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얼굴
이슬아 지음 / 위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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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칼럼집 [날씨와 얼굴]을 읽었다. 십여년 전부터 미세먼지에 대한 심각성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특히 봄철에 황사바람과 함께 초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가급적 외출할 때에 마스크를 쓰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듣고 했었다. 정말로 눈으로 봐도 뿌옇다는 느낌이 드는 날에는 마스크를 쓰고 나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 더 크고 왠지 나혼자만 유난떤다는 기분에 금방 마스크를 벗어버리곤 했다. 이렇게 몇 년 동안이나 강제적으로 마스크를 써야 할 때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초미세먼지로 시작된 마스크와의 인연은 팬데믹이라는 어머어마한 재난의 전초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미약하게 여겨지지만,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한 순간에 생과 사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녔다면 초미세먼지는 아주 천천히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안의 무엇인가를 서서히 파괴하고 있을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아주 오래전부터 너무 빈번하게 들어와서인지 오히려 위기라는 말이 갖는 중대함과 두려움이 감소된 듯하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기후위기의 직접적인 재앙을 겪는 이들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찌는듯한 폭염과 북극같은 혹한도 가진 것이 많은 이들에게는 그저 당분간의 불편함에 불과할 뿐이다. 쪽방촌에서 여름을 나는 것과 시스템 에어컨을 갖춘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하다가 비슷한 냉방을 갖춘 집에서 잠을 자며 기후위기를 겪는 것은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기를 극복하고 대책을 마련할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위기에 대한 생각과 실제 위기를 겪는 몸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기만 하다. 탄소 배출량을 당장 줄이지 않으면 해수면의 높이가 올라가 어느 나라의 땅은 바다속으로 잠기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후협약에 모인 대부분의 나라들은 심드렁한 마음으로 눈치게임만 할 뿐이다. 마치 엄청난 탄소를 배출하는 비행기의 이동을 줄이기 위해서 불필요한 개별 여행을 제한한다고 한다면 기꺼이 동참하기 위해 해외여행 계획을 전면 취소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뻔히 예상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석탄과 석유로 인한 탄소 배출량의 증가에 못지 않게 기후위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동물들의 가스 배출이다. 아니 소가 방귀를 껴도 얼마나 낀다고 그게 기후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코웃음쳤는데, 공장식 축산으로 소비되는 소와 돼지의 양을 헤아려보니 그렇게 소모된 많은 동물들을 고통스러운 짧은 생을 마감하며, 마치 자기들을 과도하고 소비하는 인간에게 벌을 내리듯이 탄소 배출량 증가에 한 몫을 하게 된 것이다. 비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초미세먼지를 대할 때와 유사하지 않았나 싶다. 고기를 안 먹는게 뭐 그리 대수라며 유난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비건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굶주린 시대를 살아온 세대와 함께 살아가기에 먹을 것을 고른다는 것 자체가 배부른 투정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건의 선택이 단지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날씨와 동물과 공장식축산과 연관지어 보게 되면 쉽게 간과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치킨이라면 환장하는 아이들도 닭목아지를 비틀고 닭털을 뽑는 장면을 보고는 식욕이 금방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울타리 안에 놓아 애지중지 키우던 닭을 귀한 손주와 사위가 왔다고 잡는 겪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놓아 기르는 가축은 귀한 시대가 되었다. 제 몸 하나 마음껏 방향을 틀 수 없을 정도의 비좁은 공간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은 항생제를 맞으며 오로지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충실한 재료가 되기 위한 극한의 시간을 보낼 뿐이다. 


먹방의 난립과 맛집 탐방이 취미가 되어버린 시대에 필수적인 영양보충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한 외식의 주재료 대부분이 고기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어떤 뜻을 품은 것이 아닌 단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한약을 복용할 때에 몇 달 간 고기를 입에도 안댄 적이 있다. 집에서야 어떻게든 식사가 가능했지만 문제는 사람들을 만날 때였다. 그전까지는 우리나라 음식의 종류가 꽤 많다고 생각해서 고기를 먹지 않고도 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특별한 식당아 아니고서는 고기를 비껴간 외식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개별적인 만남이 아닌 많은 이들이 모이는 모임의 식사에서는 더욱 그랬다. 회식하면 대부분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러 가는데, 그렇다고 횟집은 더욱 비싸고 호불호도 있으니 차선책이 될 수 없었다. 외식을 할 때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귀찮았고 뭔가 안쓰럽다거나 까탈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몇 달만에 한약 복용이 끝나고 드디어 편하게 식단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비건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동안 맘편히 살아왔던 자신과 이별을 고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 고착된 생각과 오랜시간 용인된 악습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혁명가나 순교자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이 앞선다. 하지만 이슬아 작가는 그런 엄청난 용단을 내리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 하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생각이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든다. 쿠팡의 노동자들이 극한의 장소에서 근육이 녹아내리는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로켓배송으로 원하는 물건을 빨리 받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일시적인 연민이나 동정심에서 무력함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누리는 편안과 안락의 시간은 결국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중요한 결정권을 쥔 자들은 어떤 어른들인가. 그들은 어떤 타인을 끔찍이 사랑하는가. 그들을 눈물짓게 할 타인은 누구인가. 21만 원에서 40만원 사이의 돈을 빌릴 누군가가 주변에 없는 사람. 그들이 대폭 늘어났다는 정보를 소리 내어 말하면서 고통을 느끼는 자만 슬픔에 목이 잠긴다. 한국은행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저속득 가구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클 것’이라는 건조한 문장으로 결코 표현되지 않는 고통 말이다. 나는 이것에 슬퍼하는 수장들을 원한다. 취약한 친구와 이웃과 동료를 곁에 둔 수장들을 원한다. 가장 취약한 이들의 해방과 자신의 해방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수장들을 원한다. 그런 수장들만이 숫자 속에서 취약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112)”


#날씨와얼굴 #이슬아 #위고 #이슬아칼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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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스위트 홈 - 2023년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최진영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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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었다. 대상 수상작은 최진영 “홈 스위트 홈”이고, 우수작은 김기태 “세상 모든 바다”, 박서련 “나, 나, 마들렌”, 서성란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이장욱 “크로캅”, 최은미 “그곳” 등 이다. 해마다 새해를 시작하며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접하게 되는데, 이번 작품집은 유독 재미있었다. 마치 종편과 케이블 채널을 돌리며 다양한 장르의 예능과 드라마와 쇼를 접하게 되는 것처럼,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을 갖고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그런지 하나의 단편이 끝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고 다음 단편에 쉽게 집중이 안되곤 했던 예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매 순간 몰입도가 높았고 잘 읽혀서 좋았다. 특히나 대상을 받은 최진영 작가의 “홈 스위트 홈”을 읽고 나서는 어떻게 이렇게 짧은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을 한 순간에 들었나 놓았나 할 수 있을까란 놀라움과 함께 소설이 주는 여운이 한동안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집에서 사십 대가 되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어진과 상의할 수 있다고, 곤란하고 힘든 일도 함께 겪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사고가 나면 수습하고, 싸우면 화해하고, 고장 나면 고치고, 잃어버리면 같이 찾고, 상대가 악몽에 갇혀 있을 때는 작은 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 서로를 천천히 구원하는 일상. 나에게 미래란 내일이었다.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기도와 같은 기대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22)” 


현대인에게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미래를 걱정하지 않기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내일이면 혹시 집값이 폭락하지 않을까? 금리가 터무니없이 올라 이번달에는 이자를 갚을 수 있을까? 투자한 주식이 반토막나는 것은 아닐까? 안락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현재를 갈아넣었음에도 불안한 마음은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러 가며 터벅터벅 천천히 걷는다면 십중팔구 뒤따라 오는 사람에게 어깨뻥을 맞거나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 중 누군가의 눈흘김을 받기 마련이다. 대체 바빠 죽겠는데, 이 시간에 한량처럼 걷고 있다니 거추장스러워죽겠네 라는 경멸의 시선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끊임없게 만든다. 하지만 주인공 ‘나’는 내일도 오늘처럼 별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도시에서의 혼잡한 생활을 접고 한적한 곳으로 주거지를 옮긴 ‘나’는 얼마 후 암 진단을 받게 되고, 수술과 항암 치료 후 재발, 2차 재발을 거쳐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암 치료를 그만두고 ‘나’는 기억할 수 없는 2살의 나이에 보았던 어릴 때 살던 집을 재현하고자 결심한다. 


어떤 기억들은 통상적인 수준에서 용납될 수 없는 나이때에도 각인되는 것일까? 사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남아 있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을 역사적 사건의 시기와 맞춰보면 겨우 3살 때의 일이라 혹시나 내가 혼동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큰 역동적이 사건과 맞물려 있기에 내가 기억하는 장면과 유사한 일이 벌어진 적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나의 첫 번째 기억이 하필이면 나와 가족과도 아무관련 없는 그냥 역사적 사건에 불과한 일이라니 어떤 면에서는 아쉽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패턴을 멈추게 했던 일은 간신히 걸음마를 하던 나에게도 어떤 변화를 감지하게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화자인 ‘나’는 자신이 기억하는 아주 어릴 때 살던 집의 형태를 엄마를 통해 확인하게 되고 엄마는 딸의 이야기를 믿지 못한다. 무너져가는 폐가를 사들여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고쳐나가는 과정속에서 항암을 포기한 딸을 바라보는 심란해진 엄마의 얼굴은 어땠을까? 


“아픈 사람이란 말 좀 그만해, 엄마. 나는 나을 수 없을지는 몰라. 하지만 더 행복해질 수는 있어.

그리고 어느 날엔 이런 이야기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쓸 거야. 자연스럽게 떠날 수 있도록 두라는 뜻이야. 내 몸에 어떤 튜브도 넣지 말고 나를 살리겠다고 나의 가슴을 짓누르지도 말란 뜻이야. 엄마, 잘 기억해. 나는 꼭 작별 인사를 남길 거야. 마지막으로 내가 한숨을 쉬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비명을 지르면 그것 사랑한다는 뜻이야. 간신히 내뱉는 그 어떤 단어든 사랑한다는 뜻일 거야. 듣지 못해도 괜찮아. 나는 사랑을 여기 두고 떠날 거야. 같은 말을 어진에게도 했다. 사랑을 두고 갈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자유로울 거야. 사랑은 때로 무거웠어. 그건 나를 지치게 했지. 사랑은 나를 치사하게 만들고, 하찮게 만들고, 세상 가장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어. 하지만 대부분 날들에 나를 살아 있게 했어. 살고 싶게 했지.(34)“


죽음이 두려워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갑작스럽게 죽음이 찾아오지 않고 기나긴 삶이 이어질까봐 두려워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죽고 싶지는 않은데 걱정이 앞서는 미래라니 참으로 피곤하기만 하다. 이렇게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 스트레스로만 다가온다면 도대체 행복은 언제 맛볼 수 있는 것일까? 그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 같은 행복의 순간을 화자인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의 행복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마치 선구안 같이 말한다. 이것은 모든 진리를 깨달은 초연한 자의 모습도 아니고, 치료를 그만둔 암 환자의 낙담한 심정에서 내뱉는 한숨의 흔적도 아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다 이해하고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 불가능한 이해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 어쩌면 화자인 ‘나’는 폐가를 고치며 이곳에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지만 그 불가해한 영역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사랑 뿐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안서현 평론가의 해설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우선 치료에만 집중하라는 말을 들으면,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는데 자신의 시간만 멈추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중에 다 낫고 나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시간이 복원되기 전까지는 현재를 상실하였으며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힘든 것은 어쩌면 아픈 몸보다도 이런 상투적인 단절과 유예의 서사일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발산한다’라는 한 마디는 병을 앓고 난 ‘내’가 찾아낸 새로운 서사의 지향이다. 질병이 바꾸어 놓은 시간의 감각을 다시 구성하고 남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서사의 구조를 창조하는 일이 필요하다.(61-62)”


#최진영 #홈스위트홈 #문학사상 #2023제46회이상문학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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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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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원 작가의 [미확인 홀]을 읽었다.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구멍을 간직한 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촛점은 어디에도 집중되어 있지 못하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방치한 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예민한 사람들은 알아챌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 배우자나 가족일지라도 그 구멍과 흔들림을 모른 채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예전에는 그런 심적 상태에 오랜 시간 머무르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생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런 무기력의 늪 같은 곳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배가 불러서 저렇다는 핀잔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시절이 있었다. 무지의 소산에서 나오는 막말은 구멍과 흔들림을 더욱 깊고 거세게 만들어 다시는 자기들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장벽을 쌓는 것만 같던 때였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방면에서 그렇게 구멍과 흔들림이 생긴 사람들을 탓하지 않아야 한다는 시선이 생겨났고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생각의 폭도 넓어진 편이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구멍에 메꿔지고 흔들림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시대가 있었다. 나중에서야 원래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원제목으로도 재출간 되기는 했지만, ‘상실’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뭔가 애수가 가득한 슬픈 눈을 연상시켰기에 [상실의 시대]로 출판된 두툼한 책을 들고 다니면 왠지 모르게 ‘나는 지금 이렇게 삶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는 애증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반증처럼 여겨졌다. 그때만 해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상실’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오랜시간 형벌처럼 다가오는지 말이다. 인간에게는 공감, 연민과도 같이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여 동화되고자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극도의 슬픔을 토로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맺히며 글썽거리게 된다. 문제는 시간이다. 공감과 연민의 마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함께 마주하는 순간에는 당사자의 아픔을 같이 느끼지만 돌아서고 나면 원래의 평온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어떤 일을 겪느냐에 다르겠지만 이전의 안온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더욱 큰 문제는 그렇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이다. 상실이 준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아무도 볼 수 없게 만들어진 커다란 구멍은 도대체 메꿔질 기미가 보이지 않곤 한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그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형벌처럼 느껴져 죄없는 자기 자신을 탓하기도 학대하기도 한다. 그렇게 구멍과 흔들림에 허덕이는 시기를 보내다 결국 뒤죽박죽 되어버린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일까? 이유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래서 자신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이 지옥같은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서 더욱 세차게 자신을 몰아세운다. 


은수리에서 만난 희영과 은정 그리고 필희는 감수성이 넘치는 참 좋은 때에 부모들의 연정이 뒤섞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바람핀 남주가 여주에게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목놓아 소리치는 장면처럼, 사랑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어찌하다 필희의 엄마와 은정의 아빠가 눈이 맞아 도망을 치게 되었는지는 사실 언제나 그렇듯이 중요하지 않다. 필희의 엄마와 은정의 아빠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켜켜이 일상의 먼지를 일순간에 제거하는 선택을 하자 불행은 마하의 속도로 각자의 가족에게 달겨들었다. 소설의 말미에 은정과 은정의 엄마가 등장하고 부모들의 불륜과는 상관없이 우정을 유지하고 싶었던 세 소녀는 은정의 엄마가 필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두 동강이 나고 만다. 그리고 엄마를 잃어버린 필희는 희영에게 뭔가를 고백할게 있듯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던 저수지로 함께 가고, 그곳에서 희영은 필희를 위로할 구실을 찾으러 수면 위에 돌을 던지다 신기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바위 뒤로 넘어간 돌은 바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잠깐 머물다 부서지며 어두운 구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미확인 홀을 발견한 후 필희는 사라졌고 필희의 실종 이후 희영에게도 구멍이 생겨버렸다. 


소설은 이렇게 부모의 불륜으로 어긋난 만남에만 주목하지 않고 수십년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된 희영을 시작으로 그와 비슷한 구멍을 갖게 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어릴적 친구의 실종이 혹시나 자기 탓은 아니었을까 자책하던 희영은 의사인 남편과 두 자녀를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살지만 매일 밤 베란다에서 건너편 동에 사는 사람들을 망원경으로 몰래 관찰하는 버릇을 갖게 된다. 희영이 망원경을 통해서 매일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은 사람들이 불행과 슬픔의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구멍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나아지는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해결책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희영의 남편인 찬영은 희영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같은 전처를 밟을까 두려워하지만, 어느덧 자신의 마음 속에 생긴 공동으로 인해 가려움증을 느끼며 텅빈 병원에서 알몸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물리적 빈 공간이 아닌 각자의 마음 속에 숨겨둔 공동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부디 희영이 그 공동의 공간에 의미 있는 것을 채울 수 있기를 기다린다. 희영의 서사에 등장할 수 밖에 없는 도망친 필희의 엄마 순옥은 할머니가 되어 자신의 어린 딸과 같은 이웃 집 손녀 이든에게 마음을 주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상처를 받고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며 자책의 공동을 키워나간다. 


세상에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마음 속에 공동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영원히 미제로 남을 억울함, 미안함 등이 뒤섞여 진공 상태 같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면 끝없는 바닥으로 내려앉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심해에서 유영하는 알몸의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혀 어서 빨리 수면 위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이 쉴세없이 밀려들지만, 내 안의 공동이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조금 더 참아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 뻔뻔해지고 더 염치가 없어질 거라고, 그리고 그래야만 어디선가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필성도 괴로웠다. 하지만 언니처럼 사라지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보란 듯이 잘 살아야지. 그래서 그 여자가 우리를 찾으면 매몰차게 외면해야지, 그땐 내가 먼저 버려야지. 그렇게 마음먹는 과정에서 필성은 자신이 삶에 단단히 박음질 된 사람이란 걸 알았다. 실이 끊길 위기가 닥치면 다른 실을 구해 박음질할 힘이 있는 사람이란 것도.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진학한 뒤로 언니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성은 언니도 다른 실을 구해 박음질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그럴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박음질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어떤 사람은 대롱대롱 매달린 기분으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는 걸 몰랐다.(135-136)”


#미확인홀 #김유원 #한겨례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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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
김지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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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호 언어치료사의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를 읽었다. 부제는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쌓기의 기록”이다. 흥미와 재미를 유발하여 속독이 가능한 내용이 아니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저자가 아이들에게 쓴 편지를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눈시울이 붉어져 그냥 끝까지 읽기를 포기할까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책을 한 편에 접어두고 다른 소설책을 읽으며 정말로 내가 외면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가 만났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텐데 그리고 가족들은 여전히 그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온전한 시간을 견디어내고 있을텐데.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나와 상관없는 이들이라고 외면하면 그만이라고 눈을 감아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갑작스럽게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것처럼 아파와 눈물이 맺히는 것 또한 순간적인 위선은 아닌지 부끄럽기만 한 며칠이었다. 


저자가 만났던 수많은 아이들과의 치료 과정을 읽으면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과거의 몇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래 나에게도 심각한 장애가 있는 먼 친척이 있었다. 자주 볼 기회도 없었고 그 집을 가야만 볼 수 있었던 나보다 몇 살 많아보인 그는 마치 유아기 아이처럼 거대한 보행기 안에서 몸을 의지한 채 괴상한 소리를 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어린 마음에 그가 무섭게만 느껴졌고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아서 얼른 지나쳐 버리곤 했었는데. 어쩌면 나의 친척도 저자의 책에 나온 유형의 아이들과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한 남남이었지만 어떤 우연이 겹쳐 우리는 친척 관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가 더 오래살았다면 몇 번 더 지속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유년기의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한 장면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혈연관계를 넘어서 우리는 언제든 소통이 불가능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당위를 안고 태어났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유기적 생물체인 인간 또한 언제나 완벽한 구조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와 원인 때문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모자람과 불편으로 여겨지는 것들의 인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상대적 고통과 어려움에 견주어 자신의 삶을 위로받는 치사함이 유혹을 무시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의미를 직시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저자가 만났던 다양한 유형의 말하기의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과정을 살펴보며 또 다시 부끄러운 과거의 단편이 떠오른다. 이렇게 물리적 거리에서 멀리 활자를 통해 느껴지는 공감과 연민의 마음은 실제로 그런 상황을 맞딱뜨렸을때는 제대로 작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외면했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좋지 않아 다음에 만나면 인내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막상 다시 마주하게 되면 또 다시 짜증이 나거나 어서 빨리 이 상황을 마무리짓고만 싶어진다.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란 자책을 하고 싶지 않아 먼 길을 돌아가는 것처럼 부디 소통이 어려운 이들과의 만남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언어치료사란 어떤 은총을 받았기에 이토록 지리멸렬한 싸움을 잘 해낸다 말인가란 주제넘은 감탄에 빠지게 된다. 저자가 매 순간 만난 아이들을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쓴 편지글은 경탄과 존경을 자아내며, 나와 같은 부족한 수많은 어른들을 대신하여 이 세상의 어긋나고 빈틈을 열심히 메꾸어 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치료를 마치고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끊임없이 응원하며 어디선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거침없이 말을 하면서도 매 순간 후회하고 자책해온 나의 하루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마음이 매 페이지마다 따뜻하게 느껴져 익명의 독자인 나 또한 힘을 얻어간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나는 그 말을 진실로 믿지만 한 번도 내 인생에서 무언가를 결정지어야 할 가치 기준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자기 희생이, 생명의 소중함과 내 삶을 맞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상황에 직면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생명의 소중함’이란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에서 통용되는 ‘좋은 말’에 불과했던 거야. 그래서 태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잘생긴 네 형은 그 당연한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거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143)”


“장애는 본인은 물론 가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처음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가족이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나는 헤아릴 수 없다. 그나마 삶의 파도를 헤쳐 가는 사람들과 오래 함께 일하며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동정과 연민은 행복을 향해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는 힘내라는 말보다 묵묵히 그 옆자리를 지키는 게 더 큰 힘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장애라는 말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주니네 가족은 이미 그 일을 해냈는지도 모른다.(255)”


#언어가숨어있는세계 #김지호 #한겨례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언어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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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부탁해 소설x만화 : 보이는 이야기
박서련 지음, 정영롱 만화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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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정영롱 작가의 [제사를 부탁해]를 읽었다. ‘소설*만화 보이는 이야기’ 시리즈 첫 번째 책으로 제사상 코디네이터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과 그의 뻥쟁이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동안 유명해진 소설이 나중에 만화로 재탄생되는 경우는 간혹 본 적이 있어도 이렇게 소설과 만화가 동시에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은 처음 접하게 되었다. 뒤에 부록처럼 첨부된 창작일지를 보니 소설과와 만화가와 편집자가 함께 의견과 아이디어를 나누며 새로운 형식의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동일한 스토리라인을 따라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추구하는 이야기의 전개방식이나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통일되기 어려운 장애물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창작의 과정에서 협업은 혼자 하는 것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혼자 작업을 할 때에는 과정에 대한 미더운 마음과 결과물에 대한 의구심이 밀려드는 것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지속되기는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기에 불필요한 감정적 소모는 덜 할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창조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때로는 나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는 뜻한다.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이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성향 등은 협업을 피로하게 만들고 심지어 괜히 시작했다는 하지 말아야할 생각에까지 이르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적 소모를 잘 견디어내고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면 혼자 작업할 때와는 색다른 매력을 가진 작품이 탄생되기도 한다. 

‘제사상 코디네이터’라는 색다른 직업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이야기는 당연히 누군가의 죽음을 담고 있다. 주인공 수현은 제사를 준비할 수 없거나 제사를 지낼 수 없거나 하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찜찜한 이들의 제사를 대신 차려 주고 예를 거행한다. 유교문화의 일환인 제사는 우리나라 명절과 죽은 이를 기리는 예식에서 필수적인 전례였다. 하지만 제사의 예식을 유심히 살펴보면 단지 유교의 사상에만 입각한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불교적인 해석과 더불어 샤머니즘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지방에 쓰인 신을 부르는 문구나 음식을 차려놓고 죽은 이가 와서 먹기를 기다라며 자정에 맞춰서 방문을 열어 놓았던 관행은 조상신이 자손을 잘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미신적 요소가 많이 담겨 있다. 아무리 종교적 신심이 강하다 할지라도 불행한 숫자와 요일에 대한 강박이나 손없는 날에 이사를 가는 게 좋다는 말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종교 이전에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제사는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아 행할 수 없는 이들조차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사상을 차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게 되면 그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제사상 코디네이터 수현은 이렇게 제사를 대신해주며 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의 근심을 누그러트린다. 소설 속에 등장한 새로운 직업이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직업이 보편화될지도 혹시 지금 어디선가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박서련 작가의 짧은 소설을 읽을 때에는 수현과 정서의 관계 그리고 정서의 딸과 함께 1주기 기일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막연히 상상하게 된다. 사춘기 딸의 무심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서가 가장 좋아했을 불량식품 쥐포를 준비해온 수현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정서의 아이돌 취향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리고 정서의 딸에게 정서가 좋아했던 아이돌의 정보를 검색하던 수현은 갑작스럽게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수현은 왜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간 것일까? 아직 상점이 닫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친 수현은 무엇을 사러 나갈 것일까? 수현과 정서의 이야기에 가장 중요한 화두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몹시 궁금하면서도 혹시나 소설을 읽는 동안 놓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이어지는 정영론 만화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소설 속에 드러나지 않은 장면들이 펼쳐졌다. 글로써 연상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말풍선을 담은 실제의 인물로 눈앞에 그려지니 좀 더 생생하게 그 둘의 과거와 현재를 그려볼 수 있었다. 특히나 소설 속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정서가 유령처럼 수현과 정서의 딸이 제사를 지내는 주위를 맴도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해온 모습이어서 친근하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는 수현과 정서의 딸이 제사를 지내는 도중 갑자기 방문이 닫히는 장면을 만화 속에서는 정서를 유령으로 등장시킴으로써 남편의 부재에 화를 내는 모습으로 그려내 재미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금했던 부분인 수현이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간 이유는 정서에 대한 그리움을 제대로 기리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수현이 맡은 제사상 코디네이터나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일상이 죽은 이들의 예를 기리는 절차를 밟는 것은 도와주는 것이고 슬픔에 젖은 이들을 지켜보는 일이기에 죽음에 대해서 무덤덤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현도 그 일을 계속 해나갈수록 점점 더 그런 생각에 빠졌을 것이다. 겉으로는 적절한 복장을 갖추고 제사를 대행하며 진중한 말과 행동을 기계적으로 수행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수현은 얼토당토 되지도 않는 말로 어릴적 자신을 위로했던 정서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그녀가 좋아했던 아이돌의 생일케익을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간다. 결국 예의니 도리니 하는 말로 절차와 형식을 중요했던 종교적 문화적 제례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이 내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리라.

“제사를 모시는 게 직업이어서, 제사상이라면 지겹도록 차려봐서 이 일에 익숙해진 줄 알았다. 남들의 마음을 대신해 내 마음을 바치곤 해서 내 진짜 마음은 한참 전에 닳아 없어진 줄 알았다. 아니야, 착각이었지. 마음이란 것을 어떻게 정말 다 갈아 없애겠어. 꼭꼭 잘 숨겨두고는 없어졌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쳤던 거지. 그걸 갑자기 깨달아버린 나는 지금, 뛰지 않을 수 없다.(46)” 


#박서련 #정영롱 #제사를부탁해 #문학동네 #제사상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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