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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제
츠네카와 코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소나기가 몰려올 것 같은 깊고 무거운 느낌의 하늘, 그리고 바람에 이리 저리 휘둘리는 초원, 뭔가 신비로운 느낌이자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함을 간직한 표지부터가 매혹적이었다.
작가의 전작으로 유명한 야시와 폭풍의 계절을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분이기에 표지에 반했다는 마음과 더불어 그의 환상의 세계를 다룬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고픈 마음이 생겨 선택한 책이 바로 신간 초제였다.
그리고 단편 단편으로 되어 있는 초제를 다 읽고 나서, 공포스럽다기보다 환상적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고, 그러면서도 비현실적인 이런 느낌을 이렇게 호감적으로 버무려 놓을 수 있는 작가의 역량에 매료되고 말았다. 야시와 폭풍의 계절마저 구입해 읽어보기로 마음을 굳힐 정도로 말이다.
사실 진짜 무서운 것은 현실에 전혀 등장할 것 같지 않은 거대한 괴물이나 극단적으로 과장된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있을 법한, 바로 우리의 가까운 공간 이면에 무언가 낯선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이 호의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우리를 현실과 언제고 유리시킬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글들이 아닐까 싶다. 대놓고 무섭다기 보다 으스스하게 살짝 떨려오는 그런 느낌이랄까.
이 책을 읽고 딱 떠오른 것이 어렸을 적에 정말 재미나게 봤던 환상특급이라는 티브이 시리즈물이었다. 일본은 아니고 서양 시리즈였는데, 평범하게 생활하던 사람들에게 일어난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볼때는 그렇게 무서운 느낌이 없었다가 다 보고 나서 곱씹으면 살짝 등에 소름이 돋으면서 무서워지는, 정말 내가 그런 일을 겪게 될 수도 있겠다와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샘솟던 그런 프로였다. 바로 초제가 그런 느낌이었다. 거기에 동양의 신비가 더해져, 더욱 오묘하고 기이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비오쿠라는 기묘한 땅.
다섯 편의 이야기를 묶어주는 공통적인 공간이었다. 현재의 이야기서부터 먼 과거의 이야기까지, 비오쿠 외에 등장인물들이 겹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단편이냐 장편이냐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초제는 날밤을 새고 머리가 개운치 않았던 내가 손에 잡자마자 잠을 잊고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렇게 쪽잠마저도 내쫓고 초제를 다 읽을때까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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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하늘 위로 흘러갔다. 바람이 불고, 사방을 에워싼 절벽위 숲이 출렁였다.
들판 한복판에 달걀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굵은 금줄이 쳐 있다.
처음 잠깐은 분명 '끝내준다. 우리의 멋진 은신처를 발견했어.'같은 흥분을 느꼈지만 그것도 이내 가시고,
여기는 들어와서는 안 될 곳, 아주 옛날부터 비오쿠에 존재해온
무시무시한 금단의 장소 같다는 기분이 점점 강해졌다.
"무섭다."
18p <짐승의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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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한 이야기 <짐승의 들판>은 겪어서는 안될 슬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친구의 비밀이 드러나는 이야기였다.
친구 하루가 실종되었다. 어른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친구가 있는 곳을 알 것 같았다. 둘이서 아주 우연히 들어갔던 기묘하고 무서웠던 바로 그곳, 그 곳에서 친구를 찾고 말았으나 친구와 함께 있는 예상 밖의 것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 친구의 감정이 남아있는, 평범한 학교 일상을 이야기할 수도 있는 친구와 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아주 서서히 변해가고 있음을 알았다.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소녀를 구해주는 동네 수호신 남자아이의 이야기인 <지붕 위 성성이>도 놀라웠다. 모든 것에 신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본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작가의 상상력에서만 나온 일일까? 정말 실제로 수호신이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수호신이 하는 일이란것도 아주 평범해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어느 결에 살짝 오싹해지는.. 무섭지 않아. 말하면서도 일본의 기묘한 이야기들만이 주는 그런 낯선 이질감을 가득 안고 있는 글들의 모음이었다.
숙부에게서 독과 약에 대한 비법들을 배운 소년의 이야기, <풀의꿈 이야기>.
그에게서 어느 날 무서운 기운을 내뿜는 오로치바나에 대해 듣게 되었다. 생사를 초월하는 효과를 가진 금단의 신약 쿠사나기를 만드는데 쓰인다는 오로치바나에 대해서 말이다. 소년은 어느날 독을 탄 술을 숙부에게 먹여 죽이게 되었고, 죽이고 나서야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미친듯이 후회하고 말았다. 혼자 산속에 살던 그를 길 잃은 승려 린도가 마을로 데려가 같이 살게 되었는데 린도의 딸인 키누요와 손녀 카린 등의 화목한 가정, 자신이 가져보지못한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한 그 가정의 모습에 동경과 애정의 마음을 가득 품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이 원치 않았던 비극은 그의 정의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비오쿠의 비극이 될 그런 이야기가 바로 풀의꿈 이야기에 담겨 있었다.
고해의 원반을 이용해 카드 등으로 하는 게임, 텐게는 괴로움을 덜어 낼 수 있지만 힘든 게임이라고 하였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기전엔 내려놓을 수 없는 게임. 오로지 부자냐 아니냐만 생각하는 아버지를 경멸하며 집을 가출한 소녀는 쌍둥이 소년들을 만나 텐게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게임을 잘 해내고 자신의 고민을 조금씩 내려놓는, 그러나 기력은 모두 소진해버리는 그런 나날들을 겪게 되었다. <텐게의 집>
생판 남인 오사후네씨 집에서 4년씩이나 더부살이하던 여자의 이야기도 나온다.
어릴적부터 뭔가에 너무 빠져들었던 오사후네씨는 조립식 오두막에서 만든 그런 마을 모형이 쉰이 넘은 지금도 아직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자를 아침 일찍 그 곳에 데려간다 하였는데, 그 곳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었다. 오사후네씨가 만들고 생각한 공간들 속에 그가 초대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또다른 공간들이 섞인 기묘한 마을이었다. <아침의 몽롱한 마을>
무섭지는 않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현실 속의 비현실적인 뒤틀린 공간 이야기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가 있음은 분명하였다.
이 책 <초제>,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