쳐서 좋은 글로 만들 수 있느냐에 관한 일입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초고는 다 비슷하게 별로입니다. 이를 누가 더 많이, 오래, 될 때까지 끈질기게 고칠 수 있느냐가 우리를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로 나누는 기준입니다. 초고의 완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고치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는 천재나 괴짜나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좋은 작가란 긍정적인 의미에서 직장인과 같아요. 매일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하게 쓰고, 일정하게 좌절하고, 일정하게 고치는 사람만이, 그 길고 건조한 무채색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마침에 좋은 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29)"


이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천부적인 재능만으로는 숙련되고 노련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부단히 자신을 부수고 무척이나 지루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두터운 위선의 탈을 벗고 나올 수 있다. '고치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누군가 지적을 한다면 그건 더욱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가져온다. 때로는 분노에 이르고 이성을 잃어 비논리적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고집한다. 그리고 결국 지금보다 한 걸음 뒤로 퇴보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은 퇴고가 원고를 '고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고친다는 건 때로 막막하고 불투명하고 추상적인 작업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퇴고라는 단어의 연원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작업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밀 퇴와 두드를 고.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251)"


#문지혁 #소설쓰고앉아있네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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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0-1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습니다~
 
미래의 자리 소설Q
문진영 지음 / 창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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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영 작가의 [미래의 자리]를 읽었다. 창비 소설Q 시리즈 작품이다. 요즘 MZ라는 말이 유행이다. 세대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응근히 비꼬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어차피 시간은 흐르고 또 다른 세대 교체가 당연함에도 이미 익숙한 것에 길들여지면 새로운 변화는 낯설고 잘못된 것이라는 손쉬운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90년대 생이라는 말과 결합된 MZ세대는 기존의 사회관습을 부정하는 몹시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것으로 단정짓는 결론이 많다. 기존의 가난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온 이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적 배경을 타고 살아왔기에 그들은 몹시 이기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먹거리가 풍부하고 교육열은 하늘을 찌르고 부로 계급이 편성되는 시대에 인터넷으로 노출된 형제가 없는 거의 대부분이 독자인 이들에게 과거의 세대조차 보편적으로 탑재하지 못한 아량과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기이한 기대가 아닐까. 


소설 속 주인공들의 연령이 96년생이라고 저자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아마도 지금의 대학생들은 4. 19와 5.18 기념식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에 참여해 본 적이 거의 없을 것 같다. 80년대의 젊은이들과 지금의 젊은이들이 겪은 시대의 상처를 저울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때의 상처와 고통이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고문을 당하다 죽은 열사를 기억하며 전국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분노할 수 있었던 공통의 목적이 있었다. 언제 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린치를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외면할 수 있는 정의로움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묵묵히 부끄러움을 삭힐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겪은 지금의 젊은이들은 분노할 수 없다. 그들의 죽음에 함께 아파하고 부당한 사회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몹쓸 말이 들려온다. 


분노와 정의로움이 당당히 받아들여지는 시대에는 육체적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의는 사라지고 오로지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의 팔렴치한 모습을 동조하며 이성이 마비된 뻔뻔한 이들의 냉혹한 말들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몸에 보이는 상처가 아니라서 어디에 약을 발라야 새살이 돋아날지 알 수가 없다. 더 이상 숨을 쉬게 만들지 못하는 유독 가스를 들이킨 것처럼 독약을 묻힌 것 같은 그들의 혓바닥에서 나오는 말들은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을 쓰러뜨렸다. 


지해가, 자람이, 나래가 기억하는 미래가 그랬던 것 같다. 누구보다도 상대의 마음과 감정을 세밀히 잘 살필 줄 알았던 미래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에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의아해한다. 


"그냥, 나는 가끔 너무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언니. 나는 가끔 어떤 순간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끼면, 어떤 열망에 사로잡힐 때면, 모르는 얼굴들이 떠올라. 왜 나는 여기 있고, 누구는 없지? 그런 게 이상해. 나는 왜 살아 있지? 

세상이 미쳐 날뛰는 것 같다가도, 근데 왜 이렇게 아름답지? 그런 생각이 들고, 웃다가도 갑자기 죄책감이 들고, 슬퍼할 만한 걸 슬퍼하다가도 나한테 그럴 자격이 없단 생각을 해.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싶다가도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런 생각으로 바뀌고. 내가 너무 먼지 같다가도 또 가끔은 우주만큼, 너무 커다랗게 느껴지는 거야. 그러다 아, 그 사람도 우주였는데, 그리고 또 누가 그 사람을 우주만큼 사랑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야.(210-211)"


슬픔과 애도의 시간이 점점 짧아짐을 강요받는 것 같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냐고 채근대는 시선에 몸과 마음을 어디론가 숨기고만 싶어진다. 미래가 떠나고 나서 지해가 그랬듯이 '뭐 해?'라는 자람의 물음에 '그냥 있어'라고 대답할 수 없는 마음을 헤아려주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시대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인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닐텐데, 슬픔이 그칠 때까지,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냥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이 우리가 보내야하는 시간이 아닐까. 


#문진영 #미래의자리 #창비 #소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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