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길에 오른 죄수들은 교도소에서 기차역까지 7월의 바람 한 점 없는 뙤약볕 속을 걸어간다. 그들 중에는 임산부도 있다. 결국 죄수 다섯 명이 일사병으로 쓰려져 죽었고, 그들의 죽음이 지켜보는 이들에게 불러일으킨 감정은 부패할 우려가 있는 시체의 처리와 법적 절차에 대한 성가신 고민이었다. 급기야 임산부가 호송 열차에서 해산할 상황에 놓였지만 장교는 개의치 않는다.  
 
 
네흘류도프는 도보 이송 도중 일사병으로 사망한 죄수들을 살해당했다고 여긴다. 무더위에 기차역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일상적인 명령서에 서명한 소장, 죄수들의 몸상태를 검진한 교도소 의사,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명령을 이행한 호송 장교. 아무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들이 모두 죽은 죄수들을 살해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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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연민이 사라진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늘 우선 순위를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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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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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처음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절로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난다. 앙상한 아이를 뼈가 드러날 만큼 마르고 거친 손과 다리로 감싸 꽉 끌어안고 아이의 몸에 얼굴을 반쯤 묻은 어미의 모습은 많이 슬펐다. 죽은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그저 새끼 잃은 짐승일 뿐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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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만으로도 케테 콜비츠가 시대의 아픔과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강력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라는 저자의 설명을 납득한다. 케테 콜비츠의 삶과 작품은 공감, 연민에 기반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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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이고 사회참여적인 가족 분위기, 이상주의적 휴머니스트인 남편을 비롯한 가족의 지지를 안고 예술가가 된 케테 콜비츠의 정서가 공감과 연민인 점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를 일이다. 열여덟 살 둘째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그녀. 현재까지도 어른들의 잘못으로 죽은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 사회는 올바르게 흘러간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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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죽은지 8년이 지나서야 몸을 추스린 그녀가 발표한 작품은 '전쟁' 연작이다. 케테 콜비츠는 여성적인 평화 연대를 제안한다. 작품 <엄마들>에서는 엄마들이 자식을 위해 연대한다. 더이상 세계의 권력 싸움에 아이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그러나 세상의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흘러간다. 책에 실린 콜비츠의 자화상도 무척 인상적이다. 동시에 김향안 님이 쓴 문구도 무척 가슴에 와 닿는다. 
 
 

"사람의 70대는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는 시간이다. 여기에는 남녀도 빈부도 없다. 하나의 인간이 존재하다 소멸되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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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슬로바의 상소가 기각되고 슬픈 마음을 안고 슈스또바의 집을 방문한 네흘류도프는 정치범으로 몰려 투옥되는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마지막으로 어느 종교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담당자 또뽀로프를 찾아가는데,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그 이유는 오직 네흘류도프가 뻬쩨르부르그에 연줄이 있는 영향력 있는 귀족이라는 것이었다. 탄원서 한 장만 내밀었을 뿐이데, 그 자리에서 유배가 취소되다니. 네흘류도프 자신도 어떨떨할 지경이다. 
 
 
네흘류도프는 또뽀로프의 집을 나오면서 며칠동안 그가 만났던 민중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투옥되고 추방되는 이유가 정의를 파괴하거나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재산을 갈취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러시아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비리와 부패, 무능과 부당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마리에트의 초대로 극장을 찾은 네흘류도프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희생을 바탕으로 출세하고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허위와 위선에 역겨움을 느낀다.  
 

그런데 나는 슬슬 네흘류도프에게 빈정이 상하기 시작했다. 
 
 
458.
정의나 선이나 법률이나 신앙이나 종교 같은 말들은 단지 구호에 지나지 않으며, 그 속에 가장 야비한 탐욕과 잔학성이 숨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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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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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각국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전쟁에 동원되었다. 예술가 중 일부는 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조하기도 했으나 다수의 예술가들은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성 상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군인으로서의 자화상>이다. 그림 속 군인은 상처입은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뒤에 누드 여성은 온전한 몸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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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집권한 히틀러는 모더니즘 예술작품을 조롱하기 위해 퇴폐미술전을 개최했다. 같은 시기에 나치는 '위대한 독일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나치가 추구하는 온전함이란 가부장적인 남성과 남성이 주도하는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는 여성의 이미지를 실현해 그 이미지는 고통받는 사람이 없음을 이야기하며 게르만족이 유일하게 위대한 민족이라는 차별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현실과 인간성을 왜곡한다. 퇴폐미술전에서 모욕을 당한 키르히너는 1938년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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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표현주의 계보를 이어간 것은 신즉물주의 예술가들이었는데, 이들은 아무런 환상 없이 현실을 그려내려고 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솜전투에 참전한 화가 오토 딕스는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을 묘사했다. 그의 작품 <전쟁 환생자>는, 전쟁에는 위대한 영웅 따위는 없고 희생당한 나약하고 가련한 인간만 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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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남성을 약하게, 여성을 강하게 만들었다. 전쟁으로 남자가 부재한 세상에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육체적. 정신적 노동 현장에 여성이 투입됐다. 그러나 자기주도적인 여성은 갖은 험담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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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혹함은 예술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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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미래주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미래주의가 지향하는 산업화와 그에 따른 속도를 사랑했다. 예를들면 피사체보다 피사체가 내는 유무형의 속도를 담아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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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발라는 두 딸의 이름을 '프로펠라'와 '라이트'라고 지을만큼 속도와 현대문명에 환장했고, 발라의 제자 보초니는 움직임과 속도를 조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알렉산터 콜더는 키네틱 아트를 통해 속도를 보여줬다. 그런데 그들이 찬양한 현대문명과 속도는 전쟁으로 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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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자코모 발라의 <목줄을 한 개의 역동성>은 요즘으로 치자면 만화의 한 장면 같고 <속도를 내는 자동차>는 자동차를 알아 볼 수 없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인류에게 경종을 울렸지만, 현대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은 나라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때 광고에서 나왔던 '빠름 빠름 빠름'이 유행어처럼 사용되었고, 지금까지도 현대사회는 속도전이다. 내일이 어떠할지 꿈꾸는 공간이 오늘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꿈을 만들어가는 이는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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