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재수사 1~2 - 전2권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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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질료에 따라 창조되는 형태는 다르지만, 질료를 이루는 본질은 특성을 잃지 않는 것처럼 범인은 이런저런 흔적을 남긴다. 범죄의 혐의 유무를 명백히 해 공소의 제기와 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범인을 발견확보하고 증거를 수집보전하는 수사 기관의 활동을 수사라고 사전에는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명백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아 미제로 남는 경우가 있다. 22년 전 서울 신촌에서 벌어진 미제 살인 사건을 재수사하여 진범을 밝히려는 강력 형사 팀이 있다. 22년 전 신촌 뤼미에르 오피스텔에서 자상을 입고 사망한 여대생 민소림을 죽인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지지도 않은 채 묻힐 수도 있는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여 살인범을 밝히기 위해 재수사를 한다.

 

   22년 전의 일이라 수사 기록에 남아 있는 용의자를 찾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사건 해결의 단서를 쉽게 찾을 수는 없었지만 당시 수상에서 놓친 부분들을 헤집어 재수사에 나섰다.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태완이법 통과로 재수사의 여지가 있는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수사팀은 강력범죄수사대에 근무한 이력을 바탕으로 수사망을 펼쳐 수사 아이템을 찾아 나섰다. 재수사 팀은 역할을 분담하여 그 당시의 수사 기록을 살피며 수사의 허점을 드러내는 장면들을 목도하며 놓친 부분들을 짚으며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였다. 석 달 내 종료해 버린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단서로 남은 DNA검사 결과와 CCTV검사 결과만으로 범인을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반 여형사 연지혜와 동료들은 당시의 수사 기록을 재검토하고 누락된 부분을 살피면서 범인을 추적해 갔다.

 

  홀수 장은 밝혀지지 않은 범인이 남긴 원고로 작성되었고, 짝수 장은 형사들의 수사 과정을 담아 범인의 심경과 수사과정이 교차돼 읽는 내내 몰입감을 더한다.

  ‘그들과 달리 나는 살인자다. 나는 선 바깥에 있다.’

   범인은 형사와 대면하는 시간에도 여유 있게 속내를 드러내며 악령의 주인공 스티브로긴을 불러내 형사들보다 유리한 점에 있음을 최면 걸 듯이 말한다. 얼굴에 반점이 있는 범인은 뛰어난 미모의 재원으로 학교의 스타로 유명한 민소림과 러시아문학 조별 토론 수업에서 만났다. 문학과 서양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민소림은 그녀만의 대담하고 도발적인 해석은 수업 시간 토론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미모는 치명적인 무기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큰돈이 되기도 하지만 부서지기도 쉽다고 말한 소림의 이모는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외로운 조카였음을 회상하였다.

 

   스스로 무엇을 찾는지 모르면서 뭔가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복합적인 체계로 얽히고설킨 삶에 갈증을 느끼며 살아간다. 지성인의 담론을 좇아 도스토엡스키 독서모임에 함께한 이들은 대학 시절 인간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 야기하는 불안, 자의식의 분열, 생명력의 소멸 등으로 인한 고통을 직시하고 대응하는 개인의 방식을 입체적으로 성찰했다. ‘백치소설 결말과 같은 소림의 죽음은 한 개인은 타인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 신계몽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모멸감으로 통제력을 잃은 범인의 살인을 초래하였다.

 

  ‘점박이

   소림은 대학 시절 얼굴에 반점이 있는 사촌 동생 은수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칠 때 점박이라고 부르며 그의 학습효율성을 칭찬했던 적이 있다. 사촌 누나의 칭찬에 점박이라는 말도 거슬리지 않았던 은수와는 달리 상은에게 점박이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였다.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이에게 점박이라는 별칭은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아 어떤 점이 박히다시피 된 사람이라는 낙인 효과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 소림의 한마디에 모멸감을 느낀 상은은 그녀를 칼로 찌른 뒤, 그녀는 소림의 숨이 붙어 있을 때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119를 부를 것이라는 말을 던지지만 소림은 응하지 않았다. 한편 상은은 신계몽주의 사회에서 모멸은 중범죄가 된다며 스스로 범죄를 합리화하였다.

 

   상은의 초대로 믿음공방으로 온 연지혜 형사는 얼굴에 오타 모반이 있는 상은과 은수의 접점을 발견하고는 사실을 넘어서는 상상의 복합체로 이뤄진 현실적 서사를 가늠한다. 자신을 옥죄는 듯 몰린 살인 용의자 상은은 또 다른 살인을 감행하며 22년 전 소림을 죽인 범인으로 체포될 위기 상황을 벗어나려 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연지혜는 그녀를 체포하지만 씁쓸함이 더한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며 자기한테는 남들과 다른 특권이 있다고 자부하며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욕망이 끌리는 대로 움직인 민소림의 짧은 생을 떠올린다. 누군가가 던진 한마디, 타인에게 보내는 눈길에 담긴 한 사람의 태도는 누군가를 무너뜨려 치명적인 고통을 야기할 수도 있음을 재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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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
김미월 외 지음 / 다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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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라고 하면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숙명을 끌어안고 사는 이들이 떠오른다. 작가인 엄마는 결혼을 하고 출산 과정을 거치며 아이를 양육하느라 작가로서 오롯이 글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어느 것과도 대체되지 않는 사랑과 관심, 정성을 기울여여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살다 영양을 공급하던 탯줄을 끊고 세상에 던져진 생명체는 혼자 행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엄마는 아기의 성장과 발육을 돕는 일에 주력한다. 밤잠을 설쳐 가며 아기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체의 크고 작은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 반응하며 일상을 보낸다.

 

  첫 아이를 낳은 지 보름 만에 신춘문예 등단 소식을 듣고, 출산의 통증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당선 소감을 적으며 글 쓰는 엄마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고백한 소설가는 작가로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삶을 글감으로 창작하는 과정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온 여섯 명의 작가는 보듬고 가꾸어야 할 생명을 끌어안고 작가의 길을 걸었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글을 쓰기도 했으며 떼쓰는 아기를 안고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던 지난한 과정은 한 편의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수고에 융해되어 있다.


   백지에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글쓰기는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며 살아야 할지를 사유하고 감각하는 과정이다. 연속하는 시간을 혼자만의 시간으로 쪼갤 수 없는 육아 시간을 할애하여 글을 쓰는 일은 고단한 일상의 단면이다. 아이를 한둘 키워 본 엄마도 새롭게 태어난 아기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다고들 입을 모은다. 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매순간 육아로 힘든 상황에 놓은 자신을 발견하며 관찰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 아기와 함께 엄마도 성장하느라 분투하는 중이다. 마감일이 임박하여 마음잡고 원고를 완성해야하는데도 육아는 정해진 시간에 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를 재우다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지만 계속 잘 수만은 없어 아이 곁을 빠져나와 글을 쓰는 엄마는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모은다. 스스로를 고립시킬 나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한 작가처럼 엄마 작가에게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글로 삶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녹록치 않다. 시를 쓴다고 물질적 보상이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씀으로 스스로를 인정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시인은 아이 돌봄과 가사 노동이 끝난 뒤에서야 글을 쓰지만 이마저 쉽지 않다. 가족 모두가 잠들어 부는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려도 멈칫하며 아이가 깨지 않게 살그머니 나와 글을 쓰기 위해 정신을 모은다.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내는 소리에 공명하며 감각에 반응하며 매일 쓰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굳어지는 것처럼 글을 쓴다. 헝클어지기 쉬운 긴 머리를 빗기기에 좋은 빗의 빗살 하나를 빼 숨구멍을 열어주는 공인의 지혜에 외경심이 든다. 글을 쓰는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사는 엄마들 역시 백지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 육아의 기쁨과 슬픔, 불안과 회한을 삭이며, 당위성을 들어 자신을 옭아매는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해방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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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의 가족 상담소 - 모르면 오해하기 쉽고, 알면 사랑하기 쉽다
박상미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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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면 오해하기 쉽고, 알면 사랑하기 쉽다.’

   인간관계의 기초가 되는 가족에서부터 사회에서 만난 친구, 직장 내의 성원들과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말이다.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는 하나라는 말로 유대하고 연대하는 관계를 지향하는 가족은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자신을 옥죄었다. 핏줄을 중시하는 남편을 만난 뒤 결혼과 함께 알지도 못하는 이들과 소통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집안의 대소사에 참석하며 지쳐갔다. 효자 아이콘으로 홀로 지내시는 어머님의 일을 덜어주는 것에서부터 집안의 제사까지 도맡아 모시며 결혼은 여러 일을 감내해야 했다. 직장에 다니며 경제활동을 하는 중에도 어머님과 같은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며느리 역할을 수행하느라 고된 시간들이었다.


   육십 대 중반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님은 아흔넷에 이르는 동안 병원 신세를 많이도 졌다. 그럴 때마다 넷째 아들인 남편은 어머님의 수족이 되어 살아야 했고 독박 효도로 점점 지쳐갔다. 해를 거듭할수록 힘들어지는 어머님 봉양으로 아내와 함께하려 했던 마음도 접게 되면서 남편은 다른 형제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희생하면서 어머님을 돌봤지만 다른 형제는 받은 혜택이 있으니 혼자 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발뺌을 하니 욱하는 감정을 삭이지 못한 넷째 아들과 형제간에는 의가 상하여 관계 회복이 멀어졌다. 희생이 원한이 되지 않도록 서로 분담하여 부모 봉양을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월의 신부가 될 딸의 결혼을 앞두고 생각이 많아진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라 30년 넘어 만난 부부가 잘 살기를 바란다면 결혼했으니 독립된 가정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부부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나의 편은 내 배우자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딸 같은 며느리, 아들 같은 사위라는 말 대신에 긍정의 태도로 이들을 응원하여야 한다. 부부가 살면서 어려움을 맞닥뜨리더라도 해결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이라 여기며 돌연한 일들을 지혜롭게 풀어나갔으면 한다. 가까이 살면서 잘 지내는 가족도 있지만, 자주 보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가족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가족 간에 적정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상담자는 한 존재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자신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부모가 아이들을 응원하는 친구 같은 상담자가 되어야 한다. 부모 교육도 없이 부모 역할을 수행한다고 아이들을 키우려는 마음이 앞섰지 친구 같은 수평적 관계에서 자식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았음을 뉘우친다.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하여 감정 조율을 잘하고 학습 능력도 좋아질 환경을 마련하였더라면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였을 듯하다. 나무만 보는 데서 벗어나 숲을 보려는 노력은 긍정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들을 평소에 많이 구사하며 가정의 행복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자극에 중독된 아이를 비난하며 질책하기보다는 아이 스스로 작은 성취로 중독을 벗어날 수 있도록 게임 시간을 두 시간이나 줄여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표현하는 부모로 자리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고 짜증이 나 죽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소통의 부재를 확인한다. 소통을 잘하는 가족은 상대의 말에 경청하며 열린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평가나 판단은 유보한 채, 상대의 말에 공감하고 질문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소통은 이워진다. 부부싸움을 하고 난 뒤 한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데서 벗어나 상대의 불만을 들어준 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으며 협력해야 할 사람임을 재확인하는 열린 질문으로 관계를 악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담자의 상담 사례를 들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장기간 실천해야 할 내용들을 짚으며 건강한 가족을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임을 알아차린다. 끊임없이 익히고 배워야 할 사랑의 기술을 담은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을 쓴 채프먼 박사는,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봉사, 선물, 스킨십을 들었다. 용기를 내 상대를 위해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 우리는 가족에게 학습한 사랑의 말을 용기 있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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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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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속으로 그리는 세상과 대비되는 현실을 보며 지금보다는 나은 삶이 이어지길 바라며 살고 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함께 사는 가족으로 묶인 인연의 사슬이 일상을 지배하고, 개인의 의사 결정권까지 앗아버리는 족쇄를 풀려 해도 속수무책이다. 집으로 오는 길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세상을 뜬 아버지는 사회주의적 유물론과 사회주의 혁명을 신봉하며 외길 인생을 살았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여 적색분자를 색출하여 새로운 꿈을 꾸며 살아갈 의욕조차 앗아간 이념의 굴레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함을 주기도 하였다.

 

   딸은 아버지의 느닷없는 사망 이후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 딸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되짚어 아버지를 회억한다. 통일과 혁명, 인류의 진보를 화두로 삼은 전직 빨치산인 아버지는 이십여 년의 수감 생활 후 고향에 터를 잡았다. 사회주의 사상으로 의식만 앞선 농부는 자연적 질서를 따르며 농사를 짓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일도 그다지 없었다. 백아산과 지리산을 무대로 빨치산 활동하다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부모는 귀한 딸을 얻어 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중시하며 살아온 아버지는 어려운 이웃을 향한 온정은 넘쳐흘러 채권자의 채무를 갚아주는 일도 자처하였다. 정작 자신을 위하여서는 만 원 정도의 돈을 지출하면서 타인의 빚을 갚아나갔다.

 

   아버지는 1945년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되었으나 국토가 분단되어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국토와 민족의 분열이 시작된 해방 전후의 한계와 맞서 싸웠다. 당하며 살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사회주의적 혁명을 신념처럼 따르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 패하고 말았다. 책을 좋아하고 공부를 잘한 사촌 오빠는 육사에 합격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 통보를 받아야 했다. 이후 연좌제가 풀리고 말단 공무원으로 생활하고는 있지만 빨갱이 조카가 견뎌야 했던 시간은 억울함으로 가득했을 듯하다.


  ‘사상이란 저렇듯 느닷없이 타인을 포용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일까?’

   가난한 빨갱이 딸이라는 수식어를 숙명처럼 달고 산 딸에게 아버지의 장례는 지금껏 알았던 아버지와는 다른 모습들을 그려보게 하였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상가를 찾은 이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떠올렸다. 조문을 온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베일에 가려진 아버지의 실상을 드러내며 애도하였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였지만 누군가의 덕으로 살기도 하였다. 빨치산으로 함께 활동했던 생존자들은 조국 재건을 위해 활동한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장례식장에 모여든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사연을 들으며 돌연한 죽음으로 낯선 공간을 찾아 가는 아버지의 여정이 외롭지 않아 보인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과정이 유한한 삶을 마무리하듯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딸은 아버지와의 좋았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추억한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것이라는 구절처럼 아버지의 죽음은 빨치산이 아닌 아버지, 빨갱이도 아닌 아버지로 가슴 한복판에 자리하게 되었다. 빨치산 형 때문에 자식의 앞길을 막혔다고 여긴 작은아버지가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 술을 따르고 잘 가라고 인사를 전하는 것처럼 죽음은 화해의 시간을 예비하기도 한다.

 

   이승에서의 신산했던 삶이 빚은 물리적 시간을 분쇄한 뼛가루를 구례 오거리에서부터 골목골목에 뿌리는 딸의 손길은 아버지의 신념이 이웃 사랑으로 피어나길 바라는 듯하다. 아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 순백의 가루가 사랑의 홀씨로 발아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소망하며 이상주의자 아버지를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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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2023-06-0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 임승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제가 쓴 인문에세이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출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썼지만 딱히 홍보할 방법이 없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저자가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책 여러 권을 가방에 넣고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 승객분들에게 직접 육성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요). 갑작스러운 댓글에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여러 일로 바쁘시겠지만 1분 정도만 시간을 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문득 제 신간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의 내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21세기 실사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오면서 생긴 독특한 인간관계와 에피소드가 있듯이, 두 딸의 아빠이자 반백살의 남성인 저도 30년째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런 삶을 견지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 때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 인생이라는 여행의 경로가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다 보니 갈림길에서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글치였던 공대생 출신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선거 날 투표할 때면 지지율이 1%도 안 되는 후보에게 거침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 뜬금없이 와인에 홀딱 빠져서는 대한민국 검사뿐만 아니라 노동 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와인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인생 경로는 명승지 투어 같이 잘 차려진 패키지 여행과는 결이 달라서, 오지 탐험에서나 맞닥뜨릴 돌발 장면들이 순간순간 펼쳐졌습니다.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는 제가 사회주의자라는 여행 경로를 선택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 경로를 선택했을 때만 접할 수 있는 풍경, 경험할 수 있는 사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이 여행이 제법 맘에 들어서 설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이야기에 공감하리라 기대한다면 과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오지 탐험 여행서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하리라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이 책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삶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밌게 읽으셨다면 제 책도 ‘실사판’으로서 무척 흥미롭게 읽으시리라 확신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권의 여행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아래에는 출판사의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서 옮깁니다. 귀중한 시간 할애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인터넷서점 링크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9181643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7534357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2430088

”우리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 스며들어있다. 일례로 전 세계가 주목한 코로나19 감염병 대처 방식도 지극히 사회주의식이었다. 국가가 앞장서서 공공 재원과 행정력을 동원해 감염병에 대처했으며 코로나 진단 검사와 치료를 누구나 무상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건 의료 정책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공단, 국공립학교, 국공립어린이집, 무상 급식, 공공 임대 주택, 부자 증세 등등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 및 재분배 정책은 모두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 복지를 확대하길 원하면서도 왜 사회주의에는 유독 반감을 가질까?

저자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본격적으로 해소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가 대세이면서 동시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30년 차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또한 자본주의의 은폐된 착취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를 해설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태생과 최후를 통찰한다.

사회주의로의 강요는 없다. 다만 질문이 시작될 뿐이다. 최악의 빈부 격차, 극심한 이윤 지상주의, 유례없는 환경 파괴,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켜나갈 것인지. 증오와 배척, 불평등와 불공정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삶의 지표에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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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나긴 여정이라 불리는 인생길에 우연한 만남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아버릴 때가 있다. 그 때 그 사람을 집안에 들이지만 않았어도 별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모든 사람 가슴에는 원청이 있다.’

    는 문장에는 어떤 대상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고, 어떤 공간에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미답의 공간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원청은 찾을 수 없다고 하여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거나 포기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지금의 삶을 견디게 하는 원천으로 자리하는 희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소 무모해 보이더라도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힘을 싣고 길 위에 서는 이가 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린샹푸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지만 400무의 전답, 여섯 칸의 방이 있는 대저택, 100여 권의 책을 상속받은 부자인데다 아버지로부터 뛰어난 목공 솜씨를 물려받았다. 린샹푸의 어머니가 사별한 지 오년을 지내는 동안 말수가 급격히 준 그에게 매파는 혼담을 전하지만 쉽사리 성사되지 않았다. 어느 날 기력을 잃고 며칠 신세를 졌으면 하는 바람을 비치는 오누이-아창과 샤오메이-를 집안에 들임으로써 린샹푸의 삶은 변곡점을 맞는다. 아창이 여동생 샤오메이가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그의 집에 기거할 수 있기를 청하여 그는 홀로 지내는 시간이 길었던 데다 그녀의 청초함과 부드러운 언행에 끌려 함께 지내게 되었다. 거처가 정해지면 동생을 찾으러 오겠다던 아창은 함흥차사처럼 연락이 끊겼고, 린샹푸는 함께 지내던 샤오메이와 결혼하고 한 공간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린샹푸와 샤오메이와의 단란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그녀는 조상 대대로 모아 온 금괴의 절반을 들고 집을 나가버렸다. 가산을 탕진하고 오열하던 린샹푸는 천만금의 재산보다도 도둑맞지 않을 기술을 겸비하는 것이 낫다는 어머니의 말을 새기며 경목 장인으로 오래된 물건을 고치며 그녀를 찾아 나섰다. 딸 린자바이를 안고 젖동냥으로 딸의 주린 배를 채우며 원청을 찾아 나섰다. 풍랑으로 거룻배는 난파되었고 가슴팍에 있어야 할 딸이 없어져 통탄의 눈물을 흘리던 와중에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뒤 잃어버린 딸을 찾아 기쁨의 무늬를 새기며 샤오메이가 나타날 때까지 시진에서 그녀를 기다리겠다고 다짐한다.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잃어버린 원청이 시진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시진에 머무르고자 한 것이다.


 백 여 집에서 젖을 얻어먹고 자랐다는 의미로 붙인 딸-린바이자-과 함께 딸의 어머니인 샤오메이를 기다렸다. 시진에서 목공 린샹푸는 톱질 장이 천융량과 함께 자연 재해로 인한 민가의 피해를 복구하며 돈을 벌어들이며 훗날을 대비하여 완무당의 땅을 사들였다. 그는 샤오메이와 아청을 찾지는 못하였지만 시진에서 또 다른 인연들을 만들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는 외지에서 들어온 천융량과 리메이롄 가족을 만나 부부의 두 아들과 자신의 딸과 한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시진에서 목공소를 열어 자산을 쌓기 시작한 린샹푸는 이곳의 높은 인물인 구이민과 소통하며 아이들의 혼사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시절이 하수상하여 국민혁명군과 북양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은 토비가 되었다.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극심한 혼란기에 토비들은 마을의 일반 백성들의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하거나 사람들을 납치하여 몸값을 갈취하는 사건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 토비에게 납치된 이의 잘린 귀가 하나씩 들어있는 봉투가 도작할 때마다 양민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딸 가진 부모는 서둘러 혼인을 시키거나 유학을 보내어 화를 면하려 하였다. 토비를 막기 위해 조직한 시진 민병단은 토비들이 공격하는 총기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진의 지도자로 마을의 중심인물인 구이민을 찾기 위해 토비들과의 거래에 응한 린샹푸는 시진 대표 구출 거래에 나섰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정혼한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딸 린바이자와 천융량의 아들 천야오우는 연애 감정을 느끼고 서로를 갈애하였다. 딸의 마음을 알아차린 린샹푸는 딸을 상하이 기숙학원으로 유학을 보냈고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이라도 한 듯 딸에게 전할 메시지를 적어 지인에게 맡겼다. 린샹푸는 구이민을 구출하기는커녕 토비의 계략에 빠진 것을 알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는 세상에 남겨진 린바이자를 가슴에 품은 채, 외로움에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다정한 빛으로 다가온 샤오메이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로 하늘의 별이 되어 원청을 찾아 헤매고 있을 듯하다.

 

   린샹푸 집으로 찾아든 샤오메이와 아청이 남매지간이 아닐 것이라 의심했던 일이 소설후반부에서 드러난다. 옷 수선으로 재물을 쌓은 집안의 민며느리로 들어간 샤오메이는 세월이 흘러 아청과 혼례를 치르고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시가의 재물을 훔쳐 친정 식구를 도왔다는 이유로 마음 붙이고 살던 동네를 떠나야 했다. 샤오메이를 떠난 보내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내던 아청은 부모 곁을 떠나 부부가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을 찾아 유랑 길에 올랐다. 그는 샤오메이의 고향 완무당에서 선뎬으로 다시 상하이로 넘어갔지만 무계획적으로 노잣돈을 탕진하고 막연한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경성으로 향하였다. 아청은 어머니에게 말로만 들었던 경성에 있는 이모부에게 의탁해 보자고 하지만 이마저도 공수표에 지나지 않았다. 부부는 사실적 근거도 없이 소리를 듣고 걸음을 떼며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는 경성이 아닌 곳으로 발길을 돌려 린샹푸 집에 이르렀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 후 외로움과 헛헛함으로 별반 다를 게 없는 나날을 보낸 지 다섯 해가 지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를 만나 잠깐의 결혼 생활 후 엮이지 않아도 될 일에 저당 잡힌 채 기존의 삶과는 다른 생을 살아야 했다. 아청을 찾아 떠난 샤오메이는 남하하던 중에 임신 징후를 느끼고 다시 린샹푸를 찾아 딸아이를 출산한 후 어느 정도의 시일이 지나자 다시 아청에게 돌아갔다. 린샹푸는 인생의 마감 날을 예비하여 딸에게 엄마를 찾아주려는 인생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샤오메이의 궤적을 찾아 낯선 길 위에 섰다. 원청이라는 곳이 무형의 공간임을 알았지만 샤오메이를 찾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었다. 그에게 남겨진 사랑은 생의 마지막까지 찾고 싶은 샤오메이의 흔적에라도 닿고 싶은 정표였다. 샤오메이와 린샹푸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 멀리 달아난 것처럼 원청은 닿을 수 없는 고도와도 같은 존재인 듯하다. 굳게 잠긴 문의 자물통을 열어줄 숙명적 열쇠를 찾아 떠난 린샹푸의 유랑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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