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 고전산책 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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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하시길, 친구.


레프 톨스토이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나는 가방에 보통 한 두 권의 책을 넣고 다닌다. 마침 어제 감상문을 하나 마무리하며 책 한 권을 끝낸터라, 오늘은 새로운 책을 하나 시작할 참이었다. 출근 전 습관처럼 책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무심코 가방에 집어넣은 책이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몇 분 후 출근 길에서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의 죽음은, 사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사실이었다.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공간적 제약이 있었지만, 언제 한 번 만나 배드민턴도 치고 타코도 같이 먹기로 했었다. 그 약속을 한 게 바로 엊그저께였다. 나는 갓길에 차를 멈추고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방 안에 든 책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책을 골랐을 무렵 이미 그는 하늘나라로 간 상태였지만, 난 그 책을 고른 나의 선택을 바보처럼 탓하고 있었다. 먼저 간 거라 믿네. 친구, 심왕찬. 부디 안식하시길.


같은 책도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공감도와 이해도가 달라진다.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나는 이 책을 읽어냈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 사람이지만, 그리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낸 두 사람이지만, 나에겐 책 속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현실 속 친구의 죽음이 겹쳐졌다. 그리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이반 일리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훌륭한 집안 출신이었고 존경받는 법조인으로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것과는 거의 무관하게 그 역시 한 인간이었다. 그가 살아낸 삶은 우리네 평범한 삶과 다를 바 없었으며, 그가 맞이한 죽음도 특별할 게 없었다. 또한 이 책의 탁월한 점이라고 할 수 있고, 저자 톨스토이의 집필 의도도 엿볼 수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방관적이고 형식적인 애도를 표하는,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심리 묘사에서도 난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모두 인간 이야기였고, 모두 우리들의 이야기였으며, 또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생활신조는 대체로 ‘쉽게, 편하게, 점잖게’였다. 법조인의 바쁜 삶을 살아내면서 그는 사회적으로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비록 결혼 후 부부 관계가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개인주의적으로 해결해버렸다. 이러한 모습 또한 우리네 삶에서 흔하게 겪는 일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지나갔다. 모든 게 대단히 멋있었다. 그는 일 뿐 아니라 상류계층의 삶도 즐길 줄 알았다. 이반 일리치가 진정으로 기뻐할 때는 브리지게임을 할 때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생활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 이면에 놓인 인간의 공통적인 습성을 날카롭게 꼬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몸에 이상 징후를 발견한다. 아니, 벌써부터 느껴오던 것이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병이었다. 맹장과 신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 했다. 그 병은 그의 쉽고, 편하고, 점잖은 삶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몸이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하자, 삶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브리지게임에서도 뭐가 잘 안 되면 금새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다. 그는 외로웠다. 능수능란하게 인간관계를 조절하며 그는 늘 주인공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병이 들자 그 관계들이 모두 위선과 거짓의 옷을 입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아내 조차도 남편의 병의 책임은 남편 자신에게 있고 자신은 남편의 병 때문에 죽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존재가 주변 사람들에게 장애물로 여겨지는 것 같은 기분도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에게조차도. 비참했다. 톨스토이는 여기서 이렇게 쓴다. “그는 파멸의 끝자락에 서서 이해하고 동정해주는 사람 없이 외롭게 버텨야 했다.”


공과 사를 탁월하게 구분했던 그도 통증이 점점 심해지자 직장 생활에서도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통증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한없이 절망했다. 그가 이뤄놓은 모든 삶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동안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고 은폐하며 파괴하던 자세가 죽음에 대한 저항의 행위로써 먹혀 들었으나, 하루하루 커지는 고통은 그마저도 전혀 작동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심이 오로지 과연 그가 곧 자리를 비워주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야기된 산 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인가 그리고 자신 스스로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에 쏠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편과 모르핀이 없으면 잠을 자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약 성분이 그의 정신을 잃게 만들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그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집사 역할을 하던 농부 출신의 게라심이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게라심에게서는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바로 거짓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는 게 명백한데도, 조금 아플 뿐이라는 거짓말,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치료를 받으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거라는 거짓말 등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은 죽음에 이를 것임을 알았다. 그것도 자기를 동정하는 사람 하나도 없이 홀로 말이다. 죽어갈 때 외로움은 가장 큰 고통임이 분명한 것 같다.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면서 이 책은 점점 그 혼자만의 관념적인 서술로 채워진다. 저자가 기술한 이반 일리치의 독백 중 내 마음에 꽂혔던 문장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현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쁨들은 더욱 부질없고 의혹투성이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항상 똑같았던 사람. 계속되면 될수록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삶. 산에 오른다고 상상했었지. 그런데 사실은 일정한 속도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어. 그래 그랬던 거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어. 근데 사실은 정확히 그만큼 내 발아래에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다 끝났어.”


그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계속 피해왔던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혹시 내가 살아온 삶이 바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어서 그는 예전에 도저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 즉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 번 그 생각에 저항하고 반대하고 합리화를 해댔지만,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에 와서 톨스토이는 그의 죽음 직전의 의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그는 매 순간 아무리 기를 써도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에 조금식 다가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며 힘들어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그 구멍에 기어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더 힘들어한다는 것 또한 느끼고 있었다. 구멍에 기어들어가는 걸 방해하는 건 자신의 지난 삶이 괜찮았다는 인식이었다. 삶의 정당화는 그를 붙들고 놔주지 않아 그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 점이 그를 제일 힘들게 했다.”


그가 사망하기 한 시간 전, 김나지움에 다니는 아들이 그의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갖다대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족과 자신을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순간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음을 본다. 그로부터 두 시간 임종의 고통은 더 지속되었지만, 그 자신은 죽음에 이른 게 아니라 빛에 이른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마음 속 독백은 다음과 같다.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이반 일리치의 삶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살아보고 싶어하는 삶이었다. 부와 명예를 누리며 여유도 즐길 줄 아는 보기 좋은 삶. 그러나 그 삶은 온갖 위선과 거짓으로 둘러싸인 삶이었다. 인간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에 높이 오른 사람들에게서 위선과 거짓의 힘을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 미끄러져 내릴까, 아니면 피라미드 체제 자체가 무너질까.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진실을 대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삶을 통해서도 인간의 추악한 이기적인 습성을 넌지시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죽음을 통해서도 인간 내면의 모습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삶을 화려하고 보기 좋게 만들었던 것들이 거품이었다는 것. 살았을 때 자신이 주인공 자리에서 이용하고 누리던 그 편리했던 것들이 죽을 때에서야 거치장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도구가 된다는 것. 결국은 아무리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아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을 때와 같이 바닥의 심연에 이를 때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고 동정받길 바란다는 것. 톨스토이는 분명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있는 깊은 구멍과 존재의 의미를 깊이있게 철학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는 전 세계의 모든 독자에 의해서 이반 일리치는 매일 매시간 또 죽는다. 그러나 나의 친구의 죽음은 단 한 번, 오늘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무리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도 현실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일반적인 답이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에, 그것도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답이 될 때가 많은 것이다. 친구를 생각한다. 그의 삶과 그의 죽음. 그를 통해 보았던 여러 나라의 사진들. 가족의 행복함. 생각이 맞는 사람을 만났다는 희열. 구독하여 종종 듣던 그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와 기타 연주.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을 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한 번 애도한다. 부디 거기서 안식하시길.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5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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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고독으로부터 찾는 해답 서양문학의 향기 10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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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인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포항 시골을 떠나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이면 나는 종종 습관대로 서면에 있던 대형 서점인 '동보서적'을 찾았다. 대학생이 된 나는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과학이나 의학 코너가 아닌 문학 코너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었다. 그땐 소설보다는 시를 읽었고, 맘에 들면 그 시가 담긴 시집을 구매할 마음도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중학생 때 칼릴 지브란과 헤르만 헤세와 괴테를 읽으며 스며든 문학적 감성이 대학생이 된 나를 시집 코너로 인도했던 것이다.


1996년.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젊은 시인들이 낭만에 가득 차 저마다 부르짖는 사랑 노래를 시로 담아 책으로 만들었었다. 연애 편지에나 사용할법한 낯간지러운 시부터 시작해서 몇 번을 읽어야 비로소 무언가가 묵직하게 와 닿는 시까지, 시집 코너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집이 넘쳐났다. 이 책 저 책 내키는 대로 시를 읽어가다 보면 한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메뚜기처럼 그날도 이 시집 저 시집을 들춰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의 시에 사로잡혀 난 그 책을 끝내 구매하고야 말았다.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시인 이름은 똑똑히 기억이 난다. 릴케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뭔가가 달랐다. 굉장히 감성적이면서도 절제가 잘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겉이 아닌 심층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릴케를 처음 만났다. 감수성이 여전히 예민했던 풋풋한 20대의 시작점에서 릴케를 만났던 건 행운이었다.


40대에 접어든 내가 저번 주말 중고 서점에서 우연히 릴케를 만났던 건 일종의 데자뷰였다. 언제나 중고 서점에 들르면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꼼꼼히 살피는데, 마침 릴케의 책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순간, 시간이 멈추면서 내 기억은 20여 년 전으로 훌쩍 뛰어갔고, 동보서적 시집 코너에 서서 시집 한 권에 몰입해있던 과거의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혼자서 기분이 좋아 입가에 웃음이 걸린 채 그 책을 구입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이 책은 시집이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오른 릴케의 작품인데 시집이 아니라니 나도 처음엔 의아했었다. 그러나 릴케는 시나 산문보다 훨씬 많은 양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책은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라는 이름의 작가에게 릴케가 보낸 열 편의 편지를 모아놓은 작품이다.


카푸스는 문학 지망생이었다. 릴케와 같은 사관학교에 다녔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릴케의 시집에 몰입해 있던 중, 릴케가 학생일 때도 있었던 호라체크 목사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릴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카푸스는 자신이 쓴 습작 시들을 릴케에게 보내 그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타고난 소질과 그가 가질 직업이 서로 어긋나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 무렵이었고 막 스무 살이 되려는 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카푸스는 단순히 그가 쓴 시에 대한 평가나 조언을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닌 솔직한 인생 고민까지도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편지로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그는 몇 주 후 릴케의 성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쓰인 답장을 받게 된다. 1903년 2월 17일 파리에서 보내온 편지였다.


그 후 열 번째 편지가 작성된 날짜는1908년 12월 26일이다. 약 5년 간의 기간 동안 주고 받은 편지, 그 안에 담긴 젊은 날의 무수한 고민과 좌절과 방랑의 여정. 그것들에 대한 인생의 선배이자 고독한 시인의 길을 꿋꿋이 먼저 간 릴케의 답장이 바로 이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릴케는 창작의 고통 중 마주해야만 하는 고독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삶과 죽음, 고독과 침묵, 그리고 그로부터 길어 올려 예술로 승화시킨 글, 곧 시의 언어. 무엇보다도 릴케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이니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권면한다.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것을 신뢰하고 매달리라고 말한다. 늘 충분한 인내심을 지니고 소박한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릴케가 가진 입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사랑입니다." 그렇다. 릴케는 섣불리 서로가 하나가 되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경솔함을 넌지시 지적하며, 개개인이 먼저 성숙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간다. 릴케의 시집이 왜 20대의 나를 사로잡았었는지, 왜 막 스무 살이 되려던 카푸스를 사로잡았었는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독 가운데,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지속된 훈련으로 스스로 몸과 영혼을 다진 뒤, 그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릴케의 사색과 성찰. 그리고 그것들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시. 아마도 나와 카푸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가진 고민에 릴케의 시가 나름대로의 해답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만간 정말 오랜만에 릴케의 시집을 하나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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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뮈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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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 저,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기괴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주인공이 쪄들어 냄새가 날 것 같은 부랑자였기 때문이었거나, 하마터면 철학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이나 수준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반복을 거부하지만 또 반복되고야 마는, 그리고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그들의 허무한 삶 때문도 아니었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의 일상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쓴 나물을 먹은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얼른 깨끗하게 샤워라고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문득 그들이 갇혔던 일상이 우리 인간들의 실존적인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기괴하기만 했던 기분은 금새, 겉으론 우스꽝스럽지만 속으론 아주 깊고 묵직하게 내면을 터치당했다는 기분으로 바뀌었다.


책 전체엔 허무함이 줄줄 흐른다. 신물 나고 진절머리가 나지만 탈출할 수도 없는 그들의 일상은 마치 오래 빨지 않고 주구장창 써온 모자나, 벗어서 겨우 바람에 말리는 정도의 관리만 해서 고약한 냄새가 풀풀 풍겨나는 구두 속 땀과 함께 엉겨 붙은 이물질처럼, 이미 그들 자신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죽음을 택하지 않는 이상, 그 상황을 벗어날 길은 없어 보였다. 절망적이다 못해 절망 자체가 그들의 호흡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도를 기다리며 그 시간을 때우는 것 밖엔 없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이 책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위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허무한 삶에 그나마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도 된다.


기다림에 지쳐 순간순간 그 상황을 벗어나려 할 때조차도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건 이미 허무와 절망과 한 몸이 된 그들에게 있어선 일종의 의식과도 같아 보였다. 그 기다림은 또한 그들을 유일하게 하나로 묶어 주는 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는 마치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와 악으로 물들어버린, 그래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의 마음 중심에서도 여전히 무언가 구원을 바라는 본능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자신의 책에서 신을 찾지 말라는 말까지 남긴 사무엘 베케트였지만, 난 이 책에서 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구원과 해방의 길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매일 기다려도 오지 않고 고작 전령인 소년을 보내어 다음을 기약하는 "고도"라는 존재는 어쩌면 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도에게 전할 말이 없냐고 물어보는 소년은 인간의 기도를 담아가는 천사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년에게 자기들을 만났다고만 고도에게 전하라고 하는 두 주인공의 메시지는 절망 속에서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실존을 전하는 것 같았다.


2차 세계대전 가운데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나치를 피해 숨어 지내는 동안 피난민들과 대화를 나눈 경험에서 창작의 실마리를 얻었다고 하는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의 정체를 포함한 이 책에 대한 해석을 전혀 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전적으로 남겨 두었지만, 아마도 그는 그가 겪은 인생의 부조리를 통해서 궁극적인 인간의 삶의 의미를, 비록 절망적인 현실 속이지만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기다림"에서 찾으려고 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의 모습이나 끊임없이 질적 변증을 통해 주체적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실존주의적인 그의 인간관과도 맞닿아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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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전원 교향곡 - 을유세계문학전집 24 을유세계문학전집 24
앙드레 지드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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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다시 읽고.


책에 몰입을 해보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만나기 전까진 독서하며 한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엄마의 도움으로 "데미안"을 읽게 되면서 문학세계에 들어왔던 나는 문학고전들을 기회가 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당최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단테의 신곡, 책보단 짧은 연극을 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던 괴테의 파우스트, 지루하기만 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길고 난해하여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마칠 수 있었던 도스트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책도, 뭔지 모를 의무감 반 호기심 반으로 읽어냈다. 내가 "좁은문"을 읽었던 시기가 그 어려운 책들을 읽고 난 이후인지 읽기 전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확실히 내 뇌리에 박힌 기억은 내가, 이 싸나이 김영웅이 독서하면서 울어버린 사건이었다. 그렇다. 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에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책의 앞 색지에다가 내가 처음으로 울었던 책이라고 써놨었던 것 같다.


데미안에 이어, 나이 마흔에 시작한 나의 고전 다시 읽기 시리즈의 그 두 번째 주인공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었다. 베드타임 스토리로 Calendar mystery 시리즈 중 September 편을 아들에게 끝까지 다 읽어주고 나서 느꼈던 깔끔함 때문이었을까. 아들을 재우고 나니, 퇴근 길 기차 안에서 읽다가 만 챕터의 나머지 부분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챕터까지만 다 읽고 자려고 했는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눈물을 흘렸던 유일한 책이었던 탓일까. 지속되는 알리사의 편지와 제롬이 묘사하는 그녀의 이미지, 그리고 곧 닥쳐올 둘 사이의 비극이 너무나도 선명해져, 난 결국 알리사의 죽음을 두 번째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고, 또다시 비탄에 잠긴 채 겨우겨우 책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녀가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문장이다. 25년간 잊혀지지 않았던 문장. 심호흡을 했다. 비록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감정의 폭풍같은 것이 내 전신을 감쌌다. 시계는 벌써 자정을 가리켰지만 당장 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하녀가 등불을 들고 오기 전에 조금만 더 그 책 안에 있고 싶었다. 정리되지는 않지만 불현듯 마음 깊은 곳을 터치당한 것 같은 기분으로 그냥 그렇게 한동안 나 자신을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왈칵 터져나오는 감정의 북받침이 책 곳곳에 나오지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적이기만 하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차례의 감정의 폭풍 또한 고요함 가운데 있다. 고요한 폭풍이랄까. 그리고 책에 지속적으로 흐르는 또 다른 기운은 슬픔이다. 고요함과 슬픔. 아, 좁은문을 통과하는 길은 고요하고도 슬픈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걸까?


25년 전에, 알리사의 죽음과 살아남은 제롬을 생각하며 눈물을 터뜨렸던 건, 어쩌면 내가 신앙이라는 게 무엇인지 지금보다 많이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해석해 본다. 지금도 그때처럼 책을 다 이해할 순 없다. 인간 사이의 사랑으로 인한 행복이 왜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적이 되어야만 하는지, 난 아직도 명쾌하게 답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라는 것은 분명 15살의 청소년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를 기억하며 아련함과 순수함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그 아련함과 순수함의 출처가 무지일 수도 있겠다는, 참 재수없고도 늙어빠진 생각을 하게 된다.


알리사의 성스러운 길을 가고자 하는 그 고결한 뜻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마흔 살의 나는 한편으로 알리사를 책망한다. 비록 알리사가 병에 걸려 죽게 되어 그 이상 깊게 논쟁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알리사가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분명히 망설이지 않고 바보라고 말해주었을 테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을 더 밝히 인도받는 것이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라면, 어찌 그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함께 그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있냐고 난 따질 테다. 그 좁은문은 결코 한 사람만 지나칠 수 있는 "종착역'의 의미보다는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 길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들어가야만 하는 "시작점"의 의미이지 않겠냐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당장 그 볼품없는 어설픈 연극을 그만 두라고 큰 소리로 권유해볼 테다. 그 성스러운 길을 가는 길이 고행과 고독과 외로움으로만 가득 채워져야만 하는 거냐고, 왜 사랑하는 사람과 두 손 붙잡고 갈 수 없는 거냐고, 정 길이 좁다면 사랑하는 사람 등에 업혀서 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외쳐볼 테다.


하지만, 25년 전에도 그랬듯이 알리사는 혼자 요양원에서 외로이 죽어갔다. 그것은 스스로 준비한 죽음이었다. 의도적으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갔다. 난 너무 속이 상했다.


제롬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알리사가 그렇게 매몰찬 연극을 해가면서까지 제롬으로부터의 사랑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시도들이, 마흔살의 내 눈엔 부질없고 어리석게도 보인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다. 아, 25년간 내가 너무 늙어버렸나. 나도 모르게 내가 어릴 적 그다지도 싫어했던 뭇 아저씨의 버릇없고 영혼없는 논리로 색안경을 끼고 잔소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면서 난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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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이슬람 사회 세창출판사 이슬람 총서 13
김동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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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문 (Dong Moon Kim) 저, "우리가 모르는 이슬람 사회"를 읽고.


선입관이나 고정관념만큼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왜곡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더욱이 소시오패스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요즈음,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이것의 암묵적인 배후세력으로 규정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사람을 공감하지 못해 사람을 해치는, 이 기형적인 존재의 탄생은 어쨌거나 우리 시대가 낳은 괴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전적 요인의 기여도를 차치한다면, 소시오패스의 모습은 자기자신을 서민이라 여기는 평범한 우리들에게도 존재한다. 공감능력상실이 항상 범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옳고 그름을 자신의 유익에 근거해서만 판단하는 모습은 비단 범죄자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든 인간은 아직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 부분적으로는 그리고 간헐적으로는 모두 소시오패스의 기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 했다. 무관심은 선입관, 고정관념과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관심이 없으면 근거 없는 풍문을 의심 없이 그대로 믿게 되고, 그대로 믿다 보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조차 못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의 결과, 인간은 사랑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10년이 넘게 요르단 선교사로 활약했던 김동문 선교사가 2016년 말에 출판한 "우리가 모르는 이슬람 사회"를 읽고, 내가 얼마나 이슬람 사회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는지 놀랐다. 게다가 그 단편적인 지식의 대부분도 근거 없는 루머에 기반을 두고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웠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었던 이슬람이었기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또 기독교인이었기에 대적해야 할 대상으로 당연히 무슬림을 지목했었다고 변명하는 내 모습도 직면할 수 있었다. 숨어있던 나의 잘못된 선입관과 고정관념이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맹목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이슬람 사회를 두려워했고 무슬림을 혐오했었던 나도 결국은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소시오패스였던 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기독교의 우파적인 관점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찾을 수 있다. 동성애가 죄라면서 그들을 인간 이하의 벌레로 취급하는듯한 기독교인의 태도와, 이슬람을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그들을 에돔 족속의 후예라든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대적 정도로만 여기는 기독교인의 태도는 모두 인종 혐오 수준의 문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혐오 문제에 '사랑'을 대표명사로 하는 기독교인들이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잘 모르는 이슬람 사회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고 올바로 알고 오해를 넘어 이해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저자인 김동문 선교사는 이 주제에 대해서 그 동안 많은 글을 써왔고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해 옴으로써 대중들에게 이슬람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헌신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강한 여론처럼 버티고 있는 이슬람 사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다시 김동문 선교사로 하여금 펜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공했음이 틀림없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 김동문 선교사는 우리를 아랍 이슬람 사회의 일상으로 초청한다. 관찰자와 관광객의 시선을 넘어 생활인의 자리에서, 아랍인들도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너무나 당연했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을 뿐, 그들도 역시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적인 삶에 참여하고 있노라면, 그들을 매일 종교적인 행위만을 하거나 기독교나 서방 세계 (특히 미국)에 대한 악감정으로 매일 테러나 준비하는 단체인 것처럼 여기는 우리들의 그릇된 편견에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 행위인 의식주에 대한 소개, 그들만의 언어인 아랍어에 대한 소개, 길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김동문 선교사는 관광객들이 아닌 현지 생활인들만 경험할 수 있는 아랍인들의 실제 일상적인 생활 공간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간다. 또한 그는 중동 지역에 국경을 두고 있는 여러 아랍 국가들을 소개하는데, 그 뜨거운 땅의 나라 중동 지역에도 폭설이 내린다는 사실에 우린 놀랄 수도 있고, 종교와 민족 문제로 인하여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2부에서는 이슬람 사회를 오해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언론에 대하여 김동문 선교사는 일침을 가한다. 현지에서 사실을 확인하고 공정하게 그 사실만을 중립적으로 보도해야 할 언론이 기존에 만들어진 편견을 깨기보다 굳히기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면서 밝힌다. 덕분에 우린, 한국 언론에 비춰진 중동 이슬람의 모습은 종교 이슈에만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팩트 체크를 하지 않은 채 외신에 무분별하게 의지하여 차별성 없게 보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만이 아닌 세계를 공포에 물들게 했던 IS뿐만 아니다. 한국에서 크게 이슈화되었고 무슬림 혐오증을 더 증폭시킨 할랄단지 반대운동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도 김동문 선교사는 책에서 밝힌다. 정치적인 압력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팩트 체크는 기자들의 기본 사항이라는 명백한 부분을 고려할 때, 성의 없고 편파적인 언론의 역할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이슬람 사회"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책 전체에 저자 김동문 선교사의 한이 진득하게 배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지고 있었던 이슬람 사회에 대한 선입관과 고정관념과 무관심,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이슬람 포비아와 무슬림 혐오증에 대해 김동문 선교사는 한없이 아쉽고 답답하다. 이슬람 지역을 종교 이슬람의 시선에만 고정시키고 있는 우리들의 시선,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안경을 벗지 않는 우리들의 고고함, 그리고 사실이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들의 무관심에 치를 떤다. 10년이 넘도록 요르단 선교사로서 활약한 풍부한 경험에 의거하여 그만큼 팩트를 많이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한은 거칠지도 직설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포기가 아닌 소망이 묻어 있고, 그 뒤엔 사랑이 있다. 이 책은 이슬람 사회에 대한 팩트에 철저히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에서도 그의 한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우리들은 이슬람 사회에 대한 그 동안의 오해와 착각, 그리고 무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이해하고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약 280 페이지 분량의 책이 김동문 선교사의 한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는 아직도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은 더 많은 분량의 책을 출판하는 것이기보단, 더 이상 책을 출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이슬람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전달되는 것일 테다. 그들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그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무관심의 옷을 입은 잘못된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어떻게 그들 앞에서 소시오패스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을 제대로 아는 것이 먼저다. 그것이 시작이다. 이 한 권의 책이 그러한 시작을 알리는 작은 불쏘시개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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