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는 모든 것이 독이다.
아름다움, 글, 술, 성, 눈물, 욕망, 이기심, 증오심, 분노, 공포, 탐욕, 교만, 호색, 나태, 시기, 거짓된 신념, 진부하고 편협한 사상, 심지어 사랑조차도.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독을 품고 살았던 조몽구의 이야기.
냉장고에 보관해 놓았던 부패한 음식을 먹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 '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혼몽한 시간을 보낸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가 쪽에 누워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낮은 소리로 읊조리 듯 기괴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그 남자는 자신, 조몽구의 삶을 들려준다.
독과 친화력이 있는 아버지와 독에 취약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정체모를 이마의 두통은 어린시절부터 그에게 낙인처럼 박혀 평생을 괴롭힌다. 초등학생 시절 만난 윤자경. 몽구의 두통이 어머니의 옻 알레르기와 임신 중 정서적 고통에서 기인했다면, 소녀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산소 농도가 짙어 병에 걸렸다. 사람은 산소 없이 살 수 없지만, 산소도 과잉이면 독이 된다는 사실.
99.
독을 뿜어 타인을 죽일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타인의 독을 흡수해서 살릴 수 있는 여자도 있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독이 없는 청정한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여 몸속에 독성이 전혀 없는 여자, 다른 사람의 독을 제 몸으로 흡수하여 살리는 단 한 번의 용도로 길러진 여자, 타인의 독을 흡수한 뒤 그 여자는 어떻게 될까. 자경은 그 여자에 가깝지 않을까.
자신을 독이라 여기는 수호. 한때는 직장인으로, 사회운동가로, 예술가로 살았지만 결국 자신은 독으로 인해 보통의 삶이 가능하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수호의 몸은 점점 독에게 잠식되어 갔고, 독과 하나다. 그의 마지막 사명은 사랑했던 연인 소화를 되찾고, 조카인 몽구를 정화시키는 것.
467.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자기 스타일을 갖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제 스타일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그리고 스타일이라는 게 네가 선택하거나 바깥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야. 네 태어난 모습 그 자체가 취향이고 스타일이지. 벌독에 특별한 항체가 있어서 아나팔락시스 따위를 엿 먹이는 게 네 스타일이야."
강력한 힘을 갖고 싶었던 광수. 군 시절, 몽구로 인해 동료들이 광기로 날뛰던 그 밤. 광수는 몽구가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힘에 매료되었다. 아니 압도되었다. 그래서 독을 욕망했고, 수호를 찾아갔다. 독 때문에, 수호 때문에 인생을 잃게 될 거라는 몽구의 조언은 부질없기만 하다.
510.
"(...)독이 약을 사랑하고, 약이 독을 사랑한 거야. 그래, 그렇지, 독과 약 사이에 사랑이 있는 거지. 그걸 이제야 알게 된거야."
늘 평범함이 싫었고 존재의 증명을 하고 싶었지만 충분한 역량이 없어 주위의 것을 무엇이든 이용했던 영로. 그것이 그에게는 독이였고, 그 독을 정화시켜 주었던, 사랑하고 신뢰했던 아내의 죽음으로 스스로를 버린다. 수호는 몽구를 정화시켰고, 자신이 사랑했던 소화 곁에 눕는다. 몽구 또한 정화된 자신의 몸을 자경을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독을 빨아들이며 기꺼이 내놓는다. 그것이 비록 죽음에 이르는 길일지라도.
작가가 몽구를 빌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결국 독에 대한, 삶에 대한 질문과 답을 각자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56.
마치 내 이마에 낙인이 찍힌 것 같았어. 그리고 낙인이 찍히는 그 순간 정체 모를 독이 몸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괴롭혔어. 그 때문에 두통이 생기고 그 두통을 누르기 위해 끊임없이 이마를 만져야 했는데, 손이 늘 청결한 상태가 아니어서, 나의 손독이, 그리고 내가 만진 모든 것이 독이 되어 이마를 통해 내 속으로 스며들었어. 나는 손과 이마로 온갖 독성을 흡수하고 있었어. 그건 그야말로 독이 독을 부르는 돌이킬 수 없는 악순환이었어. 그런데 낙인은 대체 누가 찍은 것일까. 나 자신이 찍은 건 결코 아니니, 그렇다면 세상이, 어쩌면 우주가 그 낙인을 찍은 것일지도 몰랐어.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낙인을 찍는다는 건 뭔가를 끊임없이 상기 시키기 위해서잖아.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상기시키려 하는 거지? 상기시켜서 뭘 어쩌려는 거지. 어쩌면 나로 하여금 싸우라고 하는게 아닐까. 버티고 저항해서 마침내 이겨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닐까. 그런데 무엇을 이겨내야 한다는 말일까. 나 자신에 대해서? 아니면, 세상의 독에 대해서? 그렇게 내 생각은 내내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맴돌고 있었어.
355-356.
그러던 어느 날 비로소 깨달았지. 그동안 나는 독에 취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그들에게 내 속의 독을 뿜어내는데 급급했고, 그러면서 그 모든 게 두통 때문이라고 정당화했던 거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내 한 몸 건사하면 살아간다면, 나는그저 한 마리의 독충에 불과한 것이었어. 이제라도 나 자신을 찢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어. 그 순간 에나폰정이 든 약통을 휴지통으로 던져버렸어.
에필로그에서 '나'는 괴물에게 말한다.
"삶이라는 책 한 장 한 장에는 독이 묻어 있어. 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러나 너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나'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고 말하지만 곧 자신은 치유될 것이라고 한다.
"삶의 의미는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에 있어. 기쁨은 두려움에 대면할 수 있도록 삶이 제공하는 몇 움큼의 에너지일 뿐이지."
하지만 우리는 슬픔과 두려움이 만연한 인생일지라도 몇 움큼의 기쁨이 삶의 가치와 즐거움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고통이 일상이 되어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슬퍼할 줄 모르는 것이 더 두려운 일 아닐까. 수호와 몽구, 수호와 소화, 그리고 몽구와 자경. 인생은 고통스럽고 외롭다. 하지만 타인과 고통을 교감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독, 견뎌볼 만 하지 않나!
소설을 읽다보면 몇몇의 문학 작품들이 생각난다. 내용은 다르지만 독이 의미하는 바는 대체로 상통한다. 욕망의 근간이 무엇이든 그 욕망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의 잠재된 힘이 바로 약(해독)이 아닐까?
사족.
읽던 중에 기록해 놓았던 미겔 데 우나무노의 <안개>의 글이 떠올랐다.
'인간은 병에 걸린 동물이다. 항상 병들어 있다. 단지 잠잘 때만 건강을 누리는 것 같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잠을 자면서까지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용과 매락은 차이가 있지만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안개>의 주인공과 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호가 함께 떠올랐다.
[소설 속 문장]
44.
"어머니에게 독은 악이었고, 어둠이었고, 병이었어. 그런데 독을 이기려면 그 독을 중화시킬 수 있는 독이 필요했어."
78.
"(...)비로소 나는 내가 독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다른 존재에게 독이라는 것도 알았어. 하지만 또한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나의 삶과 세상의 독이 서로 침투하는 음침한 세계를 보았던 거지. 그 두려운 세계에서 내내 살아가야 하는 운명,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서 격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어."
97.
"독은 위험하지만 무척 흥미롭거든. 사람들이 독을 가지고 온갖 일을 벌이는 것도 그래서지. 독에는 운명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말이야."
185.
우리가 독을 가지고 노는 동안, 독도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었어. 우리야말로 어떤 아이들보다 더 심하게 중독되어 있었어.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나 자신이 더 두려워지기 시작한 거야.
196-197.
모든 생명체는 살아 있기 위해 매 순간 자기 내부의 독성으로 외부의 독성과 싸우고 있어. 그러나 대부분 자기 내부의 독성을 의식하지 못하지. 의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말 그대로 깨어 있으라는 게 아닐까. 일상의 마비에서 벗어나 있으라는 게 아닐까. 고대 인도의 한 철학자가 말했지. 우리가 진실로 깨어있는 때는 꿈꿀 때의 그 짧은 순간 뿐이라고. 우리가 깨어 있다고 믿는 시간은 단지 마야, 곧 미망과 환영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무엇이 미망이고 무엇이 실제인가. 독도 따지고 보면 미망이고 환영이 아닐까.
199.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329.
우리는 둘 다 저능아고 백치였던 거야. 우리는 서로에게서 자기 모습을 보았던 거야.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지 모르지. (조영로)
348-349.
"그 사람은 가장 먼저 네 잠을 빼앗을 거야. 그러고 나서 네 웃음을, 네 자존심을, 네 친구들을 빼앗아 갈 거야. 아무도 너를 존중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하게 할 거야. 네가 실망과 외로움 속에서 시들고 색이 바래다가 결국 너 자신을 죽이게 할 거야." (몽구)
"나는 네게 실망했어. 너는 너무 평범해져 버렸어. 아니, 나약해져 버렸어." (광수)
467.
대체 독이 뭐야? 그 물질이 무엇이든 간에, 몸 안에 들어와 생체의 리듬과 균형을 무너뜨리면 그게 독이야. (수호)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0612/pimg_7831441762216971.jpg)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0612/pimg_7831441762216972.jpg)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0612/pimg_783144176221697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