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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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으로 보여준 소중한 가치


보후밀 흐라발 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다시 읽고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형용모순적인 상황은 한탸의 존재와 삶 모두를 잠식한다. 독서모임 ‘인생책방‘ 덕에 5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여러 층위의 모순적 상황에 대해 주목할 수 있었다. 이 글은 그것들에 대한 나의 보잘것없는 분석이다.


먼저 이 작품의 심장을 가르는 주제, ‘책을 향한 사랑‘에 대한 두 겹의 점층적인 모순적 상황에 대해서다. 한탸는 폐지 압축공이다. 한탸는 소중한 인류의 자산이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한낱 종이 쪼가리로 취급받게 되는 책들을 파기하는 장본인인 동시에 그 책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겸비한다. 그는 파기되는 책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모으기도 하고, 읽고 온몸으로 흡수하기도 한다. 그 자신의 표현으로는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다. 마치 살인자가 인간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치 백정이 동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첨예한 모순 속에서도 한탸는 책 애호를 넘어 책을 수호하고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폐지 압축기라는 기계로 책을 파기하면서도 책이 상징하는 인간의 고유성을 지키는 존재. 이것이 한탸의 정체성이고 그가 처한 가장 근원에 깔린 모순적 상황이다.


사회주의 체제와 발달된 기술의 여파로 한탸가 사용하는 구형 압축기 시대는 저물고 그것보다 스무 배 효율을 낼 수 있는 신형 압축기가 도입되어 한탸는 필연적으로 직업을 잃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문명화, 기계화로 인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더욱더 냉소적으로 변해가고, 이에 따라 책은 점점 더 전통적인 가치를 상실해 간다. 구형 압축기를 사용하던 한탸는 비록 모순적이었지만 그나마 책을 수집하고 읽고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는 여유라도 있었다. 그러나 신형 압축기의 도입은 곧 한탸의 존재 자체를 근원에서부터 지워버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책을 파기하면서도 수호하고 구원하는 모순적인 역할을 감당하던 한탸는 종국에 가서는 더 이상 책을 파기하는 자가 아닌 파기되는 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책 파기자이면서 책 애호가, 수호자, 구원자의 위치를 넘어 결국 책 자체가 되어버리는 한탸의 강화되고 심화된, 그리고 비극적인 모순적 상황이다. 


이러한 두 겹의 모순적 상황은 작품 속에서 수차례 언급되는 상반된 운동법칙, 즉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미래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후퇴)이 점점 혼재되면서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미래로의 후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근원으로의 전진)도 모두 가능하며, 마침내 이 둘은 같은 것이라는 인식에 다다르는 한탸의 의식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한탸가 만지는 압축기에는 초록색과 빨간색의 단 두 개의 버튼이 있다. 기계를 앞뒤로 움직이게 하는 단순한 조종 장치다. 한탸에게도 처음에 미래는 전진하는 것이고, 근원은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을 파기하고 구원하는 모순적 상황 속에 자신을 계속 잠식시키면서 한탸에게 미래는 단순히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는 것이기도 하며, 근원 또한 후퇴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진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책을 파기하는 것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소중한 가치, 이를테면 인간성, 인간다움, 고상함, 고결함 등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책을 파기하는 행위는 후퇴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문명화와 기계화에 추진력을 얻어 효율이 증가하게 된다는 면에서는 미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미래로의 후퇴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책을 더 빨리, 많이 파기하라는 소장의 고함소리와 함께 들리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시시포스 같은 기계적 반복이 아닌 폐지 더미 안에서 활자가 담고 있는 인류의 지적, 정신적 유산을 흡수하는 행위는 미래가 아닌 근원을 향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또한 이 행위는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므로 후퇴가 아닌 전진이라 할 수 있다. 즉, 근원으로의 전진인 것이다. 한탸가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책이 가진 가치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백과사전 의미를 거뜬히 초월하여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존재론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외에도 모순을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들이 작품 속에는 많이 등장한다. 이것들을 찾아내어 생각해 보니 작품 이해를 위해 큰 도움이 되었다. 재독 하면서 내가 발견한 예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지상과 지하. 지상은 문명, 물질, 전쟁, 소란을 상징한다면, 지하는 낭만, 정신, 평화, 고독을 상징한다. 한탸가 구형 압축기로 작업하는 공간이 지하인 반면, 무미건조한 신형 압축기로 젊은이들이 효율 충만한 방법으로 책을 폐지 처리하는 공간은 지상이다. 우유와 맥주의 대조 역시 각각 지상과 지하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 우유는 책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유니폼 차림의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젊은이들의 양식인 반면, 맥주는 한탸의 정신적인 고양을 부추기고 디오니소스적인 낭만을 유지하는 인간 고유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맥주라는 알코올은 지하 작업장에서 한탸의 고독하면서도 은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제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탸의 지하 작업장에는 한탸 말고도 다른 생명체가 한탸와 동고동락하고 있다. 바로 쥐다. 일견 불결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쥐는 한탸가 일하는 작업장의 의미, 혹은 ‘근원으로의 전진‘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한탸의 작업장이 지상으로 대변되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작은 지하 공간이라고 볼 때 그곳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쥐가 들끓을 만큼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배제되고 소외된 공간이라는 의미를 띠게 만들기 때문이다. 근원으로의 전진이라는 형용모순적인 행동법칙은 다수가 아닌 극소수에게만 참인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는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 묘사되는 한탸의 비극적 운명일 것이다. 책을 파기하는 자가 아닌 파기되는 책으로 자신을 스스로 던져 넣는 한탸. 이 끔찍한 자살 장면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답은 묘연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한탸의 심정이 온전히 반영된 행위였다는 점이다. 7장 마지막 부분에서 한탸는 손목을 칼로 그어 자살을 행한 세네카의 환상을 보게 되면서 세네카의 사고가 정확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했다고 쓴다. 그리고 세네카의 자살은 자신의 저작인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를 쓴 것이 헛일이 아님을 입증했다고도 쓴다.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정은 타자와 세상의 시선에 맞춘 공허한 삶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위한 아낌없는 삶이 제공하는 만족이다. 그렇다면 세네카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평정에 다다랐다는 말인가. 한탸 역시 세네카의 뒤를 이어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었다는 말인가. 


8장 도입부에서 한탸는 카페 ‘검은 양조장’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홀로 세상을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한탸는 수심에 가득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 환상을 보며, 전진이 곧 후퇴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다는 말까지 한다. 한탸는 홀로 세상을 맞서지 못할 거라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걸까. 그래서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이지 않기를 결정했던 것일까. 자신이 늘 사용하던, 은퇴한 이후에도 구입해서 집으로 가지고 가려고도 계획했던 구형 압축기 안에 자신의 뇌뿐만이 아닌 몸뚱이 전체를 던져 넣음으로써 궁극적으론 포기를 선언한 것이었을까.


한탸는 그렇게 압축기 안으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 과정 모두를 기록한 저자 보후밀 흐라발 덕분에 한탸는 이렇게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 살아있다,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인간의 고유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책 속의 인물이 된 한탸 덕분에 우린 책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곱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나머지 상징들은 독서모임 ‘인생책방’에서 마저 나눌 계획이다. 각자의 고유한 생각을 나누는 풍성한 모임 덕분에 이 책에 대한 이해는 물론 우리 삶 또한 깊어지리라 확신한다. 또한 책은 나에게 무엇인지, 나는 왜 책을 읽는지, 나아가 내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질 계획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초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1020

* 재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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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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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컴플리케이티드 휴먼 네이처


스콧 스미스 저, ‘심플 플랜’을 읽고


결국 심플 플랜은 심플하지 않았다. 플랜이 아무리 심플할지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주체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편소설의 방점은 플랜이 아닌 플래너, 즉 인간에 있다. 플랜이 아무리 심플해도 절대 심플하게 처리할 수 없는 존재, 인간 말이다. '심플'은 '컴플리케이티드'를 가리키고, '플랜'은 플래너인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제목, '심플 플랜'은 '컴플리케이티드 휴먼 네이처'라고 나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한 시골 마을, 한 해의 마지막 날, 행크라는 이름의 화자는 자신의 친형과 형의 친구, 이렇게 셋이서 함께 우연히 추락한 경비행기를 발견하게 된다. 조종사는 이미 죽어 까마귀에게 눈알을 파 먹힌 상태였고, 바닥에 놓인 더플백 안에는 사백만 달러가 넘는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 하지만 평상시에는 이성적이기보다는 습관을 쫓아 살아가는 동물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약간의 스크래치를 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인간이 가장 이성적인 상황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된 일을 수습하려고 할 때가 아닐까 싶다. 평소에는 존재하는지조차 의식되지 않던 머리가 활발하게 돌아가는 순간, 우린 자신이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제삼자의 눈으로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 가끔 바보처럼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습관을 쫓아 살아간다는 건 다분히 감정에 이끌리는 생활 패턴을 가리킨다. 늘 해오던 대로, 편리한 대로, 쉬운 길로, 그것이 정의로운지 옳은지 이타적인지 도덕적인지에 대한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자신의 유익을 더하는 방향으로만 살아가는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방식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서게 될 때가 있는데, 그 생활 패턴은 지나친 탐욕으로 드러나게 되고 인간은 실수랄까 범죄랄까 하는 행동을 종종 하게 되는데, 나는 바로 이때가 이성이 최고조로 활동하게 되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은 일을 벌이기 전이 아닌 이미 벌어진 일을 처리하는 데 더 활발하게 사용되곤 하는 것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인 이 작품을 가득가득 메우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유익, 탐욕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 계획을 계속 수정해 나가며 일을 눈덩이처럼 부풀리게 되는 이야기. 그 과정 중에 아홉 명이라는 적지 않은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게 되는 스릴 넘치는 이야기. 놀라운 건 그 살인조차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합리화를 하며 그다지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만의 이기적인 목적을 완벽히 성취하기 위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읽을 때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주인공인 화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 그 심리 변화로 인한 행동의 변화, 그리고 그 행동의 변화로 인해 빚어지는 돌발적인 상황들을 수습해 나가는 일련의 모습들일 것이다. 


플랜이 아무리 심플해도 절대 심플하게 처리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탐욕 때문일 것이다. 탐욕은 왜곡시키는 힘이 있다. 그것에 의해 객관성은 증발되고, 이성 대신 감정이 더욱 우세하게 되며, 범죄에 대범해지게 되며, 급기야 모든 이성을 총동원하여 합리화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인간 심리의 변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도 우리도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기도 한다. 언제나 섬뜩함의 심연은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본성을 자각할 때이지 않은가. 비록 벽돌책이지만 페이지터너인 이 책을 나는 휴가 때나 휴일에 꼭 손에 들고 읽어보길 강력하게 추천한다.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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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0-14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벽돌책 소설이 마치 심리학이나 자기계발 이슈를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인간의 뇌는 원시 인류로부터 물려받은 생존 본능 때문에 익숙함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를 크리티칼 패스라고 부르는데, 행동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게 종종 오류라는 결과를 불러온다고 하더군요. 즉 이성적인 판단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Youngwoong Kim 2025-10-15 15:50   좋아요 0 | URL
네 인간의 본성을 깊이 파헤치는 소설은 모두 그러한 특징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몸글에도 적었지만 제가 보는 인간은 이성적이기보다는 습관을 쫓아 살아가는 동물인 것 같습니다. 그게 생존 본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이성적인 판단이 자기의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걸 선택하지 않는다는 게 저의 지론이고요. 그걸 해내는 사람만 존재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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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박과 대박 사이: 작가, 운명, 기적


폴 오스터 저, '빵 굽는 타자기'를 읽고


이 책을 손에 집어든 건 비단 문지혁 작가를 작가로 만든 문장,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를 직접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목 ‘빵 굽는 타자기‘의 원제 ’hand to mouth'가 내 관심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원제는 말 그대로 하루살이를 뜻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삶 말이다. 


작가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라는 문장을 잇는 다음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부분이 원제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동시에 폴 오스터의 담백한 심정을 잘 묘사한 것이라 생각한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 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각오도 되어 있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 물질적으로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었고, 내 앞에 가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겁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 것은 재능 (나는 이것이 내 안에 있다고 느꼈다)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어지는 문장은 작가의 이중 직업에 대해서다. 글만 쓰고 사는 건 금수저로 태어나거나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이 문장들뿐 아니라 이 책 저변에 깔려 있다. 이 일관된 논리를 작가는 선택되는 것이라는 문장과 연결시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필연적으로 탄생하게 된다. 


“작가는 쪽박 차게 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다.” 


이 간결한 문장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작가들이 공감할 수 있고, 또 많은 경우 자신의 삶에서 직접 체험한 적이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알기론 저 유명한 도스토옙스키도 생계형 작가였다. 폴 오스터 역시 시대만 다를 뿐 같은 족속에 속하는 작가였던 것 같다. 이 책은 폴 오스터의 자전적 이야기로써, 그의 작가로서의 시작과 초창기 무명시절의 일대기를 에세이로 쓴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두 가지 단어가 남았다. 하나는 자유, 다른 하나는 믿음이다. 두 가지는 모두 폴 오스터의 작가 초창기, 아니 그의 젊은 시절을 모두 아우르는 키워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자유라 함은 선택의 기로에서 그의 태도를 말한다. 이는 두 번째 단어인 믿음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에 인생의 연륜이란 걸 쌓을 순 없으므로 폴 오스터의 자유로워 보이는 선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라기보다는 근거 없는 믿음, 혹은 객기가 기반이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그는 어떤 규칙이나 의무에 묶여 있길 싫어했다. 자기 옷이 아닌 옷을 입는 걸 참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청소년 시기를 갓 벗어난 자가 어떤 옷이 자기 옷인지 아닌지 분별하기란 어려웠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수학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닌 영혼이 끌리는 일을 언제나 선택했다. 가까운 미래에 생계가 어려워지리라는 수학적인 계산 결과가 나와도 그는 입에 풀칠을 하면서도 읽고 쓰는 일을 선택했다. 어찌 보면 폴 오스터는 그의 현재 모습이 아닌 미래 모습에 대한 믿음을 그때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24년에 타개한 폴 오스터는 전 세계적인 대작가 반열에 그의 이름을 당당하게 올렸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실제 살아온 자유분방한, 동시에 현재 모습이 아닌 미래의 자기 모습에 대한 믿음을 기반한 삶을 "작가는 쪽박 차게 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다"라는 문장과 연결시키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폴 오스터는 작가는 쪽박 차게 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 삶을 선택했고 그렇게 살아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대박을 터뜨리는 운명의 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만약 폴 오스터가 무명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였다면 이 책은 출간되지도, 아니 써지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이제야 보인다. 자신의 하루살이 시절을 각색하여 책으로 만들었다는 건 그렇게 해도 충분히 괜찮기 때문이었다는 것. 즉, 무명 시절 하루살이 생활을 솔직하게 꺼내보아도 더 얻었으면 얻었지 잃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 말하자면 성공한 작가 스스로의 입을 빌린 자신의 어려운 시절 이야기는 오히려 작가의 생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인간미를 불어넣어 더욱 멋진 작가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며 폴 오스터의 초창기 시절을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많은 작가들은 위로와 공감을 얻는 동시에 희망과 용기도 얻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전업작가라는 단어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이 세상에 속한 단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요원한 직업인 것이다. 그것을 꿈꾸는 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무명작가 혹은 초보 작가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작가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폴 오스터처럼 자유와 믿음 (가난과 경험을 필수적으로 전제한다)의 자세로 삶을 살아가면 언젠간 성공한 작가가 되리라는 바람은 허황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운명처럼 폴 오스터에게 찾아온 만남과 기회의 기적이 전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폴 오스터 읽기

1.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 https://rtmodel.tistory.com/1788

2. 뉴욕 3부작 중 유령들: https://rtmodel.tistory.com/1791

3. 뉴욕 3부작 중 잠겨 있는 방: https://rtmodel.tistory.com/1794

4. 굽는 타자기: https://rtmodel.tistory.com/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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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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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로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볼 때


안규철 저,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을 읽고


몇 개월 전 '사물의 뒷모습'이라는 에세이집을 읽고 안규철 작가의 글쓰기에 매력을 느꼈다. 대상을 관찰하는 그의 시선, 그 이후에 따라오는 성찰, 그리고 사유의 마침표를 찍는 그의 통찰이 짧은 글 안에 잘 녹아 있었다. 제목에 나온 뒷모습이라는 단어도 마음에 쏙 들었는데, 나는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많은 말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듬어지지 않고 숨길 수 없는 한 사람의 본연의 모습이 뒷모습에 많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사물의 뒷모습이라니. 그의 시선은 사람에 머물지 않는다. 생명을 가진 것들에 머물지도 않는다. 세상 모든 것들의 뒷모습을 보며 사유하는 작가 안규철의 그다음 책이 나는 몹시 궁금했다.


제목이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럴 수가! 뒷모습에 이어 내가 늘 마음에 품고 있는 단어 하나가 그림자다. 뒷모습과 그림자는 내게 있어 비슷한 이미지다. 여백이랄까, 무랄까. 말해지지 않는 말, 보이지 않고 보이는 그 무엇. 어떤 통제할 수 없는 사물 혹은 사람 본연의 모습이 뒷모습과 그림자에 담긴다고 나는 믿는다. 저자 역시 '책머리에'에서 정확히 그 점을 짚는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은 '사물의 뒷모습'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고. 사물의 뒷모습을 말하는 것은 사물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회색의 다채로움을 말하는 것이라고. 낯선 이의 글에서 우연히 내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문장을 읽어낼 때의 그 신비한 쾌감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안규철 작가는 미술가다. 이 점이 나는 그의 책을 읽을 때 절대 무시하면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본다면, 작가는 글쓰기(글)를, 음악가는 음악(소리)을, 미술가는 미술(그림이나 조각)로 본인의 마음과 생각을 경유한 그 무언가를 표현한다. 글과 소리와 그림은 예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도 가진다. 그런데 저자는 글과 그림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작가인 것이다. 이렇게 두 세계를 모두 관통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그 세계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저자의 글은 뭔가 다르지 않겠는가. 


독서란 한 작가의 고유한 시선을 함께 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즐거웠다. 부러운 마음도 한가득이었지만, 나는 나대로 고유한 시선과 통찰을 살리면 된다는 용기도 얻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이 책은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림 그림, 그 세 번째 이야기'인데, 첫 번째 이야기가 아직 책장에 꽂혀 있다. 아껴서 읽을 작정이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안규철 읽기

1. 사물의 뒷모습: https://rtmodel.tistory.com/1992

2.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https://rtmodel.tistory.com/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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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선집 3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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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감각, 피안과 차안의 합일: 단일성과 현재성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 저, '싯다르타'를 다시 읽고


비록 ‘싯다르타’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보다 먼저 쓰였지만, 초독 때와 달리 이번엔 의도적으로 나중에 읽은 까닭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이루지 못한 공백을 '싯다르타'가 충실하게 메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르치스가 이성, 머리, 정신, 학문을 대변한다면, 골드문트는 감성, 가슴, 육체, 예술을 대변한다. 이 양극은 작품 마지막에 가서도 좁혀지지 않는다. 양극이 서로 다른 개인으로 발현되어 있다는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합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싯다르타'에서는 이것이 이루어진다. 마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싯다르타 한 개인 안에서 합일을 이룬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를 '사유와 감각의 합일'이라고 해석했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헤세를 다시 읽으며 여실하게 느끼는 건 헤세는 인간의 대립된 두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그 두 자아의 합일을 강렬하게 욕망했다는 점이다. '데미안'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이런 모습은 그 이후에 쓰인 모든 작품 속에 충실히 반영된다. 합일을 욕망하기 위해서는 서로 조금도 섞이지 않는 선명한 양극이 전제되어야 한다. 양극이 선명할수록 합일은 요원해지기 마련이고, 선명한 양극은 이분법적으로 나눠지기에 현실적이기보다는 이상적이고 실험적인 모델로 비치기도 하지만, 헤세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이를 해내려고 고군분투한다. 


'데미안'에서는 데미안을 만나기 전과 후의 싱클레어가 서로 대립한다. 대립하는 두 자아가 싱클레어라는 한 개인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린 '데미안'을 싱클레어의 성장기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청소년이 성인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성장소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러니까 특정한 방향성이 없는 성숙화 과정이 아닌, 싱클레어에서 출발하여 데미안으로 향하는, 다시 말해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한편, '황야의 늑대'에서는 사회에 길들여진 시민의 자아와 길들여지지 않은 채 자기만의 자유로운 개성을 갈구하는 늑대의 자아가 서로 대립한다. '데미안'과 달리 '황야의 늑대'는 하리 할러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없다. 싱클레어에겐 데미안이라는 목적지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하리 할러에겐 특정한 목적지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깊이 통찰하고 드러낸 '현대인의 내면 보고서'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은 모든 독자는 하리 할러로부터 동질감을 느끼면서 자기 안에 꿈틀대는 늑대를 자각하고, 동시에 그 늑대를 억누르며 사회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시민을 인지하게 된다. 


양극이 한 개인 안에 발현된다는 점에서 '싯다르타'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보다는 '데미안'과 '황야의 늑대'와 닮아 있다. 출간 순서를 따져 볼 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가장 나중에 쓰였다는 점만 보아도 헤세는 한 개인 안에서의 대립된 두 자아를 '데미안',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를 통해 먼저 보여주고, 가장 나중에 두 자아가 두 개인으로 존재할 수도 있음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통해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또한 맨 앞의 두 작품,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는 싱클레어와 싯다르타가 내면에 존재하는 양극의 합일을 추구하고 결국 완성을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에 쓰인 '황야의 늑대'에서는 양극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합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혼재되어 있을 뿐이다. 구하며 끝내 성장을 이뤄내는 반면, ‘황야의 늑대’에서 하리 할러는 합일을 추구하나 이뤄내지 못한 채 한계를 보여준다. 이 하강 현상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정점을 찍는다. 두 자아는 마치 처음부터 합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한쪽으로 치우친다 하더라도 마치 저마다의 개성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서로 다른 인격체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 이뤄진 내면의 성장과 성숙을 통한 합일이 ’황야의 늑대‘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로 진행하면서 점차 희미해진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합일에 대한 헤세의 강렬한 욕망이 결코 약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의 합일을 이뤄가는 과정이 다분히 이상적이었기에 현실성과 다양성을 반영하면서 ‘황야의 늑대’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탄생시킨 거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헤세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그의 모든 전작들이 집대성된 대작으로 여겨지는 ’유리알 유희’에서 우리는 합일을 향한 헤세의 염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 ’싯다르타’는 나르치스로 생을 시작했던 싯다르타가 골드문트의 세계를 직접 체험한 뒤 두 세계의 합일을 이뤄내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각각 사유와 감각을 상징하는 두 세계를 싯다르타는 그 어떤 인간 스승도 따르지 않고 스스로 깨닫고(사유) 경험하며(감각) 융합하여 하나의 단일성으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인생 전체라는 긴 여정을 통해 이뤄낸 숙원이었다. 


싯다르타가 이룬 합일에서 고찰할 수 있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스승과 제자가 되어 이뤄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위대한 세존 고타마도 해내지 못했던, 영원하고 통일적인 세계 법칙의 전체 구조를 설명하는 단일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르치고 배워서 진리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싯다르타는 '데미안‘의 싱클레어보다 한 단계 더 급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이라는 가시적인 목적지가 있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명징한 푯대였고 스승이었다. ’데미안‘을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는 여정’이라고 읽을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에게는 그런 가시적인 푯대 혹은 스승으로 해석될 인격체가 없었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스승과 제자가 되어 그 누구의 도움 없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사문의 행렬을 따르기 전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이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많은 성스러운 제사와 목욕재계, 가르침, 논쟁, 명상, 침잠을 익혔지만 싯다르타는 자아로, 자기 자신에게로, 아트만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많은 현인들, 지혜로운 브라만들은 있었으나, 그들은 심오한 지식을 알고 있었을 뿐, 삶 속에서 체득한 적은 없었다. 그들 역시 구도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그 원천,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그 원천을 찾아내야 하고, 바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탐색의 길이거나 돌아가는 길이거나 또는 방황하는 미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위대한 스승을 두고 따르는 것조차도. 


싯다르타는 사문이 되어 몰아와 침잠을 더 익히고 고행과 단식과 사색에 몰입해 보았지만, 결국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야 마는 윤회의 고뇌를 피할 수 없었다. 자아로부터 벗어나 경이의 세계와 접하여 마음의 안식을 얻고 싶었지만 사문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해 냈다. 사문의 방식은 의식을 마비시켜 자아로부터 잠시 도망치는 것일 뿐이었다. 그건 창녀가 있는 거리의 술집에서나, 마부나 노름꾼한테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사문의 끊임없는 단식과 고행은 여인숙에서 잠든 소몰이꾼의 막걸리 몇 잔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눈에 보이는 방식은 현저히 다르나 본질은 말초적인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 무엇을 해도 다시 자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싯다르타는 스스로 깨우쳤다.


‘스승은 없다, 스스로만이 스스로에게 참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깨달음은 싯다르타가 세존 고타마를 대면한 이후 확신으로 바뀐다. 고타마는 세계를 하나의 단일성으로 설명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해탈에 관한 부분에서는 유일하게 균열을 내었다. 결국 해탈은 단일성으로 통일적으로 설명되는 세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해탈을 말할 땐 어쩔 수 없이 차안과 피안의 구분을 초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싯다르타가 보기에 고타마는 해탈에 이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에 이르는 방법은 고타마조차도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 싯다르타의 입을 통해 정리되어 말해진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라고 말이다. 말로 표현된 진리는 반쪽일 수밖에 없다고, 반쪽 짜리 진리는 전체성, 완전성, 단일성을 담아낼 수 없다고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정면으로 마주한 뒤에나 깨달을 수 있는 진리였다.


고마타도 설명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었던 진리는 차안이나 피안, 그 어느 한쪽에만 속하는 게 아니었다. 단일성, 완전성, 전체성이 온전히 담기기 위해서는 그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사유나 감각도 분리가 되면 안 되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도 없어야 했다. 싯다르타는 이 일련의 깨달음을 고타마와 고빈다와 헤어진 이후 스스로의 길을 걸으면서 얻게 된다.


고타마와 헤어진 후 새롭게 태어난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매개로 하여 그동안 살아왔던 사유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감각적인 세계를 오랜 기간 경험하면서 사유와 감각의 세계 모두를 인정하게 되었고, 거추장스럽고 거짓으로만 보았던 차안의 세계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피안과 차안의 구분, 사유와 감각의 구분을 초월하여 마침내 합일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싯다르타는 감각의 세계에서 너무 물들어버린 자신이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로부터 뛰쳐나와 강에서 자살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 순간 옴의 소리를 들으며 싯다르타는 제2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로부터, 강물로부터 배우며 시간이란 개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고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모습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을 띤다. 강물은 아래를 향해 나아가고, 가라앉고, 깊이를 추구하며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강물에는 현재만 있을 뿐인 것이다. 이제 싯다르타에게는 이분법적인 것들의 경계가 사라지고, 시간이라는 마지막 경계마저도 무너지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단일성으로 현재성으로 빛나게 보이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었다.


또한 싯다르타는 카말라로부터 얻은 아들에게서 버림을 받으면서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일종의 번뇌요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란 사실을, 윤회이자 슬픔의 원천이자 시커먼 강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것이며 자신의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 이후 싯다르타는 과거엔 덧없어만 보였던 인간의 일상적 삶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덜 현명하고 덜 오만해지면서,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공감하는 마음도 싹트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깃든 사랑을 알게 된다. 그는 그들을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들 각각의 열정과 행위들에서 생명, 생동감, 불멸의 브라만을 보았다. 그는 인간이 그런 맹목적인 성실성과 힘과 강인함을 지녔기에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혜는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단일성을 느끼고 빨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이자 능력, 그럴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기술이었던 것이다. 진리는 단일성과 현재성의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성을 뜻하는 옴의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마지막 꼭지에서 늙은 뱃사공 싯다르타는 여전히 깨달음만을 추구하고 있는 고빈다와 재회한다. 고빈다에게 건네는 조언에서 우린 싯다르타가 깨달은 진액을 맛볼 수 있다. 그중에서 나는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완성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싯다르타의 말, 그리고 이 세계는 매 순간 완성의 경지에 있다는 말에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돌멩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무엇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오늘 내게 돌멩이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돌멩이가 사랑스럽다는 말에도 마찬가지로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단일성과 현재성으로 압축될 수 있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책을 덮은 지금도 자꾸 생각이 난다. 비로소 세상을 깔보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싯다르타의 고백이 지금도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1991

7.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2014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2033

9.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2045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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