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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양상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1월
평점 :

평소 에쿠니 가오리만의 문체를 무척 아끼고 좋아하는 편이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몇 권의 소설과 시집, 그리고 수필도 조금씩 읽고 있었는데 그러다 푸드 에세이를 내었단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내렸다. 나 또한 음식과 관련된 소소한 이야기들을 무척 좋아하기에, 좋아하는 작가의 푸드 에세이가 어떤 느낌일까 기대되었던 것.
이 책을 읽은 다른 분의 서평을 잠깐 읽어본 적이 있는데, 다소 실망스러웠다란 글을 접하고,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읽는 내내 그야말로 난 정말 행복한 기분이었다.

공감! 이란 말로 그 기분을 대신하고 싶다.
특히나 흰빵, 검은빵을 발견했을때는 너무 반가워 읽고 또 읽었다.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작은 발견이랄까.
사실 나도 어릴적에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나온 많은 대목 중에서도 주인공 소녀가 처음 맛본 흰빵에 감격해 할머니 갖다 드리고 싶어서 모으고 또 모으는 부분을 보면서 도대체 흰빵이 무얼까? 너무 궁금해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것, 특히나 먹을 것에 집착하고 궁금해하는 모습이 좀 부끄럽게도 느껴지고, 그런 대목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에쿠니 가오리의 글에서 만나게 되다니.. 저자 또한 흰빵이 뭔지 궁금해 엄마에게 묻고 또 물어도 "네가 평소에 먹는거"란 답변에 실망했다고 한다. 이제 그녀는 흰빵이 아닌 검은빵을 오히려 훨씬 더 좋아한단다. 중학생때는 이미 검은 빵파(아버지가 명명)였고, 생일이나 축하할 일이 있을때나 먹고 싶은게 있으면 말하라고 할 때면 검은빵이라고 대답해, 부모님이 종종 독일 음식점에 데려가 주었다. 검은 빵과 풋콩으로 만든 수프가, 당시의 내게는 황홀할 정도로 맛있는 최고의 식사였다. 81p
흰빵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될 무렵, 난 엉뚱하게도 흰빵이 혹시 호빵인가? 하는 결론을 내리고, 내 나름대로 호빵을 소중하게 야금야금 먹어본 기억도 있었다. 아마도 검은빵은 호밀 등의 잡곡이 들어간 다소 거친 느낌의 빵이고, 흰빵은 부드러운 흰 밀가루로 만든식빵 등의 보통 빵이 아닐까 싶다.
어쩐지 편견 같은 것이 있어서 여린 감수성의 저자분은 학과 같은 고고한 삶을 살 것만 같았다. 물론 에쿠니의 식성은 동물성 단백질을 거의 섭취하지 못하는 철저한 채식과 과일 위주의 식사라 한다. 그런 그녀가 술과 담배를 좋아한다니 그건 의외였다. 게다가 약간 결벽증도 있는 듯 하지만 그녀의 많은 부분들이 글 속에 녹아나는 방식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담담하면서도 청아하게 다가오는 글들은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작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참 좋다.이런 기분.
한편 한편의 이야기가 음식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억지스런 느낌이 없어 좋았다.
뉴욕에 놀러가서 친구를 만날때의 폭설이 내리던 어느날, 우연히 들어가게 된 첫 스타벅스의 경험이라던지 (스타벅스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지 공공연히 가지 않겠노라 선언했던 그곳이었다한다.), 방황하는 웨이터란 제목이 붙은 단편은 그녀가 유일하게 대식을 했던 시절 만난 어느 레스토랑의 기억에 남는 직원을 그 이후로도 종종 다른 레스토랑에서 계속 만나게 된 재미난 인연 등을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편의 정말 공감갔던 글, <버터밀크의 수수께끼>
어렸을때 읽은 외국 이야기들 속에는 잘 모르는 음식이 이것저것 많았다. 요크셔 푸딩, 티티새 파이, 감초 사탕, 크럼피트 등, 잘 몰라도-라기보다 모르기때문에 멋대로 상상했다.-그 맛과 냄새와 색깔과 모양과 특성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었고, 그것들은 '아주 좋은', 내 주위에 있는 실제 먹을 거리와는 위상이 다른 '빛나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172p
책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데, 조금 오래된 어린이 책에 버터밀크가 종종 등장했다. 그것은 우선 마시는 것이다.(책 속에서 아이들이 꼴깍꼴깍 마신다. 맛있게, 소리까지 내면서) 그 앞에 종종 '신선한' 이나 '갓 짠' 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있기도 했다. 그러니 밀크를 사용한 음료인 것은 확실한 듯 했다. 거기까지만 알 수 있었다. 173p
나도 어릴적 읽었던 책들에서, 특히 서양의 책 등에서 나오는 처음 접하는 음료, 음식 앞에 그런 궁금증이 더해졌다.
쌍둥이 로테에 나오는 진저 에일이라던지 레모네이드(지금은 레몬에이드가 나름 대중화되었지만 어릴적 우리 주위에선 흔하게 만날 음료는 아니었다.) 등은 참으로 생경한 동경의 음료였다. 도대체 무슨 맛일까? 아주 어릴 적엔 약수조차 궁금해하기도 했다. 약수는 톡 쏘는 맛이 나는 광천수가 약수인줄 알았다. 나중에 맹물맛을 느끼고, 엥. 이게 뭐람 하고 실망했던기억도 난다. 서양과자와 빵 등의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 다양한 명칭 앞에서 에쿠니 가오리가 느꼈던 그런 느낌을 어릴 적의 나 또한 갖고 있었다. 게다가 난 그녀와 달리 꽤나 서양 음식이 입에 잘 맞는 편인지라 (고기도 좋아하고, 각종 서양 음식이 고루 입에 잘 맞는다.) 어른이 되어 실제 접하게 된 그 맛들에 나름 만족한 것도 꽤 많았다. 아직 진저 에일에만 도전을 못해봤지만 말이다. 버터밀크는 어릴적 내가읽은 책에선 못봤던 부분인데 그녀에겐 참으로 궁금증을 안겨주었던 음료였나보다. 로라 잉걸스 와이더의 초원의 집에 등장한다니, 나도 그 작품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읽기 전 막연하게 느꼈던, 기분 좋은 예감이 어김없이 들어맞아버렸다. 게다가 마치 잊었던 기억이라도 되찾은양 행복한 기분마저 들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부드러운 양상추, 어릴 적의 나로도 잠깐 되돌아가는 추억의 여행도 하게 해주고, 다양한 그녀의 시선을 따라 여행하는 기분 또한 쏠쏠하게 느끼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