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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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 없는


한강 저, '흰'을 읽고


‘흰’이란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다분히 독립적으로 보이는 많은 짧은 글들의 모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에세이 같은 느낌을 준다. 중간중간에 사진도 여러 장 끼어 있어 마치 시집 같은 느낌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읽고 나면 이미지가 남는다. 짧은 텍스트를 읽었는데 남는 건 그림이다. 이 작품은 한강 작가 특유의 문체가 묻어나는 텍스트로 그린 그림집인 셈이다. 


한강 작가의 여느 작품처럼 이 작품 역시 서사가 아닌 묘사 위주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데엔 여백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텍스트 대비 물리적 여백이 많기도 하다. 나는 그것을 그만큼 천천히 읽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작품은 모호하기만 했다. 공중에 붕 뜬 느낌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다.


마침 한강 작가가 이 책을 쓰고 나서 남긴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존재하지만 안개 같아 손에 잡히지 않던 것이 물방울이 되어 피부로 느껴진 순간이랄까. 그제야 선명해졌다. 소설 속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윤곽이 의미를 가지고 실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그녀의 전작 '소년이 온다'가 남긴 흔적인 것 같았다.


'소년이 온다'는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 내게는 가장 무거운 작품이었다. 한국 역사의 커다란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광주민주화운동)를 그 어느 논픽션보다도 선명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던 나는 그 책을 읽고 조금이나마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거짓 역사와 참 역사를 분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역사 선생님이 하지 못했던 일을 소설 한 편이 해낸 것이다. 이는 왜 그녀가 박근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로 올랐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터뷰에서 알게 된 사실 몇 가지를 소개한다.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지명을 직접 거론하지 않지만 언급되는 ‘어느 도시’는 한강 작가가 실제 4개월 정도 머문 폴란드 바르샤바다. 2014년 8월부터 12월까지였으니 ‘소년이 온다’를 탈고한 직후다. 한강 작가 역시 이 부분을 언급한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 가까이 와 있다고 느꼈던 혼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고, 흰 것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던 차에 바르샤바에 머물게 되는 기회가 찾아왔노라고. 전쟁에 의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던 도시가 복원된 모습을 보면서, 그 도시를 닮은 사람을 상상하게 됐고 그런 이미지가 확장되어서 책을 쓰게 되었노라고. 

 

그녀가 말하는 ‘흰 것’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고 절대 더럽혀질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희다는 표현도 여러 색 중 하나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선다 (물론 어떤 면에서 흰색은 색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인터뷰 글을 가만히 읽어보면 그녀는 ‘소년이 온다’ 이전에도 흰 것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단지 ‘소년이 온다’가 담고 있는 참혹하고 어두운 기운이 흰 것에 대한 갈망을 더 짙게 만들었을 뿐. 그러고 보면 ‘소년이 온다’ 차기작으로 ‘흰’이 쓰인 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셈이다. 어두울수록 조막만 한 빛도 밝은 법이니까.


책의 서두에서 그녀는 흰 것의 목록을 나열한다. 거기엔 생명의 시작도 끝도 모두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보와 배내옷부터 시작해서 백발과 수의로 끝나기 때문이다. 마치 삶과 죽음이 모두 흰 것 안에 들어 있기라도 한 것 같다. 작품 속에서 그녀가 직접 거론하는 죽음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같은 엄마의 자궁 속에 먼저 있다가 세상의 빛을 잠시 보고 숨을 거둔 언니의 죽음이다.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그녀는 태어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나에겐 마치 그녀의 삶이 죽은 언니에게 빚지기라도 한 것처럼 읽혔다. 작품 속에서 그녀의 언니는 언니가 되기도, 아기가 되기도, 또 그녀가 되기도 한다. 어떤 모습으로도 자꾸만 살아나고 또 죽고 또 살아나고 죽는 존재인 듯했다. 그리고 언니는 그녀가 바르샤바를 보며 떠올린 사람이었다. 파괴되었으나 복원된 한 사람. 책을 읽으면서도 왜 그녀는 보지도 못했고 함께 하지도 못했던 언니의 존재를 이렇게나 의식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내 안에선 끊이지 않았다. 혹시 그녀의 언니는 실재했던 한 사람의 의미를 넘어 파괴된 모든 넋을 상징하는 건 아니었을까. '소년이 온다'에서 학살당한 그 수많은 영혼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바르샤바에서 본 것은 그 혼들이 복원되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흰 것의 궁극적인 이미지였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삶과 죽음뿐 아니라 부활의 의미까지 흰 것은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품을 '소년이 온다'를 읽기 전에 먼저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아마 6년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땐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번엔 많이 이해가 되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은 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도 파괴와 복원, 죽음과 삶이라는 단어들에 대한, 그리고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그 무엇, 흰 것에 대한 어떤 갈망 같은 것이 그동안 생겼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그동안 더 많이 보았고 체험했기 때문일까 (하기야 그동안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많이 읽었으니). 물론 흰 것이 빛을 낸다면 그 빛의 세기는 한강 작가의 그것보다 더 세진 않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흰'은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서 느꼈던 폭력성이 희미한 잔재로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읽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희미한 잔재마저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선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아직 이 작품을 읽기 전이라면 적어도 '소년이 온다'는 먼저 읽고 시도해 보길 추천한다.


* 한강 읽기

1. 채식주의자: https://rtmodel.tistory.com/362

2. 소년이 온다: https://rtmodel.tistory.com/791

3. 작별하지 않는다: https://rtmodel.tistory.com/1360

4. 희랍어 시간: https://rtmodel.tistory.com/1409

5. 흰: https://rtmodel.tistory.com/1886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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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예배의 순간
정혜덕.하늘샘 지음 / 비아토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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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덕, 하늘샘 저, '하루, 예배의 순간'을 읽고


소소한 일상 가운데 깃든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느끼게 해 주신 고마운 두 분께,


위도 37.4의 대한민국 서울과 위도 42.9에 위치한 미국 미시간 주의 그랜드 래피즈 사이의 거리를 살펴보니 약 만 킬로미터 (육천오백 마일) 남짓 되는 것 같더군요. 비행기로 18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직항은 존재하지도 않네요. 참 먼 거리입니다. 하지만 저의 첫 미국이 미시간 주와 남쪽으로 접하고 있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여서 그런지 그 거리가 낯설지만은 않아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11년 미국 거주 경험이 이 책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미국을 모두 경험한 저에게는 편지에서 배경으로 깔려있는 혜덕 작가님의 한국과 늘샘의 미국이 친숙하게 다가왔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거리감도 거의 느끼지 못했어요. 덕분에 서로 다른 문화와 생활환경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편지의 주제였던 '예배와 일상' 혹은 '일상 속에 깃든 예배'에 좀 더 집중해서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한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미국에서 사제로부터 견진성사까지 받은 성공회 교인인 적도 있었기에 두 분의 신앙 배경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답니다. 


이제 책을 다 읽고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두 분이 만 3년간 주고받으신 편지를 공식적으로 훔쳐본 저 나름대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랄까요. 아니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늘샘이 감사하게도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저에게 한 부를 보내주셔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랄까요. 그것도 아니면 이 책이 제게 남긴 잔잔한 흔적이 저를 이 자리로 불렀기 때문일까요. 몇 자라도 남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저는 이렇게 늦은 밤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노트북 화면 위 깜빡거리는 커서를 노려보고 있답니다. 


두 분의 편지를 읽으며 모처럼 제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기분을 느꼈어요. 제 마음이 그만큼 평소에 무뎌지고 딱딱해져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좀 더 부드러운 남자가 되어야 하는데, 두 분 때문에 뜻밖의 반성도 하게 되었네요. 저는 이 책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아들에게 저녁을 챙겨주고 난 뒤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읽었답니다. 딱 열흘이 걸렸네요. 한 번 탈 때 30분가량 소요되는 걸 감안하면 300분, 그러니까 5시간 정도 걸려 앵앵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200 페이지 밖에 안 되고, 물리적으로도 손에 잡기 딱 좋은 판형이라 텍스트 수는 분명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였을 텐데, 평소에 책을 조금 빠르게 읽는 편인 제가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나 생각해 보았어요. 쉬운 소설이었다면 아마 3시간 채 걸리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딱히 집중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다른 책보다 더 집중해서 읽느라 하루 목표인 10킬로미터를 달성했는지 모를 때도 있었답니다. 아마 저도 모르게 두 분의 편지를 눈으로만 읽었던 게 아니라 제 일상에서도 예배의 순간이 언제인지 여러 번 진중하게 물으며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덕분에 지난 열흘 동안 저의 자전거 타기는 저만의 예배가 되었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를 경험해 버린 셈이랄까요?


일상에 깃든 예배의 순간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에 침투하여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사로잡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그저 상투적인 행위를 했을 뿐인데도 마음과 생각의 주파수가 하나님의 그것과 맞춰지는 순간 우린 예배자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어요. 예배하기 위해 옷단장, 몸단장, 마음단장을 하는,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익숙한 공예배가 아니라 일상의 예배, 삶의 예배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을 뿐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이뤄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답니다. 


책을 읽으며 반성도 많이 했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견고해진 저의 마음을 느꼈거든요. 어느덧 감사가 사라져 가고 분주한 마음이 가득한 저의 일상에 더 많은 예배의 순간이 깃들길 바라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의식적으로 알아채고 다시 얻은 이 두 번째 인생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지금은 한국 시간으로 밤 11시가 막 넘었습니다. 혜덕 작가님은 주무실 시간이네요. 미시간 시간으로는 이제 아침 9시가 지났습니다. 늘샘은 분주한 아침을 지나 일과를 시작하셨겠어요. 저도 이제 잠을 청하려 합니다. 저는 단 한 번뿐인 편지를 이렇게 쓰지만,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아마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각자의 일상에 깃든 예배의 순간을 알아차리고, 더 나아가 그 순간들을 감사함으로 즐기고, 또 그 순간들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기쁨까지 누릴 수 있길 바라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대전에서 영웅 드림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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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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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것들, 그리고 고독

보후밀 흐라발 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시끄러운 고독’. 사실, 제목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책이다. 중고서점에 들를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마주쳤던 책. 그러나 나는 이상하리만큼 한 번도 그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책을 볼 때마다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아마도 이 책 또한 과대포장된 제목의 책’일 것이라는, 별 근거 없는 나의 상처 입은 신념이었던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펼쳐보다가 적잖은 실망을 했던 적이 어디 한 두번이던가. 이 책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게다가 저자 이름도 생소하고 해서, 난 그냥 제목만을 읽고 표지만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최근, 평소에 내가 참 좋아하는 필체로 글을 쓰시는 지인이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쓴 것을 보았다. 익숙한 제목과 익숙한 표지, 그러나 낯선 내용. 순간, 내가 중고서점에서 그 책을 볼 때마다 했던 생각이 철저히 틀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말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중고서점에 들려 그 책을 구입했다. 다행히 그 책은 비슷한 자리에 꽂혀 있었다. 마치 계속해서 내 손길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 책은 장편소설로 분류되지만, 상당히 짧은 분량의 작품이다. 그다지 큰 집중을 하지 않아도, 두 어시간에 다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의 제목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과대포장된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 한타는 삼십 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습하고 퀴퀴하며 어두운 지하실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에는 압축기 한 대와 수많은 종이 (책)와 쥐들이 산다. 저만치 위에서는 언제나 화가 난 듯한 소장의 불평과 잔소리가 큰소리로 들려온다. 늘 구부리고 일을 하느라 허리가 구부러지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마치 시끄러운 세상과는 단절된 듯 고독 속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한타.

이야기만이 아닌 글에서 시적 이미지를 떠올려보길 좋아하는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한타와 그의 작업장을 머리 속에 그려봤다. 꽤 흉측하고 기괴한 그림이 그려졌다. 내 그림 속에서 한타는 마치 꼽추와 흡사했다. 저자가 묘사한 것처럼 잘 씻지도 않는 그의 몸에선 곰팡이 냄새와 쥐 냄새가 나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몰골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가 즐겨 마시던 맥주를 파는 곳에서 계산할 때 옷 속에서 쥐가 뛰쳐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읽으니 더욱 내 그림 속의 한타는 처참하고 처절한 인간의 대표가 되어버린 듯했다. 잊혀진 듯한 인물, 그리고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인물.

그러나 한타의 일상은 압축기가 내는 괴물 같은 소리나 쥐들이 은밀하게 내는 조그만 소리, 혹은 소장의 고함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시끄러운 세상만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그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폐지를 압축하는 성실한 사람만도 아니었다. 그는 폐지가 되기 직전의 수많은 책에서 추출한 어마어마한 양의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마치 폐지를 압축하듯 고독하게 머리와 몸에 압축하여 흡수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시대가 원하지 않거나 남아돌거나 잘못 만들어진 책들을 파기하는 작업의 맨 마지막 단계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그가 섭렵하는 지식의 출처도 모두 시대가 어쨌거나 파기하길 원하는 책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좋아한 건 고전적인 책들이었고 , 또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대가 원하는 책들은 그의 냄새 나는 지하실 작업장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테니.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고성능의 압축기가 개발되었다. 한타에게는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폐지를 압축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압축되어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가운데 나름대로의 자존감을 찾기도 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계는 그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했던 양의 책들을 단 몇 시간만에 해치웠고, 그가 휴가까지 반납하고 몇 푼 안되는 수당을 받으면서 일을 해야만 마칠 수 있었던 일은 멋드러진 유니폼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희희낙낙거리면서 일을 마치고 어디 놀러갈까 이번 휴가에는 어디 갈까를 지껄이면서 진행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로 변해버렸다.

한타는 말문이 막혔다. 더욱 시끄러워진 기계와 전문성이나 경험 없이도 충분히 자신이 했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단시간에 처리하는 젊은이들의 시끄러운 지껄임 가운데 한타는 더욱 고독했다. 그는 늙었고, 그가 은퇴 후 사려고 마음 먹었던 그 압축기 또한 이젠 시대에 걸맞지 않은 저사양의 그것이 되어버렸다.

그곳에 한타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습하고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 작업장과 그 안을 언제나 가득 채우고 있던,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책들, 그리고 그와 동반자였던 쥐들이 있는 그 작은 세상이 그에겐 그나마 위로요 안식처였는데, 이젠 그마저도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세상은 더욱 시끄러워졌고, 한타는 한층 더 고독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작업장을 찾는다. 늘 하던 압축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압축기에 넣은 것은 폐지가 아니었다. 자기자신의 몸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고독 속으로 생을 마감한다.

다소 끔찍한 책의 마지막 설정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강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그의 고독에 가슴이 미어졌고, 이해가 충분히 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왠지 모를 동질감까지 느껴졌다. 내 안에도 한타의 모습이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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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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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


양귀자 저, '모순'을 읽고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름은 안진진. ‘참 진’ 자가 두 번이나 연거푸 쓰였으나 성이 하필 ‘안’씨였던 사람. '진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안'이라는 성을 물려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딸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참한 성품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기대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성 때문에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 아버지의 타고난 그 무엇이 딸에게 기대했던 그 어떤 것도 부정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던 걸까. 혹시 아무리 강한 삶에의 의지도 천성이나 운명을 이길 수 없다는 철학을 무의식 중에 전달했던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무책임했던 걸까.


안진진에 의해 묘사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평범한 아버지 상을 거스른다. 그는 가정에서 폭력을 일삼았고 툭하면 집을 나갔으며 아내가 어렵게 벌어온 돈도 훔쳐갔다. 술주정쟁이에다가 돈도 벌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외로이 저항했던 걸까. 책을 다 읽고 보니,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의 무능력한 방탕함은 자신의 천성을 고스란히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 그의 마지막 가출은 5년 만에 끝이 났다. 다시 돌아온 그는 부랑자의 모습이었다. 중풍과 치매까지 업어왔다. 그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사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까지 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던 사람. 그가 바로 은연중 참하디참한 딸을 바랐으나 자신이 이미 갖고 있던 것으로 자신의 바람을 부정해 버린 안진진의 아버지다.


다행히 안진진은 아버지의 삶을 따르지 않은 듯하다. 아버지가 물려준 성이 아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대로 살아가는 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안진진은 이름의 권세를 극복했던 걸까.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을 닮아 비뚤어지고 반항하는 삶을 살아가는 남동생도, 시장에서 팬티와 양말을 팔아 남은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나가며 가족을 살리는 어머니도, 그리고 어머니의 일란성쌍둥이 동생인 이모까지 이해하고 품는 그녀는 동시에 사귀고 있는 두 남자 중 하나를 덥석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솔직하다. 그리고 자신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방법으로 극복해 나간다. 이십 대 중반까지 아버지가 자기 인생에 구멍 낸 곳을 메꾸느라 이룬 것 하나 없었지만 그녀는 큰 불평 없이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간다. 아마도 이 부분이 많은 독자들에게 암묵적인 위로와 공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진진의 이러한 씩씩한 삶은 책을 여는 첫 문장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책은 운명을 극복해 낸 한 여성의 간증집이 아니다. 제목부터가 '모순' 아닌가. 책의 마지막 부분, 그녀가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 (그것도 스스로가 자신의 반응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뒤 나영규가 아닌 김장우를 선택한 이후에, 또 그것도 온실 속, 아니 궁전 속 무료함 속에서 살아가던 이모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건을 현장에서 목도한 이후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나영규는 안진진보다 자기 계획의 성취 여부를 더 사랑하는 남자였다. 안진진은 나영규의 인생계획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조각일 뿐이었다. 한편 안진진은 김장우 앞에서와는 달리 나영규 앞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이끌림을 부정하고 끝내 그녀는 나영규를 선택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나영규와 헤어지기 위한 이유는 많았으나 그와 결혼하기로 한 이유는 많지 않았다. 


이모가 자살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교과서 같은, 아니 어쩌면 기계 같은 이모부와 이모부 덕분에 굴러들어 온 지극한 안정감이었다. 그 지극한 안정감이 무덤이 되어 이모의 목을 졸라맸던 것이다. 나영규는 이런 면에서 이모부를 닮았다. 그리고 굳이 대비하자면 김장우는 아버지 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이모부 유형과 아버지 유형, 이렇게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안진진은 과연 안정감을 선택했던 것일까. 저자 양귀자는 이 부분에서 모순을 극대화하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었을까. 


자살로 남긴 이모의 가르침을 거부하며 나영규를 선택한 안진진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모처럼 '무덤 속 같은 평온'한 삶을 살게 될까, 아니면 남편이 나영규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처럼 지루할 새 없는 삶의 전사로 살아가게 될까. 


안진진이 나영규를 선택한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왜 김장우를 선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 답은 모순이라는 단어 속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모순에서 엉뚱하게도 희망을 발견한다. 안진진에게 김장우는 아버지가 아니고, 나영규는 이모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 부모 세대에서 작동하던 이분법이 안진진 인생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면 그건 결코 모순이라 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안진진을 응원하기로 한다. 그녀가 나영규를 선택했기 때문도 아니고, 김장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다.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바로 이 책 첫 문장에 쓰인 안진진의 외침을 실현한 것이라 믿게 된다. 모순된 인생을 정면돌파하는 방법은 모순될지라도 나중에 잘못된 선택이라고 평가받게 될지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조용히 내리면서 말이다.


#쓰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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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 - 차별 없는 은혜, 오름 직한 동산, 은혜의동산교회 이야기 동네 교회 이야기 시리즈 8
김종원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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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교회, 공동체의 일치


김종원 저, ‘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를 읽고


늦게 잠들었음에도 모처럼 개운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감상문을 쓰기 위한 나의 루틴을 쫓아 어젯밤 책을 읽으며 노트에 옮겨놓은 문장들과 끄적거린 나의 단상들을 훑어본다. 새벽 2시경 잠들기 직전에 써놓은 마지막 줄에 내 시선이 멈춘다. 이 책이 내게 남긴 메시지다. 


“복음이면 되는구나! 교회면 되는구나! 공동체면 되는구나!”


어릴 적 교회 간증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채 나는 성인이 되었고, 그 이후 어지간해선 개인이나 교회 간증집을 멀리해 왔다. 의외로 많은 경우 간증은 영웅담 혹은 성공담의 포장지 역할을 충실하게 했고, 간증하는 당사자는 자신의 과거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그럴 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스스로도 은혜의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비극을 숱하게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저자가 지인이 아니었다면 내 손에 들리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사실 반쯤은 의무감으로 구입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지금은 그랬던 나를 반성한다. 이 책 읽길 참 잘했다.


이 책의 앞부분은 저자의 역사다. 저자는 폭력에 물든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겐 '어머니의 기도'라는 영적 배경이 있었고, 교회라는 도피처와 안식처가 있었다. 그래서 숨 쉴 수 있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이었다. 학창 시절, 개인 기도는 물론 공동체 기도의 힘을 체험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환상을 보았고 그것을 평상시 어머니가 해 주시던 기도의 내용과 합하여 선교사의 비전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자 즉시 자신의 삶을 그 비전에 맞추었다. 필리핀 파송 선교사로 갔지만, 막상 현장에서 마주한 건 벌거벗은 자신의 영적 실체였다. 그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이 준비된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사랑은 물론 성경 지식도 교회론도 턱없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고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귀국 후 갑작스럽게 찾아온 공황 발작을 수 차례 경험하며 부목사직을 사임하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목회 성공이 아닌 자신이 드려지는 거룩산 산 제사의 깨달음을 얻고 다시 하나님과 방향을 맞출 수 있었다. 하나님은 한 번도 그를 버린 적도 잊은 적도 없었던 것이다. 생계를 위해 맨발로 뛰면서 막막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청년부 수련회 강사로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목회에 대한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지하여 개척을 감행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저자의 집에서 첫 예배가 드려졌다. 


짧은 저자의 역사를 뒤로하면, 책의 대부분은 저자가 현재 담임으로 섬기는 ‘은혜의 동산 교회’의 개척 역사를 소개한다. ‘공황 발작으로 사임한 목사가 개척한 교회’라는 소문 때문이었을까. ‘은혜의 동산 교회’에는 개척 멤버부터 깨어진 자들, 구부러진 길을 걸어온 자들의 비율이 타교회보다 높았다. 담임 목사처럼 공황 장애를 겪은 사람도, 조현병을 앓은 사람도, 사채업자에게 쫓기며 가정 파탄을 일으킨 장본인도 인도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 정도로 문제아로 자리매김했던 청소년도, 이단 종교에 심취한 부모를 가진 자녀들도 하나님께선 은혜의 동산 교회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마음, 목회자의 마음 없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만 판단한다면 목사에겐 충분히 교회를 포기할 만한 이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달랐다. 그는 삯꾼 목사가 아니었다. 그는 목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두 번째 삶을 조금 먼저 살기 시작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랑의 빚을 갚아 나가는 한 사람이었다. 그는 깨지고 상처 입은 각 사람을 교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대했다.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한 마리의 양으로 말이다. 그는 믿었을 것이다. 모든 깨짐과 무너짐도 예수의 생명의 빛이 임하면 회복되고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그는 몸과 마음 모두를 실어 그들의 현장으로 직접 찾아갔다. 삶으로 예배하며 그들을 섬겼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모습에서 참 목자, 예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은혜의 동산 교회에는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현재진행형으로 임하는 곳임을 믿게 된다.  


이 책이 만약 이렇게 저자와 저자가 개척한 교회의 역사를 소개하는 데에 그쳤다면 나는 이 책을 그리 추천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여기 소개하지 못한 책 속의 많은 감동적인 일화들이 더 많이 소개되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진미는 저자인 김종원 목사 한 사람에게도, 은혜의 동산 교회 성도들의 감동적인 회심 이야기에도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재미와 감동이 잘 버무려진 한 편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으로 이 책을 술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로 '공동체'를 꼽는다. 김종원 목사도 은혜의 동산 교회 성도도 아닌 '은동교 (은혜의 동산 교회 줄임말) 공동체' 말이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마음 담아 읽는 독자라면 모두 이 사실을 발견하고 감동이 되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예수의 복음이면 된다는 것, 교회면 된다는 것, 그리고 공동체면 된다는 것을 더욱 믿고 신뢰하게 되리라 믿는다.


정말 오랜만에 예수의 복음, 교회, 공동체, 이 세 가지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나고 회복되는 증거를 볼 수 있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누려야 할 축복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덧붙여 저자 김종원 목사가 내 지인이라서 영광이다. 나도 한 다리 건너 공동체 일원임에 감사한다. 개인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여전히 예수의 복음으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의 살아있음을 보고 싶다면 나는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세움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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