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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놀이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0년 11월
평점 :

근래에 조정래 작가님의 허수아비춤을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 까닭에, 벌써 또 신간이 나왔나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 소설 끝에 붙은 1982년이라는 단어를 보고 , 약력을 다시 찾고 나서야 1982년의 중편들을 엮어(애초에 한권의 이야기였다.) 장편 <불놀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음을, 그리고 그 작품이 2010년에 다시 재 출간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은 1983년에는 mbc TV 6.25 특집극으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거의 30년전의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흡입력이었다.
사실 대작에는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전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법.
꽤나 두꺼운 소설이 된 이 작품이 정말 놀랍게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읽혀버렸다. 전혀 지루하지도 않고, 너무나 재미나게.. 하지만, 그 잔인하고 억울한 내용들에는 치가 떨리면서..
요즘에 책을 워낙 많이 읽어서, 웬만한 책, 게다가 두껍기까지 한 책은 읽고 나서 며칠 지나면.. 다시 책을 펼쳐봐야 생각이 날 정도인데.. 이 책은 읽을때는 초고속으로 잃은 책이었는데 읽은지 몇주가 지났음에도 아직도 방금 책을 다 읽은 듯 내용까지 생생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점수는 전쟁이 터지기 1년전부터 빨강물이 들어 있었다.
"배점수씨. 저 시퍼렇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시오. 그리고 저 속에서 맥을 못 쓰고 녹아내리는 쇠를 보시오.
바로 저것이오. 양반이니 지주니 하는 것들은 저 쇠붙이고 우리는 저 쇠붙이를 맘대로 녹여 버릴 수 있는 불꽃인 것이오."
28p
한 마을 전체를 호령했던 대단한 지주 집안의 억압, 그리고 그에 억눌려 살아온 이들의 피맺힌 원한이 불러온 비극적인 살육, 그 살육이 또 대를 이어 복수로 이어지는 장대한 한풀이,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온 다는, 고리를 끊을 수 없는 자손에 이르기까지의 비극의 여정.
헐리웃 영화나 그에 못지 않은 잔인한 요즘의 한국 영화처럼 그런 복수를 하지는 않는다. 물론 전쟁시의 복수는 그에 못지않은 잔인함이었으나, 자손대에서 이뤄지는 복수는 철저하게 달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실적이기도 하였다.
좌파냐 우파냐 하는 이념의 대립 이전에 팽배해져 버린 감정의 원한. 빨강물이 들어버린 배점수는 사실 그와 자신의 여동생, 또 부모가 겪었던 핍박에 대한 원한이 더 컸지, 민족의 영웅이 되어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복수가 보상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 착각했고, 새로운 세상이 그들을 돌봐줄줄 알았다. 무조건 닥치는 대로 지주를 죽여대는 것만이 자신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리라 착각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참변이 불러낸 삶의 댓가.
죄를 지은 사람들은 다 살아남은 이들 앞에서 죗가를 치르며 죽지 못한 삶을 이어왔다. 하지만, 배점수는 달랐다.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철저하게 다시 살아났다.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그 연결고리를 남기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영웅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천대받던 자신의 핏줄을 독립군, 양반의 것, 그리고 심지어 공산당에 반대한 지주의 것, 바로 그가 훔친 지주의 목숨인양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돈과 명예를 거머쥔 아버지의 모습을 아이들은 본받고 싶어했고, 조상을 자랑스러워했다.
"당신 아버지는 부역으로 저지른 죄를 은혜하기 위해 이름도, 고향도, 얼굴까지도 바꿨소. 모두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꾸며진 일이었소. 상상할 수 있겠소?" 109p
걸판지게 놀고 끝이 날 줄 알았던 세상.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8명의 생목숨을 앗아간 사람이 너무나 길고도 오래, 자신의 명줄은 이어가고 있었다. 선이 분명한 그런 거침없는 책, 그 복수의 현장, 게다가 배점수의 여동생 순월이 어려서 겪은 잔인했던 일과 그 일이 불러온 광기어린 살육의 현장이 자꾸만 무섭게 머리를 휘저어버렸다. 사람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광기가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실감하게 해주었던 책이었기에..
누구의 원한도 사지 않고 그렇게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부르고, 자식들의 삶까지 완전하게 허물어버린다. 복수를 감행한 사람의 마음이 편할 수 있으랴.
두눈 못 감고 죽은 부모의 원수를 갚을 사람이 어찌 편하게 밥을 뜰 수 있었으랴..
현대의 수많은 작품을 읽고 또 읽어도, 30년 전의 이 작품의 뛰어난 흡입력은 못 따라가겠단 생각이 들었다.
강렬한 여운이 남겨진 책. 불놀이. 정말 길고도 긴 여정인 그의 대작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읽어야겠단 열망에 불을 붙여준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