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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
에쿠니 가오리.가쿠타 미츠요.이노우에 아레노.모리 에토 지음, 임희선 옮김 / 시드페이퍼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가쿠타 미츠요, 이노우에 아레노, 모리 에토, 에쿠니 가오리
4인의 나오키상 수상작가가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칼을 무대로 쓴 요리와 사랑, 치유에 관한 이야기.
에쿠니 가오리의 은근한 팬이 되어버린 나는 주저않고 이 책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요리와 여행 등을 즐기는 내게는 정말 더욱 잘 어울리는 주제의 소설이 아닐 수 없었다.
1960년대생이고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나오키상 수상작가에 최고의 여성 작가들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그녀들의 작품.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비슷한 주제로 에세이집이 엮어진 책을 읽은 적이 있었고, 일본 책의 경우 50이라는 주제로 미스터리 소설이 쓰인 책을 읽은 적도 있었다. 최고의 작가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과제, 유럽 어느 여행지를 직접 여행하고 (그게 참 궁금했는데 소설을 다 읽고 찾아보니 그녀들은 직접 그곳을 여행하고 소설을 써내려간 것이 분명했다.) 요리와 사랑, 치유라는 공통 주제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서로에게는 많은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을텐데 엮어진 소설들을 읽어보니 하나같이 과제로 해낸 숙제라 치기에는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괜찮은 소설들이었다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아이들은 따뜻한 음식이 담긴 그릇을 건네줘도 무표정하게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는 경우도 있지. 그게 맛있는 것이고, 먹을 것이고, 배부르게 해주는 음식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거야. 그런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알 수가 없는 거지. 그러다가 점점 날이 갈수록 그런 아이들의 얼굴하고 눈에 표정이 생겨나. 가족끼리 나무 밑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아직 어린 아이가 자기보다 더 어린 아이를 안고서 우리가 만든 음식을 먹는 거야. 56.57p 신의 정원, 가쿠타 미츠요
처음엔.. 그녀들이 일본인 여성들이니 당연히 주인공도 일본인 여성이 아닐까 싶었다. 읽을수록 그 생각은 철저히 부숴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출신을 벗어던지고 관광객이었던 소설가는 철저하게 유럽인들의 삶으로 침투해들어갔다. 아마도 저자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더라면 있는 그래도 유럽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다소 감성적인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이구나 정도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른다.
유럽의 대도시의 이야기가 아닌 보수적인 시골 출신들의 이야기. 아마도 작가들은 여행 도중에 만난 사람들, 혹은 숙소의 주인들을 통해 철저히 그들을 분석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신의 정원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아이노아 또한 그런 이야기를 풀어낸다. 자신도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반드시 소속된 클럽에 모여 식구들의 이야기,특히나 축하할 것이 있을 경우에 소집된 대가족이 만찬을 즐기고 그 이야기를 화제로 삼는 그들만의 방식. 아이노아는 어느 날, 그 모임에서 어머니의 말기 암 선고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한 만찬이라는 생각에 가족들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정나미가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가족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서 객지를 떠돌다 신의 재능을 타고난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평범한 요리솜씨를 물려받아 국경 없는 쉐프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는 난민 캠피 등에서 한시적으로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는 그런 일을 하는 곳에 소솟ㄱ되게 된다. 사실 아이노아의 이야기에는 공감이 많이 갔다. 가족 모임에 크게 반발했을 때에도, 국경 없는 셰프회에 대해 그녀가 비관적으로 생각하던 것도 모두가 충분히 공감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다시 가족의 이야기로 옮겨올 수 있을까. 아주 자연스레 이야기는 흘러간다.
이노우에 아레노의 이유는 남편 카를로를 사랑하게 된 이유에 대한 그녀의 답변으로 시작하게 된다.
이유가 수없이 많다는 말은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하고 똑같지 않을까 하고. 66p 이유, 이노우에 아레노
처음부터 확실히 주인공의 이야기가전개된다기보다, 하나하나 수수께끼를 풀어가듯 이야기 속에서 상황을 짐작하게 된다.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을 매일같이 간병을 가는 젊은 아내, 그녀는 남편이 좋아하던 미네스트로네를 끓여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남편에게 매일같이 들고 간다.
모리 에토의 블레누아는 지나치게 미신에 집착하던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진저리를 치며 고향을 등지게 된 어느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양 사람들이 개방적이라 생각하는 것은 성에 대한 부분때문에 일어난 편견으로 심한 부분은 그들이 극단적으로 더욱 폐쇄적일 수도 있다는 그런 것들을 (특히 대도시가 아닌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소설을 통해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장수하기 위해 또래 소년의 장례식에 참석해 시체의 이마에 입을 갖다대어야했던 어린 시절의 주인공은 그로 인해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깊은 반항심이 생겨나고 말았다.
청년이 어떻게 또 요리와 관련이 되어 갈까.
청년네 마을 브르타뉴 지방에서는 음식을 미각을 위해서가 아닌 살아가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다.크레이프도 달아서는 안되고, 짭짤한 토속적인 것이어야 했다. 크레이프를 만드는 기구는 여성의 신성한 영역으로 아무나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큰 어머니의 빌릭은 자신의 어머니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것이었다. 청년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마을의 성향이 자기도 모르게 뿌리깊게 박혀 마을을 떠났음에도 완벽주의를 자랑하는 쉐프가 되고야 말았다. 자신과 너무나 닮은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같이 마을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녀 또한 알고 보니 브루타뉴 지방 출신이었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어머니를 어느 날 갑자기 진실을 알고 깊이 이해하고 후회하게 되는 그 과정. 길고 긴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이야기였다.
내 생각에 같은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의미있는 행위다. 아무리 섹스하는 사이라도 별개의 인격이라는 사실을 바꾸지 못하는 두 사람이, 매일같이 똑같은 음식을 똑같이 몸속으로 집어넣는다는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6p 알렌테주, 에쿠니 가오리
사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를 생각하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다른 작품들 또한 하나같이 괜찮아서, 단편집치고 참 괜찮은 책이었다란 생각이 깊이 들었다. 그리고 사실 반전처럼 느껴진것이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읽으며 당연히 주인공이 여자일거라, 아니 왜? 워낙에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단정함이 깃들여 있어서랄까? 생각했는데 갑자기 "넌 남자애가 뭘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그래." 하고 이야기가 나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그럼 내가 반대로 알고 있었나? 바람피우고 활달한 마누엘이 여자였단 말인가? 읽다보니 그것도 아니다. 놀랍게도 (아니 이게 왜 놀라워?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편견상 당연히 그들이 이성일거라 착각했다.) 연인인 게이 남성들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바람을 잘 피우는 성향의 마누엘때문에 미식여행으로 기분전환을 하기로 한 그들, 그들이 묵은 숙소는 허름해보이지만 디너만큼은 소박하면서도 꽤 괜찮은 그런 맛을 갖고 있었다. 주인집 딸인 엘레네가 자신네 디너에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말이다. 그들은 그 곳에서 같은 음식을 먹다 너무나 설탕 맛이 강한 당밀과자를 먹고 같이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멀고도 먼 유럽의 어느 시골 이야기.
한번도 가본적도 없는 유럽이라 멀게 느껴지는데 그러면서도 푸근했던 것은 바로 음식이야기가 녹아있어서 그랬나보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입밖에서 내놓는 화제가 상당부분 음식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을정도로 음식을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어쩌면 내 전공과목을 이 쪽으로 정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생각할 정도로 요리와 미식은 알면 알수록 참 기분좋은 그런 세계가 아닐 수 없다.
결혼전에는 주로 사먹거나 엄마가 해주시는요리를 먹기만 했는데 결혼후 내가 요리를 하게 되니 서툴더라도 내 솜씨를 조금씩 맛보게 되었고, 옮긴이가 말하는 "얘야, 남자의 심장은 위장 바로 옆에 있단다."라고 어디선가 들었다는 그런 이야기에도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내가 식순이로 결혼했나? 가끔 그런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남편은 내가 해주는 요리, 특히나 맛있는 요리가 상에 오르면 크게 기뻐하며 같이 즐겨 준다. 내가 좋아서 결혼한게 아니라 음식이 좋아서 했어? 하는 말도 안되는 투정도 부려보지만 (결혼 전 한번도 요리를 해준적이 없어 요리를 잘할거라 기대도 안했던 신랑이었다. 친구 와이프가 낙지볶음 한다고 부엌에 들어가서 세시간만에 나오는 것을 보고, 나도 밥이나 앉힐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다고 한다.) 맛있게 기쁘게 먹어주는 신랑을 보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음식과 함께 가족의 사랑, 혹은 연인과 부부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흘러가고, 그리고 그 안의 뭉쳤던 문제가 한올한올 풀려가는 그런 인생 이야기였다.참으로 잘 끓인 스프 같은 이야기였달까? 제목도 참 잘 붙였고말이다.
미네스트로네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책을 읽으며 나도 미네스트로네를 먹고, 건강한 우유 과자도 즐겨보고픈 그런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