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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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는 삶, 그리고 타자를 알아가는 애씀에 대하여.

서보 머그더 저, ‘도어’를 읽고.

아직도 눈을 감으면 나는 낯선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거리에 서있다. 그 거리에 자리잡은 공동주택과, 당장이라도 음식 냄새, 커피향, 여러 꽃향기가 뒤섞여서 날 것 같은 넓은 앞마당, 그리고 그 뒤로 마치 세상과 담을 쌓은 것처럼 언제나 견고하게 닫혀있는 에메렌츠 집의 문이 보인다. 이어서 이 모든 것을 관망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로 조곤조곤 그 세상을 내게 보여주는 ‘나’, 그리고 에메렌츠와 ‘나’를 이어주는 끈이자, 때론 에메렌츠로, 때론 ‘나’의 내밀한 자아로, 때론 인간의 영역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의 뜻을 전해주는 매개자로 역할하는 것 같은, ‘비올라’라는 이름을 가진 개 한 마리도 보인다. 

이 작품은 공간적으로 꽤나 정적인 구도를 가진다. 앞서 언급한 공간이 소설 대부분의 사건이 벌어지고 시간이 흘러가는 장소다. 에메렌츠와 ‘나’, 그리고 비올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조연에 불과하며, 나머지 공간과 시간도 부차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처음 만나는 이 책의 저자,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는 이 작품 속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여행 길잡이가 되어준다. 독자를 어느새 단 한 사람 에메렌츠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녀를 알아가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에메렌츠를 떠나보낸 ‘나’의 복잡한 심정을 주목하게 만든다. 

역사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어떤 오래되고 두꺼운 책 한 권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경이감에 찬 채 그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 책은 신비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 이 책이 제공하는 여행은 지리적인 의미가 아닌, 비로소 한 사람을 알아가는 끝없이 신비한 여정에 비유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나와 타자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여정과 겹쳐진다. 

주제 넘을지 모르겠지만, 책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이 책에 한 번 빨려들어가기 시작하면 아마 나처럼 어지간해선 헤어나기 어려울 거라는 점이다. 이 책이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정적인 이미지 안에는 아주 깊은 우물이 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건 그 우물의 깊이와 그 깊은 우물 속에서 천천히 물을 길어내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좁은 공간에 흐르는 시간의 깊이와 그것이 한곳으로 모여 마침내 한 사람을 이루고 있다는 신비도 이 책을 통해 보게 될 것이다.

저자 서보 머그더의 분신인듯한 일인칭 화자 ‘나’는 작품 속에서 잘 나가는 전업작가다. 그녀는 결혼 후 아이도 가지지 않고 남편과 단 둘이서만 산다. 오로지 할 줄 아는 건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이다. 청소며 요리며 할 것 없이 모든 집안일이 그녀에게는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인생의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집중해서 글을 쓰기 위해선 그런 귀찮고 하찮은 일들을 대신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수소문을 해서 그 일을 담당해줄 사람을 구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에메렌츠다.

에메렌츠가 죽기까지 20여년을 함께 살게 된 ‘나’는 에메렌츠와 티격태격하며 그녀에게 미운정 고운정이 들다가도 도무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다. 에메렌츠는 완전무결하며 무오하기까지 할 정도로 독립적인 삶을 스스로 완벽하게 통제하며 사는 아주 강한 개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 기질까지 보이는 그녀는 거의 모든 제도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관습이나 사상 등에 대해서 언제나 저항하며 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반사회적이라거나 이기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곤란하다. 그녀는 그런 단어와 삶에서 정반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에메렌츠는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 열정적이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이웃에게 관대했고, 기꺼이 나누며 흔쾌히 돕는 일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그녀는 실로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가서 자신의 신앙을 깊게 만드는 동안그들이 교회에 앉아서 소망하고 기도하고 다짐하던 이웃사랑을 길거리로 나와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말과 수사로 화려하게 도배하는 것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뭇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존중과 배려, 희생과 환대를 삶으로 조용히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녀에게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은 한낱 인공적으로 조작된 비극 영화처럼 충분히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비관론자, 반엘리트주의자를 자처했고, 뭇사람들의 오해를 쉽게 살 정도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삶을 살았지만, 에메렌츠에게 삶은 단순히 허황된 소망으로 치장한 뒤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자위하며 제자리 걸음이나 후퇴를 하는 시공간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삶이란 실제로 살아내는 일상이었다. 이런 면에선, 평론가 신형철도 간파한 것처럼 에메렌츠는 여성 조르바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에메렌츠를 의지하고 사랑하게 된다. 저자가 작품 속 화자 ‘나’를 전업작가로 등장시킨 이유는 저자의 분신이라는 의미도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에메렌츠가 살아내는 삶의 모습을 더욱 조명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머리로 대표되는 글만 쓰는 사람이 여기에 있고, 몸으로 대표되는 일만 하는 사람이 또 저기에 있다. 이 강력한 대비를 알아챈 독자라면, 아무래도 에메렌츠의 삶의 방식에 대한 매력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다분히 ‘나’의 입장에 천착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부조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작품은 단지 그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지는 않았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비록 마치 닫힌 문처럼, 여느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른 비범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에메렌츠를 궁극적으로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에메렌츠의 죽음에 대해 과도한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비록 영원히 뛸 것만 같던 에메렌츠의 심장이 어느날 멈추는 날이 왔었지만, ‘나’는 에메렌츠를 삶으로 사랑했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나는 책의 후반부를 가득 메우는 그녀의 내면의 독백에서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영원한 숙제이며, 머리에서 몸으로 전환되는, 마치 기독교의 성육신 개념과도 흡사한, 과정은 인간에게 있어선 완료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우린 그저 오늘도 애쓸 뿐이다. 타자를 안다는 것의 무게중심은 애씀에 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1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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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소중한 삶은 없다 - 방황하는 영혼들을 치유하는 끝없는 사랑과 연민의 힘
그레고리 보일 지음, 이미선 옮김 / 공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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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기.

그레고리 보일 저, ‘덜 소중한 삶은 없다’를 읽고.

머리말에서 저자 그레고리 보일 신부는 혹시라도 있을 이 책에 대한 오해를 예방하고자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라는 점. 둘째, 이 책은 ‘갱단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저자의 바람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공유하는 유대감의 범위가 확대되면 좋겠다. 이 책은 조직폭력배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찾아주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겪은 무시무시한 고난과 깨진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찾아내고자 한다.”

저자가 밝힌대로 이 책은 수많은 짧은 에피소드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는 실제 갱단에 소속되어 있던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임을 주의하라) 사람들의 실화다. 그만큼 하나의 이야기는 큰 임팩트가 있으며, 살아있는 메시지를 가진다. 특히 이야기들의 주인공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기에 더욱 그렇다. 

저자는 이 에피소드들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의 중요한 축이자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 근본적인 과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어떤 삶은 다른 삶보다 덜 소중하다’고 여기는 우리 마음속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책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제안하고 싶은 것 한 가지가 있다. 각 에피소드를 읽어나갈 때 갱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단순히 죽은 이들을 통해 교훈이나 뽑아내는 목적으로는 이 책의 무게가 너무 크다. 만약 이 책을 읽는 이유가 교훈을 얻거나 감동을 받기 위함이라면 당장 이 책을 내려 놓으라. 그건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감히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믿음의 선진들을 우상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일궈놓은, 누구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세상의 빛나는 저 높은 곳에서 벌어지는 변화가 아닌, 감히 ‘바닥’, ‘절망’, 심지어 ‘지옥’과 같은 단어가 어울릴법한, 어둡고 낮은 곳에서의 변화를 맨눈으로 목도하게 될 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나로선 그저 할 말을 잃고야 만다. 동시에 내 안에선 소요가 인다. 잊고 있었던, 혹은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두 세상의 차이, 즉 예수를 닮는다는 것과 실제 현장에서 그렇게 살아낸다는 것의 괴리가 걷잡을 수 없이 명징해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름 평온했던 내 마음에서 거짓과 기만의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한없이 작아짐과 동시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무래도 이 책의 큰 축은 저자인 그레고리 보일 신부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존재감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소개를 이 짧은 감상문에 굳이 옮겨다 놓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잠깐의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거기에 10 여분 정도만 더 검색에 시간을 투자한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레고리 보일 신부는 엘에이 갱단 한복판에 자진해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과 함께 변화를 일궈냈다. 마치 갈릴리 주민과 같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나라를 살고 보여주신 예수처럼 말이다. 

물론 그레고리 신부는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와 너무 닮았다. 그의 캐릭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행한 일에 대해서다. 그의 과거를 보면 아마 누구라도 예수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확성기에 대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열렬히 외치는 억지스런 행위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삶의 열매를 그레고리 신부는 조용히 자신의 인생을 바쳐 얻어낸 것이다. 그는 떠들지 않고 예수를 보여주었다. 예수라는 단어를 남발하지 않고도, 혹은 고급스러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누구나 머리 속 어딘가에 파편처럼 떨어져있던 예수에 대한 기억과 정보를 스스로 찾아내고 주워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남들과 동등하게 사랑받을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의 삶은 대형교회에서 자본의 힘으로 밀어부치는 선교라는 단어로도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선교 현장이었다. 

이 책은 여느 책과는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집중을 해야 한다거나, 저자의 어떤 숨어 있는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 이미 모든 메시지는 머리말과 프롤로그에 다 써져 있다. 1장부터 9장까지의 2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모두 실제 저자와 함께 했으며 저자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은 이들의 이야기로 빼곡히 들어차있다. 각 장들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아마도 많고 많은 에피소드들을 저자가 나름 분류하면서 공통된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각 장들을 하나하나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총 아홉 장의 제목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책의 중심된 축을 이루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연민’, ‘관심’, ‘유대감’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에게는 아직 이 책을 읽어낼 만한 충분한 공감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함을 깨닫는다. 연민과 관심과 유대감을 말하면서도 나는 그 단어들의 사용 범위의 경계를 나름대로 ‘안전하게’ 그어두고 살고 있음을 여실히 보게 된다. 물론 내가 지금 당장 그레고리 신부처럼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난 이상 뭔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일을 해내겠다거나 더 큰 일을 해내겠다는 어설프고 유치한 결단보다는, 난 예전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은 공감능력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책을 통해서 그러한 목적을 위한 점진적인 변화가 내 안에서 진행되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가져본다. 언젠가 한 번 엘에이 다운타운에 들를 기회가 있다면, 홈보이 인더스트리에 들려 커피와 빵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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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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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람.


김영하 저, ‘여행의 이유’를 읽고.


이 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김영하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토종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소설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이력을 가진 작가는 아직 소수에 불과한데, 김영하는 그중 하나다. 그럼에도 나는 여태껏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전문학 읽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은 우선순위에서 밀어두고 있었다. 궁색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의 작품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독서모임 9월 도서로 선정되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이 책을 일부러 구입하여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독서모임이 선사하는 다양성의 향연과 그에 따른 암묵적인 압박을 즐기기로 이미 오래 전에 결정한 나는 며칠 전 이 책을 구입했고 책을 통해 작가 김영하와의 첫 대면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출퇴근 길을 오갈 때도 일부러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몇 개 들었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 등으로 전달되는, 텍스트로는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운 그의 모습을, 책만 읽으면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괜한 오해 없이 사실적으로 알고 싶었다. 글이란 종종 가면 역할에 그칠 때가 많고, 글쓴이를 그가 쓴 가면을 통한 인격, 즉 그가 선정한 하나의 페르소나로서만 알게 되는 건 그닥 유쾌한 경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다면 이런 작업은 차후에 진행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산문집은 아무래도 저자와의 만남을 환상 속에서 시작하는 것보단 현실에서 시작하는 게 더 낫다. 나름대로 이런 규칙을 가진 나는 김영하라는 사람을 동영상을 통해 먼저 조금이나마 이해한 후 그가 쓴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 소설이 아닌 산문집으로 내게 처음 다가온 그는 어쩔 수 없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의 글은 의심할 여지 없는 작가의 글이었다. 때론 현미경과 같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때론 나이를 지긋이 먹고 이런저런 인생 경험을 다 해본 어른의 지혜로, 또 때론 나와 조금도 다를 것 없고 친근한 한 인간으로서 그는 타자와 세상, 그리고 자신을 관찰하고 성찰하고 숙성시킨 후 그 결과를 이 책 ‘여행의 이유’를 통해 글로 내뱉았다.


책 제목에 ‘여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해서 이 책이 단순히 여행 경험담이나 노하우, 또는 올 컬러 사진으로 도배한 여행 답사 기록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는 달랑 단 하나의 사진이 소개되는데, 그것마저도 그의 여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구 사진이다. 심지어 그가 찍은 것도 아니다. 나사에서 제공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에서 찍은 사진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여행 사진 하나 없는 여행에 관한 책이다. 이 점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차별화 전략일 수도 있고 상상하기 힘든 어떤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의도된 결과일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 ‘여행의 이유’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단순한 여행이나 여행 관련 정보가 아니다. 오히려 김영하라는 사람과 그의 타자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여행 다녀 오기 전의 김영하와 다녀 온 후의 김영하가 있다. 여전히 여행 중일 수도 있고 일상일 수도 있는 기묘한 이중적인 의미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한 사람 김영하가 있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여행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여행은 가도 결국 남는 건 사람이다.


여행은 그저 사람을 있게 한, 사람을 더 사람답게 한, 마치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고 고뇌하는 유일한 존재자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여행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읽었고, 그렇게 김영하를 만났다. 그의 시선에서 많은 공감도 했고, 여러 에피소드나 그의 남다른 관찰과 통찰에서 소소한 감동은 물론, 여전히 답이 없는 질문과 고민들도 떠안게 되었다. 


여행의 이유? 나는 답을 잘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한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 뒤에 펼쳐진 또 다른 세상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낯섦 가운데 던져진 채로 역설적인 자유와 안도감을 느끼고, 연대와 환대를 경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그네된 삶을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 어쩌면 여행의 이유는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라고 답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성의 없는 대답을 나는 해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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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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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움, 그리고 사람다울 수 있는 이유.

김현경 저,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자 중에서도 존재를 묻고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자, 즉 현존재다. 이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김현경은 인간을 한 번 더 걸러낸다. 바로 ‘사람’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건, 사람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결코 우생학적 관점에서 도출된 말이 아니다. 이 논리는 모든 존재자 중에서도 현존재인 인간을 구별한 하이데거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 역시 인간의 우월함을 말하고자 현존재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나 모든 사물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어떤 사용의 맥락 안에서 정의된다고 말했던 그가 인간의 우월함을 과시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별됨이 언제나 상하 관계의 우열을 의미하진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인간이지만, 모든 인간이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람답지 못한 인간이 있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김현경은 1장 ‘사람의 개념’ 첫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됨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문득 나도 사람답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이 책은 사람, 장소, 환대, 이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한 해제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인류학, 사회학 등의 전공 배경이 저자만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을 만나 탄생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역사와 문명은 물론 현 세태의 민낯을 날카롭게 파헤친 저자의 통찰을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를 살면서 꼭 한 번 쯤은 깊게 생각해 봄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나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마치 논문을 읽는 것만 같은 딱딱함도 책 중간중간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을 과감하게 건너 뛰더라도 충분히 책 전반에 흐르는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공돌이이자 인문학에 문외한인 나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문을 여는 프롤로그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담겨있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선 반가운 도입부였고 덕분에 몰입을 잘 할 수 있었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기존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해설은 빈틈과 오류를 가진다. 기존의 해설들은 그림자를 영혼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한데 반하여, 저자는 그림자를 오히려 영혼과 대립하는 외적이고 현세적인 그 무엇이라고 해석한다. 소설 속에 등장한 주인공 슐레밀은 그림자를 팔았지만, 여전히 인간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슐레밀은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즉, 그림자의 유무는 인간과 사람의 그 묘한 구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 무엇인 것이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림자의 상실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된 이 소설은 이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알레고리를 선사한다. 슐레밀이 그의 괴로움을 칠십 리 장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어디든 한달음에 갈 수 있는 장화 덕분에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슐레밀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이 해결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 대접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전제가 되어 있는 셈이며, 유일한 해결책은 사람들을 떠나는 것밖에 없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슬프게도 슐레밀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를 단념하고 순수하게 관조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한다는 말은 브레네 브라운의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에서는 진정한 소속감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었지만,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해석하는 김현경에 따르면, 그건 소외와 도피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슐레밀이 브레네 브라운의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진정한 자존감과 진정한 소속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림자가 없어 사람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했을까. 반대로 브레네 브라운이 김현경의 해석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막다른 골목인 ‘비장소화’밖에 없다는 김현경의 통찰을 브레네 브라운은 어떻게 생각할까. 브레네 브라운의 이론은 사회구조라는, 인간이 속한 환경이라는 더 큰 숲, 더 큰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진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아무리 홀로 황야를 거치고 이겨낼 만큼 비장한 용기를 낸다고 해도 그림자를 다시 얻을 순 없기 때문이다.

슐레밀의 최종 선택은 스스로 소외당함이었다. 이는 저자에 따르면 ‘비장소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사람다움이란 사람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 주어지게 된다. 즉, 타자의 존재가 필수다. 홀로 존재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소외시키고 소외당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 역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일 뿐일 것이다. 이를 다시 풀면, 우리 모두는 타자의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때의 환대는 타자에게 자리/장소를 주는 행위로 설명이 가능하다.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저자는 환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 장소, 환대,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서로 맞물린 채 사람다움이라는 한 단어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사람다움이란 한 인간이 타자에 의해 장소/자리를 제공받는 행위, 즉 환대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훌륭한 성품이라든지 고결한 도덕성이라든지 지고한 개인영성이라든지 하는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단어들은 오로지 사적인 영역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성품과 고결한 도덕성, 그리고 지고한 개인영성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0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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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손성현 옮김, 김진혁 / 포이에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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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를 향한 갈망, 그리고 진창 속에도 비치는 소박한 구원의 빛줄기.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저, ‘도스토옙스키 (부제: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를 읽고.

20세기 저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1919년 ‘로마서’ 제 1판을 출판한다. 이어서 3년 뒤 1922년, 제 2판을 출판한다. 2판은 1판과 많이 달랐다. 전면 수정이었다. 바르트 스스로도 거의 모든 부분을 다시 썼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의 신학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 변화로 인한 차이 때문에 ‘로마서’ 제 2판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다. 도대체 3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한 가지 단서는 ‘로마서’ 제 2판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판 서문에는 없던 내용이다. 거기서 바르트는 자신의 새로운 성서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키르케고르, 그리고 뜻밖에도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언급한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학자도 철학자도 아닌, 학위라곤 하나 없던, 러시아 출신의 생계형 소설가 이름이 당시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졌던 키르케고르와 나란히 전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1판과 2판 사이의 3년이란 시간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균열의 틈으로 시대를 해석하는 새로운 신학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해제’에서 김진혁이 썼듯) ‘인간성의 깊은 어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식 없이 응시하면서, 깨어지고 부서진 인간을 찾아오는 신적 자비에서 희망을 찾는 신학’이었다. 하나님의 내재성보다는 다시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학은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배우지 못한 통찰을 던져줄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그 누군가가 바르트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였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바르트에게 소개해준 친구가 이 책의 저자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진혁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바르트가 이후에 밝혔듯 투르나이젠이 없었다면 바르트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그저 그런 시골 동네 목사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신정통주의의 문을 연, 20세기 이후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바르트 신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었으며,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투르나이젠이었다. 

신학자 혹은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단 바르트의 친구로서 더 잘 알려진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읽고 깊이 연구했으며, 대부분의 강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연구는 1921년 스위스 아라우 대학생 총회에서 행한 강연으로 세상에 공식적으로 선보였으며, 그 강연 내용을 다듬어서 출간한 책이 바로 이 책 ‘도스토옙스키’이다. 번역은 ‘로마서’ 제 2판을 번역한 손성현이 맡았고, 김진혁이 해제를 담당했다.

감상 및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일러둘 것이 있다. 이 책의 이해와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즉 5대 장편이라 일컬어지는 소설 중 세 편은 먼저 읽고 접하는 편이 좋다. 그러한 공감대 없이 무턱대고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난해하다거나,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거나,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고 진지하게 그와 그 작품들을 이해하려고 애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비록 200 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사상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하는데 탁월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그 작품들 이면에 흐르는 중심 사상에 대한 해제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난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강력히 추천한다.

평온한 삶을 살던 사람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만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저자 투르나이젠은 그것이 마치 눈 앞에 갑자기 원시 야생의 세계가 펼쳐지는 느낌과 같을 것이라고 표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맛을 본 독자들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별다른 표현이 없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포장을 다 뜯어내고 남은 날 것 그대로의 삶, 그 이면에 붉은 피처럼 선명하게 녹아있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창 가운데서도 꺼지지 않고 진주처럼 빛나는 저 너머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갈망의 불씨, 그리고 마침내 저 너머에서 소박하게 찾아오는 구원의 빛.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대부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이유는 결국 우리네 인생도 작품 속 인생과 하등 다를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성의 불가사의함과 수수께끼로 가득찬 원초적인 삶을 마주하게 되고, 그 안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투르나이젠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것처럼 이 단순한 질문이 곧 도스토예프스키와 우리의 공통된 질문,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궁극의 질문이다. 저자는 이 질문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던진 유일한 질문이라고까지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도스토예프스키를 피할 수 없다며 투르나이젠은 그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통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책상 앞이 아닌 현실 한복판에서 그 현실을 이야기로 만들었고, 그 시대의 흐름을 낱낱이 관찰하고 파악한 후 작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갓 잡은 큰 물고기가 퍼덕대는 것처럼 살아있다. 야생 그대로의 느낌이다. 또한, 저자의 표현처럼, 그는 인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독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속에서 자기자신과 자기자신의 인생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순히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일종의 충격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것저것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답을 얻은 것 같았으나 그 답이 진짜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우린 노출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결코 경솔하게 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해석되어지지 않은 삶을 우리 앞에 펼쳐보일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 차원 높은 의미의 사실주의자에 불과하다. 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낱낱이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최고의 심리학자라고 치켜세우지만 어쩌면 그건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무런 해석이나 가치판단이 가미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저자가 간파했듯,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단순한 질문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것이 이미 해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뒤늦게 깨닫도록 이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묻는 그 질문 자체에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수수께기와도 같은 인간, 결코 한 마디로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인간, 한계를 가진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저 너머와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심겨져 있는 인간, 그래서 그 무엇을 갈망하는 인간. 그렇다.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야말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한 아름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제 2장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장편에 등장하는 핵심인물, 즉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세 형제들, 그리고 ‘백치’의 미시킨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역으로 고찰한다. 각 작품에 대한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죄와 벌.
관 같이 비좁은 방 안에서 홀로 세상과 타자와 단절된 채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어설픈 공리주의에 입각한 이념에 빠져 살인을 계획하고, 불행하게도 그것을 실행에 옮겨 버린다. 그 얄팍한 이념의 핵심에는, 자기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인 (헤겔이 말한 ‘세계사적 개인’에 상응하는 존재)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었던 그의 내밀한 욕망이 숨어있었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했듯, 이를 달리 표현하면,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에게도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과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는 도끼를 휘두르고 나서 처절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결국 자수하게 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가서도 몇 년 뒤에서야 소냐를 통해 인간의 이념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저 너머로부터 오는 그 무언가를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곧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범인이 되려고 했던 그 무모한 도약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시도에 다름 아니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자신도 한계를 지닌 유한한 인간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투르나이젠은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얻은 깨달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의 참된 삶, 본질적인 삶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 너머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심연의 바닥에 다다랐을 즈음에야 인간이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투르나이젠은 ‘죄와 벌’에서 재앙의 중심이 이념에 있었다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그 중심이 여자 (그루셴카)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 난 이 해석에 완전 동의하진 않는다. 여자뿐만이 아니라 돈 문제를 빼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와 벌’에서의 주인공은 명백하게 라스꼴리니꼬프 한 사람이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죄와 벌’에서처럼 재앙의 중심에 어떤 한 가지가 놓여 있다고 동일한 잣대로 해석하기에는 뭔가 억지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르나이젠은 이 작품에서도 ‘죄와 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인간이 결국 다다른 곳은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자리였다고 말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핏빛어린 비극 안에도 여전히 최종적인 구원의 불씨가 남아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카라마조프 가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무조건 구제불능의 운명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카라마조프 가에 흐르는 총체적 난국이 우리네 삶에 흐르는 그것과 다를 게 없다면, 우리가 처한 운명이라는 굴레 안에도 구원의 빛이 흘러들어 아무리 깊은 바닥에서도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백치.
바보, 정신박약, 머저리, 무지, 그리고 간질. 미시킨 공작에 대한 세상의 평가다. 그러나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러한 백치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온갖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뒤흔들고, 그들로 하여금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게 만든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백치의 존재는 “인생의 참된 의미란 얼마나 깊이 감춰져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과연 누가 백치이고 누가 지혜자인가? 투르나이젠은 이러한 역설적인 인물 미시킨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 그의 절대적인 모호성에 있다고 본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지칭한다. 인생의 거대함, 끔찍함, 모호함에 대한 놀람과 경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어린아이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존재. 흡사 그리스도 예수를 떠올리게도 만드는 존재.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백치’를 통해 다루고 있는 것이 곧 삶의 표현 불가능성,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비라고 짚어낸다. 이는 라스꼴리니꼬프를 뒤흔들었던 것과 같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격정에 사로잡혀 뛰어들었던 것과도 같다. 이어서 저자는 나스타샤가 로고진의 격정보다는 미시킨의 연민과 사랑에 더 마음이 흔들렸던 이유가 미시킨을 통해 드러나는 용서의 빛, 즉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빛 때문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결국 ‘백치’ 역시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처럼 인간의 삶 속에서 얽히고설킨 모든 혼란의 해명과 해결이 갖는 가장 심오한 의미를 짚어주는 단어가 용서, 곧 ‘죄의 용서’라고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다 보면 저 너머에 있는 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같아지고, 그 존재로부터 전적으로 비쳐오는 구원과 용서의 빛을 발견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세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들여다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 (혹은 신학)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 곧 하나님을 향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을 지표 삼아 옆길로 새지 않고 솔직하게 정면으로 그 질문을 마주하도록 유도한다. 유한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알고 보면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인물들. 투르나이젠은 그들 모두가 자기 자신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키는 존재라고 해석한다. 곧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우리 자신과도 같다면, 우리 모두 역시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는 존재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 사랑과 용서를 그려내는 작품은 이 세상에 허다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양극성’이라고 투르나이젠은 말한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실적인, 너무나 사실적인 인물들의 인간성을 작품 속에서 철저히 해부해 놓는 동시에, 그 인물들이 삶과 죽음 너머의 세계를 향해 영원히 도약하는 모습까지도 한 작품 안에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투르나이젠은 이 양극성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 인간관의 총체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고 하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특성과 비인간적이고 탈속적인 특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역설한다. 즉, 투르나이젠이 간파한대로,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핵심적인 경향인 것이다.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강조한 핵심적인 통찰은 곧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결코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 즉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기울인 유일한 노력은, 그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상화된 인간 영혼의 일부나 이 세상 현실의 일부로, 다시 말해 오로지 신적인 가능성에 속한 것을 또다시 인간에게 가능한 것, 혹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구성하는 관계, 즉 인생 저편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알고자 하지 않고 감히 신과 같아지려고 도약한다. 곧 반역이다. 반역한 인간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스메르쟈코프처럼, 혹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모든 일이 허용되었다”라는 구호를 따르며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모순됨, 즉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알고 향하도록 지어진 피조물이지만, 정작 그 궁극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그와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면서,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맞닿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을 이야기하면서 종교와 교회를 겨냥한 그의 공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투르나이젠은 이러한 면에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인물 이반, 이반이 쓴 서사시 ‘대심문관’, 그리고 이반이기도 하고 대심문관이기도 하며, 혹은 이반과 대심문관을 소유하고 조종한 악마에 대해서 언급한다. 

앞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기울인 유일한 노력은, 가짜 하나님을 진짜로 만들지 않도록, 즉 그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다움'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켜내는 것’이었고 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반역이란 초월적인 하나님을 끌어내려 알 만한 하나님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아론의 송아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문제 상황을 탈피하려고 하는 행위들의 전반일지도 모른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당시 세상의 종교와 교회가 교묘하게 이런 인간적인 시도에 가담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반역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데, ‘대심문관’은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는 오로지 ‘자유’만을 선사해주었는 데 반해, 대심문관으로 대표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연민보다 더 큰 연민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훨씬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사랑을 과시하며 인간의 짐을 덜어주고 필요를 채워주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을 드러낸, 일종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고소장인 셈이다. 이 고소장이 주장하는 바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알도록 힘쓰고 돕고 전파하고 그 나라를 살아내는 모델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예수가 인간에게 주었던 자유를 빼앗은 뒤 오히려 하나님 자리를 꿰차고 거짓 선지자 혹은 가짜 하나님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의 껍데기는 그대로이나 예수가 증발한 교회. 어찌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건 교회가 아니라 악마와 손잡은, 혹은 악마의 현현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이러한 엄청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서사시가 바로 이반이 만든 ‘대심문관’이다. 

마지막 장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문장 하나로 운을 띄운다. “형제들이여 인간의 죄 때문에 놀라서 뒤로 물러서지 말라. 비록 죄를 지으며 살고 있더라도 인간을 사랑하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형상이니라.” 톨스토이는 평생토록 이 비극 너머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일을 통해서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올 때 서로가 불안정한 존재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형제애가 비로소 가능해질 거라면서 ‘죄의 연대’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인간은 깊은 곤경 속에서 함께 버티고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모든 생명과 모든 자연과 모든 인간을 향해 적극적인 관심을 쏟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긍정하되, 그 존재가 지금 그대로의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역설적 긍정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톨스토이와 구별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신학은 다음 문장으로 다시 풀어 쓸 수 있다. “당신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와 더불어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죄 안에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투르나이젠이 강조한 것처럼,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모든 생명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실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곳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지금 이 모양 이 꼴의 세상 한복판, 즉 인간 존재의 수렁 같은 문제 상황 속이라고 한 데 반하여, 톨스토이는 그야말로 거센 반항심 속에서 사회에 비판을 가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존의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너그러웠던 것이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너무나 불의하고 끔찍한 사건에서도 그 속에 감춰진 긍정성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혁명의 파토스가 아닌, 그 위대한 이해와 용서의 파토스가 작동한다. 

투르나이젠이 꼽은 또다른 톨스토이와의 차이점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건주의적인 참회의 노력을 떠올리게 되는 데 반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비록 그런 결단과 전환의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회심자와 비회심자,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하나님 자녀와 세상 자녀로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경건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런 이분법적 구분이 있어야 하고, 심지어는 그러한 구분이 목표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주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예수 안에서도 오히려 이 세상과 하나님, 죄인과 의인이 모두 함께 어우러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려내는 ‘결정적인 변화’ (즉, 구원의 빛이 임하는 시기)는 인간이 종교적 도덕적 노력으로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단계나 가장 높은 단계가 아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여정은 인생의 바닥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 가시화된다. 결정적인 변화는 인간이 발버둥치고 억지를 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그분의 영원한 능력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그 변화를 위한 길은 특별한 성인이 가는 길이 아니다. 애쓰며 노력하는 사람의 길도 아니다. 오히려 누가봐도 세상의 자녀인 이들, 심지어 죄인과 창녀와 살인자, 불안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인 것이다. 용서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은 의인의 길이 아니라 죄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요소 하나는 어린아이의 존재다. 그는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요구한다.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어린아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인생 앞에 서라고. 절대적인 진실성을 지니고 순진한 무방비 상태로 삶을 맞이하라고. 마치 ‘백치’의 미시킨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알료샤처럼. 왜냐하면 자신을 하나님께로 활짝 열고 어린아이로 돌아간 사람 속에서는 서서히, 혹은 갑자기 가장 위대한 것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에 대한 감각, 사랑과 구원의 작은 불씨, 한 조각의 부활 말이다. 

한 가지 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하여 따뜻한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점은, 그는 항상 낮은 곳에 있는 겸허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투르나이젠도 간파했듯,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과 혁명보다는 그들의 감추어진 힘에 더 큰 기대를 걸기도 했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부정적인 느낌을 가진 사람은 아마도 읽다가 중간에 그만 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만약 한 작품이라도 끝까지 읽고, 가만히 그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난 누구나 가슴 따뜻해짐을 경험할 거라고 믿는다. 죄의 심연에도, 그 참혹한 어두움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실뿐 아니라, 아직 죄로 흥건히 젖어있는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인 나는 다시금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생각하며 인간의 정체성을 묵상할 수 있었으며, 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발적 순종으로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다짐까지 조용히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 이면에 흐르는 그의 사상과 신학에 대한 해제를 읽고나니, 그 어떤 신학책, 철학책보다도 묵직하게 내 마음을 울렸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마치 흩어졌던 파편들이 모여져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7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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