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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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회복을 위하여


한병철 저, ‘서사의 위기’를 읽고


서사의 위기는 서사의 종말에 대한 경고다. 인터넷, 스마트폰, 동영상, 그리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워크 등으로 공급되는 정보의 과포화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오늘날 우리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다. 텍스트와 영상을 대조하며 영상의 폐해를 논한다거나, AI로 인한 인간성 상실 등의 부작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책에서는 그것들보다 좀 더 근원적이고 좀 덜 기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두 가지 개념 비교를 거듭 강조하면서 말이다. 하나는 정보와 지식의 대조, 다른 하나는 스토리와 서사의 대조이다. 


저자 한병철은 이 시대에 지식이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신 모든 게 정보화되고 있으며 그 정보가 모든 곳을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정보는 새로움을 선보이지만, 새로움은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순간 더 이상 새로운 게 아니게 되므로 자연스레 힘을 잃는다. 그래서 정보는 찰나적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즉 아무런 서사를 남기지 않고,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단편의 더미로써 휘발된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은 또 다른 정보들로 대체된다. 이런 무한반복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여러 미디어들로 인해 무한히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정작 중요한 지식은 점점 밀려나게 되고 결국 소멸하고 있다. 소위 지식의 종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식의 위기, 지식의 소멸, 지식의 부재는 원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보화되고 있는 이 시대의 열매(결과)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인과응보의 열매를 수동적으로 따먹을 필요가 없다. 저항하고 저항해서 다른 열매가 맺히길 주도해야 한다. 객체로서 정보의 홍수에 빠져 죽지 않고, 주체가 되어 지식의 소중함을 깨닫고, 알리고, 또 지켜야 한다.


또한 저자는 이 대조를 기반으로 해서 이 책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와 서사의 대조를 심화시킨다. 여기서 스토리란 우리가 아는 이야기의 개념이 아니다. 엄마 아빠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누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마음을 담은 은밀한 고백은 여기서 말하는 스토리가 아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혹은 ‘스토리‘가 붙는 여러 소셜네트워크시스템, 이를테면 카카오스토리, 브런치스토리, 티스토리 등을 포함한 여러 블로그들에서 남용되는 스토리를 일컫는다. 맥락도 없고, 성찰도 없으며, 휘발성이 강하고, 소통을 빙자한 보여주기식의 포스팅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런 스토리들은 무방비 상태의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소리소문 없이 침투한다. 침투하여 장악한다. 장악하여 소비자인 우리들을 조용히 노예로 만든다. 우리 중 누군가는 먹고 자고 싸고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스토리들을 읽고 반응하고 또 게시하는 데 사용한다. 이른바 중독이다. 중독도 문제지만,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중독인데 중독인 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앞에서 소통을 빙자했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소통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진정한 소통은 사람을 알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경험과 생각,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과 재해석, 타자와 세상을 향한 시선과 태도 등(이 모두가 개인의 서사를 이룬다)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즉 진정한 소통은 스토리가 아닌 서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보로는 한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이는 서류 전형으로만 인사를 단행할 수는 없는 근원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로 도배되는 스토리들의 비대로 인해 점점 서사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게 데이터화(정보화)되고, 모든 게 조각난 스토리로 실시간으로 전시된다. 성찰은 온데간데없고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진다. 보여주는 정보와 스토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리는 목적보다는 진정한 내 모습을 감추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도구가 된다. 내가 아닌 나의 모습, 좋아요를 받기 위한 최적화된 방식의 정보와 스토리로 거짓된 내 모습을 만들어 진정한 나를 은폐한다. 괴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이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브이로그처럼 아무런 서사가 없는 그냥 보여주기로는 결코 나를 알 수도 알릴 수도 없다. 나를 알거나 알리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전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되는 일상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서사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이 시대에 글쓰기를 권하고 싶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유일한 방식이 어쩌면 글쓰기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믿게 된다. 사건을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등 소소한 개인의 인생에 서사를 불어넣는 것이다. 저자는 셀카가 텅 빈 자기 복제라고 했다. 글쓰기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는다.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가지 않고, 스토리 전시로 거짓된 모습을 증폭시키고 강화시키는 공허한 작업을 그만둘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대체 방안이라고 믿는다.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솔직하게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성찰할 수 있으며, 마침내 타자와 세상을 향한 통시적인 통찰도 내놓을 수 있는 서사의 회복을 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만약 이 메시지가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면, 만약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탈피하고 싶다면, 자, 오늘부터 글쓰기 1일이다.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고, 상호 간의 서사를 살려내며, 비로소 함께 사는 서사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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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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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라도 괜찮을 수 있는 이유


강양구 저,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을 읽고


강렬한 붉은 바탕의 화려한 표지가 시선을 강탈한다. 하지만 제목만으로는 이 책의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만화책인가 싶은 착각도 잠시, 부제를 보니 비로소 감이 잡힌다. 다음과 같다: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 그런데 단순히 SF에 대한 독서에세이는 아닌 것 같다.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이라는 표현을 보면 시대상을 반영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F를 읽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시대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통찰하는 책인가? 싶은 궁금증이 든다. 책장을 넘겨 '들어가며'를 읽고 목차를 보면 완전히 파악이 된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랜 기간 읽어온 수많은 SF 중에서 이 시대를 보며 독자들과 함께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 작품 열여덟 편을 선별하여 그것들이 묻는 질문을 소개하고 시대적인 문제들과의 접점을 다방면에서 분석하고 논하는 방식으로 저자의 통찰을 나누는 책인 것이다. 


제목의 '망가진'에서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 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다. 수많은 SF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의 일면들이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서 얼추 실현된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을 때 부정신학의 독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모든 SF 작가들이 진정 바랐던 미래는 적어도 그들이 그린 디스토피아가 아닌 세상이었을 거라고 말이다. 저자 역시 이런 관점을 취한다.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고 파국 같아 보이지만, 저자가 제목에서 '망가진'이라는 표현을 일부러 사용한 이유일 것이다. 파괴된 세계는 고칠 여지가 없지만, 망가진 세계는 고칠 여지가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이 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표면적인 시선은 부정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희망을 머금은 긍정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우리가 처한 이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SF가 던지는 여러 질문과 메시지를 통해 깊은 성찰을 거쳐 마침내 희망을 노래하는 통찰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어떤 거대한 담론의 답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우루과이의 무히카 전 대통령의 문장들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젠장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더라도, 각자가 선 자리에서 재미있게 꿈꾸고, 싸우면 좋겠습니다. 확신컨대, 그러다 보면 분명히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겁니다." 책을 다 읽고 나는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와 동의했다. 무력함도 느껴졌지만 그 가운데 가느다란 불씨처럼 남아 있는 희망을, 그 끈질긴 소망을 나도 붙잡고 싶어졌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싶어졌다. 망가진 세계라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책 본문은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져서 그런지 매 꼭지를 읽을 때마다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각 꼭지에서 다루는 SF의 내용도 조금 더 보여주고, 그 SF가 던지는 질문과 메시지를 우리 현실의 망가진 부분과 연결시켜 논하는 부분도 조금 더 깊게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덕분에 SF를 거의 읽지 않는 내가 SF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의외의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책 뒷부분에 나온 '함께 읽기' 편에서도 여러 SF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으니 독자들은 참고하면 좋겠다. 특히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SF가 아닌 듯해 보이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니 이런 친절한 소개서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나도 한두 편 골라서 도서관에서 빌려볼 생각이다.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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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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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이자 시작, 죽음과 부활의 장소


이승우 저, ‘캉탕‘을 읽고


지리적으로 캉탕은 웬만한 지도엔 나오지도 않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도시다. 캉탕의 의미는 그곳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의 끝’이라는 표현 속에 녹아있다. 지구는 둥글기에 세상의 끝은 세상의 시작과 같다. 그러므로 캉탕은 세상의 끝이자 세상의 시작이다. 또한,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끝은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어디든 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어느 곳이나 세상의 끝이 될 수 있고 세상의 시작도 될 수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캉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여기가 바로 세상의 끝이자 시작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저자 이승우 작가의 숨은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끝이 시작이라는 것. 끝은 어디든 될 수 있고, 바로 그 자리가 시작도 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할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그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인물은 홀수 장 전지적 작가 시점의 주인공이자 짝수 장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인 한중수, 한중수에게 주어졌던 목적지이자 캉탕에 오래전에 먼저 정착한 핍, 그리고 광신적 종말론을 믿고 어쩌다가 선교사가 되어 캉탕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타나엘, 이렇게 세 남자다. 소설 속 서사는 등장인물의 사연을 반영한다. 서로 다른 세 인물의 서로 다른 세 사연은 모두 기구하다. 물리적 접점은 없지만 셋은 공통점을 가진다. 어쩌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일지도 모른다. 이 공통점이 위에서 질문한 ‘어떤 세상인가?’에 대한 단초다. 


세 기구한 사연의 공통점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세상의 끝 캉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 자발적으로 캉탕을 찾은 건 아니었다. 아니, 찾을 수도 없었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운명이라 할 수 있을 어떤 반강제적인 힘에 의해 캉탕으로 유입되었다. 인간은 결코 자발적으로 인생의 끝에 서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어떤 이유와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게 우린 끝을 맺고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장과 성숙, 멸망과 구원,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우리네 인생이다.


셋 중 캉탕에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된 핍은 수십 년 전 고래잡이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뻔했다. 간신히 육지에 닿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육지가 바로 캉탕이었다. 핍이 캉탕으로 유입된 것은 운명일 뿐 그가 결코 원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캉탕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의지였다. 그를 구해준, 세이렌에 비유되는 여인 나야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핍은 나야와 결혼하여 캉탕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된다. 최기남이 아닌 핍으로서의 인생 2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타나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날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어느 날, 종말론을 부르짖는 광신적인 종교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면서 선교사로 훈련받고 타국으로 파송된다. 그곳이 바로 캉탕이었다. 그는 선교사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복음 전파와 개종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선교사가 된 게 아니었다. 다만 세상이 속히 멸망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게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음에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원했고, 그 바람 가운데엔 자신의 파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무렵 타나엘은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귀국을 명령받게 된다. 단지 선교의 열매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과거의 무언가가 현재로 침투하여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타나엘은 자신의 해임 사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 해임 통지서는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주 먼 과거로부터 날아왔습니다. …… 과거는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현재를 물어뜯는 맹수와 같습니다." 캉탕에서 시작된 그의 인생 2막이 그렇게 끝을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중수는 중요한 발표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등 지독한 두통을 동반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J가 수 차례의 상담 끝에 한중수에게 일을 당장 그만두고 쪽지에 적힌 주소로 가라고 명한다. 그 주소는 자신의 외삼촌 핍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지만 한중수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언어와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낯선 곳이었다. 그곳이 캉탕이었다. J는 한중수에게 그곳으로 가서 한중수의 건강 회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하라고 주문한다. '걸으면서 보고 쓸 것, 보려고 걷지 말 것, 쓸 것이 없으면 쓰지 말 것, 그저 걸을 것.' 한중수는 그 주문대로 실천에 옮긴다. 인생 2막이 낯선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각자 다른 과거를 가지고 셋은 세상의 끝 캉탕에서 만나게 된다. 캉탕에서 세 명은 모두 뜻하지 않은 사건과 상황에 엮이게 되면서 자신의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게 된다. 그 과정에는 공통적으로 읽어주기와 말하기와 쓰기가 있었다. 이것들을 다루기 전에 세 남자의 과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핍에겐 고래잡이배를 탔던 이유가 있었다. 그가 최기남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가난했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책을 좋아했던 그는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그는 자신의 삶이 지옥 같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탈출하고 싶었다. 문학소년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모비 딕'을 읽고 난 뒤였기 때문일까. 그는 고래잡이배를 타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달성했다. 이십여 년간 고래잡이배를 타다가 캉탕으로 흘러들어온 최기남은 나야를 만나고 핍이 된다.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왔을 때 나야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캉탕 사람들의 말로는 핍은 나야가 죽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한중수가 핍과 같은 건물에서 살면서 보았던 핍은 폐인과 같았다. 최기남으로 살던 시절이 인생 1막이었다면, 캉탕에서 나야와 함께 살던 시절을 인생 2막이라 할 수 있고, 나야가 죽은 뒤 폐인의 삶을 인생 3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핍에게 유혹자이자 구원자였던 나야의 죽음은 핍을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나야와 함께 핍도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핍은 나야가 죽었지만, 죽기 전 나야가 있었던 병원으로 자주 찾아가 그곳에서 환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한다. 나야가 그것을 좋아했었고, 핍은 타자에게 같은 행위를 하면서 나야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캉탕은 핍에게 인생 1막을 끝이자 2막과 3막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곳이었다. 책을 읽어주는 행위를 통해 그는 나야와 함께 죽었던 인생 2막으로부터 3막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타나엘은 과거 한 여자와의 헤어짐으로 인해 삶의 이유를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던 날 마침 그 종교집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그녀가 실종된 날이기도 했다. 타나엘이 죽였는지 타자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는 책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타나엘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타나엘의 인생을 낭떠러지도 떨어뜨린 날로 각인되었다. 타나엘이 몇 년 후 캉탕에서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했던 이유도 그날 실종당했던 타나엘의 옛 애인이 뒤늦게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타나엘은 살인혐의를 쓰게 된 것이었다.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왔을 무렵 타나엘은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그의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기 위해, 진술서를 솔직하게 쓰기 위해 매일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쓸 수 없었다. 써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한중수의 졸도 사건을 계기로 그는 글이 아닌 발화된 글, 즉 말로써 쓰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지극히 낯선 타자인 한중수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중수가 이미 자신의 과거를 타나엘에게 먼저 고백하는 사건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한중수는 버러지 같은 아버지의 횡포로 말미암아 젊은 시절을 각박하고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 때문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는 죄책감을 포함하여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며 모든 게 정지되는 듯한 상태로 갑자기 들어가는 병도 얻게 되었다. 사이렌 소리는 어쩌면 한중수에게 있어서는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몸의 자발적인 방어본능으로 한중수를 죽지 않도록 먼저 쓰러뜨리는 방안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중수는 그렇게 정신병까지 얻게 되면서 아버지의 망령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망가진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과 상담을 했던 친구 J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겨왔던 그 과거의 이야기들을 한중수는 캉탕에서 졸도를 경험한 이후 병원 침대맡에 있던 타나엘에게 고백하게 된다 (이 덕분에 타나엘도 나중에 한중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로 쓴다). 


핍은 읽어주기를 통해, 타나엘은 말하기를 통해, 한중수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각자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솔직하게 대면한다. 읽어주기와 말하기와 글쓰기는 모두 발설 행위다. 발설을 통해 정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세 남자는 비로소 과거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어두운 과거로부터의 탈출, 죄책감으로 물든 숨겨왔던 과거의 종말, 현재의 삶까지 송두리째 갉아먹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의 해방. 세상의 끝은 곧 과거의 끝이었다. 인생 1막의 종언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셋은 모두 과거의 종말을 캉탕에서 맞이했던 것이다. 이를 기독교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죄인으로서의 삶의 종말이라 할 수 있겠다. 


캉탕이 철저하게 낯선 곳이라는 점, 그리고 세 남자가 서로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 이 두 가지 ‘낯섦’이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정직하게 마주하고 고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과 접점을 이루는 누군가에게는 비밀을 잘 공유하지 않는다. 누설될 위험과 왜곡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 타자에게는, 그리고 절대적으로 낯선 곳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저 깊숙한 곳의 비밀도 고백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가장 낯선 곳에서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이다. 캉탕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믿든 안 믿든 신이 그들을 캉탕으로 인도했는지 모른다. 자신의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여 인정할 건 인정하고 뉘우칠 건 뉘우치고 버릴 건 버리며 새롭게 다시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이다. 인생 1막과 다른 2막을 멋지게 시작하라고 말이다. 두 번째 삶이 허락되었다고 말이다. 


책은 세 남자가 새로운 시작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끝을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캉탕이 세상의 끝이라고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끝난 곳에서 세상은 다시 시작된다고 믿고 싶다. 세상의 끝에서 쓰기(읽어주기, 말하기, 글쓰기 포함)를 통해 과거 자신의 내밀하고 은밀한 내면을 정직하게 마주하면 바로 그곳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된다고 믿고 싶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캉탕은 세상의 끝이자 시작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캉탕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만약 내가 내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고백하게 되면, 바로 지금 여기가 옛사람을 끝내고 새 사람을 시작하는 곳일 수 있다. 또한 캉탕은 절대적 낯섦의 공간이다. 절대적 타자는 신이다. 인간은 신 앞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캉탕이다. 정직하게 신 앞에 선 인간은 모두 캉탕에 있는 것이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이승우 읽기

1. 생의 이면: https://rtmodel.tistory.com/1588

2. 사랑이 한 일: https://rtmodel.tistory.com/1628

3. 고요한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960

4. 캉탕: https://rtmodel.tistory.com/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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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쓰기 위하여 - 글쓰기의 12가지 비법
천쉐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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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진정성


천쉐 저, ‘오직 쓰기 위하여‘를 읽고


글쓰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쓰고 싶은 욕망은 여전히 가득했지만 정체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늘 비슷한 류의 글을 양산하는 복사기가 된 것 같았다. 총은 계속 쏘고 싶은데 총알도 떨어지고 총도 노후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뭔가 쇄신이 필요했다. 그즈음이었다. 나는 서점에 기웃거리며 작법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작가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알고 싶었다. 어떤 비밀스러운 팁이 있다면 얼른 습득하고 싶었다. 정체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서너 권 정도 읽었을 때 알았다. 시중에 깔린 글쓰기 책들 혹은 작법서들은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 도배된 채 수십 종이 넘게 출간되어 있다는 것을. 그 이후로 그런 책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점에서 훑어보는 정도로만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작법서들을 읽으며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법서는 작법을 잘하기 위한 목적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 그런 책들은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나다를 배우는 용도, 혹은 이미 글쓰기 경험이 다년간 쌓인 사람들이 공감과 위로를 받는 용도, 이렇게 두 가지 용도로 이용하면 된다는 것. 즉 글쓰기를 어느 정도 하다가 나처럼 어느 순간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이런 결론에 이른 나는 서점에 가도 작법서는 읽지 않게 되었고, 갈증이 느껴질 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정독하고 필사하는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런 패턴은 지속되고 있다.


문지혁 작가의 유튜브 채널을 보다가 알게 된 작법서 한 권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 끌렸던 건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가방에 챙긴 다섯 권의 책 중 당당히 포함되기도 했고, 실제로 탑승하자마자 읽어버린 첫 책이기도 했다. 바로 이 책, 처음 들어보는 작가 천쉐의 ‘오직 쓰기 위하여‘이다.


상업성이 가미된 듯한 인상을 주는 ‘글쓰기의 12가지 방법‘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라는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자신이 체득한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나눈다. 목차만 봐도 그 조언들은 쉽게 알 수 있다. 경력 30년 작가의 내공이랄까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겐 12가지 비법서가 아니라 천쉐라는 작가의 글쓰기를 향한 진심이 담긴 책으로 읽혔다. 부제보다는 제목이 이 책의 메시지를 더 잘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직 쓰기 위하여 저자는 자기 몸 관리, 마음 관리, 시간 관리, 관계 관리를 성실하고 지속적으로, 무엇보다 현재진행형으로 해 내고 있는 작가다. 치열하다고도 독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저자는 삶의 중심에 글쓰기를 두고 있다. 이런 여러 관리들을 어떻게 해 내는지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는데, 이것들이 비법이라면 비법이라 할 수 있겠다. 


편집 문제인지 저자의 글쓰기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이 책 한 권에는 중첩되는 내용들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이를 상술이라고 보는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눈엔 저자의 진정 어린 조언이 강조되는 부분으로 보였다. 글쓰기 비법을 전수하기 위한 책이 아닌, 저자가 작가가 되어가는 여정을 진솔하게 담은 책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성은 시중에 나온 천편일률적인 작법서들보다도 내겐 더 명징한 메시지로 와닿았다. 


저자가 강조하는 점이 내겐 크게 두 가지로 보였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두 가지라 해도 무방하다. 하나는 자기 관리, 즉 글쓰기라는 지난한 여정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동안 빈번하게 마주하는 절망, 좌절, 정체위기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잘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어야 하고 힘든 시기를 견뎌야 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마음과 생각이 그렇게 건강하기 위해서는 몸도 건강해야 하므로 기본적인 수면 시간과 작업 시간, 운동 시간을 성실하게 사수하는 것의 중요성을 저자는 강조한다. 


다른 하나는 경제적 수입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시장에서 장사하는 일)에서도 글쓰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 지금은 전업작가가 된 저자는 글쓰기를 위해 해 내야만 하는 여러 관리 중에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버는 돈의 액수를 어느 정도 정해 놓고 그 이상 욕심부리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글쓰기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저자가 주업이라고 여기는 소설 쓰기이고, 다른 하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여러 다양한 글들, 이를테면 인터뷰, 여행에세이, 자서전 대필, 칼럼, 기타 청탁받은 원고들, 그리고 강연들로 이뤄진다. 저자는 소설 쓰기를 지속하기 위해 다른 글들로 돈을 버는 일이 필수이나 그것이 절대 우선순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돈을 좇는 작가가 아니라 진짜 소설 쓰는 게 좋고 그것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행복과 만족을 얻는 작가로 살아가는 저자의 진정성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천성 작가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저자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혼하고 직장도 가지고 있으며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 작가들에게는 저자의 조언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만 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인데, 나처럼 이 책을 읽으며 비법 찾기가 아니라 진정성에 매료된다면 이조차도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저자의 작가로서의 철학과 삶과 미래를 응원한다. 저자의 진정성만큼은 나도 꼭 본받아야 할 점일 것이다. 


#글항아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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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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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이란? 


장강명 저,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제목 ‘먼저 온 미래’는 뒤표지 상단에 박힌, 마치 신문기사를 오려 놓은 듯한 문장으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다. 2016년부터 몇 년간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것이다.” 저자 장강명 작가 개인의 생각일 뿐일까? 내 눈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미 온 미래’를 기자 출신의 세밀한 눈으로 관찰하고 냉철한 머리와 부지런한 손과 발로 분석한 뒤 잉태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경고 내지는 예언으로 보인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위치한 한 예언자의 종말론적인 메시지로 들린다. 저 두 문장의 위치가 책 뒤표지라는 점도 기가 막힐 노릇이다. 책을 다 읽고 한숨을 쉬며 멍하니 있는데, 불현듯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뒤표지 글귀를 무심코 읽으며 나는 소름이 돋았다. 책 읽기 전과 후, 같은 문장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두 번째 문장은 더 이상 예언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온 미래‘는 팩트였다.  


논픽션인 이 책의 발단은 2016년 구글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와 당시 대한민국 최고 바둑기사 이세돌 9단 사이에서 치러진,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알파고가 4승 1패로 승리한 역사적인 대국이다. 저자 장강명 작가는 이 사건을 세계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 중 하나로 본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 의심 없이 믿어왔던 곳까지 침투하여 믿을 수 없이 압도적인 역량으로 점령하고 정복해 버린 공식적인 첫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 이후 바둑계를 초월하여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이를테면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지, 무엇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좀 더 확장하면 신학적이기도 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믿어왔던 것들, 자명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의 경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정의 자체가 존폐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바둑 몇 판의 패배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사건이 가진 함의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한 르포르타주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다. 인간의 존재론적인 물음까지 하게 만드는 철학책이자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사유하게 만드는 인문학책이며, 시대와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 걸친 통찰을 보여주는 사회과학책이다. 인간 본성을 깊이 통찰하게 만드는 이 책에 대한 팟캐스트 ‘책걸상’의 판단은 옳다. 나 역시 단연 올해 최고의 논픽션이라 생각한다. 


이 책이 냉철하고 객관적인 팩트만을 나열한 건조한 책이라거나, 인터뷰 기사들만을 추리고 육하원칙에 따라 기술한 보고서 같은 딱딱한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저자는 바둑계에 먼저 온 미래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지 자신의 통찰을 나누며 심도 있게 물을 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학계에서도 이미 온 미래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이야기하며 솔직한 한 인간의 두려운 감정을 토로한다. 이 부분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가 문학계를 이야기하듯 자연스레 자신이 속한 영역(업계)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기초과학, 그중에서도 생물학계에 인공지능이 침투하여 맹활약을 벌이고 있는 상황들(내가 직접 참여하진 않지만, 나는 알파폴드로 새로운 크리스퍼 구조를 예측하고 만드는 공동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는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소속 선임연구원이다)을 떠올리며 저자의 두려움에 깊이 공감했다. 저마다 다른 영역에 속해 있어도 우린 모두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이 절대 넘어설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인공지능이 쓴 논픽션이 아니라 인간이 쓴 논픽션이라는 사실이 나는 다행스럽게 여겨졌고, 인간다움의 한 조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건 다층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생물분류학적인 접근으로는 다른 동물과 비교하며 모든 면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중심적인 관점을 들 수 있다. 인류학적인 접근으로는 인간의 뇌 크기라든지 직립보행으로 인해 자유로워진 손으로 만든 도구의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비교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보다 창의성일 것이다. 여기에는 인공지능 역시 기계의 한 부류로 볼 때 아무리 계산이 빠르더라도 단순반복의 연장선에 있을 뿐 기계를 만든 인간의 창조성은 결코 따라 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은 바둑이었고, 바둑은 체스와 달리 단순한 게임이 아닌 무수한 경우의 수로 이뤄지는 하나의 예술로써 인간의 창의성이 가장 잘 발현되는 영역이라 믿어져 왔다. 인공지능이 체스를 정복했을 때에도 바둑계에서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다. 


알파고의 승리는 인공지능이 가질 수 없다고 믿었던, 혹은 가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인간의 고유한 창의성까지 침범하여 정복해 버린 사건이었다. 두려움까지 느끼게 만드는 인공지능의 능력에 대해서 인간이 느낀 건 단순히 어떤 상실감과 좌절감을 넘어 인간의 고유성과 인간의 존재 자체가 초라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마지막 보루를 빼앗긴 인간은 긍지를 잃었고 교리처럼 믿어왔던 인간의 위대함 혹은 우월성마저도 인공지능에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급했다시피 이 현상은 바둑계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먼저 시작되었을 뿐이다. 저자가 속한 문학계에서도 이미 인공지능은 ‘안나 카레니나’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같은 대작은 아니더라도 짧은 에세이나 소설은 써내고 있다. 역시 창의성의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인간의 마지막 보루 하나가 인공지능의 영향력 아래 조금씩 잠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이미 저자에게 두려움을 불러왔으며, 앞으로 급속도로 발전될 인공지능의 권세가 과연 어떤 일을 벌일지에 대해서는 저자 역시 모르기에 섣부른 판단을 자제한다. 단, 책의 뒷부분에서 여러 합리적인 대안 혹은 예상을 내놓는다. 무엇 하나 확실한 건 없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역시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불확실성 혹은 모호성이랄까 하는, 어쩌면 우리가 피하거나 감추고 싶은, 나약하다고 믿어왔던 인간의 속성들이 인간다움의 중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믿어왔던 우월성이 아닌 열등성이 인간다움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이 생각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걸 거꾸로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는, 어쩌면 우리가 믿어왔던 자명한 것들을 의심하고 다시 들여다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개별성을 띤 한 사건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재해석이 보편적인 통찰을 이끌어내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인간이라면, 특히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난다. 과연 인공지능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잠식당하지 않고 인간다운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는 어떤 고결하고도 절박한 의지를 읽어낼까? 아니면 인공지능에게 결국 패배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읽어낼까? 이러한 인간의 몸부림이 혹시 가소롭다고 판단하진 않을까? 수많은 궁금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저자는 말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현재 예상하고 있는 건 모두 틀릴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예상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무한반복의 시나리오 가운데 인공지능의 발전은 가속화될 것이다.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의 발전을 멈출 수 없는 인간. 결국 남는 건 최종심급 자본의 힘일까? 무엇이 문제인지 알면서도 자멸을 향하는 모순된 존재자 인간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인간다움의 하나로써 모순과 이율배반성을 꼽게 된다. 모호성, 불확실성, 모순, 이율배반성, 이런 속성이 결국 인간이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책을 덮고도, 이 글을 다 쓰고도, 계속 남아 있다. 비록 저자는 상상력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며 책을 온건하게 마무리하고 나 또한 조금은 무력하게 동의하지만 말이다. 


#동아시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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