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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평점 :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었다. <홈 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 <레몬케이크>, <안녕이라 그랬어>, <빗방울처럼>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전 작품이 학생 교과서에 실릴만큼 뛰어난 가독성과 글쓰기의 표본을 보여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번 소설집은 가히 역대급이라 할 만큼 단편 하나 하나의 스토리와 인물들의 감정 묘사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신형철 평론가의 안녕에 대한 기원은 단지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닌 문학 작품이라는 예술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확신을 갖게 만들어준다.
사실 소설집을 다 읽을 때까지도 7편이 모두 '돈과 이웃'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평론에 나온 내용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단편의 소재와 배경과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마치 연작소설을 읽는 것처럼 내용이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이유는 바로 '돈과 이웃'이라는 유사한 문제에 얽힌 이야기가 펼쳐졌기 때문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겉으로 드러나게 돈을 밝히는 것은 속물처럼 비춰졌기에 마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거나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애써 돈에 대한 욕망을 감추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돈 자랑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태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SNS의 범람은 상대적 박탈감을 가중시켜 모바일 인터넷 세상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의문의 1패를 당한 사회적 루저가 된 듯한 좌절감을 안겨주곤 한다.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것 같은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어찌나 구질구질해 보이던지 갑자기 짜증과 분노가 밀려와 무심코 내뱉은 말과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그나마 얼마되지 않는 대인관계까지 어그러지고, 그러한 상황을 자초한 자신을 경멸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너무 비약적인 성격으로 해석한 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황당무계한 설정도 아닌 것이 사실이다. 세상사 지금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유사한 고통과 어려움 없이 지나간 시대가 단 한 순간도 없었겠지만, 문제는 고통과 어려움의 근본적인 이유는 동일하다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의 갈등과 한계를 어떻게 한 꺼풀 벗겨낼 것인지에 대한 접근법이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 세상은 내적 법정의 최고의 심판자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법과 규율에 위반되지 않는다면 속된 말로 얄미워 죽을 만큼 이기적인 선택을 반복하는 어떤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감정적 답답함이 소설집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악인을 응징하고 선인이 보상을 받는 전형적인 상선벌악의 스토리가 아님에도 결말이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는 하지만 분명 소설의 정황으로 보아 등장인물들의 사정이 별로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음에도, 소설의 시작에서 묘사된 모습과는 달리 뭔가 힘있게 살아갈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극중 인물들이 감당할 수 밖에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을 마주하며 표출되는 감정의 변화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된다.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어려움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란 뒤늦은 깨달음. 그리고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그냥 내 차례가 되었다는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게 된다. 사람은 태어난 모양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바꿔 쓸 수 없다는 다소 염세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가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창조해 낸 예술이라는 영역에 접근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자기 성찰의 시간 뿐이라 생각된다. 그때 마주한 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부끄럽고 비참하고 나약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아침을 맞이하게 해 준다. 이번 소설집의 단편들이 그런 선물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은 감사함을 갖게 된다.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 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 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한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141)"
"오랜 시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한 이들이 뿜는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단순히 재료뿐 아니라 그 사람이 먹는 방식, 먹는 속도 등이 만들어낸 순수한 선과 빛, 분위기가 있었다. 편안한 음식을 취한 편안한 내장들이 자아내는 표정이랄까. 음식이 혀에 닿는 순간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찰나가 쌓인, 작은 쾌락이 축적된 얼굴이랄까. 아무튼 그런 인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기태는 그걸 자기 혼 자 '내장의 관상'이라 불렀다. 음식의 원재료가 품은 바람의 기억, 햇빛의 감도와 함께 대장 속 섬모들이 꿈꾸듯 출렁일 때 그 평화와 소화의 시간이 졸아든 게 바로 '내장의 관상'이었다.(179)"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맨 정신에, 취기 없이.(214)"
"'표현론'의 미학자 R. G. 콜링우드는 이젠 거의 잊힌 고전 [예술의 원리들 The Principles of Art](1938)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예술가가 필요한 이유는 어떤 공동체도 자신의 마음을 전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는 실패한 표현은 '추'가 아니라 '악'이라고 덧붙였다. 남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악의 진정한 근원인데, 좋은 예술은 공동체를 제 마음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의식의 부패를 막는 '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녕을 위해 김애란의 아녕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형철 평론 중에서(312-313)"
소설집의 제목으로 선택된 <안녕이라 그랬어>의 단편 중에 'Love Hurts'라는 팝송이 나온다. 화자인 '나'는 헤어진 연인 헌수와 함께 'Love Hurts'를 듣다가 '안녕'이라는 우리말이 들린다고 했을 때 헌수가 그건 원래 가사인 'I'm young'을 잘못 들은거라고 정정해주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캐나다인 로버트와 화상 영어 수업을 하던 화자는 우리말 '안녕'에는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안부의 인사가 담겨 있음을 설명하다가 언젠가 헌수가 전화를 걸어와 그 때 안녕이라고 들린 것을 틀렸다고 지적한 것을 후회하는 대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화자는 헌수의 노래 가사에 정정 때문인지 그 팝송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내용을 되내이게 된다.
"- I learned from you, I really learned a lot, really learned a lot...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248)"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된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250)"
내 차례를 맞이한 화자는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쉽고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고.(249)" 말한대로 인생을 말한다.
안녕.
그래. 세상 많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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