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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서장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어했던 이유도 서장의 제목과 같다. 김정희에 대해서는 추사체로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가 명문가의 귀하게 자라고 영특한 신동이였다는 것, 유배을 갔다는 것,
세한도를 그렸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추사체에 대해서도 추사체가 어떤 형태의
글씨체인지, 추사체가 왜 그토록 유명한지도 잘 모르는 바 나의 무지함을 깨닫고 이제사
김정희에 대해서 읽는다.
p13
추사는 본디 시와 문장의 대가였으나 글씨를 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됨으로써 그것이 가려지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는 서체는 말할 것 없이 회화, 종교, 답사, 학문에까지 아우르는 천재적 학자였다.
<제1장 월성위 집안의 봉사손 : 출생~24세>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10)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예사롭지 않은 출생의 설화를 시작으로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조부, 양부, 양모, 친모,
어머니를 잃고 생부와 다시 함께 살게 된다, 북학의로 유명한 박제가를 스승으로 두면서 그는
북학에 눈을 뜬다. 생원시에 합격하면서 그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게 된다.
추사의 어린시절은 엘리트로서 명문가 교육을 받고 성장하지만, 가까운 가족을 이른 나이에
잃음으로써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2장 감격의 연경 60일>
북학파 학자들의 학문 개척기를 들여다 보자.
한중 문화 교류의 시작은 홍대용에서부터 시작한다. 1765년 첫 연행을 떠난 담헌 홍대용.
그곳에서 그는 음악, 천문 등에 대해서 지식을 얻고 엄성, 반정균, 억비 등을 만나 학문을 나눈다.
'천애지기'를 나눈 엄성의 죽음에 홍대용이 추도사를 보내면서 한중 교류의 결정적 계기가 마련된다. 홍대용의 연행 이후 13년이 지나 박제가와 이덕무가, 2년 뒤에 박지원이, 그로부터 10년
뒤에 유득공과 박제가가 연행길에 올랐다. 이때 박제가는 연경에서 자신의 제자인 김정희에
대해서 자랑 했다고 한다. 네 번이나 연경에 다녀온 스승 박제가의 영향을 받은 김정희는 24세에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게 된다. 연경에서 조강, 완원, 옹방강 등과 교류하며 견문과 학식을
넓혔고, 주학년처럼 빼어난 예인들과도 사귀었다. 청조 학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후지쓰카는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라고 단언했다.
<제 3장 학예의 연찬 : 25~34세>
추사의 학예 연찬은 옹방강과의 깊은 사우 관계로 이어진다,
옹방강은 추사를 지극히 사랑했으며 그의 아들 완상생 역시 추사와 교류를 이어갔다. 또한
추사는 금석학의 제일인자로 손꼽히는 섭지선과도 교유도 긴밀했다.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유는
추사 뿐만 아니라 추사 주위의 문인들 사이에도 펴져나갔다. 그로인해 무수한 책과 서화 작품,
금석 탁본등이 두 나라를 오갔다.
내가 이 장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추사가 답사와 여행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추사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새로이 발견한 장본인이고, 무장사비, 진흥왕릉 고증까지
고고학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단양과 금강산 유람도 다녀왔다.
P101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김경인이 오다.
정축년 6월8일 김정희.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 있는 글자 68개를 면밀히 살펴 보았다.
추사는 불과 서른의 나이에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얻었다.
31세 때 남한산성의 '이위정기', 32세에 '송석원' 암각 글씨. 33세에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사의 글씨를 얻기를 원했다. 추사의 장년의 글씨는 매우 매끄럽고
윤기나는 글씨라고 한다. 훗날 추사체는 방정한 방피을 기본으로 금석기를 보이며 획의 굵기에
변화가 많지만, 장년의 글씨들은 오히려 유려한 원필이 많고 리듬이 다채롭단다. 본격적인
추사의 장년 서예 작품으로는 옹방강의 석묵서루에서 본 것을 본받아 썼다는 '상견엄연
(想見儼然)'이다.
<제 4장 출세와 가화 : 34~45세>
추사가 41세 되던 1826년 즈음이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권세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고 한다.
추사는 다산 정약용에게 꾸준히 배움을 구했으며 평양의 조광진, 한양의 조성기, 홍현주 등
지식과 글을 교유하며 지냈다. 평양에서는 묘향산에 들러 용연폭포 위쪽에 위치한 상원암에
들러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이 현판은 현재도 상원암에 걸려있다. 홍현주의 '운외몽중첩'
앞장에 쓰인 표제글씨는, 구성은 예서체를 따랐지만 필획의 운용에는 해서법이 들어 있어
정중한 가운데 멋스러움이 있다. 저자의 말마따나 멋스러우면서도 단정함이 깃들어 있어서
개인적으로 나의 마음에도 쏙 들어온 글씨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현대에 추사체라고 일컫는
글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1830년 김우명의 상소로 시작된 모함은 결국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유배된다. 차후 추사는
억울함을 토로하며 두 번 상소를 올렸지만 소용 없었다. 김노경 65세, 추사 45세였다.
<제 5장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 45~55세>
추사는 가문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연경 학계와 계속 교류했다. 추사는 50대에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대가의 위치에 있었다. 1833년에 아버지 김노경이 해배 됐지만 1년 후에 다산 정약용이,
그로부터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 김노경이 서거했다. 그로인해 추사는 가정에서나 사회
에서나 어른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추사의 중년 글씨에는 동시대 청나라 서예 사조가 그대로 나타난다. 이는 스승인 옹방강아 완원,
등석여, 이병수, 건륭 4대가인 옹.유.양.왕의 글씨를 열심히 본받아 썼기 때문이다. 추사가 54세
때 쓴 <옥산서원> 현판 글씨에는 그의 글씨가 무르익어감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서예가의 글씨가
변해가는 과정은 무엇보다 편지 글씨와 해서 작품에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하는데, 추사의 50대
글씨에 이르면 우리가 추사체의 멋이라고 생각하는 획의 굳셈과 부드러움의 조화가 능숙하게
구사됨을 알 수 있단다. 책에 실린 자료들을 열심히들여다 본 노력으로 글씨체의 변화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또한 추사는 난초 그림에 애착을 보였는데, 명작으로 손꼽힌다는 <산심일장란>은
아는 게 많지 않은 내가 봐도 글씨와 그림의 멋스러움을 느끼겠다.
1840년 천적과 다름 없는 김우명이 대사간이 되면서 김정희는 10년 전 사건으로 다시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벗,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만은 피하고 제주도로 유배된다.
p216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때에 맞는 것이요, 웃어야 할 떄 웃는 것은 중용에 가까운 것이다.
(...) 인정에 어긋나지 않나니 묵소(默笑)의 뜻이 크도다. 말하지 않고 깨우쳐줄 수 있다면 침묵에
무슨 손상이 있겠으며 중용을 얻어 말한다면 웃는다 하여 무엇이 걱정일까. 그것에 힘쓸지어다.
/ 묵소거사 자찬
<제 6장 세한도를 그리며 : 55~59세>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 된 추사. 그가 인덕이 남달랐다는 생각이 드는 건 바로 이 제주 유배
이후부터이다. 물론 연경까지 두루 뻗친 그의 인맥은 감탄스럽지만, 사람이란 고난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맥락에서 추사는 학문과 예술에서만
경지를 이룬 것이 아니라 제자를 아낀 것에서부터 그간 주변 사람들을 살뜰하게 보살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잘 나가던 명문가에 태어나 귀한 공자로 키워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
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식과 환경에 적응하는데 꽤 고생했던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지인들이 돌아
가면 찾아와 머물고 서신으로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추사는 외롭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배 기간이 길었던 만큼 양아들 입양, 아내의 죽음 등 집안의 경조도 많았건만 그것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음을 많이 애석하고 서글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그는 유배기간 동안
독서,그림, 글씨 등 다방면에서 원숙함과 완성도를 쌓아나갔다고 한다. 그 유명한 세한도 역시
유배지 제주에서.
<제 7장 수선화를 노래하다 : 59~64세>
이 장에서는 추사가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만나왔던 사람들과 글씨(현판), 답사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한라산 답사, 추운백수도, 낙선재 현판 등 꾸준하게 쓰고, 그리고, 읽는데 게으름이
없었고, 사람을 사귀어 제자를 삼음에 신분을 크게 따지건 같지는 않다. 스님 초의를 비롯해
필장(붓 만드는 사람( 박혜백), 전각가 오규일이 그들이다. 무엇보다 추사 글씨의 변화에서
대해서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동주 이용희 선생이 하신 말씀이 가장 와 닿는다.
P349
많이 썼을 거예요. 아마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
(...) 그 실력과 그 학식에 그렇게 써댔으니 일가를 이루지 않고 어떻게 되겠어요. (...)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계기가 추사체의 비밀이겠죠, (...) 즉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특이하고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제 8장 강상의 칠십이구처당에서 : 64~66세>
여기서 부터는 추사의 만년기다. 제주 귀양에서 돌아온 추사는 '강상'이라는 곳에서 잡리를
잡았다.
P364
추사체가 제주도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정작 추사체다운 본격적인 작품이 구사
되는 것은 해배 이후 '강상시절'부터라고 해야 더 정확할 정도이다. 추사 글씨 중 최고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잔서와석루>, 거의 신의 경지로 평가받는 <불이선란>, 제자들이 벌인 서화 경진
대회의 출품작 비평서인 <예림갑을록>등이 모두 이 시절 소산이다, 사실상 이 시절에 추사의
예술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청년기를 보냈던 추사는 강상에서 무척 곤궁했다. 그러나 추사에게는
벗이 있고, 시와 그림, 글씨가 있어 마음이 궁핍하지는 않았다. 추사는 지인들과 쉼없이 서신을
주고 받고, 글을 나누어 주며, 현판을 쓰면서 추사체를 완성시켰다.
P412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꺠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 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
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를 따져본다는게 불가하다. (유최진)
서법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그것이 추사체이다. (...) 추사체의 본직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과 글씨
구성의 힘에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후에 흥선대원군이 된 석파 이하응과 추사의 관계. 이하응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신을 바닥까지 낮추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추사에게 난화를 배우고
논했다는 사실, 단순히 알고 지낸 사이일 만 아니라 이하응과 신뢰를 주고 받았다는 것은 뜻밖이
었다. 이것도 잠시, 추사는 다시 북청으로 유배된다.
이번에는 그 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나중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지기인 권돈인까지.
<제 9장 북청의 찬 하늘 아래 : 66~67세>
따뜻한 제주와는 달리 추운 북청. 이곳에서도 추사는 벗을 사귀며 제자를 찾아 가르쳤다.
(제주에서는 소치요, 북청에서는 요선이다.)
변함없이 시를 쓰고, 답사를 하고, 책을 읽고, 서신을 주고 받았다. 이쯤되면 공부의 달인이다.
그는 제주에서나 북청에서나 마음만은 외롭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거듭든다.
<제 10장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 67~71세>
북청에서 해배 된 추사가 집으로 삼은 것은 과천의 과지초당이다. 현재 과천 경마장 뒤쪽이란다.
P484. 485
추사는 장기. 바둑. 술 같은 취미나 잡기의 맛은 알았지만 거기에 빠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추사에게 진짜 취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독서와 글씨 쓰기였던 것이다.
칠십이구초당 시절 쓴 글씨 중에 '일독 이호색 삼음주 (一讀二好色三飮酒)'라는 재미있는 현판이
있다.
첫째는 독서(공부), 둘째는 여자, 셋째는 술이라는 뜻이다. (...)
추사의 만년을 지켜준 것은 공부하는 행복, 제자를 가르치는 즐거움, 예술에 전념하는 열정이
었다, 그중 공부하는 행복이 제일 컸다고 한다.
눈을 감기 3일 전, 병든 누구의 몸을 세워 썼다는 봉은사 현판, [판전 板殿]
저자는 추사가 생의 마지막 힘을 이 두 자를 쓰는데 바쳤다고 말한다. 그 말이 나에게는 무척
감동으로 들어왔다.
추사가 71세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제자들과 지인들의 영전 앞에서 통곡
했고, 애도의 제문들이 답지했다고 한다. 얼마나 애석했을까...
진실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예술과 학문은 높고 깊기만 하다. (p571)
산숭해심(山嵩海深)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내 머릿속에서의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가 아니라 '세한도'였다. 우연찮게 세한도 모사품을
보고 그림이 이렇게 외로워 보일 수도 있을까라는 생각에 학교에서 배웠던 '추사체'라는 단어
대신에 '세한도'가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 문인이라는 것과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던 김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평전이 이렇게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는 것만으로도
궁금했다. 물론 나의 궁금증의 그의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였지만.
추사의 연경 탐방기, 청의 문인들과 끊임없는 교류, 당대 최고의 명문 사대부 집안의 아들임에도
사귐과 제자를 삼음에 허물이 없었던 열린 정신. 다른 책을 들고 있는 줄 알았다. 이거 연암
박지원 평전이야? 하면서....
또한 다산 정약용과 석파 이하응과의 교류, 당시에는 천인 신분이었던 스님들과의 대화와 서신, 남다른 제자 사랑까지 그의 인적 네트워크는 어디까지인건지... 읽으면서 추사 김정희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또한가지 더 입을 벌렸던 것은 역사 답사. 지금도 역사(문화) 답사는 쉽지
않다. 그나마 평지에 있는 절터나 유적지들은 다닐만 하지만 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답사는 극기
훈련인데, 조선 후기에 답사라니... 그의 문화에 대한 열정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관심있게
보았던 그림 부분. 세한도의 외로움에 이끌렸었더랬는데, 지금봐도 다르지 않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추사는 그렇게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나의 감정과잉이였나싶은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머나먼 외지 섬에서 무거운 고립감이 없지 않을 수 있었겠나하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석파 이하응이 추사에게 배움을 청할 정도로 능했던 난화.
그중 <향조암란>은 난화에 대해서 아는게 없는 내가 봐도 공간의 멋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리고 작정하고 그릴 수 없는 작품이라는 <불이선란>은 <향조암란>보다는 진중한 맛이 크다.
예서체, 해서체 등 말로만 들었던 글씨체들을 자료를 통해 보고 구분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었다. 독서와 예술, 예인과 장인 그리고 제자를 사랑했던 추사 김정희.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한 천재였다.
* 추사는 청나라 완원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세워 자신의 아호를 완당이라 했고, 연행 후
중년으로 들어서면서 추사보다는 완당이라는 호를 더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좀더
널리 알려진 대로 계속 추사라고 칭하겠다고 언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