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준 것 마음산책 짧은 소설
문지혁 지음, 박선엽 그림 / 마음산책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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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성장, 작품으로 말하다

문지혁 저, ‘당신이 준 것’을 읽고

KISS
거의 이십 년 전 대학원 워크숍에서 썼던, A4지 한 장 정도 분량의 초단편 소설. 첫 문장부터 긴장과 스릴을 조성하다가 외통수의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는 강렬한 작품. 제목의 철자를 다시 보게 되고 작품 속 공간이 어딘지 재차 확인하게 되는 이야기. 초단편 소설은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하는 걸 보란 듯 보여주는 작품.

강과 맥주
완결성을 갖는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아주 작은 한 장면을 묘사한 듯한 작품.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맥주만 홀짝거리는 한 남자와 마음이 이미 많이 멀어진 듯, 식은 듯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가야 한다며 먼저 일어나 가버린 여자. 여자의 맥주는 거의 마시지도 않은 상태였다. 시간은 남자와 여자에게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맥주를 세 캔이나 마시던 남자에게 시간은 홀짝대는 만큼 멈추고 있었으나, 맥주를 거의 마시지도 않은 채 침묵을 지켰던 여자에게 시간은 무겁고 느리게 계속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먼저 입을 열고 일어나 가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멈출 필요가 없어진, 홀로 남겨진 남자는 여자가 남긴 맥주를 마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강물에 그냥 흘려보낸다. 하지만 네 개의 빈 캔은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간다. 미련이었을 것이다. 

7초만 더
기다리던 메시지는 그녀에게 고백을 한 뒤 2주 만에 왔다. 유니온 스퀘어에서 만나자는 건조한 텍스트가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 그는 평소에 타지 않던 라인의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향한다. 운명이었을까. 그가 무작위로 튼 곡 제목은 ‘추억과 함께 영원히 둘로 남는다’였고,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방화범의 방화로 그는 곡이 끝나기 7초 전 생을 마감한다. 7초가 더 지나도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가 바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마치 그 곡을 끝까지 들으면 혼자가 아니라 둘로 남을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결국 ’추억과 함께 영원히‘까지만 듣고 ‘둘로 남는다‘는 듣지 못했다. 

굿나잇, 웨스트엔드
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덴마크 출신의 교사 라리사를 화자는 종강파티 2차를 가기 직전에 찾는다. 그녀의 집으로 택시를 타고 달린다. 건물에 도착했으나 어느 집이 그녀의 집인지 모른 채, 머릿속에서 많은 문장을 만들었지만 우물쭈물하다가 전화도 하지 못하고 그는 문자 하나만 달랑 넣고 만다. Good night. 그리고 다시 2차 장소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남자가 애절하다는 느낌보다 찌질하다는 생각이 남는 작품. 아마도 내가 더 이상 이십 대가 아니라 그런 것이리라.

싱글 허니문
청첩장도 돌리고 여러 예약도 하고 신혼여행도 예약한 젊은 예비부부 이야기. 예비 신부는 결혼 3주 전 급작사로 세상을 떠난다. 아내가 될 여자가 사라진 ‘무의미‘와 싸우면서 어쩌다 혼자 살아남게 된 남자는 여자가 도맡아 준비했던 신혼여행을 취소하지 않고 혼자 떠나기로 한다. 세계 3대 야경을 볼 수 있는 한 곳, 하코다테였다. 호텔에만 처박혀 있다가 체크아웃을 하고 전망대에 오른 그는 호텔에서 썼던 편지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홀로 선 전망대에서 날린다. 까마귀 떼가 그것을 잽싸게 잡아채 하강하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는 저녁 비행기 시간에 개의치 않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서 있는다. 죽은 예비 신부의 전령이었을까. 야경을 보지도 않고 돌아가려는 남자를 사로잡는 그 장면은. 

핏자국
카페에서 발견한 핏자국을 ‘그 핏자국‘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소설을 쓰는 일임을 말해주는 이야기. 문지혁 작가의 짧은 수업을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자인 듯한 화자는 정체 모를 핏자국으로부터 남녀 사이의 이별 장면을 상상하며 손목을 그은 여자를 떠올린다. 그렇다. 아주 작은 재료로도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소설은 그런 것이다. 

얼음과 달
‘핏자국’에 이어 허구적 상상력은 이렇게 작동하는 거다,라는 예시를 보여주는 작품. 한 여자에게 술을 얻어 마시고 잠에서 깼는데 얼음 욕조 안에 있더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 그 남자는 신장을 도둑맞은 직후였다. 그리고 매일 괴물이 되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이 연출되고 끝내 살아남게 되는 한 여자의 이야기. 여자가 가까스로 탈출한 날 밤은 언제나 붉은색의 만월이었다. 화자가 술집에서 그 여자와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여자가 먼저 떠나고 밖을 나왔는데, 갑자기 코가 사라진 남자가 와서 자기 배를 찌른다. 하늘을 보니 붉은빛 만월이었다. 단편소설만이 줄 수 있는 이런 과감하고 조각난 상상력의 향연.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런 식의 소설을 읽고 나면 똥 싸고 제대로 닦지 않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무책임함’이 단편소설의 독특한 맛이리라.

당신이 준
이야기가 막 진행되려 하는 차에 끝나버리고 마는 듯한 소설. 예전에 선물 받았던 오르골의 의미를 소설이 조금만 더 진행이 되면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아 아쉬운 작품. ‘당신이 준 시간‘이라는 메시지도 모호하기만 한 작품. 몇 페이지만 더 저자가 써줬으면 싶었던 이야기.

체이서
SF 소설. 안드로이드인 주인공은 탐정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부터 시작된 오래된 일이지만, 안드로이드가 안드로이드를 대하는 방식도 작품 속에서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설정이다. 살인사건 해결로 목돈을 마련하여 안과 수술을 받으려는 주인공 안드로이드와 그와 친분이 있는 경찰 안드로이드 프랭크. 프랭크는 주인공이 안과에서 마취를 당했을 때 이용당했음을 간파해 내고 주인공을 살인사건 용의자로 체포하려 한다. 기지를 발휘하여 주인공은 프랭크를 공격하고 서로의 칩을 맞바꾸는 선택을 한 뒤 실행에 옮긴다. 안드로이드에게도 정체성이란 게 있는지, 중요한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묻는 듯한 이야기. 이 책을 구성하는 열두 편의 짧은 소설 중 꽤 긴 작품임에도 내겐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여전히 모호하게 다가왔다. 장편으로 확장하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했다.

홀 시커
역시 SF. 외계인은 물론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공간 속 이야기. 주인공은 가방 속 알 수 없는 책 한 권을 읽으며 먼 출장길에 오른다. 그 책은 지구동공설에 관련된 책이었고, 언젠가 사라졌다던 할아버지 이름도 적혀 있었다. 주인공의 아버지 역시 우주 싱글라이딩을 하다가 어느 날 돌아오지 않은 채 행방불명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듯한, 아버지가 마지막 모습을 보였던 좌표 가까이 가게 된 주인공은 자신이 가지고 간 혈액샘플이 반지 형태로 가운데 구멍이 생긴 모양새를 하게 된 것을 샘플 문제로만 여겼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블랙홀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지구의 구멍을 찾는 자, 홀 시커를 우습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홀 시커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작품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우주의 구멍 블랙홀을 찾게 되고 빨려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지구의 구멍과 우주의 구멍을 연결시킨 이야기. 앞뒤의 연결에 어색하고 뜬금없다는 인상이 강했던 소설. 역시 장편으로 확장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이 책에 실린 열두 편의 작품 중 긴 편에 속하는데 읽는 내내 엉덩이에 힘을 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했던 소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의 전개는 물론 불친절한 연결조차 작품성을 더 훌륭하게 만든 것처럼 느껴졌던 작품. 완전한 결론이 나지 않아 여전히 궁금함이 남았지만, 정유정의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까지 든 수작이었다. 다이아몬드와 연필의 대비도, 꽃반지와 다이아몬드 반지의 대비도 그 상징성을 잘 드러내 주었다. 택배 주인을 알게 되기까지의 주인공 부부의 모습들에서도 나는 인간 본성과 심리를 통찰할 수 있었다. 문지혁 작가가 이런 유형의 소설을 장편으로 쓰면 딱이겠다는 강렬한 생각이 들었다. 써주세요 작가님~ 제2의 정유정 작가로~

멸종과 생존
이 책의 저자인 문지혁 작가가 등장하는 소설. 그러나 시간대는 현재가 아니다. 살짝 디스토피아의 뉘앙스마저 느껴지는, 몇 년 혹은 몇십 년 뒤일까, 아니 오지 않길 바라야 하는 시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북토크를 한다. 종이책도 마지막인 듯하다. 출판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문지혁 작가의 우려가 허구적 상상력을 입고 구체화된 현실일 것이다. 고등학생인 첫아들이 북토크가 끝날 무렵 들어와 종이로 만들어진 포스터를 가져도 되냐고 묻는다. 학교 과제를 하기 위해서였다. 주로 새벽에 작업을 하는 작가에게 이메일이 온다. 첫아들이 보낸 거다. 발표자료를 검토해 달라는 부탁인데 첨부파일 제목이 ‘멸종과 생존: 종이책이 사라진 39가지 이유와 생존자를 아빠로 둔 나의 북 토크 탐방기’였다. 작품은 주인공이 아들에게 피드백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문지혁 작가의 종이책에 대한 염원과 사랑이 담긴 글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종이책이 영원하길 바란다. 

총평
눈여겨보고 있는 차세대 한국작가 문지혁의 일대기 혹은 성장기를 그의 자서전이 아니라 작품으로 읽은 느낌이랄까. 극초단편부터 초단편, 단편까지 여러 분량, 그리고 스릴러, SF, 드라마 등에 이르는 여러 장르를 뛰어넘는 열두 편의 작품들을 읽으며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문지혁 작가의 사상과 시선, 작품 속에 녹아든 그의 고유한 정서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생각. 다른 하나는 소설가의 성장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구나, 하는 깨달음. 

둘 다 내겐 유익했다. 무엇보다 문지혁 작가가 강사로 수업하는 내용의 청사진을 작품으로 본 것 같아서 좋았다. 소설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이런 식으로 상황을 전개하고 반전을 주는구나, 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나도 소설 습작을 하는 취미가 있고 언젠간 멋진 장편을 하나 쓰려고 염두에 두고 있는 터라 내게 이 책은 하나의 소설 쓰는 교본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위에서 각 작품에 대한 감상을 짧게 나누면서 잠시 언급했지만, 문지혁 작가에게는 정유정 작가 스타일의 스릴러, 그리고 ’고잉 홈‘에서 물낀 풍겼던 이민자만의 고유한 정서와 감성 혹은 문화를 소외나 배제 혹은 소수자라는 개념과 연결 지어 아련한 느낌을 주는 소설 형식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작품을 더 써주길 기대하게 된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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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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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에서 작가로: 나만의 목소리, 나만의 언어로


파스칼 메르시어 저, ‘언어의 무게’를 다시 읽고


같은 영화를 다시 볼 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감동은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여유에서 비롯된다. 그다음 장면이 이전보다 궁금하지 않기 때문에 줄거리 파악에 상대적으로 힘을 덜 들이게 되며, 처음 볼 때 놓쳤던 부분들까지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원작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단순한 관객을 넘어 스스로 감독이나 원작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 


같은 책을 다시 읽게 될 때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영화와 차이점이라면 '상상력의 능동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는 감독의 상상력이 기술력 및 재력과 타협한 지점에서 가시화되어 관객은 그저 수동적으로 감상하고 감동할 뿐이지만, 책의 경우는 영화에서의 감독처럼 이야기를 가시화시키는 매개자가 없기 때문에 같은 책을 재독 한다 하더라도 독자는 또다시 머릿속에서 초독 때처럼 능동적으로 상상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이 차별적인 수고로움(혹은 번거로움)이야말로 나는 재독의 고유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안 해본 사람은 절대 몰러).


초독 시 머릿속에 그렸던 책 속의 장면들이 재독 시에도 동일하게 그려지게 될 때, 나는 마치 고향을 찾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한동안 잊고 있던 책 속의 공간과 인물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일종의 안도감도 느낀다. 그러나 영화의 재시청처럼 초독 때 보지 못했던 부분들도 보게 되고 그것을 기존에 머릿속에 그렸던 장면들에 더하게 되는데, 종종 이 작업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가 될 때도 있고 대폭 수정되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상상력의 재구성'이다.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묘미는 바로 이것이다.


약 2년 전에 '언어의 무게'를 읽었을 때도 겨울이었다. 서사보다 묘사가 주를 이루고, 주인공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이 책은 분량만 해도 600페이지가 넘는다. 정신없는 서사가 빼곡한 600페이지의 장편소설과는 읽는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줄거리나 재미 위주로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아마도 충분히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 단순히 줄거리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깊은 사유의 열매이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과 상념들과 공명을 이룰 때가 많다는 것 등을 조금이라도 아는 독자라면 이 책을 내가 왜 두 번 읽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이 책은 재독, 아니 삼독을 해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다. 


이번에도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하루에 30페이지 정도씩 거의 매일 읽었다. 한 달이 넘게 걸렸다. 행복했다. 레이랜드와 함께 나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 위치한 몰로 아우다체에 앉아 바다에 발을 담그기도 했고, 아내와 사별하기 전에는 아내가 사장이었다가 사별 후 레이랜드 자신이 사장이었던 출판사 앞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카를로타가 가져다주는 커피도 마셨으며, 안드레이가 수감되었던 감옥 안에도, 출옥 후 감옥 같이 살던 그의 집 안에도, 그리고 레이랜드가 사준 집 안에도 거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뿐인가. 운명 같은 오진 때문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영국 햄프스테드에도 가볼 수 있었고, 그와 함께 런던 거리와 서점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 공간뿐인가. 레이랜드 옆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덕분에 레이랜드의 절친이 된 이웃 케네스 버크의 첼로 연주를 여러 번 들을 수 있었고, 그가 도움을 주고받았던 숀과 린도 만날 수 있었으며, 그가 과거에 번역을 했던 책의 저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이랜드의 딸 소피아와 아들 시드니의 내외면의 성장과정을 목도하며 아버지로서의 레이랜드를 볼 수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유지되었던 이들과의 교유가 나는 벌써 그립다.


교모세포종이 분명한 MRI 사진은 레이랜드의 것이 아니었다. 의사와 병원의 실수였지만, 레이랜드에게는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되어버렸다. 레이랜드는 자신을 병원으로 실려가게 했던 발작의 원인이 교모세포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 암은 치료가 불가능하며 시한부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출판사를 팔았고, 생을 정리하려고 했다. 날벼락처럼 찾아온 죽음의 방문 앞에서 그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 열흘만 일찍 사진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레이랜드의 인생은 과거의 연장선에 머물렀을 것이다. 출판사도 그대로 자기 소유였을 테고, 트리에스테에서 계속 살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러지 못했다. 딱 그 열흘 사이에 출판사를 팔고 삶을 마감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레이랜드에게 출판사는 단순한 건물이나 직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심장마비로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 리비아의 분신이었고, 영국에서 이탈리아로 옮겨오게 만든 이유였으며, 그의 모든 것이었다. 의사와 병원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하나가 레이랜드에게서 그의 모든 것인 출판사를 빼앗았던 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레이랜드에게 일어난 이러한 운명 같은 사건이 결코 그를 무너뜨리지도 불행하게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담담히 보여준다. 트리에스테에서 햄프스테드로의 이동 역시 그에겐 생소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지만, 그 덕분에 그는 새로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의대와 법대에서 각각 하얀 카스트와 검은 카스트에 신물을 느끼고 저항하며 정의롭게 인간답게 살려고 아등바등 대는 소피아와 시드니에게도 햄프스테드의 새로운 집과 그로 인해 파생된 여러 만남들은 얽기 설기 연결되어 영양분이 되었다. 


이쯤에서 다시 묻게 된다. 레이랜드에게 일어난 그 황당무계한 사건은 과연 그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을까, 아니면 행복을 가져다주었을까? 아니, 질문이 틀렸다. 불행과 행복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나는 이번에 재독을 하면서 잡아냈기 때문이다. 삶은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것,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은 소수이지만 늘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좋은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 보이고 연결된다는 것. 어쩌면 그 사건 덕에 레이랜드는 그가 작품 후반에서 그의 언어로 써 내려가는 소설 속 주인공 루이 퐁텐처럼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지 않을까. 어쩌면 그 사건 덕에 그는 암암리에 그를 잡고 있던 과거의 흔적을 뒤로하고 마침내 그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번역자에서 작가로의 변화는 곧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언제든 운명 같은 사건을 맞닥뜨릴 수 있다. 그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될 때 나는 아마도 레이랜드를 떠올릴 것 같다. 그 사건이 아무리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될지라도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고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다 보면 거기엔 새로운 길이 있고 행복이 깃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 길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 뒤에 숨지 않고 당당히 내 목소리로 삶을 노래하고 싶다. 나만의 언어로 삶을 써 내려가고 싶다. 그때 비로소 언어의 무게를 말할 수 있으리라.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 파스칼 메르시어 읽기

1. 리스본행 야간열차: https://rtmodel.tistory.com/1203

2. 언어의 무게: https://rtmodel.tistory.com/1726


* 파스칼 메르시어 다시 읽기

1. 언어의 무게: https://rtmodel.tistory.com/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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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 쓰기의 기술부터 작가로 먹고사는 법까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글쓰기 세계의 리얼리티
정아은 지음 / 마름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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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거절의 벽을 넘어 끌어안기까지


정아은 저,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를 읽고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는 글쓰기를 일상으로 장착시키는 지난한 과정과 저자가 생각하는 글쓰기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를 소개한다. 다른 글쓰기 책과 중첩되는 내용도 있지만, 저자만의 독특한 (글쓰기를 오래 경험한 사람은 아마 누구나 공감할, 그러나 글쓰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겐 어쩌면 도발적인) 주장인 "잘 쓰지 않겠다" 같은 내용도 있어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볼 만하다. 


2부는 여러 유형의 글쓰기에 대한 친절한 소개와 함께 각 유형의 글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잡아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연자의 목소리가 아닌 옆집 누나 같은 목소리로 사적인 경험을 동반해서 알려주는 방식이라 술술 읽힌다. 서평, 칼럼, 에세이, 논픽션, 그리고 소설의 차이를 잘 모르는 분들이라면 유익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에 불이 켜진 시점은 3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빨라졌고 들리던 시계 초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쓰는 마음'이라는 제목의 3부는 저자의 사적인 경험담으로 이뤄진다. 저자는 2013년 제18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그 이후 거절의 구렁텅이들을 숱하게 거친다. 누군가의 실패는 이미 실패에 몸을 담고 있는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는 법이다. 비록 본인에게는 모든 걸 손에서 놓고 싶은 순간들일지라도 말이다. 저자는 인생의 가장 낮은 지점들을 통과하며 비로소 본인이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외통수와 같은 나날들 속에서 사활을 걸고 작가라는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농담처럼 다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내 눈에는 저자가 예전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궤도에 안착한 듯 보였다. 3부 마지막 페이지에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참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4부에서는 책 출간 시 관여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저자의 개인 경험담이 진득하게 녹아있어 나는 4부를 3부의 연장선에서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저자가 함께 일한 편집자 세 분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나는 다시 시간을 잊고 말았는데, 편집자의 자질과 작가에게 미치는 위력, 긴장과 갈등이 얽힐 수밖에 없는 책 출간의 전반적인 과정, 작가의 눈에 비친 독자, 기자, 동료 작가의 위상이 실감 나는 문체로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이라지만, 저자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 읽고 다시 제목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을 보니 다르게 느껴졌다. 책 읽기 전에는 머리로 알던 것이 다 읽고 나니 가슴으로 느껴졌다고 할까. 작가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조금은 더 존경이 묻어나게 되는 의외의 열매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정아은 작가처럼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계속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추신> 저자가 사고를 당해서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소식을 방금 알게 되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 눈을 감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마름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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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란 뭘까? - 쓰기에서 죽기까지 막간 1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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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재능보단 글쓰기의 힘을


유진목 저, '재능이란 뭘까?'를 읽고


'재능이란 뭘까?'로 시작해서 '나는 나와 오래도록 함께하는 불행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로 끝나는 산문집. 저자는 스스로를 불행하다 말한다. 그것도 기꺼이. 그리고 첫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동안 자신이 불행한 재능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행복을 마음 다해 바란 적도 없고, 행복 또한 찰나에 지나버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 그녀가 불행을 사랑하기로 결정해서 다행인 걸까?


툭툭 내던지듯 써놓은 조각난 산문들 가운데 로버트 맥키의 말을 빌려 저자는 재능을 정의한다.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이 재능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은 삶에 대한 재능일 수 있겠다고 말한다. 삶에 대한 재능은 없지만 글쓰기에 대한 재능만은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를 진단하는 그녀. 그녀는 빠듯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들을 글쓰기와 바꾼 듯한 삶을 살아간다. 절박함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더 이상 표현이 불가능한,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선 듯한 삶을 살아간다. 페이지마다 우울과 냉소, 처절하고 지독한 현실, 그리고 자기 비하와 학대까지 이어지는 문장들로 수놓고 있다. 돈, 글, 삶, 그리고 또 돈, 글 삶… 저자의 무한반복되는 일상은 비참하다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 표현은 사용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직 글쓰기가 그녀에게 남아 있어서다. 나는 글쓰기의 힘을 믿는다.


이제 마흔 중반에 이른 저자는 다른 것들을 다 잃거나 버린 것 같은 초탈함에 접어든 것 같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은 '가정 불화, 결혼 실패, 그리고 두 번의 자살 실패를 한 몸에 겪어내면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싶은 정도에 불과하다. 인지적 공감은 가능하나 정서적 공감은 불가한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할 말을 잃는다. speechless.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 '가정 불화, 결혼 실패, 자살 실패'가 어쨌거나 살아있는 저자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길 바란다. 그런 과거의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글은 무겁고 어둡고 외롭다. 전염력이 강하다. 경쾌한 단문의 연쇄조차도 냉소를 머금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짧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연작이 출간된다면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불행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문장들이 줄어들어, 아니 사라져서, 다시 삶을 노래하게 되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글쓰기의 마력을 믿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쓰기 재능이 마력을 부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자의 문장력과 문체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것 같아서다.


#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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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김양현 지음 / 한국NCD미디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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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 읽고 쓰기의 소중한 열매


김양현 저, '책으로 보는 세상'을 읽고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저자도 그렇다. 김양현 목사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위기를 맞이했다. 인생이 휘청거렸고, 그는 가족을 데리고 제주를 향했다. 곧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던 차에 코로나19가 터졌다. 이번엔 경제적인 환란까지 겹쳤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제주는 그에게 유배지였던 것일까.


그는 코로나19 시기에 귀인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알 수 없는 신비로 예기치 못한 순간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시는 분이다. 현재 과신대 이사장인 팽동국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덕분에 읽고 쓰는 삶이 이미 일상이 되었던 그는 과신뷰에 연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한국 NCD 미디어 대표 김한수 목사와의 만남이 주어지고 과신뷰에 연재했던 글을 첫 책 '영화로 보는 세상'으로 펴낼 수 있게 되었다. 설상가상, 풍전등화, 누란지세의 위기로 다가왔던 코로나19 기간이 그에겐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축복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김양현 목사의 인생을 단 몇 줄로 요약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겠지만, 이 짧은 한 단락을 쓰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도하심을 보며 그분을 더욱 신뢰하는 마음이 단단해짐을 느낀다. 김양현 목사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그의 지독한 읽고 쓰는 성실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달란트로 작용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는 최근 라디오 방송에서 '책소목 (책을 소개하는 목사)' 코너를 맡아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방송에서 소개한 책들 중 일부를 정리하여 엮은 결과물은 그의 두 번째 저서 '책으로 보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그의 친필 사인이 담긴 두 저서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읽으면서 즐거웠고, 형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읽고 쓰는 유전자가 있다면 나 역시 그의 동생이라 하기에 부끄럽진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이 만남이 부디 선한 열매들을 맺고 사람을 살리는 데 귀하게 쓰임 받길 간절히 기도한다.


'책으로 보는 세상'은 크게 두 챕터로 이뤄진다. 1부는 '성경과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비신자와 새신자를 주 대상으로 하는 책들을 소개한다. 신학/신앙 서적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쉽게 접근하고 이해를 돕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자와 새신자가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나 같은 헌(old)신자가 읽어도 충분히 좋았다. 읽고 싶었던, 혹은 읽으려고 사두었다가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이 몇 권 있었고, 이미 읽은 책들도 몇 권 있었다. 저자의 신학과 철학, 그리고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해석한 책의 요점들을 읽으며 해석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다. 책 한 권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정리하는 데에 저자는 탁월한 능력을 소지한 것 같다. 


2부는 '청소년과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관련 문학(소설)들 위주로 소개한다. 우리가 잘 아는 엔도 슈사쿠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가 절반을 차지하고, 청소년의 현장을 담은 책들과 제주 현지의 역사와 관련된 책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고전과 현장을 고루 담은 것이다. 이 챕터 역시 1부와 마찬가지로 대화체로 되어 있어, 읽고 있노라면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부담 없이 읽어나가며 소개되는 책들에 관심을 가지고 읽고 싶어지는 글들이 가득하다. 


기독교인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책과 영화에 관심만 있다면 김양현 목사의 두 저서를 적극 추천한다. 


#한국NCD미디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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