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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 - 조선 최초의 세계인 문순득 표류기
서미경 지음 / 북스토리 / 2010년 12월
평점 :

조선시대 25세의 홍어장수가 바다에 나간지 3년하고도 석달이 지난 다음에야 돌아왔다. 그는 류큐 (일본 오키나와), 여송 (필리핀), 중국 등에서 머물다 돌아왔으며, 그의 표류기간동안 현지의 언어를 익히고, 현지 문화 문물을 습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비록 상인이어서 문자를 알거나 기록할 형편이 되지 않았으나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가 풀어낸 이야기들은 마침 우이도에 귀양왔던 정약전에 의해 책으로 편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당시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나라들은 전부 오랑캐로 보고, 그들의 문화와 언어 등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한다. 그런데, 그때에도 여러 나라에서 표류되어온 사람들이 있었고, 조선인 또한 다른 나라로 표류한 이력들이 많았다 한다. 기록되어 있는 증거도 여럿 있었고,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아마 더 많으리라. 그 중에서 실제로 문헌으로까지 남은 이가 있었으니 장장 3년이 넘는 시간동안 여러 나라의 풍습을 제대로 경험하고 온 홍어장수 문순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정약전은 문순득의 경험담을 실학자답게 날짜별, 나라별, 주제별로 구분해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뒤쪽에는 문순득이 류큐와 여송에서 배워 왔다는 신기한 외국어들을 한글 해석까지 달아서 적었다.
그렇게 마무리한 다음 표지에 "표해시말"이라고 적었다.
표류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고 나서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 라는 자를 지어 준다.
이는 우리나라 개벽 이래로 해외 오랑캐 나라를 이 사람이 최초로 보았다는 뜻이었다. 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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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사상에 젖어 꽉 막힌 양반들이 표류를 했다면 (그러기도 힘들겠지만) 그 나라의 풍습과 문물을 배우려 들지 않았겠지만, 홍어장수 문순득은 달랐다. 기꺼이 그들의 생활상에 스며들었고, 배울 수 있는 언어는 충분히 배워왔다. 그리고 여송에서는 실제로 노끈을 꼬아 내다 팔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류큐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대접이 후해서 생활에 곤란을 겪지 않았으나 여송에서는 표류인에 대한 후한 대접이 없어서 스스로 살아남아야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과 여송의 교류가 전혀 없기에 기존에 정착민들이 있는 중국과 달리 그가 겪었을 소외감은 훨씬 컸을 것이다. 그렇게 배워온 여송어가 아주 유용하게 쓰일일이 생겼다.
조선 땅 제주에 표류해온 정체불명의 세 사람의 통역을해주게 된것이었다.그 표류민들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으나 막가외 막가외만 외쳐댔고, 말이전혀 통하지 않는 조선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설움의 세월을 견뎌왔다. 그러던 차에 말이 통하는 문순득을 대하자 울며 웃다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바닷길을 건너는 일은 크게 항해와 표류로 나눌 수 있다.
..표류는 돌발상황에 의한 것으로,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우연히 발생하는것이다.
.표류의 역할은 먼저 새로운 항로의 발견이다.
.. 또한 국제 교류의 매개역할을 했다. ... 68.69p
놀라운 모험을 하고 돌아온 문순득의 이야기. 그 표류의 여정으로 새로운 항로가 개척될 수도 있고, 새로운 문호가 트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약전 등의 실학자들은 이 점을 아주 높이 사고, 표해시말을 한글로 적어내며, 문순득의 이야기에 깊이 매료되어갔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3년간이나 표류하면서 그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수도 있지만, 대개 글을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기억력이 좋습니다. .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주민들과 격리된 표류민 신분으로 류큐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그렇게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이야기한 류큐 사람들의 생활이나 의복, 음식에 대한 기록들은 민속학적으로도 의미가 큽니다.
그리고 류큐의 장례식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끼리만 지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무덤도 보고, 그 속까지도 봤다는 것은 실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게다가 오키나와의 전통 장례식 기록으로는 문순득의 표해시말이 가장 오래된 자료일 것입니다. 153.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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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시말을 일본어로 옮긴 히로시마대 다와타 교수의 평가이다.
본의아니게 세계 여러 곳을 누비게 되었던 문순득이라는 한 상인의 이야기가 한글로 쓰인 책으로 나왔고, 일본에까지 번역이 되어 귀중한 자료로 선정이 되고 있다.
문자를 배우지 못했으나 그는 총명한 머리와 비상한 기억력으로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세세한 풍습까지 꼼꼼이 정약전에게 전달을 해주었다.
그가 필리핀 등지에서 보고 배워온 화폐에 대한 조언은 당시 상평통보 하나만을 사용하고 있던 우리나라 화폐 개혁을 위한 좋은 조언이 되었으나 아쉽게도 그 의견은 묵살되고 말았다. 일찌감치 세상을 보고 배워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도 깊은 감화 (물론 실학자들은 그 유용함을 일찍 깨달았으나 )를 주고 영향을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들은 중화사상 이외의 문물에는 눈과 마음을 닫아버렸기에 문순득이 보고 배워온 많은 것들이 사장되고 말았다.
나 또한 뒤늦게 알게 된 표해시말.
문순득과 함께 한 그 놀라운 여정에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비행기를 타고 몇시간만에 만날 수 있는 현대의 여행과는 다른 감명이 있었다.
나라의 비호 없이 한 개인이 타국에서 겪었을 설움과 한이 서려 있기도 했으나, 그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이었는지는 타국에서 외국어를 익히고, 생활하여 건강히 조선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민간 외교관이자 통역관으로 바뀔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