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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보트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11월
평점 :

이 작품을 두고 '에쿠니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하는 목소리가 많다.
요코는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살려고 한다. 운명의 보트에 몸을 맡기고, 담배와 커피와 초콜릿 향기에 싸여서.
..
대개 에쿠니의 작품은 이상을 얘기하지 않는다.
소위 극적인 요소도 그리 강하지 않고 지나치게 비극적인 장면도 없다. 그저 물처럼 반짝거리고 유연하다. 286p 아동문학가 야마시타 하루오의 작품해설 중에서.
책을 읽고 나서, 예전엔 미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역자 후기, 작품 해설 등까지 요즘은 꼼꼼히 읽고 있다.
그 중 유난히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 해설 등을 보면 격하게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들인데 떠오르지 않아 못했던 말들. 작품해설에서 콕콕 짚어준대로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인용해 담아왔다.
에쿠니의 소설은 정말 반짝반짝하는 그 느낌이 새롭다.
정말 기복이 지나치게 있다거나 자극적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마구 자아내는 그런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그 무엇이 강렬하게 있다. 편안하게 빨려들게 만드는 에쿠니만의 매력.
이미 나는 에쿠니의 팬이 되어버렸다.
에쿠니의 책을 모두 다 읽은건 아니었지만 최근의 책을 더욱 열심히 챙겨 읽었는데, 이 책.. 읽지 않았더라면 정말 후회했을, 에쿠니의 멋진 작품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설명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에쿠니 식의 담백하고 깔끔한 표현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이야기는 엄마인 요코와 딸인 소우코의 시선에서 교차되어 서술되고 있었다.
지중해 휴양지의 어느 섬 방갈로 풀 사이드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엄마, 아빠
아빠만이 만들수 있는 달콤하고 중독성이 강한 시칠리안 키스라는 칵테일을 마시던 엄마가 아빠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 자신을 낳았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을 소우코는 믿고 자랐다. 엄마의 엉뚱한 이야기들이라는 표현을 한참 후에나 이해했지만 말이다.
에쿠니가 이끌어주는 여주인공 요코는 어쩐지 가녀리고 나긋나긋한 여성일 것 같았다. 엄마, 아빠의 한없이 깊고 깊은 사랑을 받은 요코였기에 반듯이 정숙하게 자라날줄 알았던 요코가 어린 학창시절에 소위 학교를 퇴학당할 정도로 문제아였다는게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아빠가 옛날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만약 초등학생 때 만났더라면, 당신 어깨에 상처가 나도록 하지 않았을 거라고.
중학생때 만났더라면 , 같이 먼 곳으로 떠났을 거라고.
고등학생 때 만났더라면, 난 당신에게 들려주기 위해 매일 기타를 쳤을 거라고.
만약 대학생 때 만났더라면, 지금 나와 당신은 절대 여기 있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의 어깨에는 싸워서 생긴 상처의 흉터가 조그맣게 남았고, 중학생 때 엄마는 어느 날 혼자서 집을 나갔다. 고등학생 때는 코튼 캔디색 머리를 하고 혼자서 날마다 춤을 추러 다녔다.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엄마는 지금 여기에 있다. 163.164p
자신의 외로움은 아마 요코도 몰랐을 것이다.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에 대못을 박아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유일하게 잘할 수 있던 피아노를 전공하고, 엄마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그리고 평생 누구도 꿈꾸지 못했을 단 한번의 사랑을 하였다.
지금 여기 아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엄마가 말하는 '천국처럼 포근한 품 안'에 나를 품어주면 좋을 텐데. '엄청 예쁜 얼굴'로 웃어주면 좋을텐데. '엄마의 볼에 딱 맞는' 겨드랑이를 내게도 좀 빌려주면 좋을텐데.
153.154p
한번도 아빠를 본 적이 없는 딸 소우코.
그녀는 엄마의 보트에 함께 올라타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실 불안정한 생활 속에 아이가 비뚫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소우코는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도 좋은 편이고, 엄마에 대한 원망도 하지 않은 채 엄마를 따라 일년마다 혹은 더 수시로 진행되는 방랑자 같은 삶을 따라다녔다.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잔혹한 처사인지.
한 곳에서 친구를 새로이 사귀고 또 금새 헤어지고.
상처가 될 수 있는 삶이었는데, 엄마는 자신만의 강렬한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채 살아갔기에 딸의 외로움 등을 되돌아볼 여력조차 없었다.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 여전히 혼자 갇혀 있었기에.
딸조차 같이 그 배에 실어 같이 아빠를 무한정 기다리는 그 삶만을 지속하려 하였다.
딸은 그녀의 소유물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에게는 딸 자신이 아닌, 아빠를 투영한 대체물처럼도 보이는 듯 하였다.
예쁜 등뼈.
그 사람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게 아니야.
걸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람을 만난 후의 세계야. 그러니까 괜찮아. 다 괜찮아.
마치 기원후와 기원전 같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역시 그 사람은 나의 하느님인 것이다.
-난 반드시 당신을 찾아낼 거야.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194.195p
젊은 나이의 격정적인 사랑.
그리고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
소우코를 가졌다는 사실도 말해주지 못하고 아빠를 그렇게 떠나보냈던 엄마.
어디에 있건 그녀를 찾아내겠다는 아빠와 정착해버리면 아빠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에 엄마는 떠돌고 또 떠돌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모모이 선생님의 그녀를 보면 힘들다는 말에, 도쿄를 떠나 방황해야했기에 그녀의 방랑자의 삶은 더욱 길고 긴 여정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도대체 어떤 끝이 될까. 중간까지도 한참 빠져드는 이야기였지만, 나라면 어떻게 마무리가 될지, 제대로 마무리하기가 힘들 내용일거라 마음대로 넘겨 짚었었는데.. 역시 에쿠니 가오리님. 결말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스토리였다.
얼마나 사랑을 하였으면 이토록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일 수 있을까.
가녀리고 약해보이는 그녀의 느낌이었지만 정말 집념 하나로 그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아주 오랜 세월을 말이다.
사랑이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채 그리움을 키워와서, 더욱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된 것이었을까.
엄마는 자신보다 더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거라 생각지도 못하고, 지금의 삶을 낙담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 그 사랑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처연한 사랑의 느낌, 하지만 자신 안에서 너무나 반짝이는 그 사랑의 느낌.
요코와 소우코의 삶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그런 스토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