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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은 언제나 에쿠니의 비밀로 가득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에쿠니의 비밀'을 읽고 난 후에 독자들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것 같다. 왠지 그런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읽은 독자는 에쿠니가 그녀의 비밀을 나에게만 털어놓을 듯한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밀을 들은 후에는 역시 자신의 비밀도 털어놓고 싶어진다.
친밀한 비밀의 주고받음. 183p
남녀 작가가 서로 연애편지를 쓰듯, 소설을 주거니 받거니 연재해 쓴 것으로 유명한 냉정과 열정 사이, 평범하지 않은 그 설정과 낭만적인 분위기에 한껏 고무되어, 영화로 먼저 만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이후 책으로 사서 읽으면서 (그땐 무척이나 책을 읽지 않던 시기였기에 가끔 사보게 되는 책들은 정말 내게는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에쿠니 가오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분명 남녀 두 작가의 책을 동시에 읽었음에도 에쿠니 가오리에게 유독 빠져들었다. 이후 에쿠니 가오리가 내놓은 소설이나 에세이라면 망설임없이 고르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에쿠니 가오리 작품 사랑은 멈추지 않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단아하다. 공감이 간다. 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자극적이거나 놀라운 결말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나를 끌어당기는 그녀의 오묘한 매력을 말로 설명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런데, 작품 해설을 한 가와카미 히로미라는 또다른 작가의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공감하게 되었다.
그녀의 절제된 표현,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 이야기에도 분명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것 같은 사실감을 부여해주는 그녀만의 비밀.
소설일텐데도 이게 진실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심어주는 그녀의 표현과 말투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게 아닐까 싶었다.
열한명 소녀들의 차갑고 애처로운 비밀 이야기라고 씌여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난 다 그녀의 어릴 적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다.
물론 가정 형편이 다 다르게 나오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소각로>를 시작하는 철도 변의 이비인후과 옆에는 분꽃이 소복하게 피어 있어서 그 곳을 지날때면 언제나 꽃 한 송이를 땄다. 98p라거나 <하루카>에 나오는 배경인 이비인후과는 철도 변에 있어서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입구 옆의 분꽃밭이 보였다. 150p라는 대목을 보면 분명 같은 공간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냥 우연히 설정한 배경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이어지는 내용인듯한 착각, 그녀의 어릴적 이야기임을 암시하는 듯한, 그래서 여기 적힌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은 아닐까 하는 몰입도를 높여준다.
에쿠니 가오리의 가장 훌륭한 점은 '여기에 어떤 언어를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탁월한 심미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칸센을 싫어한다.
질서 정연한 차량 안의 모습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는 안내 방송도, 수레를 밀며 군것질거리를 파는 여자의 유니폼도, 깨끗하고 커다란 창문, 반질거리게 닦인 은색 창틀, 멋대가리 없는 옷걸이, 그 허술한 커튼 따위도.
<호랑나비>의 첫 문장이다.
이 얼마나 군더더기 없는 문장인지.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어려운 표현 역시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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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허술한 커튼 따위도.'라는 마무리이다.
'그 허술한', '따위도'. 이 구어적 표현. 그리고 '커튼'이라는 명사와의 절묘한 조합.
그 전까지 담담했던 표현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함으로써 문장 전체가 갑자기 솟아오른다.
와, 대단하다. 나는 감탄하고 만다.
정말 대단하다. 185p,186p
대단한 기대를 안고 그래, 에쿠니가 그렇다고? 어디 한번 읽어보자 하는 오기로 책을 펼쳐든다면, 이게 뭐~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냥 나는 히로미의 평가가 딱 절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물론 한국어로 씌여진 책이 아니라, 일어로 쓰여진 책이니, 번역하는 중간에 그 느낌이 많이 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에쿠니 가오리 번역에 가장 적격인 김난주님의 번역이다 보니, 아마 한국어로 소설을 쓴다 해도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남들은 예사로 넘기는 그런 일상들.
잊고 있던 그 일상들을, 기묘한 일들, 꼭 대단하진 않더라도 기억에 남을 그런 일들을 에쿠니 특유의 감성으로 잘 풀어낸 이야기가 수박향기가 아닌가 싶었다.
물의 내음, 바람의 냄새를 닮은 수박 향기.
에쿠니가 아니면 콕콕 집어내지 못할 그 현실을 글로 풀어내는 담담한 서술법에 늘 난 반하기 일쑤였다.
같은 표현이라도 다른 작가가 이렇게 잡아낼 수 있을까
아니 나의 일상이라도 난 항상 어떤 단어를 어떻게 적절히 풀어낼지 몰라 막막하지 않았던가.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정말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맞아 맞아, 나도 이런 경험 있었어. 이런 생각 나도 했었어. 아니, 이렇게 해도 되는거야? 이건 아닌데. 등등 책을 읽으며 마구 수다 떨고 싶어지게 하는 그런 에쿠니의 솜씨.
약하고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늘 그것이 오히려 강함을 느끼게 해주는 에쿠니.
열 한명의 소녀, 혹은 에쿠니 단 하나의 자신의 이야기인지 모르는 이 소설 속 단편들은 <수박향기>가 주는 신기하면서도 약간 오싹한 느낌의 괴담같은 이야기서부터 아슬아슬한 순간에 늘 수호천사처럼 나타나 연약한 그녀를 지켜준 친구 M의 이야기 <그림자>, 연상의 대학생을 동경하면서도 그에 대한 마음을 쏟아내는 데는 서툴렀던 어느 소녀의 이별 이야기를 담은 <소각로>, 말매미 울음소리로 불안한 공포를 예견케하면서도 막상 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정도의 것은 아니었음에 안도하게 만드는 <물의 고리> 등등..
에쿠니가 주는 담담하면서도 깊은 공감은 그의 작품이 나올때마다 집어들게 되는 묘한 끌림을 주는 그 무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