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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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 작가의 [중급 한국어]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2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자가 시리즈 중에 한 작가의 책이 두 번이나 들어간 것은 이번에 처음인 듯 하다. 마치 전작인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가 2권으로 이어진 긴 장편인 것처럼 여겨졌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가능한 것이었는지. 아무튼 소설에서 지혁의 아내 은혜가 말한 것처럼 초급이든 중급이든 소설의 제목이 꼭 한국어 교재 이름 같다는 말에 한 표를 던진다. 전작에서는 시간에 대한 설명 중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부분이 마음에 꽤 와닿았었는데, 이번에는 전작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운 성찰 거리는 가득 담고 있다. 


뉴욕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지혁은 엄마의 부고를 듣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혁의 여동생인 지혜가 사귀는 미국인 라이언이 "왜 한국으로 돌아온거냐?"고 물었을 때, 선뜻 지혁이 대답하지 못한 것처럼 지혁의 귀환 이유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사실 지혁이 왜 돌아왔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책을 두 권 내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작가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는지 의문인 지혁은 선배의 소개로 강릉의 바닷가를 마주한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담당한 시간 강사로 일하게 된다. 요즘 대학에서 인문학 계열의 종말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 기초 인문학과들이 통폐합되고 오로지 실리와 자격을 위한 변종된 이상한 이름의 학부들만이 남게 되는 것을 보아 충분히 짐작이 된다. 소설의 배경과 우리의 현실이 다르지 않아 국문학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수업에서도 지혁은 학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글쓰기 수업의 시작부터 합평을 거쳐 과제물을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어느 글쓰기 교수의 수업계획서를 그대로 떼어와 붙여놓은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지혁의 수업 내용을 귀가 아닌 활자를 읽는 눈으로 따라가고 있음에도 마치 오디오 서비스가 동시에 제공되는 것 같은 황홀감에 빠져들곤 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들, 제임스 조이스의 [애러비],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와 같은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토대로 나 또한 글쓰기 수업을 참석한 것 같은 상상에 빠져들곤 했다. 아마도 읽으려고 했다면 중간에 멈춰버렸을지도 모를 막연히 지루하고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는 작품들을, 지혁 선생님은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며 소개된 작품들 속에서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지 고민하는 시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 속에 주제를 해석하기 위한 키워드를 제시하며, 그 단어와 사건들은 단지 소설속에서만 박제된 나와 무관한 일들이 아니라 저자와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나의 현실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이제 나에게 맡겨진 것은 오늘의 삶을 나의 힘으로 해석해내는 것이다. 


소설의 왼편에서는 시간 강사 지혁의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면, 오른편에서는 지혁이 은혜를 만나 은채를 낳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은채를 낳아 키우며 작가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지혁은 대문호들의 작품을 친절히 소개하며 글을 쓰고, 읽고, 고치는 반복된 작업을 통해서 진실한 자기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는 무언가 통달한 자처럼 보이지만, 은혜와 결혼하고 은채를 갖기까지 여러 차례의 인공수정 시도를 통해 깊은 좌절의 늪을 경험한 지혁은 하루에 왕복 6시간 이상의 운전과 3시간 짜리 수업의 연강으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를 감당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글쓰기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냉랭함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위트가 담긴 말을 던지며 부단히 밀도높은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은채를 돌보며 자신과는 다른 아내 은혜와의 관계를 곱씹는 지혁은 역시나 전혀 다른 성향임에도 무던히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한 이유는 부모님에게 있어 삼각형의 한 부분으로 자신이 존재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 속에서 진주처럼 빛나는 부분은 두 권의 소설을 출판했지만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언제든 잘릴 수 있는 시간 강사로서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일상을 가진 가정을 지키고 코로나 확진이라는 최고의 불안 속에서 한 편의 소설을 탄생시키는 지혁을 담담하게 그려낸 것이다. 내가 만약 지혁이었다면 그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소설 속에서는 자세히 그려지지 않았지만 가족의 일상과 소설이라는 꿈을 지켜내기 위해서 견뎌야만 했던 소소히 고통들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저자의 자전적인 요소가 얼마나 많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글쓰기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예를 들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검은 빵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불의의 사고로 생일을 앞둔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는 생일 케익을 찾으러 간 빵집 주인에게 분노를 쏟아내다가, 사정을 알게 된 주인이 내어 준 시나몬롤과 커피를 먹으며 기운을 되찾게 되고, 마지막에 빵이라고 할 수 없는 검은 빵 덩어리를 함께 나누며 아들을 잃은 재앙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된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가 아닌 남겨진 자에게는 살아갈 날들이 있기에 말이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 단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운도 쾌락도 고통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가 아니라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부는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이 빵을 먹죠. 더 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먹습니다. 먹는다는 건 그 걸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이 검은 덩어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건 바로....(220-221)"


소설 속에서 저자는 그게 바로 무엇인지 바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답은 이미 앞서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에피파니, 곧 현현이다. "조이스의 주인공들은 거룩한 공간에서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건을 통해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32)" 아들을 잃은 부부는 검은 덩어리를 먹으며 그들이 겪은 상처와 고통을 살아내려고 할 때 그들 안에서는 에피파니가 이루어진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부분에게 검은 덩어리를 전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혁이 그랬듯이 '먹이고 놀아 주고 치우고 재운다', '쓰고, 읽고, 고친다'가 되풀이 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되풀이만이 삶이다.(162)"


#중급한국어 #문지혁 #민음사 #오늘은젊은작가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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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 2023-03-2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입니다. 초급편을 읽고 중급을 이제 막 읽으려는데 리뷰 덕분에 기대가 샘솟네요

제코루 2023-03-24 09: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글쓰기 수업에 대한 내용 중에 위트 넘치는 곳이 몇 군데 있어서 혼자 웃게 됩니다.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래요.
 
여행의 시간 -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
김진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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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 작가의 [여행의 시간]을 읽었다. 부제는 “도시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이다. 바야흐로 팬데믹의 종식이 눈앞으로 다가오며, 몇 년동안 억누르던 여행세포가 마구마구 폭발할 것만 같은 시기이다. 일상을 견디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딘가 떠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서지만, 막상 어디를 갈 것인가, 누구와 갈 것인가를 비롯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다 보면 비용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냥 집에서 쉬지 뭐’ 라는 단순한 결론에 다다르곤 한다. 요즘 시작한 여행 예능 중 ‘지구마불 세계여행’이라는 프로는 유명한 여행 유튜버 세 명이 나와서 우리가 어릴 때 했었던 부루마불 보드게임처럼 실제로 주사위를 던져 나온 나라를 여행하는 컨셉이다.  여행 유튜버들이다 보니 일반인들과는 다른 여행의 고수처럼 어느 곳이든 아무 문제없이 일정을 수행할 것 같지만, 그들도 낯선 곳에서는 긴장과 두려움과 설렘을 드러내며 좌충우돌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튜부 채널은 구독자와 조회수를 늘리는 것이 제일 중요할텐데, 여행 채널에서 조회수가 올라가는 영상은 한 마디로 유튜버가 여행지에서 개고생을 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 말이 설득력있게 느껴지는게 어차피 여행지의 드라마틱한 영상들은 이미 제대로된 촬영을 마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널려 있다. 여행 채널을 통해서 독자들이 보고 싶은 것은 영화와 그림 같은 영상이 아니라, 내가 만약 그 곳에 가게 된다면 혹은 실제로 그 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몸으로 감당해야 할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학생 때 단체로 어디를 갈 때를 제외하고는 어디를 가야겠다거나 가고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제일 친했던 친구는 방학이 되면 항상 어딘가 여행을 다녀왔다. 방학을 마치고 다시 만난 그 친구는 당시 우리 나라임에도 처음 듣는 이름의 장소를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 이후로도 며칠씩 집을 나서는 것, 집을 나서기 위해 짐을 꾸리는 것, 단체로 잠을 자고 세면과 용변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귀찮은 일로만 여겨졌었다. 어찌보면 여행을 즐기게 된 것은 유학시절에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도피처로 생각한 다른 도시의 방문과 언제 다시 살아볼지 모를 타지에서의 삶을 즐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없는 살림과 짧은 일정으로 다른 도시를 다녀오기 위해서는 철저한 계획이 필요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딘가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리고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여행을 다녀오고 몇 번 후회되었던 것은 너무나도 철저히 계획을 세운 탓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MBTI의 영향도 있겠지만 여행지에서 동선을 생각했을 때 미리 장소를 생각해두지 않으면 거리에서 시간과 체력 낭비를 너무 많이 하게 된다. 마치 어떤 미션을 완수하겠다는 강박증을 가진 사람처럼 여행지에서도 쓸데없고 불필요한 동선을 거부하겠다는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저자의 말처럼 여행이 주는 커다란 선물 중의 하나는 바로 우연성이다. 어차피 낯설고 어색한 곳에 가는 것이니 일상의 삶이 있는 곳처럼 자연스러울 수는 없다. 길을 잃기도 하고 맛이 없는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현지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것이 여행일텐데, 그런 것들을  반갑게 맞이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 유튜버들의 영상에 나오는 어이없는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방구석에만 머물려고 한다면 나를 기다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닫는 것과 마찬가지일텐데, 지금까지의 여행 습관을 버리려면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여행길이란 일상을 깨뜨리는 시간이다. 모르던 세계, 처음 가보는 공간, 낯선 문화, 익숙지 않은 문물, 낯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떨어지는 상황 그 자체가 비일상이다. 이 비일상은 나의 일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낯선 여행길은 나를 비추고, 나의 관계, 내가 익숙해했던 모든 것을 비춰준다. 그 과정에서 여행은 인생에 풍부한 소재와 주제를 던져준다. 여행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나를 다시 찾고, 찾았다고 생각한 나를 다시 잃어버리기도 하고, 내가 몰랐던 또다른 나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11)”


“홀로여행이란 ‘결단의 행위’이자 ‘용기의 행위’이고 ‘모험의 행위’이자 ‘자신을 대면하는 행위’다. 그만큼 두렵고 주저하는 시간이지만 그만큼 완벽한 시간이 된다.(305)” 


#여행의시간 #김진애 #창비 #인생여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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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뒤에 쓴 유서 오늘의 젊은 작가 41
민병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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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훈 작가의 [달력 뒤에 쓴 유서]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1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양장으로 출판되기에 책장에 순서대로 꽂아두면 훨씬 더 폼이 나는 것 같다. 그 고유의 폼을 내주는 치트키는 바로 표지에 그려진 화가들의 그림이다. 소설의 내용이나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연상시키는 그림을 사용하기에 표지를 유심히 살펴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유독 표지의 그림에 눈길이 많이 갔다. 아마도 지금 어느 집에서는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를 둥그런 모양의 철제 밥상. 소재가 스테인리스인지 알루미늄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아함과 고상함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걸 만드는 사람도 알았는지 밥상 윗면에는 항상 화려한 꽃과 같은 무늬가 형형색색 새겨져 있었다. 밥상의 다리 또한 부실해서 오래 사용하게 되면 다리 한 쪽이 시원치 않아서 금방 밥상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해 오기도 했다. 어쩌면 다리가 세 개인 이 밥상은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장면처럼 누군가 밥상을 손쉽게 뒤엎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라도 밥상을 뒤엎은 이가 시간이 지난 뒤에 계면쩍음을 느끼며 다시 살아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밥상의 소재와 촌스러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밥상 위에 놓인 음식에 눈길이 저절로 가며 순식간에 침이 고인다. 흰쌀밥에 두부가 들어간 된장국과 김치, 계란말이, 날고추, 양파와 마늘 짱아치, 그리고 이 밥상의 하이라이트인 잘 구운 조기 두 마리. 이런 메뉴 설정은 자기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를 위한 차림이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은 함께 살지 않고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정성껏 준비한 상차림이다. 없는 살림에 미리 찬거리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얼려둔 조기가 생각나 두 마리나 구워 올린 것이다. 날고추가 풍성한걸 보니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한 상차림에는 밥과 고추와 김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상차림을 가능케 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부모 밖에 없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며 그렇게 상을 차려주신다. 


식탁 옆에는 당연한 소품으로 언제나 달력이 등장한다. 밥을 먹으며 일상을 기억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연로해질수록 점점 커지는 달력 숫자는 그리운 이와의 만남을 카운팅 한다. 그래서 식탁 옆에는 언제나 달력이 있다. 그렇게 당연한 소품의 뒷면에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적혀 있다. 저자의 이름과 동명인 화자 병훈은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달력 뒤에 아버지의 유서가 씌어 있다. 농약을 마셔 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죽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면 그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결심이 섰을까 싶다. 아들 병훈은 병원에 실려간 아버지가 며칠 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차라리 자신이 더 늦게 발견을 했더라면 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의 시간이 짧아지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를 한다. 때마침 엄마 마저도 집을 떠난 때라 화자인 ‘나’는 홀로 그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아버지의 자살을 고백하며 시작하는 화자의 이야기는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는 또 왜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간 것인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여타의 소설처럼 어떤 사건과 정황을 토대로 유추해볼 수 있는 이야기도 전개되지 않는다. 그저 이 소설에서 어떤 화제가 된 일이란 아들과 엄마가 오키나와로 여행을 갔다는 정도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버지의 자살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화자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이야기를 뛰따라가 가지만, 작가는 그렇게 쉽게 독자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주인공은 소설을 쓰며 아버지와 엄마와의 흔적을 기억하려 애쓴다. 유독 마음이 가는 장면은 엄마가 온 장터를 들쑤셔서 찾아낸 스케이트 날로 썰매를 만들어 동네 아이들의 주목을 받던 아들을 위해 썰매장에 연결된 관이 얼지 않도록 빙벽에 오른 아버지를 발견한 주인공이다. 행여나 잠깐의 실수라도 있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도 아버지는 왜 이리 무모한 것일까란 생각에 화자인 병훈은 온 몸이 덜덜 떨리지 않았을까? 도대체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자식이 제일 먼저 발견할 것을 뻔히 알면서 농약을 들이마시는 결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에두르고, 빙빙 돌고, 중요한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뉘앙스만을 풍겼다. 가령 이런 문장. 당신은 소설에게 당신의 손을 빌려준다. 명확한 서사와 분명한 주제를 쓰지 않았다.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소설을 따라오도록 안내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설은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왜 자꾸 명확하고 분명한 것들을 회피하고 있는 걸까.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 이 이야기를 쓰는가. 나의 가족 이야기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117-118)”


#달력뒤에쓴유서 #민병훈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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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염기원 지음 / 문학세계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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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원 작가의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를 읽었다. 처음 제목을 접하고 하이틴 소설일까, 아이돌을 대상으로 하는 내용일까 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여기서 오빠는 혈육인 친오빠를 뜻하고 채하나인 여동생이 채강천인 오빠가 서울에서 진짜 사고를 친거라 생각하고 고향인 태백으로 데리고 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지난 이틀 동안 강릉으로 출강을 다녀오면서 기차를 타고 가며 창밖으로 보이는 논밭과 작은 야산들을 보고 있자니 드문드문 작은 마을이 보이고 집 한 채만 덩그러니 놓인 곳도 있었다. 물론 아파트도 중간 중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층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어딜가나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 살다가 한적한 시골에 가면 더 답답함이 느껴지곤 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은 환경에서도 어느 순간 적응하고 그곳을 편안하게 느끼며 벗어나길 거부하게 되니 말이다. 도시의 번잡스러움에 익숙해진 나는 시골의 한적함을 견디지 못한다. 자동차의 소음과 경적소리, 사람들이 술마시며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화를 내며 싸우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음에도 어둠이 너무나도 빨리 찾아오는 시골의 고요함은 이름모를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 


석탄 소비가 줄어들면서 거의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기는 했지만, 한때 강원도의 사북과 태백은 수많은 광부들이 있었다. 태백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주인공 채하나와 절친 미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경제적 상황이지만 하나는 미주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미주는 하나에게 있는 척을 하지 않아 친구로 지내며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 하나의 오빠 강천을 짝사랑하는 미주, 그리고 미주의 오빠 우주를 짝사랑하는 하나라는 인물 설정은 오히려 소설의 긴장감을 저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란 의구심이 들지만, 우주는 거의 등장하지 않기에 하나와 미주의 관계 설정에 집중하며 과연 하나의 우려처럼 강천이 정말 사기꾼의 유혹에 넘어간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앳된 하나와 미주는 여전히 학생처럼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지만 하나는 엄마의 병환으로 인한 죽음과 아빠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혼자가 될까 두렵기만 하다. 하나는 육상부였던 오빠를 만나러 학교에 갔다가 투포환 선수가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국가대표 상비군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동안 올림픽을 보면서 거의 대부분의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유독 육상의 필드경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하나의 경우처럼 여자 투포환 선수가 국내가 아닌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체격 조건이라고 한다. 메달을 따는 여자 투포환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100kg이 넘는 신체 조건을 갖고 있는데, 우리나라 여성이 그런 조건을 갖추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기 때문에 메달권에 진입하는 힘을 뿜어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어쨌든 85kg에서 무게가 멈춘 하나는 현실을 파악하고 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공장에 취직해 아빠 때문에 열악해진 거주지를 옮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며 우연히 유튜브에 나온 오빠 강천의 얼굴을 보고 하나는 경악하며 오빠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불안하기만 하다. 오빠를 잡으러 서울에 가기 위해 거의 불가능한 연차를 내고 함께 따라 나선 미주와 함께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빠의 흔적을 찾게 된다. 하나와 미주의 경제적 상황이 정반대라면, 태백의 황지 페투페라는 카페 겸 호프집은 도시의 스타벅스와 대조를 이루며 소설 속에서 여러번 등장한다. 미주를 기다리며 스타벅스에 머물던 하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입장에서 비슷한 가격을 지불하고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그곳은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곳인 반면에,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또 하나의 전쟁터와 같은 곳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스타벅스는 우리나라에서 도시화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스타벅스가 있는 건물은 비싼 매물이 될 확률이 높고 유동 인구는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많으며 차량의 흐름도 만만치 않게 복잡한 곳이 대부분이다. 


연결이 잘 되지 않는 오빠와의 만남을 위해서 미주와 함께 옛 고향 언니 하연은 언론사에 취직하여 기자로 생활하고 있지만, 막상 하연 언니를 만나 설명을 들으니 그녀가 하는 일이란 고작 다른 기사의 내용을 우라까이 하여 다시 웹상에 게재하는 기래기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연은 하나와 미주보다 냉철한 시각으로 강천이 하는 일이 분명 책기꾼에 만들어놓은 사슬에 걸려들었다고 자신했다. 그럴만한 것이 유튜브에 나온 강천의 소개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스타트업 대표이자 교수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렇게 어이없는 뻥을 치는 강천이 누구에게 홀딱 속아 넘어간 것인지 불안하기만 하다. 강천에게 마저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상에 자기 혼자 남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어서 빨리 강천을 제정신 차리도록 태백에 데리고 가야 한다고 종용한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하연이 하나와 미주와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책기꾼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부분은 강천의 사기로 의심되는 부분과 상관되기에 필요한 설명이기도 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오빠새끼잡으러간다 #염기원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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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
하재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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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작가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읽었다. 부제는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이다. 얼마 전 [친애하는 나의 집으로]를 읽고 한마디로 ‘너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신작을 읽고 나니 저자가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번 책도 너무 좋고 감동적이고 논리적이고 진솔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책 읽기를 좋아해도 결말을 알고 싶고 책 한 권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지막 페이지가 그렇게 아쉽지 않은데, 유독 하재영 작가의 책은 항상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생면부지의 남남이고 앞으로도 우연히라도 마주칠 기회가 없겠지만, 이렇게 책으로 누군가의 진지한 삶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는 계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나온 시간을 가감없이 들려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저자의 책을 읽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몇 년 전에 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받고 체력이 떨어져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갑자기 엄마는 내가 모르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란 궁금증이 생겼다. 마치 어느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처럼 나중에 아주 나중에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집안을 정리하다가 혹시나 내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한다. 본가를 떠나와 살기 전에는 집에서 가끔 가족 앨범을 둘러보곤 했다. 정리되지 않은 부모님의 흑백사진을 대충 훓어보며 우리 엄마 아빠도 이렇게 젊을 때가 있으셨구나라는 잠깐의 감흥에 빠지곤 했는데, 이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함께 사진을 보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저자도 고백하고 있지만 사춘기를 비롯한 20대 시절에는 그야말로 자기 밖에 몰라서 그런지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임에도 부모들의 마음 상황을 헤아릴 여지가 거의 없다. 그 당시에는 마치 인생의 가장 큰 고뇌에 빠진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대놓고 드러내며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기를 바란다. 생각해보면 특출난 사춘기를 보낸 기억이 없다. 큰 사고를 친 적도, 가출이나 일탈을 한 적도 없다. 어쩌면 너무 밋밋하게 열정의 시기를 보낸 것이 아닌가란 아쉬움마저 든다. 


전작에서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집안의 흥망성쇠를 어느 정도 설명했기에 이번 신작에서 언급된 사건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을 갖고 읽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벌어진 같에 대해서 딸와 어머니의 관점과 처신은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것인지 놀람을 금치 않을 수 없었고, 어머니의 책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직하여 그 사랑의 헌신 덕분에 이렇게 무관한 나와 같은 독자들이 저자의 글을 읽는 혜택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시집을 와서 시집살이와 집안 일, 고부간의 갈등, 자녀와의 반목, 남편의 냉담함 등 어찌보면 이미 지난간 일이라 할지라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들려주시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 책이 가진 재미의 90%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구전 동화를 듣는 것처럼 어머니의 이야기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함께 특정한 사건이 일어난 장면을 지켜보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자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심각하고 진지하다. 어머니는 마치 세상사를 초월한 도사같은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딸인 저자는 어머니가 겪은 상황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겪은 불합리함과 편협한 사고는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도 새로운 세대에게 지속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많은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말과 행동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알게 모르게 ‘가부장제의 수혜자’로 살아온 남자인 나 또한 아주 오랜시간 나의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인내한 시간을 모른척 해왔기 때문이다. 여자가 공부는 해서 뭐하냐며 책을 아궁이에 쑤셔넣어 불태워버렸던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 세대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체념과 수동성을 배웠을 것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로 아내에게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용인하던 시대는 이미 생물학적으로 힘의 우위에 있음에도 감히 가부장의 말에는 토를 달지 못하게 만드는 독재자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딸들이 공장을 다니며 하나 뿐이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대고 출세한 아들과는 반대로 지지부진한 생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어쩌면 그 오랜시간 동안 여성들은 남자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더 많은 노동을 감내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세뇌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도 동등하거나 더 우위에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보직을 맡기거나 승진을 시킬 때 결혼과 출산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배제시키는 일이 여전히 발생된다. 워킹맘이라는 단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자가 언급한 일하는 여성에게는 자신의 일과 더불어 가사일과 육아돌봄이 가중된다. 우리 사회는 그 모든 것을 다 잘 해내는 여성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것이겠지. 


“엄마에게 여성의 일생이란, 특별한 사람으로 고독하게 지내는 삶과 평범한 사람으로 원만하게 지내는 삶으로 이분되어 있었고,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후자가 더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다.(34)”


“‘평범한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로서 결혼 제도권에 편입하는 것,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갖춘 남편과 자녀를 두는 것, 중산층에 안착하는 것,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 등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것이 평범성이라면 미디어가 ‘노출’하는 동시에 ‘누락’하는 삶을 ‘평범한 삶’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평범함은 정체성, 가족 형태, 경제적 배경 등의 다름을 무시한 채 남용된다. 모두가 스스로 평범하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등의 가치는 어디에서 배회하고 있을까?(39)”


“엄마가 선택한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져온 일을 생각하면 수많은 가정과 질문 들이 떠오른다. 가사노동이라는 ‘반복의 노동’이자 ‘필수적 노동’을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만 담당한다면, 그 한 사람이 어머니-아내-며느리로 부리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성역할 모델에 맞춰 경제적, 사회적 자립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와 그녀가 추구하는 자화상이 동떨어져 있다면, 다시 말해 그녀의 노동이 ‘스스로 원해서’ 맡은 일이 아니라면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아분열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결국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란 선택권이 없는 자의 자아분열이 아닐까? 현실과 의식이 유리되어 있을 때 그녀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으니 그저 현실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 의식의 깨어남을 억누르거나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은 아닐까?(209)”


“…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계절마다 다른 모자를 쓰고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어쩌면 바뀌는 모자를 알아채주는 정도의 일만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한정원 시인 [시와 산책]: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중에서(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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