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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 랜덤 워크 - 영화와 음악으로 쓴 이 남자의 솔직 유쾌한 다이어리
김태훈 지음 / 링거스그룹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새벽 3시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상한 시간이죠. 일찍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에겐 오직 시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시간이니까요. 마치 지도 위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지명 같은 시간입니다." 가끔은 이미 경험한 과거의 회상 속에서도,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이런 이상한 느낌들과 만나곤 한다.
215p
어려서는 잠자기 바빴던 그 새벽에 깨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기를 가졌을때 유독 밤잠을 설치는 일이 많아서 밤 늦도록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지금은 아기가 자는 시간이 아니면, 내 개인시간이 없기에 또다시 새벽에 일어나 앉아있곤 한다. 책도 보고, 인터넷도 하는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한때가 유일한 새벽이다. 그 새벽에 누군가가 같이 깨어 있다는 느낌 . 생소하면서도 무척 반가운 일이다.
아기가 돌 전에 보챌때도 잠들지 않은 아기를 안고, 베란다 밖의 불켜진 집들을 바라보며 동질감을 느끼기까지 했으니..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이제는 그가 누군지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 직장을 쉬면서 집에서 하는 일이 주로 라디오를 듣는 일이었기에 김태훈님의 목소리를 생각보다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팝 칼럼니스트인 그의 팝이나 영화 소개보다도 주로 연애 카운셀링을 더 자주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미 결혼한 몸이라 연애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어쩌면 결혼도 안한 분이 저렇게 여자들 마음을 속속들이 잘 짚어낼까? 궁금증이 일기도 하였다. 연애 상담이라고 해놓고, 그냥 말장난만 하다 끝나는 다른 프로의 다른 게스트들과는 확연히 다른 연애 상담이었다. 그래, 실연의 아픔으로, 혹은 짝사랑의 고달픔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처방을 해줘야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시니컬하면서도 얄밉지는 않은 그. 연애에 정통해서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인줄 알았더니 요즘은 연애 슬럼프란다.
마치 일기인것처럼 아니면 수첩 메모인 것처럼 그의 이어지는 독백들을 듣고 있자면.. 마치 그의 목소리가 옆에서 직접 책을 읽어주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연애, 영화, 음악에 정통하고, 그가 하는 말들이 모두 박학다식해보여서 무지하게 공부만 파고든 모범생인줄 알았다. 다만, 영화와 음악은 따로 취미생활로 하고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학생때부터 담배와 만화방 생활..그리고 아버지와의 불화도 많이 겪고, 나름 놀만큼 놀았다고 자부할 만한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저 탈선이나 일탈로 끝나고 마는 10대들의 방황이 아니라 그는 취미라고 이름붙여질 그 장르들을 자신의 직업으로 뛰어나게 승화시켰다.
즐길줄 아는 그, 그의 해박한 지식이 진정 부러웠다.
사랑: 일시적인 정신병
결혼으로 치유될 수 있음.
-앰브로스 비어스
189p
직업적인 글쓰기와 방송출연에 허덕거리는 요즈음, 언젠가부터 음악과 영화, 책 읽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 한곡을 들어도 ' 이 음악을 어떻게 써먹을까?'를 먼저 고민하고, 영화를 보는 극장에서도 '음, 이 부분을 칼럼에 쓰면 좋겟군'이라고 직업적인 판단만을 내린다. 책 읽기에선 아예 문장을 따로따로 떼어내어 외우려는 한심한 짓거리까지 무의식적으로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121p
그런 그에게도 고민이 생겼나보다. 아무리 좋아하던 것도 일이 되고, 생활이 되다보니 호기심이란 이름으로 더이상 즐길 수가 없고 그저 직업적으로 임하게 된 것.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돌파구를 반드시 마련하고 뚫고 나와야 할 것이다. 그래도 똑똑한 그는 이 난관을 잘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과거란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다.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그렇고, 우리가 숭배하는 영화와 무대 위의 스타들도 그렇다. 너무 많이 알아버린 관객들은 사랑에 잘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254p
음악과 영화, 그리고 특히 연애에 조예가 깊지 않아 그가 말하는 것을 모두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의 이야기는 분명 재미가 있고, 즐길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 라디오, tv 뿐 아니라 그의 좀더 사적인 영역인 일기장까지 들여다보고 나니, 어쩐지 시니컬했던 그가 외로워도 보이고 좀더 친근하게도 느껴졌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허점이란게 있구나. 그래야 사람들은 그를 더 믿을만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