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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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과 모험, 일상과 예술, 죽은 삶과 살아있는 삶


서머싯 몸 저, '달과 6펜스'를 읽고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으나 끝내 제목은 설명되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해설을 일부러 읽지 않고 유추를 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영어 단어 'lunatic'이었다.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정신 나간' 혹은 '미친'을 뜻한다. 나는 '광기 어린'이라고 읽었다.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달’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광기를 부추긴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늑대인간이 짐승으로 변하는 시간은 보름달이 뜬 밤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하이드가 악행을 저지르는 밤거리 위에도 달이 떠 있었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모해 가는 공간적 배경 역시 도심의 밤거리와 차가운 달빛이었다. 문학적으로 달빛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기를 발현시키는 어둡고 은밀한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착상을 '달과 6펜스'에 적용시켜도 말이 된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을 '광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스트릭랜드가 아내와 두 자녀, 안정된 직장, 집, 재산까지 모두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니 그려야만 했기 때문에, 파리로 떠났던 날 밤하늘에도 보름달이 떠있지 않았을까 싶다. 스트릭랜드의 떠남은 이성과 합리로는, 나아가 윤리나 도덕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 나는 이를 광기 말고 달리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달은 이 작품 속에서 직접적인 배경이나 소재로 등장하진 않지만, 마치 늑대인간이나 하이드나 조커를 발현시킨 것처럼 스트릭랜드 안에서 잠자고 있던, 그렇다고 개성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도 모자란, 광기 어린 그 무엇을 깨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비단 스트릭랜드에게서만 발견되지는 않는다. 작품 속에서 상황과 원인은 다르지만 평소와 전혀 다른 삶으로의 전환을 이행해 버리는 인물이 세 명 더 등장한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나의 상상 속에서는 이들이 갑작스러운 삶의 전환을 이행하던 날에도 보름달이 떠 있었을 것만 같다. 


먼저 블란치 스트로브의 경우다. 이 여인은 처음엔 더크 스트로브의 아내로 등장한다. 하지만 어느 날 남편의 간곡한 부탁으로 죽기 직전의 찰스 스트릭랜드를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간병하게 되는데, 그 기간에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남편도 집도 재산도 모두 버리고 스트릭랜드를 따라나서겠다고 선언한다. 남편도, 화자도, 심지어 스트릭랜드조차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왜 그녀는 그런 결단을 내렸던 것일까. 스트릭랜드에게 비친 달빛의 힘이 블란치 스트로브에게까지 미쳤던 것일까. 정황적인 추론으로는 육체적 관능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부정적이고 불쾌감을 주는 외로운 독고다이 캐릭터인데 저자인 서머싯 몸은 그를 남성적인 육체를 가진 인물로 그려놓았다. 아마도 블란치는 간병 중 찰스에게 모성애와 함께 본능적인 관능이 깨어남을 느끼고 남편으로부터 얻지 못했던 쾌락을 향유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듯하다. 이에 대한 화자의 해석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그녀는 다정하면서도 성마르고, 생각이 깊으면서도 분별이 없던 복잡한 여자였지만 이제는 딴사람이 되어 버렸다. 바커스 신의 무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욕망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녀가 그런 비상식적인 결단을 내린 건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은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 함구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스트릭랜드로부터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무엇을 얻지 못했던 듯했다.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으며, 입과 식도가 타버려 극심한 고통을 받다가 병원에서 죽음에 이른다. 아, 그녀의 죽음은 또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인물은 책의 후반부에 잠시 소개되는 아브라함이라는 유능한 의사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실력을 가진 천재 외과의였다. 그에겐 모든 게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휴가차 배를 타고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했을 때 그는 어떤 계시와 같은 순간을 맞이한다. 에피파니였을까. 모든 게 돌연 새롭게 보이고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나머지 인생을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었다. 그는 그 순간 이후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만 것이었다. 실제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에 힘입어 남은 인생을 부와 명예와 권력을 거머쥐고 살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어쩌다가 이런 기구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 아니, 그에게 선택권이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단순한 충동에 휩쓸렸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에게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삶은 무언가 압도적인 힘에 의해 이끌려 오게 된 외나무다리가 아니었을까. 이를 광기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과연 설명할 수 있을까.


나머지 인물은 찰스 스트릭랜드가 마지막 숨을 쉬었던 타히티에서 끝까지 그의 곁에 머물며 그를 도왔던 아내 ‘아타’이다. 비록 중간에 티아레가 중개인으로 역할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아타는 타히티에 와서도 여전히 독고다이 캐릭터로 살아가는 스트릭랜드의 아내가 되어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그를 도우며 살기로 작정한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다. 그녀 혼자만의 결정이었다. 앞에서 소개했던 블란치가 스트릭랜드를 따라나섰던 이유와는 다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타는 스트릭랜드의 모든 것을 수발했고 아이까지 낳았으며 나중에 문둥병으로 죽어가는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 결연한 여인이었다. 무엇이 그녀에게 이런 삶을 선택하게 했던 것일까. 아니, 이번에도 이 질문은 틀린 질문일 것이다. 그녀에게도 어떤 운명 같은 순간이 닥쳐왔고 그저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무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이런 갑작스러운 삶의 전환을 광기라는 표현을 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찰스 스트릭랜드, 블란치 스트로브, 아브라함, 그리고 아타, 이렇게 네 인물은 이 작품 속에서 일생일대의 운명 같은 삶의 전환을 맞이했고, 비록 끝은 다르지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 없이 마지막까지 후회 없이 그렇게 살았다. 한동안 내 머릿속은 이들의 패턴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바빴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솔직히 내 작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어떤 근거를 대며 설명하려 해 보아도 근사치에 머물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에서는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엔 이런 일이 의외로 많이 일어나지 않는가. 나는 다시 겸손해진다. 세상엔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겸허히 인정하게 된다. 그것의 시작이 광기이든 무엇이든 상관은 없다. 광기라고 해석하는 것조차 하나의 이성적인 접근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제목에서 '달'을 제외한 나머지 ‘6펜스’에 대한 해석을 해 볼 차례다. 작품을 다 읽고 달의 의미를 유추했더니 그와 대조적인 이미지로써 6펜스가 자연스레 해석되었다. 6펜스는 돈이다. 달이 안정적인 삶 혹은 일상에서 사람을 끄집어내는 원인으로 작용했다면, 6펜스는 그와 반대되는 힘일 것이다. 달이 원심력이라면 6펜스는 구심력으로 작용했을 거라는 말이다. 즉 안정적인 삶 안에 가둬두려는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앞에서 언급한 네 인물은 모두 6펜스의 삶으로부터 달의 이끌림으로 인해 일생일대의 대전환을 이뤄낸 사람들이다. 원의 바깥으로 궤도 이탈을 이뤄낸 소수의 사람들인 것이다. 


6펜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다수다. 그들은 주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대의 조류이기도 하고, 그 시대의 얼굴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세속에 따라 살아가는,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그것이 추구하는 방향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그 안에서 안정과 만족을 얻으며 살아가는 무리들인 것이다.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익명성에 의지하여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살아간다.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네 인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6펜스의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화자처럼 나름대로의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달의 삶과 6펜스의 삶 양쪽 모두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부류도 존재할 테지만 말이다. 


문제는 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바로 옆에 존재하는 6펜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문자적으로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행운을 거머쥐는 자가 되기도 하며, 기회주의자처럼 눈치를 보다가 자신의 이익에 위해 더욱더 견고한 6펜스의 삶을 살아가는 자로 강성해지기도 한다. 


먼저 스트릭랜드의 첫 아내의 경우다. 그녀는 전적으로 피해자로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모든 걸 버리고 떠나면서 편지 한 장 달랑 남겼는데, 그 편지에는 왜 떠나는지에 대한 이유는 적혀 있지도 않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만 적혀 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갑자기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로서 느꼈을 그 황당함이 적이 공감이 간다. 그리고 남편이 떠난 이유가 어떤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라는 말에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반응 역시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그녀는 남편이 달의 삶을 사는 사람인 줄 진짜 몰랐던 것일까. 부부인데도 남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속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래놓고도 안정적인 부부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일까. 스트릭랜드의 인격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는 위선과 거짓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아마도 스트릭랜드는 6펜스의 삶에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깊숙이 빠져 살아가는 아내와 대화조차 되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었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달의 삶을 사는 사람과 6펜스의 삶을 사는 사람 사이의 소통이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하는 물음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그다음으로는 블란치 스트로브의 남편 더크 스트로브의 경우다. 그 역시 스트릭랜드 부인의 데칼코마니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떠난 아내 때문에 불행을 겪게 되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은 없었지만 스트릭랜드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매우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체면도 자존심도 내던지고 광대짓을 기꺼이 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선한 인물이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스트릭랜드를 온마음 다해 도운 것밖에는 없다. 스트릭랜드를 일견에 싫어한 아내를 간신히 설득해서 아픈 스트릭랜드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자고 했던 사람도 더크 스트로브였다. 그런데도 그는 친구도 잃고 아내도 잃는 신세가 되고야 만다. 저자는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인생은 익살극의 소란스러운 대사로 가득 찬 비극과 같았다." 그래서일까. 익살극을 펼치며 그의 너그러움 성품을 발휘해도 그의 삶은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더크 스트로브를 보며 나는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 역시 이런 말을 덧붙인다. 허를 찌른다. "그처럼 허다한 모순을 안겨주고선 이 사내로 하여금 당혹스럽고 냉엄한 세상에 맞서게 한 거 보면, 조물주의 장난도 잔인하기만 하다." 전적으로 동의가 되는 문장이지 않을 수 없다. 뭐라고 분석할 수조차 없는 이 인물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기로 한다. 


마지막으로는 알렉 카마이클이라는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알렉산드리아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그로 예정되어 있던 여러 자리는 아브라함에 밀려 언제나 2등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알렉 카마이클의 것이 되었다. 그는 대여섯 개 병원에서 정식 의사직을 가지고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다. 화자의 친구이기도 한 그는 화자에게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 모든 게 아브라함 덕분이라고. 하지만 그가 아브라함에게는 인격이 없었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화자뿐 아니라 나 역시 반기를 들 수밖에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인격이 없었던 게 아니라 6펜스의 삶이 주는 최고의 복을 넙죽 받아들이는 이해타산적인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아 용기 있게 떠난 사람이었다. 알렉 카마이클은 6펜스의 세상에서는 아브라함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이 정착한 달의 삶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외계인에 불과했다. 그래서일까. 알렉 카마이클의 삶에서 공허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의 삶을 달의 삶과 6펜스의 삶, 이런 식으로 둘로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분법이 아니라 방향으로 해석하면 생각해 볼 만한 거리가 많은 것 같다. 6펜스의 삶이 인간의 모든 삶인 것처럼 믿고 그 안에서 경쟁하고 피라미드 상층부를 차지하려 애쓰며 안정과 만족을 얻으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광기라는 강한 어감의 단어를 사용할 만큼 인간 내면에 깃들어 있는, 다시 말해 6펜스의 삶에 반대되는 가치를 지향하며 언제나 저 너머를 궁금해하고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안정과 만족이 아닌 인간다운 그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내 삶은 어느 쪽을 향하고 있을까. 나는 잘 정돈된 행복만을 얻으면 된다고 여기고 있을까. 물질적인 만족과 기쁨이면 만사가 괜찮다고 여기고 있을까. 나는 안정을 원할까, 모험을 원할까. 내 삶은 너무도 안정적이어서 죽은 것 같은 삶일까, 불안정하고 불확실하지만 언제나 길 위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살아있는 삶일까.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은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극단으로 보여준 이 소설을 통해 우린 우리의 현재 삶의 방향을 성찰하고 미래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바라기는 6펜스의 삶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달의 삶을 잊지 않고 항상 추구하며 살아내려고 애쓰는 삶이 되면 좋겠다. 가능할 런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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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 명강의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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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풍지대에 아주 조금의 바람과 파도를


박찬국 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읽고


어쩌다가 읽게 된 책. 올해 1월부터 동녘에서 나온 '처음 읽는 독일 현대 철학'을 통해 2주마다 철학자 한 명씩 훑는 프로젝트를 지인 두 명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철학을 읽는다고 하면 일견에 대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2주 동안 두세 시간만 내면, 비록 여전히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정도에 만족해야 하지만, 충분히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철학을 전공하고 싶지도 않고, 철학적인 지식을 더 많이 머릿속에 축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고 하는 것과도 같은, 행위는 나도 모르게 젖어 버린 익숙함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낯섦과의 조우를 만들고, 그 결과 자칫 무풍지대가 될 수도 있을 내 마음과 생각에 아주 조금의 바람과 파도를 가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함께 하는 두 명의 지인도 나와 같은 고백을 하는 걸 보면 이런 나의 믿음은 현실에서 어느 정도 잘 작동하는 듯하다. 


총 열두 명의 철학자를 소개하는 책인데, 지난주에 여섯 번째로 만난 철학자가 하이데거였다. 박찬국 교수가 쓴 스무 페이지 정도의 그 글을 읽다가 뭔가 클릭이 되었고, 인터넷 서치 끝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제목도 근사하지 않은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라니. 삶을 짐으로 느낄 수 있는 존재자는 인간밖에 없다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으면서 동시에 삶을 짐으로 느껴본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흠칫하며 살펴보고 싶어 할 책인 것 같다. 


두세 시간이면 후루룩 다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 철학'의 하이데거 편,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을 읽은 사람이라면 훨씬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책은 그 스무 페이지의 확장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이데거와 에리히 프롬, 그리고 소로까지 연결시키는 논리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었다. 박찬국 교수의 말마따나 하이데거의 철학 혹은 사상은 기존의 서양 철학이 이성 중심이었던 것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철학을 전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이데거가 폄하를 받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는 말도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철학을 전공한 적도 없고 전공할 마음도 없는 내 눈에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배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일맥상통했으며,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즉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표현한, 숭고함이랄까 성스러움이랄까 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 솔직하게 드러나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철학보다 문학을 더 사랑하는 내겐 하이데거가 훨씬 문학적이기도 했다. 다른 철학자들처럼 인간을 마치 다 파악한 것처럼 군림하는 듯한 인상도 주지 않았을뿐더러. 인간을 신비 가운데 그대로 두고 그 자체를 존중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아서 이 또한 마음에 들었다. 때론 어떤 대상을 술어로 단적으로 풀지 않는 편이 그 대상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도모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다. 


에리히 프롬에 대한 책도 구해놓았다. 하이데거와 연결시켜 읽어보면 좀 더 깊고 풍성한 읽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월든'의 정체를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인지, 소로는 여전히 마음이 가지 않는다. 물론 여러 책에 발췌된 '월든'에 등장하는 소로는 정말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지만 말이다. 언젠가 마음을 좀 더 비우고 내가 아량이 좀 더 넓어지면 '월든' 완독도 가능해질 수 있겠지.


박찬국 교수의 해설이 쉽고 편해서 좋다. 어려운 전공 지식을 대중어로 쉽게 풀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아주 조금 안다. 하물며 하이데거라는 거인을 이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건 아무래도 저자의 탁월한 내공 덕분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다른 책들도 천천히 읽어 봐야겠다. 이런 식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하지만 적은 시간을 활용하는, 공부는 언제나 즐겁고 유익하다.


#21세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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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따라 한 걸음씩 - 성경적 교회론의 신학과 실천
안진섭 지음 / 샘솟는기쁨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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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설교하다


안진섭 저, '말씀 따라 한 걸음씩'을 읽고


새누리2교회 대표목사이자 약 2년 전부터 나에겐 '우리 목사님'이 된 안진섭 목사님은 파킨슨씨 병을 앓고 계신다. 파킨슨은 알츠하이머 다음으로 대표적인 퇴행성 뇌질환이며, 알츠하이머가 기억력 감퇴 같은 인지 장애 쪽이라면 파킨슨은 도파민 신경세포의 소멸로 인한 운동 장애가 주된 증상이다. 


60세 이상에서 약 1퍼센트 내외의 발병률을 보이는 이 병을 앓았던, 혹은 앓고 있는 사람들 몇몇을 나는 알고 있다. 전설적인 권투선수 무함마드 알리,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주인공이었던 마이클 J. 폭스, 그리고 가톨릭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 한국인으로는 600백만 불의 사나이, 인디아나 존스, 그리고 '스타워즈'의 한 솔로 목소리를 맡았던 성우 양지운 등이다. 


무함마드 알리는 은퇴 후 3년 후인 1984년에 파킨슨을 진단받았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1942년생인 그는 2016년 향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킨슨 투병 32년 째였다.


마이클 J. 폭스는 1991년, 그러니까 그가 29세 때 조기 진단을 받았지만, 2026년 현재까지 활동을 35년째 지속하고 있으며, 파킨슨 연구와 치료에 많은 기부와 헌신을 이어가고 있다. 1961년 생인 그는 현재 64세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나이 71세 때 파킨슨 진단을 받았다. 1920년생인 그는 14년 동안 투병하다가 2005년 향년 84세로 선종했다. 


1948년 생인 성우 양지운은 그의 나이 69세가 되던 2017년에 파킨슨 진단을 받았다. 2026년 현재까지 9년째 건강을 유지하며 재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현재 78세이다. 


파킨슨은 꾸준한 재활과 가족, 친지, 친구의 관심과 도움을 받는다면, 내가 예를 든 경우처럼 평균 수명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 파킨슨병 자체가 사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폐렴이나 낙상으로 인한 골절 같은 부가적인 사고가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관리가 중요한 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안진섭 목사님은 50대 중반에 파킨슨을 진단받았다. 현재 6년째 투병 중이다. 책에서도 밝히듯 그는 2025년 3월 9일 주일 설교 시간에 파킨슨 진단받은 사실을 고백했다. 나는 그 고백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숙연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목사님이 그 고백을 하기까지의 마음이 헤아려져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진정한 고백은 자유케 하는 힘이 있는 법. 나는 이미 목사님의 거동을 보고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생물학자의 눈에는 달리 보이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사실로 공표되고 나서 모든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좋게 해석하게 되었다. 


진단받기 전과 달리 운동 장애가 생겨 생활에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건 이 책 초반에서부터 고백된 문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나 목사라는 직업이 쓰고 말하는 것이 주된 활동인데, 이것들 모두에서 예전과 다른 점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의 괴로움은 나로선 상상하기 힘들다. 잘하던 것들을 잘할 수 없게 된 자의 비애는 겪어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실제로 설교 시간에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빨라지고 발음이 부정확해질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기도가 된다. 


저자가 책의 1부를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말씀으로 시작한 것처럼, 나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안진섭 목사님에게 파킨슨을 허락하신 이유를 가시(간질(뇌전증))를 바울에게 주셨던 이유에서 찾는다. 그리고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안진섭 목사님도 동일하게 질병으로 인한 약함이 아닌 그 연약함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고백한다는 점에서 나는 살아있는 믿음과 견고한 신앙,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다. 목사님의 설교도 좋지만 목사님의 존재 자체가 내겐 은혜가 된다. 이건 목사님이 바라신 삶으로 전하는 설교의 열매일 것이다. 부디 꾸준한 운동과 재활을 지속하셔서 가족과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으로 오래오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날까지 잘 감당하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 책은 성경적 교회론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담고 있다. 성경적이라는 말이 많이 오염되어 있는 터라 나는 의심의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나, 책을 다 읽고는 오히려 성경적이라는 말은 이렇게 써야 제대로 사용하는 거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실제로 군더더기 없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원래 안진섭 목사님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드라이하고(?) 딱딱하지만(?) 핵심과 본질을 정확히 간파하여 살만 발려내는 스타일로 교회론을 풀어준다. 일반인들이 읽기에 어려울 정도로 현학적인 이론서가 아니라 한 편의 설교처럼 글을 따라가다 보면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글로 이뤄져 있다. 그러므로 '이론서'라는 단어 때문에 혹여나 이 책에 진입하기 꺼려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건 큰 오산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리고 목사님이 밝히셨듯 성경 속 이야기들만이 아니라 새누리2교회가 공동체로서 함께 겪은 이야기들도 있어서 지금도 예수가 머리 된 교회는 건강할 수밖에 없고 생명력이 숨 쉴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충분히 느끼게 되리라 생각한다. 


새누리2교회에 몸 담은 지 2년이 다 되어 간다. 이 교회로 오게 된 건 선율 출판사 이재원 대표님의 추천이 발단이었지만, 실제로 교회를 방문하여 목사님의 설교를 여러 번 듣고 교회 분위기를 맛본 뒤에야 나는 등록을 결정했었다. 내가 느낀 건 건강함이었다. 건강한 분립 개척의 열매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 목사의 제왕적이고 수직적인 시스템이 아닌 모든 성도가 수평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분위기로부터 나는 다른 교회에서 느끼지 못했던 건강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새누리2교회에서는 장로, 권사, 집사 같은 직분이 없다. 모두 형제, 자매다. 회중 중심의 침례교단 영향 때문만이라고는 설명하지 못하는 새누리2교회만의 분위기가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를 교회가 교회답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기업이 아닌 교회, 사교모임이 아닌 교회, 교회 다운 교회로 새누리2교회가 영원하길 기원한다. 안진섭 목사님이 은퇴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 이후에도 영원히 유지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샘솟는기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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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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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설, 한 편의 수업


문지혁 저, '중급 한국어'를 읽고


'초급 한국어'와는 달리 '중급 한국어'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이 아닌 한국이다. 주된 시간적 배경은 저자의 분신이자 동명의 작품 속 화자인 문지혁 작가가 귀국하고 8년이 지난 후, 여전히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19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2021년 3월부터 강원도에 위치한 어느 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던 한 학기 동안이다. 이번에도 한 학기 밖에 가르치지 못한 신세가 된 화자의 등단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작가로서의 자조적인 뉘앙스는 ‘초급 한국어’에 이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뉴욕에서와는 달리 이젠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는 화자는 삶의 다른 부분에서의 의미와 행복을 찾은 듯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초급 한국어’에서보다 ‘중급 한국어’에서 나는 화자로부터 조금 더 인간다운 면모를 읽어낼 수 있었고, 작가를 넘어 남편이자 아빠로서도 공감할 수 있었다. 비록 내가 저자의 작품에 본능적으로 끌렸던 이방인으로서의 이질감은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초급 한국어'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설정 때문에 '중급 한국어'는 과연 누구를 대상으로 수업을 할지 궁금했다. 예전과는 달리 한국에 많이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대상일 거라는 나의 일차적인 예상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이번에도 한국어 수업일 거라고 예상했던 것도 내가 '중급'이라는 단어를 과소평가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제목을 다시 보니 '한국어 수업'이 아닌 '한국어'이지 않은가. 아차 싶었다. '초급 한국어'가 미국에서 외국인에게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업이었다면, '중급 한국어'는 한국에서 한국인에게 한국어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그리고 한국어의 모음이나 자음, 기초적인 문법과 어법, 상황별 예시 문장 연습 등을 가르치는 것이 초급에서 다뤄졌다면, 이미 그런 것들을 모국어로써 당연히 할 줄 아는 이들에게 입으로 내뱉는 한국어가 아닌 글로 쓰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게 중급에서 다뤄지고 있었다. 내 생각은 확장되어, 그렇다면 '고급 한국어'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만약 있다면 아마도 그건 말해지지 않은 말들과 써지지 않은 글들을 말하고 쓸 줄 알고, 또 듣고 읽어낼 줄 아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영어와는 달리 한국어는, 아니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나라가 아닌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발화되지 않고 쓰이지 않은 언어들이 더 중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강원도에서 한 학기 동안 글쓰기 수업을 하는 한 학기 동안 화자는 일주일에 한 번 서울에서 강원도로 차를 몰고 내리 두 강의를 하고 당일치기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을 소화한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말만 들으면 여유롭다고 할 수 있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나머지 6일에 수업이 없는 일정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날 예기치 못한 사건이라도 터진다면 머피의 법칙을 거뜬히 초월하여 모든 것이 엉망으로 무너지고 마는 날이 되기 십상이다. 소설은 이런 극적인 상황을 자연스럽게 연출해 내고 그로부터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며 독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게 되는데, 이런 패턴은 ‘중급 한국어’에서도 적절하게 다뤄진다. 아이가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아내가 코로나에 걸리기도 하는 등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건들이 화자에게도 발생한다. 어디 이것뿐인가. 미국 유학까지 했고 귀국 후 8년간 (아니 그 이상) 끊임없이 등단을 위해 애를 썼지만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마는 삶을 살아온 화자에게는 단 한 번의 작은 사건이 갖는 무게는 상대적으로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우울하고 한 편으론 무겁기도 한 공감대만이 아니라 가슴 따스해지는 에피소드와 소소한 일상 가운데 아주 가끔 드러나는 에피파니의 순간들, 그리고 삶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는 일화들도 적절히 배치하여 가독성을 끌어올린다. 무엇보다 문지혁 작가의 문체가 정갈하여 쓰이지 않은 여백까지도 무언가로 채우는 듯한 기분으로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이 장편소설을 완독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작가이자 글쓰기 선생답게 저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일상들을 씨줄과 날줄로 자연스럽게 잇기도 하고 시제와 인칭 등을 다채롭게 사용하며 작품성 높은 소설이 어떤 것인지 말없이 보여준다. 내겐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수업으로 읽혔다.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 디테일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한 수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모든 이에게 이 책은 읽어볼 만한 소설이겠지만, 특히 소설 지망생 혹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적어도 세 작품 이상을 정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문지혁 작가의 책은 벌써 다섯 권째다. 그의 문체에 익숙해졌고 더 좋아졌다. 행간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이제 몇 주 전에 사놓은 ‘나이트 트레인’이 남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야간열차가 영어로 나이트 트레인 아니던가. 어떤 작품일지 기대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문지혁 읽기

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

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

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

4. 초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4

5. 중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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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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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이질적인


문지혁 저, ‘초급 한국어’를 읽고


문지혁 작가의 소설 ‘고잉 홈‘을 읽으며 뭔가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감성을 느낀 까닭은 그가 묘사한, 혹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미국 유학생의 불안정한 신분과 그에 따른 불확실한 삶, 그리고 그 삶 저변에 조용히 깔려있는 불안감에 남다른 공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문지혁 작가를 작가 반열에 올린 첫 작품인 ’초급 한국어‘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내가 느낀 건 아마도 '향수'였을 것이다. 미국 생활 11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전환점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긴 기간을 살아낸 내 감성을 한 단어로 압축하라면 아무래도 나는 ‘불안‘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아무런 배경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의 이방인의 삶을 핑크빛으로 채색하기에 나는 어리숙했고 서툴었으며 모자랐다. 때론 즐거움으로, 때론 성취감으로, 또 때론 기쁨으로 그 시절을 보냈건만 언제나 내 삶의 저변에 깔린 무시 못할 감정은 불안이었다.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 불안이 내가 문지혁 작가의 글에 끌리는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감성을 읊조리는 작가가 있어서 나는 참 다행이라고 느낀다.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내겐 소중했던 그 시절의 아련한 감성을 되살릴 수 있어서. 


이 작품은 저자의 분신인 (심지어 이름도 같다) 화자가 이십 대 중반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대학원을 마치고 한국어 강사로 일하게 되는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인 강사. 화자는 자신의 대학원 전공과도 다른 이 일을 한 학기 밖에 할 수 없었다. 영주권 없는 유학생이 고정된 직장에 고용되어 비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일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반강제적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아련하고 아쉬운 한 학기 동안 그에게 일어난 소소한 일상을 소개한다.


한국어 수업 경험도 없었기에 준비를 많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덜컥 와 버린 기회가 가져다주는 묘한 긴장과 불안은 느껴본 자만 아는 감성에 속할 것이다. 내겐 화자의 행간이 눈이 아닌 몸으로 읽혔다. 나도 모르게 자주 화자에 나를 대입시키기도 했다. 이는 그만큼 저자의 필력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미국 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는 독자가 느끼는 감도는 아무래도 더 클 수밖에 없었겠지만.


곳곳에 코미디적인 요소도 나오고, 함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대화나 문장들이 나온다. 무심한 듯하지만 문장들 하나하나를 가려낸 저자의 정성이 매 페이지마다 느껴졌다. 소설 같지만 수기 같기도 한 일화들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었고,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드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나처럼 미국 생활을 경험한 독자라면 적어도 두세 배 이상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저자가 여러 번 내뱉은 작가로서의 자학적인 문장들을 읽으며 마음이 살짝 측은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보란 듯이 한국을 대표하는 차세대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으니 '초급 한국어'를 첫 출간했던 6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그의 위상이 나는 반갑기 그지없다. 


이제 '중급 한국어'를 읽을 차례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문지혁 읽기

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

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

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

4. 초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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