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2 (반양장) - 사랑과 진정한 자립에 대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2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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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른이 된다는 것.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게 저, '미움 받을 용기 2'를 읽고.


이 책의 전작, '미움 받을 용기'에서 청년은 철학자를 통해 아들러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깨달음을 얻은 뒤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과거의 덫에 얽매이지 않고 미움 받을 용기와 행복해질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지금, 여기'를 살아내기 위한 새로운 결단도 내렸다. 그것의 일환으로 청년은 자신의 열등감이 얽혀있던 직업을 그만두고, 아직 인생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들에게 아들러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러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했던 탓일까? 의욕이 넘쳤던 청년은 아이들 교육 분야에서만큼은 아들러의 가르침이 엉터리이고 속임수이며, 심지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단정짓게 된다. 아들러의 사상은 이해 가능하고 가치관 개혁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현실 사회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된다. 아들러의 가르침에 무릎을 꿇고 그것의 전도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실제 행동으로도 옮겼건만, 청년이 끝내 마주하게 된 것은 아들러를 버려야만 한다는 결론이었다.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청년은 다시 철학자를 찾아왔다. 이것이 예정에도 없었던 이 책 '미움 받을 용기 2'가 쓰여진 이유와 배경이다.


철학자와 청년은 3년 전에 함께 했던 행복했던 일을 모두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회는 뜻밖의 감정으로 시작되었다. 철학자는 청년의 분노가 섞인 아들러 사상에 대한 불만과 불평, 그리고 현장 경험이 가득 담긴 청년의 이유 있는 반론으로 재회를 시작해야만 했다.


철학자는 청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아들러의 가르침이 실천 능력이 전무한 이론에 불과한 사상이 아니라, 청년이 아들러를 오해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어서 뜬금없이 '사랑'을 알아야 하며 실제 삶에서 '사랑을 해야만' 아들러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선택'이며, 청년은 그 선택을 할 만큼의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고 분석한다. 청년은 어이가 없었지만 따지고 싶었고 답을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긴 밤이 시작되었다.


아들러의 가르침에 따르면 칭찬과 야단은 수직관계의 인간관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상대방을 구속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일시적인 효과는 낼 수 있을지언정, 길게 보았을 땐 오히려 교육 방법으로는 부적절하다. 아들러 사상의 핵심은 수평적 인간관계와 공동체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의 실무 경험을 가졌던 청년은 칭찬과 야단이 교육 현장에서 필수였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론과 실제가 다름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울분을 토하며, 바보 같은 이론을 실행에 옮기다가 선생으로서 권위까지 잃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교육의 목표는 위에서 아래로의 지식이나 경험 전달이 아니라, '자립'이라고 철학자는 분명히 말한다. 교육이란 '개입'이 아니라 자립을 위한 '지원'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교육의 핵심은 '인간이해'에 달려 있으며, 이를 통해 교육이 자립이라는 목표를 내세울 때, 그 입구는 '존경'에 있다고 역설한다. 청년이 그 동안 알고 있던 존경의 개념과는 달랐다. 청년은 '동경'을 존경으로 알고 있었던 반면, 철학자는 그 동경은 공포이고 종속이며 맹신이라고 반박한다. 철학자의 존경에 대한 정의는 에리히 프롬이 내렸던 것과 같았다.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존경은 사랑과 함께 어떤 권력자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덧붙이며, 철학자는 말한다. "존경부터 시작하라. 교육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토대는 존경에서 비롯된다"고 말이다. 이는 곧 청년은 그 동안 학생을 가르치고 도와준다는 신념 아래, 선생과 학생 관계를 수직관계로 설정하고 그들을 지배하려고 했을 뿐, 학생과 수평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첫 단추부터가 잘못 꿰매어졌다는 말이었다. 또한, 학생과의 관계에서 존경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리 칭찬과 야단을 금한다고 해도 아무런 효과가 나지 않았던 것이라는 냉철한 분석이었다. 뼈아픈 지적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아들러 사상은 이론에 불과하며, 현실과 무관한 이상주의적 사상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 부분에서 철학자는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문제행동 배후에 작용하는 심리를 5단계로 나누어 생각한다고 알려준다. 1단계 '칭찬 요구'부터, 2단계 '주목 끌기', 3단계 '권력투쟁', 4단계 '복수', 그리고 5단계 '무능의 증명'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한 아들러의 통찰인데, 단계가 올라갈수록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은 먼저 자신이 속한 인간관계에서 (특히 선생과 학생 관계처럼 수직적으로 인식된 인간관계에서) 칭찬을 바라고, 이어서 주목 받기 위해 애를 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권력투쟁을 일으키고 복수에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무능함을 과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청년은 3년간 경험해온 학생들의 행동을 마치 철학자가 꿰뚫고 있는 듯했다. 철학자는 이어서 말했다. 이런 문제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심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백신 역할을 바로 아들러의 '공동체 감각'이 해준다고 말이다. 청년은 의아했다. 이미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던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칭찬 받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 모이면 그 공동체에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경쟁이 일어나는 곳은 권모술수와 불의가 따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경쟁원리에 입각한 인간관계이다. 그러나 상벌도 경쟁도 없는, 경쟁원리가 아닌 협력원리에 입각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이 주장하는 수평관계를 관통하는 것도 바로 이 협력원리인데, 이러한 원리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곧 아들러가 바라는 세상인 것이다. 아들러에 따르면 이런 공동체를 살아내기 위해선 개인 안에 내재된 공동체 감각을 발굴하여 감각으로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개인은 과거의 덫에서 해방되어 '지금, 여기'를 살아낼 수 있는 용기 (미움 받을 용기, 행복해질 용기, 평범해질 용기와 같은 맥락)를 내야만 하고,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다시 말해 타인을 공감하는 기술을 통해 타인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존중해주는 것이 존경이며, 자기중심성에서 탈피하는 것이 진정한 자립임을 기억할 때, 사랑은 곧 진정한 자립이라고도 역설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인간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말을 마무리 짓는다.


동쪽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을 무렵, 청년은 자신의 3년을 돌아보며 첫 단추부터 잘못 꿰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교육자로서의 역할은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관계'였다. 신뢰와 존경, 배려, 사랑의 원리로 작용하는 수평적 인간관계였던 것이다. 아들러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청년이 아직 인생 최대의 선택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다. 열등감에서 해방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학생들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을 구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일종의 메시아 콤플렉스에 빠져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해야만 했다. 교육의 목표가 자립임을 직시할 때, 선생인 자신이 먼저 자립이 되어 있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모든 것은 용기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철학자를 다시 만나고 청년은 다시금 용기를 내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과 아들러가 바라는 세상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자와 약자가 나뉘지 않는, 차별이 없는 세상. 따지고 보면 배제와 혐오도 수직적 인간관계에서만 기인되는 것일 테다. 아들러가 강조하는 공동체 감각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되리라 생각한다. 성경이 인간에게 주어졌고, 모든 말씀과 율법이 인간을 위해 주어졌음을 생각할 때, '개인 심리학'을 주창하여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며 일생을 보낸 아들러의 가르침은 단지 심리학에 머물지 않고 철학이자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삶의 태도에 대한 훌륭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정의와 공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횡행한 이 시대는 이 책에서 말하는 진정한 어른이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배제와 혐오를 일삼으며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천착해 있을까? 아들러라는 한 사람의 연구도 뛰어넘지 못하는, 사적인 복음에 갇힌 기독교는 과연 무슨 힘이 있는 걸까? 그런 기독교의 방향이 과연 하나님나라로 직결될 수 있을까?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지만, 우선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작은 결론을 하나 내려보면 어떨까. "거룩함과 구별됨을 운운하기 이전에 먼저 어른이 되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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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에버그린북스 12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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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고 아름다운 필체가 순수함을 담아낼 때.


막스 뮐러 저,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지난 주말도 가족과 함께 중고 서점에 들려 많은 책들에 둘러싸인 채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이런 생활도 벌써 수 개월째 지속하고 있으니, 어느덧 우리 가족의 일상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난 일상에 흩어진 행복의 조각을 찾는 듯한 심정으로 매주 이 시간을 기다린다.


늘 여러 책을 뒤적거리지만, 서점에 들어서서 항상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매주마다 새로운 책이 눈에 띄는데, 저번 주는 아주 오래된 고전 하나가 내 관심을 끌었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중학생 시절, 어머니 덕에 문학을 알게 되어 한동안 고전문학에 빠져있을 무렵 접했던 책 중 하나였다.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으로 이 책을 손에 잡은 순간 내 마음은 금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의 감수성이 단박에 되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주인공 여자가 아주 쇠약해서 결국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뿐이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던 시절,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애송이였던 내게 이 책이 남긴 흔적인 것이다. 하지만 약 25년이 지난 지금, 한 여자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던 한 중년 남성으로서, 곧 사춘기가 시작될 아들을 키우고 있는 마흔이 넘은 한 아버지로서, 그리고 세상살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나름대로의 높고 낮은 곳을 경험해본 한 인간으로서 난 이 책을 다시 읽어냈다.


줄거리 위주로 소설을 읽어내던 어린 시절을 지나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난 소설을 읽을 때면 작가의 필체를 통해 작가의 내면을 느껴보려 노력한다. 줄거리야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또 잊어버릴 테지만, 필체에 흐르는 작가의 마음을 공감한다면 그 작가의 혼을 조금이라도 흡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덟 꼭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아주 어릴 적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시간 순으로 구성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이야기의 진행과정에서 반전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남자가 소년일 때부터 사랑해온,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부잣집 소녀가 있다. 성인이 되고 타지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자아처럼 여길 정도로 그는 그녀를 늘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와 그녀와 재회를 하게 된다. 둘은 떨어져 지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서로를 인지했고,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여느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이미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설정이 되어 있었고 늘 침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주인공 남자의 사랑을 끝내 받아들이지만, 그 순간이 둘 사이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줄거리만 보자면 형편없는 소설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고전문학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던 이유는 결코 단순한 줄거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마흔이 넘어 글 읽고 쓰는 일에 관심이 많아진 내 눈에는 보였다. 그것은 작가의 필체에 있었다. 어쩜 이리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단어와 문장으로 한 단락 한 단락을 써냈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의 필체는 정확했고 또 아름다웠다.


신형철이 그의 신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나도 글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가 언급한 글짓기의 준칙 중 두 번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책이 바로 이 책,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신형철의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말,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 말, 그리고 '그런 문장은 한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말을 이 책은 모두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사랑'이 말하고자 했던 사랑은 소유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줄수록 풍성해지고 맑아지는 사랑일 것이다. 자신의 죽어감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기에 주인공 남자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이 내게 전달되었을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듯 사랑을 받아주고 인정해달라는 남자의 순수한 마음이 전달되었을 때도, 결국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서로 하나가 되었던 그 짧은 순간에 흘렀던 풍부한 감수성이 전달되었을 때도, 비록 결말을 충분히 예측한 이야기 전개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어린아이처럼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헤르만 헤세의 '게르트루트'가 떠올랐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그 장면들이 이리도 강렬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그 사랑의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결국 저자의 유려한 필체도 진정성 어린 순수함을 담아낼수 있었기에 비로소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을 자아내면서도 진정성 있고, 순수함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정확한 집을 짓듯 적당한 단어와 문장으로 쓰여진 책. 살면서 이런 책을 만나게 되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나도 언젠간 이렇게 누군가에게 행운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글을 쓸 수 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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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울다 - 상실을 통해 우리 영혼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개정판
제럴드 L. 싯처 지음, 이현우 옮김 / 좋은씨앗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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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공동체, 곧 사랑의 공동체.


제럴드 싯처 저,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읽고.


그는 지금도 사고 직후의 순간을 슬로모션처럼 기억하고 있다. 어두워진 시각, 가족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였다. 맞은 편에선 차량 한대가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커브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중앙선을 넘어 그가 운전하던 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는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마 영혼에 새겨졌을 정도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충돌 직후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네 살 난 딸과 어머니의 몸은 구부러져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즉사였다. 의식이 남아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찌그러진 창문을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차에서 빠져 나왔다. 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상실의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이 책이 쓰여진 직접적인 배경이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상처의 치유는 시간이 지났을 때 자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혹은 마치 남의 일을 쉽게 이야기하듯, 감쪽같이 잊어버리게 되는 거라고. 그때가 바로 완벽한 치유가 일어난 시기라고.


마음의 상처는 보통 상실과 고통에 기인한다. 상처가 길면 길수록, 또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은 우리 내면세계에서 트라우마로 자리잡고 우리를 깊은 상실과 고통에 길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길들여짐은 우리를 비가역적으로 바꿔 놓는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곁에서 늘 함께 하던 사랑하는 사람이 눈 깜짝할 순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단 1초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일상을 당연하다는 듯 함께 하던 사람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찌 우리의 남은 삶이 그 죽음 이전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는 상실과 고통이 오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게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치유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실과 고통을 가슴에 안고 아파하고 견뎌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과정 전체다. 치유는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끝이 없을지도 모르는.


또한 치유는 과거의 기억을 삭제하는 작업이 아니다. 중요한 건 현재다. 먼 미래에는 그 현재가 치유의 한 순간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흔히 사람들은 치유를 받아야 현재를 잘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현재를 잘 살아내는 것이 치유를 받아가는 것이다. 치유가 맺고 끊음이 분명한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기에, 상실과 고통으로 인한 아픔과 슬픔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들의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인생은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받고 또 치유 받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 제럴드 싯처에게 찾아온 날벼락 같은 상실은 그와 살아남은 그 가족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남겼다. 그에게 닥쳤던 그 상황에 우리 자신을 대입해본다면, 공감을 훨씬 넘어선, 가슴 먹먹한 그 무언가에 가슴이 저민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당한 엄청난 상실과 고통,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굴복하지 않았다. 상실 후 수많은 불경한 생각과 의심, 분노, 원망, 좌절 등의 극심한 고통의 단계를 지나오며, 그 모든 과정 중에 계셨던, 마치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상처에 굴복하지 않고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굴복하기로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는 맞은 편 차량의 운전자를 복수하고 싶은 마음, 그 사람을 그리고 그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도 넘어섰다. 그 상실로 인해 불쑥 와버린 모든 낯선 상황을 수많은 환멸과 증오의 기로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하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상실의 이전과 이후는 극명하게 달랐다. 완전한 치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책의 마지막에서도 여전히 자신은 상실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고, 그 상실에서 회복되지도 않았다고 고백한다. 여전히 아직도 자신의 삶이 지금과 달랐으면 하는 바람과, 아내와 딸과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하는 바람을 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변화했고 또 성장했다." 그리고 그는 상실 자체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도 예상할 수도 없지만, 상실이 왔을 때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는 전적으로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우리가 받는 은혜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상실을 당했을 때 흔히들 하는 첫 반응은 무시와 회피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상실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려는 마음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오히려 일부러 더 바쁜 일상을 만들어 상실로 인한 고통과 슬픔이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도록 엄연히 존재하는 상실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건강하지 않은 방법일뿐더러, 오래 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시하면 할수록 도망치면 칠수록 상실은 눈덩이처럼 더 커진 고통과 슬픔을 불러올 뿐이다. 저자는 여간 해선 겪기 힘든 커다란 상실을 당한 유경험자로서 상실과 고통에서 어떤 의미를 얻을 수 있는지,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본인의 깊은 슬픔에서 길어올린 지혜의 우물을 우리에게 내민다. 


읽는 내내 가슴이 미어졌다. 어느 부분은 구구절절 마음이 요동쳐서 더 읽고 싶지 않았다. 저자는 파도가 지나간 뒤의 잔잔한 물결처럼 담담한 어투로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에서 내 가슴은 더 저미었다. 그러나 저자에게 참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상실과 고통에 대한,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깊은 성찰 덕분에 나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많은 상실과 고통 속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인이 치유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가 공동체였다고 고백한다. '상처 입은 공동체'. 곧 사랑의 공동체. 모두 상실과 고통을 겪고 아파해보았던 사람들. 충분히 인생을 파괴할 만한 힘을 가진 그 상실과 고통의 잠재력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들.


나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가. 혹시 늘 상처 받고 아파하며 누군가의 도움만을 받길 바라는 어린애로 여전히 머물고 있진 않는가. 나도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어찌 남을 도울 수 있겠냐고 합리화 아닌 합리화를 해대며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기는 커녕 조소와 악한 통쾌함을 가슴 속에 숨기고 있진 않는가. 치유가 인생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또 다른 상처도 더해질 수 있다는 우리네 무작위적인 인생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가슴을 울리도록 보여줄 수 있는 건 바로 '상처 입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상실과 고통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84?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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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 영성이다 - 영성 형성에 미치는 습관의 힘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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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습관을 지배하는 자.


제임스 K. A. 스미스 저, '습관이 영성이다 (원제: You are what you love)'를 읽고.


살아가면서 아주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관통하는 커다란 축복 같은 깨달음도 언제나 말초에 있는 손과 발까지 그 힘이 전달되지는 않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머리와 가슴을 통과한 대부분의 뜨거운 피는 손과 발까지 다다르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 운명을 맞이한다 (기억하라, 작심삼일. 우리의 오래된 벗 아닌가). 머리를 먼저 강타한 지성도, 가슴을 먼저 울린 커다란 감성도 모두 체내에서 흡수되지 못한 채 배설물로 폐기처분 되는 현상. 이 비극적인 악순환이 혹시 우리들 일상의 (혹은 영성의) 현주소는 아닐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새로이 깨닫고, 나아가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던 대상과 방식의 그릇됨을 반성하며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해도,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읽는 것과 번역하는 것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읽는 것이 지식을 습득하고 깨닫는 과정이라면, 번역하는 것은 그것을 직접 삶에서 살아내는 과정이다. 몸 안에 들어온 영양분을 세포에서 흡수하고 에너지로 전환시켜 건강한 몸을 유지하듯, 읽어서 들인 지식이나 깨달음을 행동으로 번역하여 다시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화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화만 해서는 우리의 몸과 우리의 삶은 현재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현상 유지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적인 변화를 주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 시기에는 앎과 행함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혼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변화 있는 삶을 원한다면 소화과정을 넘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체화과정'이다 ('성육신'이라고도 읽어보자. ‘습관’이라고도 읽어보자). 삶의 변화는 우리가 읽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해하고 깨닫고, 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살지 못하고 (비록 그렇게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자동적으로 몸에 익은 방식대로, 즉 관성대로 살아가는 존재다. 이런 특성을 가진 우리가 무언가를 삶에서 새로이 살아낸다는 것은 반드시 '습관화'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습관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행위는 아무리 그것이 의미심장하더라도 '일회성의 좋은 시도', 또는 '보기 좋은 쇼' 정도의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거기에 지속은 없다. 변화도 없다. 관성에 철저하게 지배 받는, 다시 말해 무의식과 본능에 의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생각건대, 이러한 삶은 아마도 인간이란 존재에게 주어진 삶은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에겐 관성을 넘어서는 힘이 가능하다. 비로소 변화를 가져오는 힘, 혁신의 힘. 그 힘은 관성을 넘어서는 관성, 제 2의 천성, 곧 습관이다. 그러므로 머리 끝부터 시작하여 가슴을 거쳐 손과 발까지 몸 전체에 따뜻한 피가 흘러, 쫓기거나 죽은 것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리드하고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특권은, 다시 말해 ‘기계적 일상’이 아닌 '창조적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특권은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닌 '습관을 지배하는 자'의 손에 있을지도 모른다. 습관은 지성과 감성보다 강한 법이다. 


습관의 힘을 재조명하여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기독교의 영성과 연관시킨 책이 있다. 바로 이 책,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제목의 책이다.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와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의 저자, 제임스 K. A. 스미스의 신작이다. 전작의 제목에서 보이는 '욕망'과 '상상'이라는 단어, 그리고 이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습관'이라는 단어에서 저자의 생각과 주장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 저자는 머리와 가슴이 아닌 손과 발, 그것도 사용해야겠다고 의도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움직여질 정도로 몸에 익은 손과 발이야말로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단순한 지성으로 환원하는 근대의 주지주의적 인간 모형을 한 문장으로 잘 나타내는  "You are what you think (당신이 생각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를 부인한다. 대신 "You are what you love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욕망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우리의 지성이 아닌 우리의 바람과 갈망과 욕망이 우리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우린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원하고 욕망하는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인간이란 무언가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면서, 기독교의 ‘제자도는 우리 마음을 정렬하는 방식,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거기에 주목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따끔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는 제자도를 일차적으로 교훈에 관한 문제로 -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대체로 지적 활동, 지식 습득의 문제인 것처럼 –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정보로 우리 지성만 채우시지 않고 우리 사랑을 빚으시는 선생’이라는 것이다. 즉, 기독교와 성경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배우고 알고 깨닫고, 과거에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반성과 회개로 통곡을 할지라도, 실제로 하나님나라를 바로 이 땅,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세계에서 살아내기 위해선 반드시 습관이라는 대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가나안에 진입한 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의 끝이 아니라, 거기에 이미 상주하고 있던 잘못된 습관과도 같은 거짓신들과 우상을 제거해야 하는 작업이 남아 있었던 것고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 책은 총 일곱 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간이 없다면 첫 장만이라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첫 장이 나머지 부분의 전제이자 총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난 첫 장을 읽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나 역시 지성과 감성의 새로운 유입을 추종하는 무리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을 다 읽고 통쾌한 느낌과 함께 뒤끝이 찝찝했던 이유는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나 역시 머리와 가슴이 손과 발과 따로 노는, 다분히 이중적인 삶을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조금은 위로가 되어주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올바른 것은 아니기에 나는 이 책에서 찔림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자신이 알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전적인 확신에 가득 차 다양성을 배제한 채 지성과 감성의 꼰대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돌이켜 낮은 자세로 눈과 귀를 열고 새로운 것들과 다양한 해석들을 접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이겠지만, 거기에서 오는 무너짐과 새로 세워짐의 희열에 만족하고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머리와 가슴만 뜨거워진 채 가만히 앉아서 유레카를 외치거나 눈물을 흘리고 마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개인뿐 아니라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 가정 및 세상에서의 예배 방식에서 역시나 무시되어왔던 습관의 힘, 즉 예전의 힘을 상기시키고 부각시키는 내용으로 충실하다. 저자는 책에서 직접 “이 책이 사랑의 예전적 형성에 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촉매제가 되길 바란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날마다 반복하는 의례를 문화적 실천으로, 즉 예전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하며, 죄 또한 개별적인 잘못된 행동과 나쁜 선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악덕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덕은 도덕적 습관이기에 죄는 관성의 영향 아래 놓여있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 곧 습관 바꾸기가 필요하고 우리의 사랑을 재형성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외친다. 또한 현대의 복음주의 예배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 종교개혁의 원인이었던, 각본에 따라 이뤄지는 자연주의와 예배자를 구경꾼으로 만드는 수동성을 흉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모름지기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지향을 재조정하시고 우리 욕망을 재형성하시고 우리 사랑의 습관을 바로잡으시는 무대라고 역설한다. 예배의 핵심은 ‘지성’이 아닌 ‘형성’이라는 것이다. 형식을 껍데기와 같이 하찮은 것이라고 배워온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주장이 처음엔 불경스럽게 느껴질지 몰라도, 책 초반부에 나온 인간의 본질을 묵상하고 습관의 힘을 깨달았다면,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예배의 형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저자가 간파한대로, 설득당하기보다는 감동받는 존재인 미적 피조물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예배가 이루어진 결과 탈육신 과정이 발생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예배의 핵심인 양, 마치 그런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인 양 여긴 결과 우리가 맞이한 기독교 신앙은 몸과 분리되어 (탈육신) 메시지로 요약되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사안으로 변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독교의 형태는 바로 (예전을 통하여) 재주술화된 기독교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앎과 행함 사이의 괴리감은 개인 영성과 공적 영성 사이의 괴리감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이 안다고 해서 안 만큼 많이 행하지 않듯, 24시간 하나님만 바라보며 개인 영성을 고양시킨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공적 영성으로 발전하진 않는다. 물론 많이 알려고 하는 노력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듯, 홀로 하나님을 독대하며 회개와 성찰을 하고 내면의 치유와 정함을 얻는 시간은 기독교 영성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지점에서 멈추고 자족하며 그것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신앙이다. 나는 복음의 공공성이 복음의 본질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개인 영성에 그치는 신앙은 원죄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자기애와 교만이 그 안에 숨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앎과 행함 사이에는 습관이라는 단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개인 영성과 공적 영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형태는 분명 예배라고 믿는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공동체와 함께 하는 예배. 개인 영성만을 고집하는 잘못된 습관을 바꾸는 유일한 공간.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며 뜨거워진 가슴으로 일상에서 작은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수 있도록 훈련받는 장소. 참 제자도를 실현하는 장소. 어쩌면 이것이 모든 가나안 성도와 세속성자들이 욕망하는 교회의 예배가 아닐까. 나도 다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지 않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7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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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상실과 믿음: 집으로.

얀 마텔 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고.

단 일주일 만에 토마스는 어린 아들과 아내, 아버지를 차례대로 잃는다. 이후 그는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뒤로 걷기 시작한다.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발하기 위해서다.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긴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반발밖에 없었다.

박물관에서 보조로 일하는 토마스는 어느 날 박물관에 기증된 유물들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성공회 기록 보관소로 파견된다. 거기서 그는 리스트에서 누락된 얇은 책을 발견한다. ‘율리시스’라는 신부가 쓴 일기였다. 그는 그 일기장에 곧 빠져들었고, 율리시스 신부가 포르투갈의 식민지 섬, '상투메'에 머물 당시 쓴 글에 매료된다. “이곳이 집이다. 이곳이 집이다.” 이 짧은 문장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독특한 스케치도 발견한다. 어떤 얼굴을 그린 것 같았는데, 몇 분만에 그는 그 눈에 깃든 슬픔에 빠져든다. 토마스 역시 커다란 상실감에 젖어있었기 때문일까. 어떤 공감대를 느껴서일까. 그는 그 일기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나온다.

아내가 죽을 당시 손에 꼬옥 들고 있었던 것은 십자고상이었다. 토마스는 그것을 빼내려고 했지만, 사지가 경직된 이후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상실로 인해 신앙적으로 표류하고 있던 그는 분노가 일었다. 십자고상을 노려보며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당신! 당신 말이야! 내가 당신을 상대해주지. 두고 보라고!” 그렇다. 그는 신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토마스는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에서 신부가 만든 어떤 종교적 조각품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의 흔적을 좇는다. 그 조각품은 스케치에서 본 눈을 가진 십자고상이 분명했고,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제였던 율리시스 신부가 노예들이 당하는 인권유린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잔학함과 악함을 보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품이었다. 기독교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십자고상이었다. 그 조각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토마스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아서 신이 자신에게 한 짓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숙부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이용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자동차가 희귀했던 시절, 토마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자동차를 몰며 별의별 고생을 다한 끝에 (죽을 위기도 넘긴다. 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부분에는 코믹한 부분도 나오고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부분도 나온다), 겨우겨우 목적지에 다다른다. 불행히도 예상했던 교회에서는 그가 찾던 십자고상을 볼 수 없었다. 낙담하던 찰나, 차를 운전하던 중 그는 어린 남자아이가 차 앞에 장난 삼아 매달려있는 줄도 모르고 출발하다가 그만 아이를 치고야 만다. 아이는 죽었다. 토마스는 뺑소니를 친다.

그는 아이를 죽였다는 이유 때문인지, 뺑소니를 쳐서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인지, 몸의 상태가 지극히 나빠진다. 구토가 쉴새 없이 나오려 한다. 어느 작은 교회를 우연찮게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토마스는 그렇게 찾길 원했던 십자고상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신의 아들은 사람이 아닌 침팬지였던 것이다!

작가는 1부를 이루는 토마스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끝을 맺고 2부를 시작한다. 독립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1부를 읽었다면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부에서 토마스가 죽인 아이의 엄마, 마리아가 최근에 죽은 남편의 시신을 들고 병리학자 에우제비우를 찾아와 부검을 요청하고, 실제로 부검이 진행되는 장면이 2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부검 결과, 놀랍게도 죽은 남편의 배 안에서는 한 마리의 침팬지와 죽은 아들이 들어있었다. 마리아는 그제서야 말한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그리고 그녀는 옷을 다 벗고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부탁해요.” 에우제비우는 그녀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아듣고 실과 바늘로, 부검이 끝나면 늘 그랬듯, 메스로 가른 시신의 모든 부분을 능숙하게 봉합한다.

에우제비우 역시 최근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그녀의 이름 역시 마리아였다. 사실, 죽은 아이의 엄마 마리아가 찾아오기 직전에 아내 마리아의 환영이 다녀갔었다. 늦은 밤 홀로 작업에 여전히 몰두해있는 그를 찾아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 복음서의 비교를 통한 놀랄만한 해석을 늘어놓고 자리를 떠난 직후였다. 아내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에우제비우는 갑작스럽고 괴기스러운 부검 의뢰를 받고 계획에도 없던 일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두 마리아 모두 환영이었을까? 어떻게 죽은 사람 몸 안에 침팬지와 아이가 들어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있는 여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에우제비우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까? 이런 온갖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은 궁금증이 최고점에 오를 무렵, 작가는 슬그머니 2부를 끝내고 3부로 넘어간다.

3부 역시 연결점을 가진다. 3부의 주인공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고 캐나다에서 상원의원으로 일하는 피터라는 포르투갈인 1.5세 남자와 ‘오도’라는 이름을 가진 침팬지이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 때문인지, 피터는 상원의원직이 그저 직분일 뿐이다. 어느 날 오클라호마로 출장을 갔을 때 우연찮게 만나게 된 한 마리의 침팬지를 구입하게 되고, 그는 안락한 모든 삶을 정리하고 오도와 함께 그가 태어난 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좌충우돌하며 도착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그는 오도와 함께 살 집을 하나 구하게 되는데, 그 집은 마침 2부에서 등장했던 마리아의 집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터가 마리아의 남편 카스트로의 손주였던 것이다. 캐나다에서 걸려온 아들의 전화에서 그는 말한다. “이곳이 집이야. 이곳이 집이야.”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피터는 정말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침팬지와 함께. 그리고 어느 날 오도와 함께 산책을 나갔을 때, 그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전경이 다 보이는 높은 바위 위에서 오도와 함께 전설의 이베리아 코뿔소를 목격하고 조용히 최후를 맞이한다.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 죽은 아이와 그 집안, 그리고 침팬지와 침팬지의 십자고상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공통점 두 가지가 더 있으니, 그것은 바로 ‘상실’과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1부의 토마스도, 2부의 마리아도, 3부의 피터도 한결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들 모두 상실로 인한 빈자리를 메우려는 듯, 어떤 믿음에 의지하여 무언가를 찾아 나섰다. 그것을 작가는 이 작품에서 ‘집’이라고 표현한 게 아닐까 한다. 세 가지 이야기의 제목에서 ‘집’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1부: 집을 잃다. 2부: 집으로. 3부: 집) 이를 뒷받침하며, 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이 ‘집’이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믿음’을 통한 구원과도 같은, 어떤 바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상실로 인해 생겨난 빈 공간을 각자의 독특하고 다른 모양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다다름으로써 메워가는 여정으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실은 여러 모양으로 발현되는 법이다. 토마스에게서는 신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으로, 마리아에게서는 죽은 아들과 남편과의 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터에게서는 아내의 부재에도 여전히 쫓기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픈 마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발현은 모두 일차적으로는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토마스는 결국 십자고상을 찾아내고야 말았고, 마리아는 원하던 재회를 맞이했으며, 피터는 오도와의 단순하고 원시적인 삶 속에서 평화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상실감이 과연 메워졌을지는 끝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피터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린아이를 죽임으로써 타자에게 큰 상실을 안겨준 결과를 낳았고, 마리아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으며, 피터 역시 아들과 누이를 남기고 먼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쉬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선 작가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변주를 들려주었지만, 결국은 하나의 곡을 연주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상실을 개념화하거나 공식화하여 상실을 겪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상실 그 자체에 대해서 함부로 규정짓지 않으려고 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실이란,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으며, 그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는 또 다른 상실을 낳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이야기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집이라는 단어의 추상화로 인해 인간이란 언제나 무언가를 상실하고 또 그 빈 공간을 메우려고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잃고 메우고, 그러다가 또 잃고 또 그것을 메우려고 하고... 이러한 윤회적인 운명 속에 인간이 놓여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건대, 만약 네 번째 이야기가 존재했다면, 제목은 1부의 제목과 같이 ‘집을 잃다’이지 않을까. 마치 돌고 도는 고리처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일 것이다. 나는 이 판타지적이고 미스터리하면서도 아름다운 책을 통해, 희미하지만 하나의 묵직한 메시지를 건져본다. 상실과 그에 반응하는 인간, 그리고 그 상실을 메우려고 본능적으로 어떤 형태의 믿음을 통해서든지 그것을 메우려고 발버둥치는 존재, 그러나 그러다가 또 다른 상실을 맞이하고야 마는 존재, 결국 상실을 늘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 또한, 상실이 각 사람에게서 다른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을 통해서, 내 주위에 상실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조금은 더 넉넉하게 바라보고 공감하며 위로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그래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구원을 기대하는 것을 난 끝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1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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