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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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이질적인


문지혁 저, ‘초급 한국어’를 읽고


문지혁 작가의 소설 ‘고잉 홈‘을 읽으며 뭔가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감성을 느낀 까닭은 그가 묘사한, 혹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미국 유학생의 불안정한 신분과 그에 따른 불확실한 삶, 그리고 그 삶 저변에 조용히 깔려있는 불안감에 남다른 공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문지혁 작가를 작가 반열에 올린 첫 작품인 ’초급 한국어‘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내가 느낀 건 아마도 '향수'였을 것이다. 미국 생활 11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전환점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긴 기간을 살아낸 내 감성을 한 단어로 압축하라면 아무래도 나는 ‘불안‘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아무런 배경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의 이방인의 삶을 핑크빛으로 채색하기에 나는 어리숙했고 서툴었으며 모자랐다. 때론 즐거움으로, 때론 성취감으로, 또 때론 기쁨으로 그 시절을 보냈건만 언제나 내 삶의 저변에 깔린 무시 못할 감정은 불안이었다.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 불안이 내가 문지혁 작가의 글에 끌리는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감성을 읊조리는 작가가 있어서 나는 참 다행이라고 느낀다.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내겐 소중했던 그 시절의 아련한 감성을 되살릴 수 있어서. 


이 작품은 저자의 분신인 (심지어 이름도 같다) 화자가 이십 대 중반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대학원을 마치고 한국어 강사로 일하게 되는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인 강사. 화자는 자신의 대학원 전공과도 다른 이 일을 한 학기 밖에 할 수 없었다. 영주권 없는 유학생이 고정된 직장에 고용되어 비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일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반강제적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아련하고 아쉬운 한 학기 동안 그에게 일어난 소소한 일상을 소개한다.


한국어 수업 경험도 없었기에 준비를 많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덜컥 와 버린 기회가 가져다주는 묘한 긴장과 불안은 느껴본 자만 아는 감성에 속할 것이다. 내겐 화자의 행간이 눈이 아닌 몸으로 읽혔다. 나도 모르게 자주 화자에 나를 대입시키기도 했다. 이는 그만큼 저자의 필력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미국 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는 독자가 느끼는 감도는 아무래도 더 클 수밖에 없었겠지만.


곳곳에 코미디적인 요소도 나오고, 함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대화나 문장들이 나온다. 무심한 듯하지만 문장들 하나하나를 가려낸 저자의 정성이 매 페이지마다 느껴졌다. 소설 같지만 수기 같기도 한 일화들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었고,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드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나처럼 미국 생활을 경험한 독자라면 적어도 두세 배 이상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저자가 여러 번 내뱉은 작가로서의 자학적인 문장들을 읽으며 마음이 살짝 측은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보란 듯이 한국을 대표하는 차세대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으니 '초급 한국어'를 첫 출간했던 6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그의 위상이 나는 반갑기 그지없다. 


이제 '중급 한국어'를 읽을 차례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문지혁 읽기

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

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

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

4. 초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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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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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 없는


한강 저, '흰'을 읽고


‘흰’이란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다분히 독립적으로 보이는 많은 짧은 글들의 모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에세이 같은 느낌을 준다. 중간중간에 사진도 여러 장 끼어 있어 마치 시집 같은 느낌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읽고 나면 이미지가 남는다. 짧은 텍스트를 읽었는데 남는 건 그림이다. 이 작품은 한강 작가 특유의 문체가 묻어나는 텍스트로 그린 그림집인 셈이다. 


한강 작가의 여느 작품처럼 이 작품 역시 서사가 아닌 묘사 위주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데엔 여백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텍스트 대비 물리적 여백이 많기도 하다. 나는 그것을 그만큼 천천히 읽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작품은 모호하기만 했다. 공중에 붕 뜬 느낌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다.


마침 한강 작가가 이 책을 쓰고 나서 남긴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존재하지만 안개 같아 손에 잡히지 않던 것이 물방울이 되어 피부로 느껴진 순간이랄까. 그제야 선명해졌다. 소설 속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윤곽이 의미를 가지고 실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그녀의 전작 '소년이 온다'가 남긴 흔적인 것 같았다.


'소년이 온다'는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 내게는 가장 무거운 작품이었다. 한국 역사의 커다란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광주민주화운동)를 그 어느 논픽션보다도 선명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던 나는 그 책을 읽고 조금이나마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거짓 역사와 참 역사를 분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역사 선생님이 하지 못했던 일을 소설 한 편이 해낸 것이다. 이는 왜 그녀가 박근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로 올랐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터뷰에서 알게 된 사실 몇 가지를 소개한다.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지명을 직접 거론하지 않지만 언급되는 ‘어느 도시’는 한강 작가가 실제 4개월 정도 머문 폴란드 바르샤바다. 2014년 8월부터 12월까지였으니 ‘소년이 온다’를 탈고한 직후다. 한강 작가 역시 이 부분을 언급한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 가까이 와 있다고 느꼈던 혼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고, 흰 것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던 차에 바르샤바에 머물게 되는 기회가 찾아왔노라고. 전쟁에 의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던 도시가 복원된 모습을 보면서, 그 도시를 닮은 사람을 상상하게 됐고 그런 이미지가 확장되어서 책을 쓰게 되었노라고. 

 

그녀가 말하는 ‘흰 것’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고 절대 더럽혀질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희다는 표현도 여러 색 중 하나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선다 (물론 어떤 면에서 흰색은 색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인터뷰 글을 가만히 읽어보면 그녀는 ‘소년이 온다’ 이전에도 흰 것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단지 ‘소년이 온다’가 담고 있는 참혹하고 어두운 기운이 흰 것에 대한 갈망을 더 짙게 만들었을 뿐. 그러고 보면 ‘소년이 온다’ 차기작으로 ‘흰’이 쓰인 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셈이다. 어두울수록 조막만 한 빛도 밝은 법이니까.


책의 서두에서 그녀는 흰 것의 목록을 나열한다. 거기엔 생명의 시작도 끝도 모두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보와 배내옷부터 시작해서 백발과 수의로 끝나기 때문이다. 마치 삶과 죽음이 모두 흰 것 안에 들어 있기라도 한 것 같다. 작품 속에서 그녀가 직접 거론하는 죽음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같은 엄마의 자궁 속에 먼저 있다가 세상의 빛을 잠시 보고 숨을 거둔 언니의 죽음이다.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그녀는 태어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나에겐 마치 그녀의 삶이 죽은 언니에게 빚지기라도 한 것처럼 읽혔다. 작품 속에서 그녀의 언니는 언니가 되기도, 아기가 되기도, 또 그녀가 되기도 한다. 어떤 모습으로도 자꾸만 살아나고 또 죽고 또 살아나고 죽는 존재인 듯했다. 그리고 언니는 그녀가 바르샤바를 보며 떠올린 사람이었다. 파괴되었으나 복원된 한 사람. 책을 읽으면서도 왜 그녀는 보지도 못했고 함께 하지도 못했던 언니의 존재를 이렇게나 의식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내 안에선 끊이지 않았다. 혹시 그녀의 언니는 실재했던 한 사람의 의미를 넘어 파괴된 모든 넋을 상징하는 건 아니었을까. '소년이 온다'에서 학살당한 그 수많은 영혼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바르샤바에서 본 것은 그 혼들이 복원되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흰 것의 궁극적인 이미지였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삶과 죽음뿐 아니라 부활의 의미까지 흰 것은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품을 '소년이 온다'를 읽기 전에 먼저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아마 6년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땐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번엔 많이 이해가 되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은 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도 파괴와 복원, 죽음과 삶이라는 단어들에 대한, 그리고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그 무엇, 흰 것에 대한 어떤 갈망 같은 것이 그동안 생겼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그동안 더 많이 보았고 체험했기 때문일까 (하기야 그동안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많이 읽었으니). 물론 흰 것이 빛을 낸다면 그 빛의 세기는 한강 작가의 그것보다 더 세진 않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흰'은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서 느꼈던 폭력성이 희미한 잔재로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읽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희미한 잔재마저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선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아직 이 작품을 읽기 전이라면 적어도 '소년이 온다'는 먼저 읽고 시도해 보길 추천한다.


* 한강 읽기

1. 채식주의자: https://rtmodel.tistory.com/362

2. 소년이 온다: https://rtmodel.tistory.com/791

3. 작별하지 않는다: https://rtmodel.tistory.com/1360

4. 희랍어 시간: https://rtmodel.tistory.com/1409

5. 흰: https://rtmodel.tistory.com/1886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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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는가?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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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운명


폴 오스터 저, '왜 쓰는가?'를 읽고


어느 날 외야석에 드러누워 프로야구 개막전을 관람하다가 뜬금없이 어떤 계시 같은 것을 느끼며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 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가 천재라고 불렀던 미국 작가, 작년에 작고한 타고난 이야기꾼, 폴 오스터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는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을까? 


글이 잘 풀리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대다가 땀이나 흘리자고 마음먹고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국수 말아먹듯 후루룩 다 읽어버린 이 책 속에 그 일화가 소개되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화만큼 매혹적이었고, 또 그만큼 터무니없게 느껴졌던 이야기. 나는 두 천재 소설가가 소설가가 된 이유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음… 그럼 그렇지. 소설가가 되는 데 합리적인 이유 따위가 어디 있겠어?' 그리고 이 생각은 곧장 작가는 운명이라는 결론으로 이끌었다. 폴 오스터가 쓴 '빵 굽는 타자기'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이 문장은 내가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한국 작가 중 하나인 문지혁 작가를 소설가로 이끈 계기로도 작용했다. 작가가 되는 것은 운명이라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폴 오스터나 (그리고 문지혁이나) 모두 작가가 될 운명이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작가는 그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마침 연필이 없는 바람에 유명한 야구 선수의 사인을 받을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에 그 이후 항상 연필을 들고 다녔다는 폴 오스터. 그 연필이 결국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진실은 개연성이 없을 때가 많은 법이다. 나는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보다 이런 진실을 담고 있는 투명한 이야기가 좋다. 


왜 쓰는가? 어쩌다가 작가가 되었는가? 이 바보 같은 질문에 이제 나와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한 단어로 말이다. 그 단어는 다음과 같다. 셋 중 하나를 골라도 된다. 뜻은 같을 테니까. 


1번 그냥, 2번 몰라, 3번 운명


폴 오스터를 좋아한다면 심심풀이로 (똥 싸면서, ㅋㅋ 나는 실내자전거 타면서) 읽기에 적당한 책으로 추천한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폴 오스터 읽기

1.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 https://rtmodel.tistory.com/1788

2.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https://rtmodel.tistory.com/1791

3.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 https://rtmodel.tistory.com/1794

4. 빵 굽는 타자기: https://rtmodel.tistory.com/2048

5. 바움가트너: https://rtmodel.tistory.com//2116

6. 쓰는가?: https://rtmodel.tistory.com//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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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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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상실, 기억을 덮는 사랑

폴 오스터 저, ‘바움가트너’를 읽고

죽음, 상실, 그리고 기억. 이 책이 내게 남긴 세 단어다. 커다란 상실을 겪은 후 암 투병으로 홀로 죽음을 앞두고 있던 폴 오스터가 남긴 마지막 단어들, 혹은 인간이라는 필멸의 존재자에게 던져진 보편적인 단어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누구나 이 세 단어를 떠올릴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인생을 절반 이상 살아버린 사람들은 이성을 뛰어넘어 가슴으로 곧바로 전해지는 묵직한 그 무엇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은 바움가트너가, 환지통을 겪을 만큼 큰 상실을 겪은 바움가트너가, 폴 오스터의 분신이기도 한 바움가트너가 조용히 읊조리고 가만히 되뇌는 인생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근사해 보인 적이 있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러다 마흔을 넘긴 어느 날, 절반의 물이 컵 꼭대기보다 바닥에 가까워 보였다. 나이 들어간다는 말보다 늙어간다는 말이, 오래 살았다는 말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내가 상관하지 않을 수 없는 말로, 때로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들리기 시작했다. 두려웠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모든 필멸의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론적 불안의 근원, 죽음이 성큼 나의 조그만 레이더망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날이 늘어나면서 죽음이 늘 내 주위에 맴돈다는 사실에 나는 익숙해져야 했다. 나이 든다는 건 죽음에 익숙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과거의 흩어진 기억들이 지금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쑥불쑥 나를 급습하곤 한다. 죽음에 가까울수록, 상실이 깊어질수록 기억하는 시간도 많아지는 듯하다. 집착일까, 애착일까. 둘을 구분할 수는 있는 걸까. 죽음과 상실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혹은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의 것이어도, 아니 오히려 그런 죽음과 상실일수록 더욱더 그 효과는 증폭되는 것 같았다. 그럴 때의 기억은 나의 기억만이 아닌 우리의 기억으로 확장되기 때문이었다. 바움가트너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아내의 죽음 전후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아내를 잃은 이후 그는 반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반은 죽어있는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기억은 아내와의 기억이었다. 

기억은 이상하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통째로 기억에서 자주 사라지는 반면, 시시콜콜하고 별거 아닌 것들은 공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어떤 것은 초단위로도 기억된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체도, 기억하는 주체도 모두 나인데, 왜 이 두 주체는 내 안에서도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바움가트너를 관통하는 기억은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아내가 죽고 그는 아내가 자신의 일부였음을 체감하게 된다. 팔다리를 잃은 사람이 여전히 잃어버린 그 부위의 고통을 느끼듯 바움가트너는 아내의 상실로 인해 환지통을 겪는다. 환지통!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피부에 와닿도록 절절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나는 그런 바움가트너를 보고 그가 아내를 진정으로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려자와의 이별은 피할 수 없다. 누가 세상을 먼저 떠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죽음보다 이별이야말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고통이지 않을까. 아내가 죽은 지 십 년이 지난 작품 속 현재, 바움가트너의 일상은 평범한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잘한 많은 것들에도 요동한다. 무엇 하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마치 원래 붙어있던 팔다리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그는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고, 세상에서 가장 큰 상실을 겪은 자로서 과거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피할 수 없고 제거할 수 없는, 뼈에 새겨진 각인이다. 

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숙고할 수 있었다. 바움가트너의 아내 애나는 많은 글을 남겼다. 그 글의 세상 속에서 바움가트너는 아내를 이미지 없는 이미지로 기억한다. 그리고 함께한다. 그녀의 옷가지들을 끝내 다 치워버려도 글만은 그러지 못한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글은 그녀가 남긴 그 무엇이 아니라 그녀의 한 부분이었을 테니까.

이제 이 책이 남긴 세 단어는 내 안에서 한 단어로 압축된다.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작품 내내 죽음과 상실과 기억이 혼재되어 숭고함이 느껴질 정도로 차분한 마음이 되었지만,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이 되니 모든 게 사랑이라는 단어로 채색되는 것 같다. 그렇다. 폴 오스터는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바움가트너’라는 글로 우리들에게 죽음도 상실도 기억도 아닌 사랑을 남긴 것이다.

언젠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나는 글을 쓰고 있길 바랐다. 그러나 그 글이 무엇을 말하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내 글도 나지막이 사랑을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죽음, 상실, 기억을 덮고도 남는 사랑을.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폴 오스터 읽기
1.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 https://rtmodel.tistory.com/1788
2.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https://rtmodel.tistory.com/1791
3.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 https://rtmodel.tistory.com/1794
4. 빵 굽는 타자기: https://rtmodel.tistory.com/2048
5. 바움가트너: https://rtmodel.tistory.com/m/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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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사생활 - 업무일지가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을까?
고우리 지음 / 미디어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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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만드는 일

고우리 저, ‘편집자의 사생활‘을 읽고

’사생활’이라는 단어는 묘한 매력이 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몰래 알고 싶은 마음이 거의 동시에 든다. 나의 사생활은 보호받고 싶지만, 타인의 사생활은 궁금한 이런 마음은 아마도 인간의 양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목에서부터 이 단어가 들어가 관심이 갔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관심 없는 척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론 관심이 가는 것. 마치 양손으로 두 눈을 가렸지만 조심스레 한 손가락씩 벌려 보게 되는 마음과 같달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책에 관련된 내용이라, 게다가 최근에 읽었던 정아은 작가의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를 출간했던 마름모 출판사 대표의 자서전적 이야기라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알고 바로 구했다. 

가족을 만나러 엘에이행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첫 식사가 준비될 즈음이었으니 두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저자의 필력이 좋았다. 술술 읽히는 문체였다. 정아은 작가도 언급했던 것 같은데, 편집자가 작가만큼 혹은 작가보다 글을 잘 쓴다는 게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인 ’진정성‘이 글 전체에 녹아 있어 마치 내가 편집자라도 된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독자로부터 흡입력을 이끌어내는 건 전적으로 작가의 내공이라 믿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편집자의 일상이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의외로 멋지게 다가왔다. 편집자가 쓴 다른 책을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이 책은 편집자의 일이 알고 보면 이런저런 일인다역을 소화해야 하느라 엄청 힘든 일이랍니다, 돈도 안 되고요, 하는 뉘앙스가 강조하지 않았고, 대신 편집자라는 직업이 의례히 가져야 할 것만 같은 어떤 ’숭고함’이랄까 하는, 물론 누군가에겐 낭만으로 보일 수도 있을, 비물질적 가치를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오히려 편집자라는 직업이 내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숭고함을 저버린 물질주의적 직업인에게서는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저자는 우스갯소리로 10층 빌딩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나는 이 목표도 좋게 보였다. 저자 같은 편집자(이자 작가이자 일인출판사 마름모 대표)라면 그래도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돈 흘러가는 데만 눈이 밝은 자들로부터 그 빌딩을 꼭 사수하길 바라게 되었다(물론, 먼저 지어야 하겠지만^^). 한 번도 함께 작업해보지 못했지만, 이 책은 작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적어도 그런 믿음과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책은 상품이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책이라는 고유한 가치를 다 담아내진 못한다. 책은 상품이긴 하지만 상품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처럼 이런 가치를 알고 존중하고, 나아가 먹고사니즘이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가치와 종종 부딪치더라도, 끝까지 지켜내고 싶어 하고 또 지켜내고야 마는 편집자 혹은 출판사의 존재가 많아지면 좋겠다. 돈을 벌어주는 책이 아닌 그야말로 ‘좋은‘ 책,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책, 꼭 읽히면 좋을 책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베스트셀러’의 퇴색된 의미가 사라지고 좋은 책이 많이 팔리고 읽히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책들을 내는 출판사들이 잘 되면 좋겠다. 더불어 편집자의 일상(사생활)은 곧 ’좋은‘ 책을 만드는 일이라는 명제도 참이길 바란다.

#미디어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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