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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스티브 잡스가 반한 피카소
이현민 지음 / 새빛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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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 Why not?

영화와 미술의 만남.

영화에 등장한 혹은 관련이 있는 미술 작품을 영화와 함께 읽어주는 책이다.

실린 영화 중에서 두 편-누드모델, 아르테미시아-을 제외하면 모두 관람했고, 미술 작품 또한 간적적으로나마 한번 쯤은 접해봤기에 한편으로는 익숙하게, 한편으로는 새롭게 접했다.

 

저자는 작가와 작품을 단편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당시 시대적 배경 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흐름과 변화가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짚어가며 논리적으로 서술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와 아르테미시아, 바스키아.

(아르테미시아는 다른 책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좋아했는데, 영화가 있는 줄은 몰랐다. 조만간 찾아서 보기로).

렘브란트를 좋아하는 지인들이 다수 있는데, 나는 그의 그림은 너무 어두워서 보고 있으면 나까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어두운 듯 하면서도 은은한 밝음이 있고, 집중하는 여성들의 모습도 좋다. 아르테미시아 그림의 확 와닿는 현실적 표현과 (나에게 있어)그 연장선에 있는 바스키아. 바스키아가 절대적 멘토이자 후원자였던 앤디 워홀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작품을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까? 앤디 워홀이 아닌 다른 후원자를 만났으면 어땠을까라는 의미없는 상상을 해 본다(나는 앤디 워홀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책에서는 여성 작가를 다루면서 대표적으로 아르테미시아, 카미유 클로델, 프리다 칼로를 들고 있다. 그들은 예술가로 인정은 고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로 재능을 억압 받고, 그들의 작품을 폄하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때를 잘못 만났다고 하기에는 안타까운 부분이 많고, 근대까지도 그 현상은 지속된다. 1970년대 페미니즘의 활동과 더불어 미국 예술계에는 여성 작가의 위상이 점차 높여졌다고 말하는데, 현재는 어떨지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저자의 의견에 개인적으로 많이 공감하고 동의했던 부분은 자본주의가 예술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념이 맞서는 세상에서는 정지적 도구로 이용당하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함으로써 예술의 창의성과 자유, 공공의 역할은 사라지고, 돈으로써 권력을 움켜쥔 이들에 의해 선전 도구로 전락하거나 예술가 고유의 영역을 침범 당할 뿐만 아니라 생계까지 좌지우지 되고 있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문학이든 순수 분야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의 창의성과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는 순수 학문이나 예술을 만나는 기쁨은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개인적인 사고를 통해 공공의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사회적 제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는 권위적인 예술문화에서 벗어나 놀이도 미술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일상에서 또는 자연에서 만나는 색, 형태, 소리 등에 상상력을 보태어 예술로 승화할 수 있고, 이러한 경험은 적어도 우리를 정서적 무능의 상태로 몰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어디에서든 미술을 만날 수 있다. 작은 미술관을 비롯해서 지역마다 종종 열리는 원화전, 길거리의 설치 미술, 어린 아이들의 낙서 등 열린 사고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무심코 지나치는 조형물에 관심을 보이시라.

잠시나마 그곳이 곧 미술관이다.

 

상상력이란 세상과 사물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우리 자신의 의식적인 노력이다.

존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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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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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아?

 

입에 착착 붙는다는 말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마음에 착착 붙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 책에서 언급된 도서들 중에서 두세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읽은 책이라 발췌한 문장 앞뒤 문맥의 흐름이 새록새록 기억이 나 더 깊이 공감했다. 

 

4부로 나눠지는 에세이는 나의 감정, 시간, 관계, 세계를 살피는 시간을 갖는다.

누군가가 물어주는 안부, 어느 이에게 전하는 위로, 온전히 나를 다독여줄, 열정을 부어주고 충전할 나만의 시간과 공간, 때론 혼자이고 싶지만 부대끼고 귀찮은 그들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그래서 쉽지 않은 타인과의 관계, 오롯이 나로서 설 수 있어야만 함께 하는 것이 더 자유스러울 수 있기에 나를 들여다봐야하는 나의 세계.

 

작가는 살면서 종종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또 그 안에서 위로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정하게 건드린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혹은 겪어봤을 크지 않은 상처들에 밴드를 붙여준다고 해야 할까...... . 

 

 

읽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도 해본다. 

 

굳이 어른으로 살거나 훌륭하게 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매 순간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최선을  다해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걸 테니까요. 

p129

 

훌륭하지 않아도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이미 충분히 가치있는 인생이라는 말에 많이 공감한다. 다만 나는 어른으로 살고 싶다. 그것도 좋은 어른으로 살고 싶다. 젠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래서 내가 어느 시절 무서울 때 잠시 숨어 기댈 이가 있었던 것처럼 나도 그리해줄 수 있는 믿음직한 어른이고 싶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오래 전에 읽었던 책들을 단편적으로나마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장 그리니에가 쓴 <카뮈를 추억하며>에서는 장 그르니에의 에세이에 쓴 카뮈의 '찬사의 글'이 떠올랐고, 허수경 시인의 시 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아릿하게 읽었던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묵직한 감흥을 안겨주는 나의 완소 애정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등등등.

뒷표지를 덮고 그 책들을 다시 읽고 싶어 책장 앞을 서성인다.

 

발췌한 문장들이 모두 좋았지만, 무척 좋아하는 에세이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우종영 저)>의 일부분을 옮긴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가 싫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로지 혼자 가꾸어야 할 자기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떨어져 있어서 빈 채로 있는 그 여백으로 인해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 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나무들이 올곧게 잘 자라는데 필요한 이 간격을 '그리움의 간격'이라고 부른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바라볼 수는 있지만 절대 간섭하거나 구속할 수 없는 거리, 그래서 서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거리.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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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룸 - 영원한 이방인, 내 아버지의 닫힌 문 앞에서 Philos Feminism 6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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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46  이슈테반 프리드먼

1946-1953  이슈테반 팔루디

1953-2004  스티븐 팔루디

2005-2015  스테파니 팔루디 

 

수전 팔루디가 2004년부터 트랜스젠더 아버지를 10여년간 추적한 기록이다. 남성 유대계 헝가리인에서 미국인으로, 여성 헝가리인의 삶을 살아왔던 아버지의 역사를 그와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거꾸로 되짚어 간다.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자신의 여성성을 찾고 싶었던 트랜스섹슈얼인 아버지와 이 시대 페미니스트의 대표선수 격인 수전 팔루디의 서로에 대한 관점이었다. 가끔 지인 중 페미니스트에게 성전환 수술한 여성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어떠냐고 봤을 때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많은 페미니스트 들이 트렌스젠더 페미니스트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트랜스젠더는 페미니스트 들이 탈코르셋을 외치는 와중에 왜곡된 여성성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러한 나의 궁금증은 의미가 없었다. 스테파니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기도 하고, 이 책은 페미니즘과는 별개(?)인 젠더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부분들이 더 크다. 수전 팔루디 또한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는 많지 않았다. 

 

2004년 7월 어느 오후, 아버지로부터 '사랑하는 부모'라는 서명과 함께 사진 한 장이 첨부된 이메일이 도착했다. 사반세기 가깝게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아버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헝가리에 한 번 방문하라고 써있다. 

 

수전이 10대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고압적이며 어머니가 법원에 접근금지명령을 신청할 정도로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왜 여성이 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왜 70대에 굳이 성전환 수술을 한 것일까? 수전은 2004년 8월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헝가리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녀는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추적한다.  

 

페미니즘이란, 계속되는 만트라에 따르면, '산텍'에 대한 것이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선택했을까? 그것은 내가 물려받은 것, 내가 조절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역사로부터 이룩해낸 것이 아닐까? 아내와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 남자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 때문에 나는 여성평등을 위해 움직이는 운동가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로서 나의 정체성은 아버지가 겪은 '정체성 위기'의 잔해, 자신이 선택한 남성적인 페르소나를 주장하지 못했던 좌절에서 태어났다. 취미이자 피난처였던 페미니즘은 내가 선택한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내가 도망치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였다.

p99

  

 

이슈테반 프리드먼.

유대계 헝가리인으로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둘 다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각자의 사업과 사교생활에 바빴으며, 어린 아들을 가정교사에게 방치했다. 부모와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 이슈테반. 유대인이 아닌 헝가리인(마자르인)으로 살았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프리드먼 집안 사람들은 가차없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슈테반은 살아남아 미국으로 떠났고, 유대식 이름을 버리고 개명하여 미국에서 가정을 꾸렸지만 안정을 찾지는 못했다. 헝가리로 돌아온 그는 스테파니 팔루디로서 새로운 삶을 산다.  

 

그녀 삶의 이력을 쫓다보면 그녀가 고압적이고 독재적인 성향을 가진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어린시절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스테파니는 아버지, 어머니 두 사람 모두에게 방치됐었는데, 유독 어머니를 미워하고 비난하며 임종의 순간까지 외면한다. 그에비해 아버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 수전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페미니즘을 선택했다면, 스테파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여타 다른 여인들처럼 되고 싶었던 것일까?  

스테파니는 성정체성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잘 동화되었던 헝가리 유대인이였건만 히틀러가 득세하자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용소로 보내진다. 유대인이었지만 마자르인으로 살았던, 그러나 결국 국가로부터 배격된 민족 정체성까지 혼란을 겪는다.

 

"오래된 습관을 없애야 해. 그러지 않으면 언제나 이방인이 되고 말지. 이... 이 소속감 없는 불안 속에서 말이야."  

p145

 

"사람들은 구분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경계에 있는 사람들조차 구분이 필요하죠. 그래야 경계에 있을 수 있잖아요. 정체성이 있어야 해요." (멜) 

p217

 

개인의 역사, 모든 개인이 저마다 경험하는 특별한 투쟁, 실망, 삶에 대한 열망, 이 모든 것이 '정체성'이라고 이름 붙은 하나의 유리병에 깔끔하게 들어갈 수 있을까?

p228

 

스테파니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그 위험한 수술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전은 아버지의 담당의인 미슐레이 박사를 만나서 수술 이후 아버지의 성격에서 어떤 차이를 발견했냐고 묻는다. 그는 스테파니가 '행복한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그것이다. 얼마를 더 살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내가 가장 마음 아프게 읽었던 부분은 자녀에 대해서 언급하는 두 부녀의 대화였다. 스테파니는 아이(자식)가 없다면 인간으로서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얘기하지만, 수전은 존경했던 한 여성이 낙태 수술 이후 평생을 괴롭히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임신을 중지한 자신의 삶을 회복시키고 젊은 페미니즘을 키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고압적인 독재자이자 폭력자일 뿐만 아니라 가정을 버렸다는 사실이, 수전은 아이러니하다. 이 대화의 연장선에서 수전은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결혼했는지, 그리고 아버지와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이처럼 수전은 아버지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그의 내밀한 부분까지 알게 되며 아버지가 아닌 인간 스테파니(스티븐) 팔루디를 바라본다. 

 

25장의 제목이 <탈출>이다. 아마 이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지만, 나는 문득 수전은 스테파니를 규정짓는 것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수전은 치매는 자아의 해체이자 정체성의 사망이라고들 하지만 오히려 스테파니로서는 말년에 앓았던 치매로 인해 그녀를 평생 괴롭혀온 피해망상과 과거의 현실들, 외면하려 했던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까닭은 단순히, 성전환자인 아버지를 페미니스트인 딸이 들여다본다는 스토리 때문만은 아니다. 헝가리 근현대 역사, 그 안에서 유대계 헝가리인들이 겪는 민족 정체성 혼란과 배신감, 트랜스젠더들의 성정체성 혼란과 심리적 고통 그리고 수술의 과정에서 오는 위험(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부담 등 일반적으로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 

 

스테파니 팔루니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수전 팔루디의 필력이 만나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부녀의 티격태격 하는 정다운(?) 말다툼이 웃음짓게 하고, 무겁게 누르는 역사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호기심을 넘은 진지한 궁금증 혹은 숙제 비슷한 고민 몇 가지가 생겼다. 트래스젠더, 페키니즘의 고정관념을 접어두고 책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트랜스섹슈얼은 ‘이전의‘ 자아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리고 당신의 과거를 삭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그 성별이라고 믿는 성별처럼 ‘보이도록‘ 신체를 변형시킴으로써 당신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완고하고 성차별적인 이해에 동조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은 그런 변형을 통해서 생물학이 운명이 아님을, 그리고 ‘트렌스‘는 젠더에 처진 경계선을 단순히 건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인가?​ - P230

히르슈 펠트가 인정한 하나의 정체성은 ‘범인권주의자 panhumanist‘였다.

"당신은 어디 소속입니까? 당신은 무엇입니까?"는 정말로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당신은 독일인인가요? 유대인? 혹은 세계시민?"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의 대답은 어느 경우에도 ‘세계시민‘일 것이다, 혹은 ‘그 세 가지 모두‘이거나.​


- P249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대교도인가 기독교도인가?

헝가리인인 미국인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너무 많은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누워 있는 몸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삶과 죽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 P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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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시간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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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도덕. 도덕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을까.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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