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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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자유: 자아를 찾고 지켜내기


슈테판 츠바이크 저, ‘위로하는 정신‘을 읽고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미완성 유작 중 하나이며, 머나먼 타국 브라질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그가 어떤 상념들에 잠겨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츠바이크는 유럽의 16세기를 자신이 처한 20세기와 데칼코마니로 보았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개신교는 중세 천 년을 지배해 온 가톨릭과 맞섰다.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서로 믿음과 관습이 다른 두 집단은 서로를 배척했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낭자한 전쟁을 오랜 기간 치렀다. 16세기 후반의 잉글랜드의 격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대립,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위그노 전쟁, 그리고 스페인 절대주의에 맞서 일어난 네덜란드의 전쟁과 독립 등이 모두 종교전쟁의 성격을 띤다. 종교전쟁은 신앙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지닌 집단적 광증의 표현이라는 이 책 번역가의 문장은 츠바이크가 바라본 16세기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사랑과 평화를 설파하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서로를 죽이고 전쟁까지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은 시대와 인간과 종교의 모순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츠바이크는 이러한 16세기와 20세기의 공통점을 관용의 부재, 그리고 나와 다른 신앙이나 신념을 가진 상대방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한다. 집단광증의 시대라고 볼 수 있는 그 시대에도 그러나 관용과 타협과 온건함을 옹호하고 끝까지 실천하려 노력했던 인문주의자가 있었다. 바로 에라스무스, 카스텔리오, 몽테뉴 같은 인물이다. 츠바이크는 16세기에 활동했던 이들로부터 자신이 처한 20세기의 문제 (인종이념에 바탕을 둔 제2차 세계대전)를 해결하는 실마리 혹은 희망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그는 이들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로 여겼다고 한다. 신념이 만들어낸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었던 츠바이크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진다.


이 책은 츠바이크가 쓴 몽테뉴의 미니 평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몽테뉴의 탄생 이전부터 그의 가문이 어떻게 평민에서 귀족으로 승격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책을 여는데, 츠바이크의 설명에 따르면 몽테뉴는 그야말로 모든 게 다 갖춰진 상황에서 시의적절하게 태어난 운을 거머쥔 인물 같았다. 즉 몽테뉴의 고유하고 탁월한 능력과 자질만이 아니라 시대를 잘 타고난 그의 운명을 그가 이룬 업적과 행보들을 평가하고 해석할 때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의 부제는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이다. 원제에는 없는 표현 같은데 아마도 한국 번역본에서 출판사가 붙인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부제의 적절성에 동의가 되었다. 그렇다면 신념이 만들어낸 전쟁이 종식되길 그토록 원했던 츠바이크가 몽테뉴로부터 얻은 힌트로써 그의 체념과 물러섬을 꼽았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말일까?


머리말을 제외한 총 일곱 꼭지로 이뤄진 이 책에서 츠바이크의 초점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꼭지에 있다고 보인다. 각각의 제목은 '자아를 찾아서', '자신만의 보루 지키기', '여행'이다. 이 세 꼭지를 '자아를 찾아 지켜내기'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는 츠바이크가 몽테뉴로부터 얻은 힌트인 체념과 물러섬의 자세와 직결되는 것으로써 집단광증의 시대에 맞서서 관용과 타협과 온건함과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방법이 바로 나를 찾아내고 제대로 알고 또 지켜내는 것과 같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도 츠바이크는 인간 본성에 깃든 선함이랄까 하는 인간다움은 시대의 조류에 생각 없이 휩쓸려가는 광기가 아닌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여 각 개인의 고유하고 고귀한 개성을 발현하는 동시에 그렇게 생겨난 풍성한 하모니 안에 내재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자아를 찾아 지켜내는 것을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자유로 보았던 것 같다. 다음 문장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 한 가지만이 잘못이고 범죄다. 이 다양한 세상을 학설이나 체계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 다른 사람을 자유로운 판단과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자기 안에 있지 않은 것을 강요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잘못이고 범죄다. 이런 사람들이 자유에 대한 경외심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정신적 독재에 미친 자들, 자기들이 얻은 새로운 것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옳은 진리라고 우기면서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들보다 몽테뉴가 더 미워한 것은 없었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 생각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된다. 지금 내가 사는 21세기는 몽테뉴의 16세기나 츠바이크의 20세기와는 사뭇 다른 시대이지만, 집단의 광기는 크기와 정도가 다를 뿐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타자의 개성을 묵살하고 파워 게임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며 자신의 세력을 부풀리는 인간들 역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그런 시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츠바이크가 몽테뉴로부터 찾아낸 체념과 물러섬, 즉 자아를 찾고 지켜내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지켜내야 할 자유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또한 내가 먼저 그 자유를 알고 누리지 못하면 타자의 자유 역시 똑같이 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유유 

#김영웅의책과일상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6.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https://rtmodel.tistory.com/1923

7. 위로하는 정신: https://rtmodel.tistory.com/2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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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질문이 있었다
송민원 지음 / 복있는사람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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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아닌 질문으로 깊고 풍성한 해석을


송민원 저,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를 읽고


이 책은 답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책이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의 패러디인 이 책의 제목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는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저자 송민원의 낯설게 읽기, 혹은 다르게 읽기, 혹은 풍성하게 읽기, 혹은 삐딱하게 읽기의 관점이 잘 드러난 것이다. 신학교에 발을 디딘 적도 없는 아마추어 평신도 신학도인 나는 지난 10년간 성경신학 관점에서 써진 수십 권의 신학책들을 읽었다. 또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정회원이자 한 명의 그리스도인 생물학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특별히 창세기 해석에 관한 책들은 더 많이 접했다. 과학과 신학 모두의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킨 창조과학자들의 주놀이터가 창세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는 창세기 해석 중 일부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성경을 정답기록지로 읽고 또 읽기를 원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신념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창세기 해석이 늘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이 이전보다 좀 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지 않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의외로 빈틈이 많을뿐더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이해는 성경 원문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주류 신학자들의 전통적인 (어쩌면 보수적인) 해석에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하고 흥미로웠으며, 더욱더 깊고 풍성한 창세기 읽기를 할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이 책에서는 창세기 여러 본문들에 질문을 던지면서 전통적인 수직적 읽기와 비교하여 많은 독자들이 접해보지 못했을 수평적 읽기를 소개한다. 수직적 읽기는 하나님과 땅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 하나님 명령을 잘 지켰는지 그러지 못했는지에 대한 주제들이 포함된다.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의 교만은 죄로 규정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의 겸손은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규정된다. 반면, 수평적 읽기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창조세계의 관계에 더 주목한다.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겐 어떤 책임과 역할이 있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두 가지 읽기 중 어느 것 하나가 옳고 틀린 건 아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둘 다 병행하여 성경을 읽어나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신앙인의 자세일 것이다. 


저자 송민원은 이러한 두 가지 읽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창세기 본문 6군데를 대표적으로 소개한다. 창세기 1-3장으로부터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창세기 3-5장으로부터 '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하고, 창세기 6-9장으로부터 '홍수는 왜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창세기 10-11장으로부터는 '바벨탑은 왜 무너졌는가'라는 질문을, 창세기 18-19장으로부터는 '소돔과 고모라는 왜 멸망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수평적 읽기의 필요성과 적법성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수직적 읽기의 사각지대를 비추며 그동안 모호하거나 모른 체 덮어두었던, 혹은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발굴하여 기존의 창세기 해석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본문을 대할 때 텍스트뿐 아니라 콘텍스트, 그리고 그것들을 읽는 능동적 주체인 나 자신까지 돌아보며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평면적이 아닌 입체적으로 읽도록 요구하며 또 그렇게 시전을 해 보인다. 우리는 모두 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빈틈 속으로 파고들어 상상력을 발휘하고 앞뒤 문맥과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의도 등을 파악하여 많은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저자가 알려준 세 가지 잣대, 즉 텍스트, 콘텍스트, 나 자신을 살펴보며 성경을 읽어나간다면 바르고 건강한 성경 읽기를 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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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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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일상


켄트 하루프 저, '축복'을 다시 읽고


깊은 어두움을 통과한 자만이 가느다란 한 줄기 빛 앞에서도 감사함으로 무릎을 꿇을 수 있듯이, 일상의 소중함도 그것을 잃어본 자만이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 따르면 그런 것 같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일상을 '잃은 자'가 아닌 '잃어가고 있는 자'와 그 주위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일상의 소중함이 어떤 건지 덤덤히 보여준다. 나아가, '잃어가고 있는 자'는 자신이 '잃은 자'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발견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나날을 참회의 순간들로 보내게 된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깨닫게 되는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라는 것을 조용히 말해준다. 우리는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대드 루이스가 되기도 하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 메리가 되기도 하며, 그들의 여러 이웃이 되기도 하면서 고르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평범한 일상의 축복을 다각도에서 다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년 전에는 느끼지 못했으나 재독 하며 깊이 와닿았던 '축복'의 장면들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써볼까 한다. 


먼저 암에 걸려 한 달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은 남편을 보살피다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 메리가 자신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의사가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뚜벅뚜벅 먼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어떻게 병원에서 나왔냐고 걱정하는 남편에게 메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한테 제대로 된 저녁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나는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전혀 진부한 표현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위해 밥 한 끼를 차려주는 것. 이 사소한 행위가 내게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까닭은 단순한 밥 한 끼 식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죽어가고 있는 남편과 어떻게든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대드 루이스가 된 것처럼 아내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라일 목사가 심란한 마음으로 밤에 마을 산책하면서 어떤 집 안을 마치 염탐이라도 하는 듯 주시하다가 경찰에 신고되어 출동한 경찰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왜 그랬는지 말하는 장면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밤에 자기 집에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런 평범한 삶. 그들이 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는 삶이지요. 나는 거기에서 뭔가를 되살리기를 바랐습니다. 소중한 일상을요."  


라일 목사는 자신의 신념이랄까 믿음이랄까 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와의 화해도 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왔다.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기엔 적어도 현실세계에서는 적당하지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과의 화해를 하지 못한 자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원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내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의 관계에서조차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한밤중에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가족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머릿속에서 했을 생각들은 예상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다. 그는 소중한 일상을 이미 잃어버린 자였다. 경찰에 신고를 당하면서까지 이웃의 집안을 들여다보며 그는 그 이웃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보았을 것이다. 상실감과 죄책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신념 사이에서 그는 여느 때처럼 또다시 고통 속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라일 목사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걸까. 나 역시 나만이 추구했던 어떤 신념을 위해 가족과 같은 일상의 소중함을 잃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혹시 지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삶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진 않을까. 나는 무너져가는 라일 목사의 불안정한 모습들을 보며 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가장 감동이 되었던 장면인데, 초독 땐 이 부분을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냥 지나쳤던 장면이기도 하다. 노년의 윌라, 중년의 에일린과 로레인, 그리고 어린 소녀 앨리스, 이렇게 네 명이 무더운 여름날 오후 가축용 수조에서 수영도 하며 야외에서 소풍을 즐기는 장면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윌라는 네 명이 모여 각자가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정오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다채로운 명암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 모두 생각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감사 기도 비슷한 걸 해보고 싶네요. 이 여름날을 주신 것도, 이런 맛있는 음식을 주신 것도, 이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 우리가 함께 있도록 해주신 것도 모두 축복임을 알고 감사드립니다. (발췌 및 수정)" 


나는 윌라가 왜 저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치 윌라에 빙의가 된 것처럼 나도 저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졌다. 어떤 특별한 경사가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현재의 삶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면 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너무나도 평범해서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순간들을 우주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숨겨진 진실과도 같은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소망했다. 매 순간을 윌라의 마음으로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네 번째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네 여자의 소풍을 묘사하는 저자 켄트 하루프의 문장이다. 다음과 같다. 


"앨리스는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말하는 사람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로레인이 자신의 음식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앨리스도 똑같이 따라 했다. (중략) 앨리스의 귀에 윌라가 코를 고는 소리, 그보다 작은 에일린의 코 고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에 누워 있는 로레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스는 다시 한번 냅킨 아래에서 눈을 떠보았다. 냅킨 위로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깬 앨리스는 그동안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어른들은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아이가 깨기를 기다리며 말없이 헛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몹시 무더워졌고, 뜨거운 바람만 간간이 불어올 뿐이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소녀 앨리스는 부모가 없는 고아다.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이런 사실만 보면 앨리스는 축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저 문장들을 읽으며 저자의 바람이랄까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앨리스 역시 축복 속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부모가 없어도 이웃에 거주하는 마음 좋은 세 명의 여자들로부터 가족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어른들로부터 하나씩 배워나갔다. 자전거를 타는 것도, 물 위에 뜨는 것도 그들로부터 배웠다. 축복은 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이웃들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저자는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하면서 독자들에게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저 장면에서 평화를 느꼈고, 앞으로 더 무럭무럭 자랄 앨리스가 정서가 안정된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길 기도했다.


다섯 번째는 윌라가 라일 목사에게 하는 질문이다. 다음과 같다. 


"오랜 세월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고 나중에 그때를 떠올리고 비교하면서 상실감을 느끼는 편이 좋은 걸까요.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그런 사람을 만들지 않는 편이 더 좋은 걸까요. 그러면 예전이 어땠는지를 기억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라일은 저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편이 분명 더 나을 거라는 대답을 한다. 나 역시 같은 대답을 했다. 켄트 하루프는 아마도 독자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상실감 자체는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인간은 단순히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고통과 환란이 갖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고통과 환란을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지만 그것들을 통과해 내야 내면의 성장과 성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상실감을 느끼는 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상실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보다 나는 더 나을 거라고, 더 인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 중 하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을 얻어 보기도 하고 잃어 보기도 하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아는 것만큼 인간에게 주어진 큰 축복이 또 있을까.


여섯 번째는 자녀에게 가지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죄책감에 대해서다. 아들 프랭크와의 관계는 죽기 직전 경험하는 섬망 상태에서도 해소되지 않았다. 딸 로레인에게는 용서를 구하고 사랑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뒤늦게 한다. 대드 루이스가 로레인에게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용서하거라. 나는 많은 일들을 놓쳤어.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난 언제나 너를 사랑했단다."


많은 일들을 놓쳤다는 문장에서 나는 큰 심호흡을 해야 했다. 나도 일상에서 종종 느끼곤 하는 생각이기 때문인데, 바보처럼 아내와 아들에게 잘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자책이 언제나 가슴 한 편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용서를 구하는 대드의 모습에서, 그리고 딸에게 용서를 받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해소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했다. 대드처럼 죽기 전에 저러지 말고 지금 더 잘하겠다고, 반드시 그러고 말 거라고. 


마지막으로 마침내 대드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 닥쳤을 때 메리가 외쳤던 문장이다. 


"준비가 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아, 누군가의 죽음을 준비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설사 배우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메리의 저 문장이 가슴 깊이 이해가 되었다. 부부는 누구나 이별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부부 중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언젠간 먼저 떠난 자와 남겨진 자로 구분되는 날이 온다. 이 장면에서는 남겨진 자인 메리가 자신이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걸 고백하지만, 아마도 먼저 떠난 자인 대드 역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준비가 된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상을 이루는 대부분의 큰 일들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들에게 닥치는 것 같다. 우린 그렇게 닥친 일들을 처리해 나갈 뿐, 우리에겐 그것들을 피하거나 그것들의 시기를 달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준비 안 됨', 나는 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 역시 축복의 일환이라는,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인생 자체가 모름의 연속이고 우린 언제나 모든 순간에 연습 없이 무대에 서는 배우라는 운명에 속해 있기 때문인데, '축복'이란 일종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고 그것은 받는 사람이 '모름'의 상태에 있을 때 진정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바로 그럴 때 우린 '신비'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이런 '준비 안 됨'과 '모름'의 상태는 탄생과 죽음, 사건과 사고 같은 어떤 특별한 일들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들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신비함을 느끼지 못하거나 축복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모든 순간들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모름에도 불구하고 반복으로 인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즉 '축복'은 언제나 '준비 안 됨'과 '모름'의 상태에서, 신비의 상태에서, 그리고 익숙함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기 객관화를 통해 낯섦을 체험하며 나와 내 일상을 대상화할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일상이 축복이다. 비록 고르지 않을뿐더러 규칙적이지도 않고 늘 갑작스럽지만, 그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 부디 일상의 소중함을 가능한 많이 가능한 자주 알아챌 수 있기를! 그 숨겨진 축복을 늘 발견하고 누릴 수 있기를!



* 켄트 하루프 읽기

1. 밤에 우리 영혼은: https://rtmodel.tistory.com/1478

2. 축복: https://rtmodel.tistory.com/1671

3. 플레인송: https://rtmodel.tistory.com/1832


* 켄트 하루프 다시 읽기

1. 축복: https://rtmodel.tistory.com/2076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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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헤르만 헤세 선집 11 유리알 유희 헤르만 헤세 선집 11
헤르만 헤세 지음, 박계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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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과 초월의 삶


헤르만 헤세 저, '유리알 유희'를 다시 읽고


7년 만에 나는 요제프 크네히트를 조용히 삼켜버린 깊고 푸른 호수 앞에 또다시 서 있다. 방금 티토는 간신히 물밖으로 나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목욕 가운으로 몸을 연신 문지르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그의 몸에선 김이 피어오른다. 얼굴은 경직되어 있고, 눈은 끔찍한 것을 본 듯 공포가 서려있다. 몸을 문지르는 그의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기를 따라오던 명인을 자주 뒤돌아보며 만족스러워했던 그였다. 갑자기 명인이 보이지 않자 급하게 방향을 틀어 잠수도 하면서 명인을 찾던 그였다. 그는 명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 이 작은 호수는 너무 크고 고요했다. 


날벼락처럼 닥친 이 사건은 이 젊은이에게 과연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옆에 숨어서 우두커니 모든 걸 목격하고 있는 나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심지어 두 번째인데도 그렇다. 도대체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이게 진짜 믿을 수나 있단 말인가! 호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묵하고 있다. 햇살이 일렁이는 호수 표면은 반짝거리는 윤슬로 아름답기만 하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유리알 유희'의 마지막 장면이 그림처럼 각인되었던 탓인지 7년 만에 이 장면을 다시 읽으며 나는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그 현장 목격자가 된 듯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경악과 허무를 동시에 느끼며 헤세를 원망했다. 왜 카스탈리엔을 자발적으로 나온 유리알 유희의 명인, 아니 그 직책을 가뿐히 넘어섰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할 마기스터 루디, 요제프 크네히트를 죽여야만 했는지 묻고 또 물었다. 심지어 그가 진정 원했던 첫 번째 일을 시작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러나 크네히트를 삼킨 호수처럼 헤세 역시 침묵을 고수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7년 전과 똑같은 지점에서 멈춰 있다.


초독 감상문에서 유리알 유희와 카스탈리엔이 무엇인지, 비록 가상공간 속의 상상물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의미와 의의에 대해 서술했기 때문에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이 글에서는 조금 더 사적인 감정이 두드러진 요제프 크네히트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써볼까 한다. 


요제프 크네히트는 타고난 자이자 선택된 자였다. 그의 이러한 천성을 소년일 때부터 알아보고 그의 평생 은사가 되는 음악 명인을 묘사하는 헤세의 표현은 '꿰뚫어 보는 듯하면서도 명랑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표현은 크네히트의 미래에 대한 묘사였다. 음악 명인은 크네히트의 '먼저 온 미래'였던 것이다. 그러나 크네히트는 스스로를 선택된 자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비록 그는 그것을 알았고 예감했으며 수백 번 느꼈지만 말이다. 그의 인생은 목표를 정해두고 성취해 나가는 일반적인 엘리트 혹은 영재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예감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정이었다. 이는 언뜻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최후의 유혹'에서 젊은 예수가 자신의 운명을 차츰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연상하게 했다. 그만큼 그의 운명은 범인들이 짊어질 수 없을 정도의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그는 한 세계 속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탁월함을 갖춘 사람이었고, 동시에 자신이 최고인 그 세계뿐만이 아니라 그 세계 속에서 최고점에 위치한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바라볼 줄 아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유리알 유희'를 처음 읽었을 때도 크네히트라는 인물을 거의 신격화시켜 놓은 것 같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일었었는데 (심지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르치스보다도 몇 배나 더),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만 작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니, 아마도 크네히트가 짊어질 운명의 무게를 강조하기 위해 타고난 자, 선택된 자라는 캐릭터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 같다는 이해에 다다를 수 있었다. 즉, 선택된 자이기 때문에 무거운 운명을 짊어진 게 아니라, 무거운 운명을 짊어져야 했기 때문에 선택된 자가 필요했던 거라고 지금의 나는 헤세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부분, 다시 말해 운명을 짊어지는 것과 선택된 자라는 것 사이의 인과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크네히트가 고백하는 자신의 삶을 묘사하는 문장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초월, 즉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음악에 빗대어서 설명하기도 했는데, 음악이 절대 지치거나 절대 잠들지 않고 항상 깨어 있으며 항상 완전하게 현재형으로 주제에서 주제로, 박자에서 박자로 차례대로 처리하고 연주하고 끝내고 지나가는 것처럼, 그의 삶도 늘 깨어 있는 상태로 항상 현재진행형으로 유지하려 애써야 한다고 여겼다. 만약 단순히 그가 모든 능력에서 타고난 자, 선택된 자였다면, 그는 그의 삶을 '각성의 삶'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럴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을 예감했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희생이라 할 수 있을 숭고한 가치를 띠는 그 무엇이었다. 그렇다. 그가 타고난 자, 선택된 자라는 것의 참된 의미는 그의 비범하고 탁월한 능력에 있지 않고 그가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증명했던 헌신과 희생이 상징하는 숭고함에 그 방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자, 선택된 자라는 표현을 나는 정신적인 차원이 아닌 그보다 더 근원적이라 할 수 있을 영적인 차원의 묘사로 읽고 해석하게 된다. 이것이 초독과 재독의 차이라면 차이일 수 있겠다.


크네히트의 이런 근원적인 능력은 최고의 자리에서도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었던 그의 비범함에서 빛을 발한다. 이 작품 속에서 곧 붕괴할 운명에 처한 카스탈리엔이라는 세상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하면서도 그 자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합법적인 명예와 권력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카스탈리엔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카스탈리엔의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현재 좌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쓴소리이지만 꼭 필요한 바른 경고를 할 줄 알았고, 그의 경고를 들을 귀가 없는 카스탈리엔 실무자들의 한계를 미리 예측하고 혼자라도 바른 미래를 위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카스탈리엔을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크네히트는 그야말로 늘 부름을 받으며 오로지 그 방향으로만 끝까지 순종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크네히트가 단순히 세속적인 능력의 탁월함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한 행보였다.


이러한 크네히트의 특질은 그가 카스탈리엔을 떠나기 직전까지 보여준 그의 모든 행동들에서도 일관된다. 무엇보다 그는 치우치지 않았다. 헤세 작품에서 언제나 빠짐없이 등장하는 양극성과 합일의 변증법은 크네히트의 생애에서도 그대로 관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중심을 흐르는 양극성은 카스탈리엔이 상징하는 정신과 바깥세상이 상징하는 자연이다.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이라는 정신적 세계에서도 가장 정신적인 영역이었던 유리알 유희의 명인이었다는 설정은 헤세가 자주 사용하는 극단적인 과장법이 적용될 것일 텐데, 바깥세상과 가장 거리가 먼 위치에 크네히트를 위치시켜야 그가 바깥세상의 참 의미를 간파하고 결국 그곳으로 빠져나가게 되는 행동 (소위 도약)의 의미를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크네히트는 음악 명인뿐 아니라 죽림의 노형과 베네딕트 수도회의 야코부스 신부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도움 받아 카스탈리엔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곳의 한계와 부패의 씨앗을 예감했고, 카스탈리엔의 존재 이유를 역사성을 기반으로 검증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가늠했다. 크네히트에게 세상은 카스탈리엔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크고 풍부한 곳이었고, 다듬어지지 않아 혼돈이 팽배한 곳이기도 하지만 모든 운명과 교양, 예술과 인간성의 고향이자 모태이기도 했다. 섬처럼 고립되어 고인 우물처럼 부패할 운명의 카스탈리엔이 우월감에 심취하여 깔보고 배격해야 할 곳이 아닌 전적으로 섬겨야만 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크네히트에겐 있었다. 첨예한 양극 사이에서 합일을 이루는 첫 시작은 객관적인 시선의 확보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크네히트에겐 있었다. 그는 실로 타고난 자, 선택된 자였다.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장면은 크네히트가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카스탈리엔 본부장과 직접 대면까지 하면서 결코 꺼내기 쉽지 않은 그의 속내를 거짓 없이 모두 털어놓는 장면이었다. 아, 이런 대화라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피하지 않고 솔직하고 담대하게 해낼 수 있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일들,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들이 우리 일상에서도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크네히트 덕에 점검해 볼 수 있었다. 크네히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예상대로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계획대로 카스탈리엔을 담대히 떠났다. 그는 끝까지 선택된 자로서 운명의 부름에 순종하는 행보를 펼쳤던 것이다. 아, 이런 행보라니! 헤세가 크네히트를 선택된 자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실로 그의 삶은 각성과 초월의 삶이었다. 욕망을 이겨내고 자기 객관화의 시선을 유지하는 힘으로 가능한 삶이었다.


이제 크네히트의 죽음에 다다랐다. 그의 죽음 앞에서 나는 또 묻게 된다. 왜 크네히트는 죽어야만 했을까. 그리도 어렵고 힘든 행보 끝에 왜 그렇게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위치해야만 했을까. 크네히트의 생애를 예수의 생애와 빗대고 싶었던 헤세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헤세는 예수가 그의 죽음 이후 부활하여 그의 정신이 온 세상에 전파된 것처럼 크네히트 역시 죽음 이후 그의 정신이 먼저는 젊은 티토에게, 나아가 플리니오에게, 그리고 플리니오와 티토를 매개로 그들이 속한 세상 속으로, 마지막으로 카스탈리엔 속으로 침투하여 퍼져나가길 기대했던 것일까. 심장이 뛰고 있는 채로는 불가능한 그것을 그의 육체를 제거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헤세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숭고하고 대단한 생애를 살아낸 자라도 하나의 작은 소리로 존재하다가 결국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는 것. 타고난 자, 선택된 자, 크네히트도 결국 한계를 가진 인간이기에 그가 최선을 다했다 할지라도 넘지 못하는 선이 있다는 것. 궁극적으로 선지자였던 크네히트도, 카스탈리엔도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것. 이런 암울한 현실을 크네히트의 죽음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세가 현실의 리얼리티의 승리를 보여줬다 하더라도, 그 하나의 사건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흔적을 남긴다는 것, 그 작은 흔적은 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제2의 크네히트가 나오고, 그다음 크네히트가 또 나와서 낙숫물 같은 그 흔적들이 거대한 바위를 뚫는 역사를 보고 싶다. 헤세도 궁극적으로는 이것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는 헤세가 아닌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그의 타고남은 그의 탁월한 능력에 있지 않고 객관성의 눈을 유지하는 각성하는 힘과 해야만 하는 일을 피하지 않고 해내는 힘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2의 크네히트는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크네히트의 죽음을 통해 헤세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이지는 않았을까. 한참 후에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대답한다. "Why not?"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헤세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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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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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당연한 건 없다


위화 저, ‘인생’을 읽고


며칠간 푸구이의 인생을 들으며 어느새 높아졌던 내 마음이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낮아졌다. 내게 주어진 것들, 그리고 내가 무감각하게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로 가득했던 내면에 여백이 생겼다. 감사와 겸손과 사랑이 그 빈 곳을 채웠다. 잊고 있던 충만함이 느껴졌다. 


한 사람의 인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넉넉한 열매를 안겨준다. 눈은 가까운 곳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게 되며, 나 하나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비좁던 마음 밭엔 어느새 따스한 미풍이 불어 날카롭기만 하던 이성과 논리를 내려놓고 내가 인간임을, 나약하고 불완전하며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며, 비로소 삶은 더욱 깊고 풍성해진다. 


푸구이의 인생은 개별적인 서사가 깃들어있는 동시에 보편성을 띤다.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문화,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고유한 가문의 맥락과 한 사람의 개성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개별성과 고유성을 하나로 꿰뚫는 키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단어다. 한 사람의 인생은 저마다 다르지만, 아무리 달라도 그것은 인간의 삶이기에 보편적일 수 있다. 이것이 푸구이의 인생이 나의 인생이 되고 또 우리의 인생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제목 '인생'이 상징하는 바일 것이다. 


아버지를 꼭 빼닮은 탓인지 도박을 하다가 가산을 탕진하게 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하나씩 잃어버리게 되는 푸구이의 인생은 그 누구의 인생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도박이 아니더라도 다른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휘말려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은 아마도 모든 인생에서 정도를 달리하며 존재할 것이다. 저자 위화가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히 푸구이라는 가상의 인물의 삶을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 푸구이의 인생 서사로부터 우리들 개개인의 인생 서사를 읽어내어 성찰해 보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밑줄을 그은 부분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이후 장인어른의 강압으로 인해 푸구이를 떠났던 아내 자전이 다시 돌아온 장면이다. 푸구이는 말한다. "자전이 돌아와 우리 집은 완전해졌다네. 내 일을 도울 조수도 생긴 셈이고,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 여자를 아끼기 시작했지." 


사람들은 어떤 큰 사건을 당하면 크게 두 가지 행보를 보인다. 이전보다 더욱 비뚤어져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막무가내인 경우, 그리고 전화위복으로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경우. 푸구이는 후자였다 (여기서 나는 위화가 도스토옙스키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아내 복이 있어 더욱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 아내를 아끼기 시작했다고 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도박을 한창 할 땐 아내를 때리기도 하고 면박을 주기도 하는 등 개망나니처럼 굴던 푸구이였는데 말이다. 왜 사람은 이런 극한 고난을 겪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일까.


두 번째는 도박으로 날린 집을 차지했던 룽얼이 공산당 정권으로 바뀌고 난 이후 악덕지주로 몰려 사형을 당하는 장면이다. 푸구이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룽얼이 그렇게 죽고 나니,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뒷목이 서늘하더군. 생각하면 할수록 아찔한 기분이었다네. 옛날에 아버지와 내가 집안을 말아먹지 않았다면 그날 사형당할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었겠나." 


인생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바로 푸구이와 룽얼의 운명이 저렇게 뒤바뀌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할 때다. 과거에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던 사건이 현재 푸구이의 생명을 보존하게 해 준 셈이 되어버렸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푸구이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자전의 말이 맞아. 가족끼리 매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복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부할 정도로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룽얼이 사형당한 직후 푸구이의 맥락을 고려할 때 내겐 전혀 다르게 들렸다. 마음 깊이 동의가 되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세 번째는 둘째인 아들 유칭을 학교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첫째인 딸 펑샤를 다른 사람 집에 맡기게 된 푸구이가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찾아온 펑샤를 업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 자전에게 결연하게 말하던 장면이다. "우리 모두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펑샤를 돌려보내지 않겠소." 아내 자전은 배시시 웃어 보였고, 웃는 얼굴 위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은 함께한다는 것. 효율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 가족과 함께하는 것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가치 중 하나라는 것. 저자 위화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기본적이고 당연한 가치들을 다시금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펑샤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남편이 되었던 얼시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는 장면이다. "아버님, 어머님, 저는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펑샤는 어릴 때 병을 앓은 이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푸구이가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농사일을 해왔다. 결혼할 때가 되었으나 장애를 가진 펑샤를 데려갈 사위가 과연 있을까 걱정했었다. 그때 머리가 어깨에 붙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얼시가 나타났다. 얼시와 펑샤 부부가 아이까지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왜 나는 마치 푸구이와 자전이 된 것처럼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던 것일까. 얼시가 저렇게 고백하는 자세 또한 감동이었다.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가던 얼시가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여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겐 과연 얼마나 큰 축복으로 다가갔을까. 내 가슴도 벅차올랐다. 그리고 내가 당연하듯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게 기적 같이 느껴졌고, 모든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가슴 벅찬 순간을 뒤로하고 펑샤는 아이 쿠건을 낳다가 죽고 만다. 몇 년 후 얼시도 죽고, 또 얼마 후 쿠건도 죽고 만다. 푸구이의 가족은 푸구이 손으로 모두 묻었다. 푸구이 가문에 불어닥친 시련의 시작이 푸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 역시 푸구이였다. 그렇게 혼자 살아남은 푸구이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화자인 '나'에게 들려주어 이 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혼자 살아남은 푸구이로부터 소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내 이런 결론이 더 현실 같다는, 그래서 더욱더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인생은 계속 굴러가는 것이다. 계속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지는 것이다. 그 어떤 가슴 아픈 큰 사건과 사고도 세월에 묻어가며 지나가고야 마는 것이다. 덕분에 그런 것들에 무너지는 인간형을 다루는 신파조의 소설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들이 이 작품 '인생' 때문에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여전히 낙관적으로, 그러나 연륜을 지닌 지혜자의 낙관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푸구이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이지 않아 책을 덮으며 마음이 흐뭇했다. 


자극적이고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로 도배되어 실제 우리의 인생을 오염시키고 있는 많은 문학작품들에 혈안이 된 현대인들에게 나는 위화의 '인생'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푸구이의 인생을 자극적인 문학작품 속 주인공의 인생과 비교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느 것이 진짜 인생 같은지, 어느 것이 진짜 인생이어야 할 것인지 깊이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위화의 작품들을 더 읽어볼 요량이다. 그의 낯선 시선이 반갑고 도전이 된다. 


#푸른숲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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